진주성을 두른 뒤
한동안 비가 오질 않아 밭작물은 물 부족이 느껴지는 유월 중순이다. 장마전선이 제주도 바깥에 머물러 이달 하순은 되어야 우리 지역에 비다운 장맛비가 내릴 듯하다. 전날은 인제대 글로컬 국책 사업 한국학 아카데미 회원들과 함께 함양의 서원과 고택을 답사하고 왔다. 전세버스로 김해를 출발 고속도로로 진입해 진주를 거쳐 산청에서 지리산권으로 향해 몇몇 곳을 둘러왔다.
내가 올봄에 섬진강 트레킹을 구간별로 끊어 경전선 열차로 하동역까지 당일치기로 몇 차례 다녀왔다. 그때마다 함안을 지나면 반성역이고 그다음 진주역을 거쳤다. 경상남도 산림환경연구원의 수목원이 소재한 반성에 내 여동생이 사는데 늘 마음이 애잔해 하고 있다. 뜻하지 않은 지병으로 서울로 올라가 수술 후 회복기를 맞는데 앞으로 치료에서 기약 없는 진료가 계속되고 있다.
워낙 먼 거리라 형제들이 문병 갈 여건이 못 되어 수술 후 잠시 진주로 복귀했을 적 고향 집으로 와 형제들과 두 번 얼굴을 만나 격려 성원을 보냈다. 이후 동생 내외는 반성 자택에 머문 시간보다 수도권 요양병원에서 더 많이 보낸 날들이다. 오라비가 진주를 거칠 때마다 병마와 싸우는 동생이 마음에 걸려 한 차례 찾고 싶어도 병실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여건이 못되어 아쉽다.
일요일은 오전과 오후로 나뉜 일정으로 하루를 보낼 계획으로 이른 아침 길을 나섰다. 창원중앙역에서 부전을 출발 순천으로 가는 무궁화호를 탔다. 마산과 함안을 거친 반성을 지나자 진주역이었다. 철길이 복선화되면서 외곽으로 옮겨진 역사에서 시내로 드는 버스를 탔다. 동생 얼굴은 오후에 보기로 하고 아침나절은 촉석루 탐방으로 나서 남강교를 앞두고 내려 강변으로 향했다.
진주는 내가 청년기 뒤늦게 입학한 교육대학을 다니느라 2년을 보낸 곳이다. 그때보다 진주성과 촉석루 일대는 경관이 정비되어 사뭇 달라졌다. 이후 몇 차례 들린 적 있는 진주성인데 오전 두어 시간 성곽을 거닐 셈이다. 진주 남강에는 매년 가을이면 유등 행사가 열려 수많은 사람이 야경을 보러 찾는다. 어느 해 유등 행사에 들러 발 디딜 틈 없는 인파에 귀로가 늦은 적 있었다.
진주성 성문에 닿아 동생에게 전화를 넣어 오라비가 진주 와 오후에 병원으로 갈 테니 나중 보자 했다. 성내로 들어 장대한 촉석루 누각에 올라 누마루와 주변 경관을 바라봤다. 이어 의암을 찾으니 400여 년 전 역사 현장이 숙연했다. 진주성에서 민관군이 왜구에 패하고 적장을 껴안고 강물에 투신한 관기 논개는 전북 장수에서 태어난 최경회 소실로 본관이 나와 같은 신안이다.
논개 사당을 찾아 영정 앞에 향을 피워 묵념을 올렸다. 논개 표준 영정은 일제 강점기 김은호 화백이 그렸으나 그의 친일 행적으로 논란이 일어 윤여환 작품으로 바뀌었다. 사당 주변은 변영로가 남긴 ‘논개’ 시에 나온 붉은 석류꽃이 피어 한창이었다. 강낭콩보다 더 푸른 물결에 이어지는 “아리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가 떠올랐다.
누각 곁에 쌍절각이 있는데 고성 출신 의병장 제말과 조카 홍록의 행적을 새긴 빗돌이다. 성곽 따라 북장대를 거쳐 서장대로 가는 길목 창렬사는 진주성을 지키다 희생된 이들의 넋을 모신 사당이었다. 촉석루 경내를 둘러 남강교 건너 동생이 입원한 요양원을 찾아 점심나절 1층 카페에서 얼굴을 보니 반가운 해후였다. 이어 진주 근교 반성으로 나가 자택에 머문 매제도 만났다.
매제와 장터 수육을 놓고 맑은 술을 몇 잔 비우고 반성에서 창원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객석에서 ‘손아래 누이야’를 한 수 남기니 창원중앙역이었다. “예순은 넘겼어도 정정한 나이인데 / 뜻하지 않은 병고 병석을 훌훌 털고 / 지난날 칠남매 다닌 소풍길을 나서자 // 곁에서 밀착 간병 매제가 오죽 염려 / 오라비 손을 모아 간절히 쾌유 비니 / 종양은 어르고 달래 꿋꿋하게 이겨라” 26.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