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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며 한대희/ 칼럼니스트

작성자김용복|작성시간26.06.09|조회수28 목록 댓글 0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며
                         한대희/ 칼럼니스트

한대희 칼럼니스트


 장애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저희 부부가 장애인이 되리라고는 정말 생각도 못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부부의 인연은 YMCA 봉사활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만나 결혼한 후에도 봉사는 우리 삶의 전부였습니다. 30대 초반, 지금의 장애인 콜택시가 생기기 전에는 중증장애인을 자가용으로 직접 이동시켜 드리는 봉사를 부부가 함께 이어갔습니다.

'대전되살미 봉사단' 활동으로 중증장애인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보았고, 주유소를 운영하면서는 보육원에 난방유를 무상으로 공급했습니다.

 임대 주유소인데도 영업이 잘 되자 건물주는 재임대 계약을 거절했고, 나는 작은 홈로리 석유차 한 대만 가지고 주유소를 나왔습니다. 아내와 함께 석유 장사를 하면서도 보육원 난방유 공급은 멈추지 않았고, 어렵게 사시는 독거노인들에게도 조금씩 기름을 나누어 드렸습니다. 아내는 단 한 번도 나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내가 먼저 슬그머니 "기름을 넣어 드리자"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아내였습니다. 도시가스가 보급되면서 자연스럽게 닭 대리점과 치킨 프랜차이즈 사업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우리 부부는 바쁘고 활기차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2005년, 사십이 갓 넘은 나이에 의사는 디스크 수술을 권했습니다. "3일이면 퇴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아내와 어머니도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고민 끝에 수술대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3일이라던 병원 생활은 8개월이 되어서야 끝이 났습니다.

 훗날 나는 그것이 의료사고였음을 알게 되었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싸움을 혼자 시작했습니다. 병원을 상대로 혼자 진실을 밝혀나가는 일은 외롭고 고단했지만, 결국 병원은 의료과실 책임보험으로 사고를 처리하겠다고 했고, 나는 배상을 받았습니다. 금액이 크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의료사고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그 어떤 위로보다 나 스스로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내가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아내는 혼자서 사업체를 지켜냈습니다. 그리고 그 무게에 짓눌린 듯, 아내마저 허리를 다쳐 병원을 찾았습니다. 의사는 디스크가 터졌다며 응급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하늘이 무너지고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아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12시간이 넘는 수술 끝에 집도의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수술을 한 번 더 해야 합니다." 디스크액이 터진 지 너무 오래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아내는 1년간의 입원 치료 끝에 지체장애 2급 판정을 받았습니다.
 나 역시 척추장애로 하반신 마비에 가까운 보행 장애를 안게 되었습니다. 수술을 받은 지 이제 2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통증은 여전합니다. 매일 마약성 진통제를 처방받아 먹으며 하루를 버팁니다. 그마저도 갈수록 잘 듣지 않아 용량만 늘어갑니다. 우리 부부는 그렇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장애인 부부가 되었습니다.

 사업장은 문을 닫았습니다. 차상위계층으로 전락한 현실 앞에서 깊은 절망감이 밀려왔습니다. 잘 나가던 인생이 한순간에 주저앉은 것 같은 그 감각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그 어둠 속에서 나는 문득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며 남긴 아버지의 짧은 메모, "대희야,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말고 네 힘으로 살아라." 그 한 줄이 나를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믿고 곁에 있는 아내를 배신할 수 없다는 마음이, 악착같이 살아야 한다는 다짐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다짐이 오늘의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습니다.

 나는 두 아들과 함께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만학도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들이 함께 교복을 입은 셈이었습니다. 아내는 졸지에 세 학생의 학부형이 되었고, 나는 장학금으로 고등학교를 마쳤습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건양대학교 심리학과에 차석으로 입학해 장학금으로 공부를 이어갔고, 이후 호산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해 사회복지사 자격을 취득했습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아내는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나를 응원해 주었습니다. 내가 모든 학업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아내의 고생과 헌신 덕분이었습니다. 아픈 몸으로 곁을 지켜준 아내가 없었다면, 나는 결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은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죽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갚겠다는 다짐을, 나는 오늘도 가슴에 새깁니다.

 두 아들에게도 감사합니다. 장애인 부부라는 낯선 현실 앞에서 가장 많이 흔들렸을 아이들이었지만, 그 아이들은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존경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많은 날을 살게 했는지 모릅니다. 큰아들은 지금 나라를 지키는 직업군인으로, 두 아이의 아버지로 묵묵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작은아들은 곧 결혼을 앞두고 레스토랑 점장으로 인정받으며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부족한 아버지 밑에서 스스로 단단해진 두 아들이, 아버지로서 이루 말할 수 없이 자랑스럽고 고맙습니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붙들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공부가 나를 다시 세상으로 이끌었습니다. 대전보문자립생활센터에서 사무장으로 일하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전지부 부회장으로 장애인 인권운동에 앞장섰습니다. 한울장애인야학에서는 사무국장을 맡아 장애인들에게 검정고시 공부를 가르쳤습니다. 비장애인으로 살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들, 식당 앞의 작은 턱 하나, 경사로를 막아선 불법 주차 차량 하나가 누군가의 하루를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이제는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장애인 이동은 어떨까요. 저상버스를 놓치면 40분에서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장애인 콜 차량은 장애 등급에 따라 이용이 제한되어 있어 저는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의사가 휠체어 없이는 병원에 다닐수 없다는 진단서 덕분에 일시적으로 장애인 콜 택시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장애인이 식당을 찾을 때는 메뉴가 아닌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느냐로 선택합니다. 약국도, 병원도, 친구와 술 한잔 하는 포장마차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장애인이었을 때 나도 그 경사로를 막아서며 주차했을 것입니다. 易地思之,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장애인은 동정의 대상도, 시혜의 대상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 지역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시민이며 국민입니다. 장애인의 독립은 당사자 혼자서 이루어 낼 수 없습니다. 사회가 함께 노력할 때, 비로소 스티브 호킹 같은 학자도 나오고, 장애인도 사회 발전에 공헌할 수 있습니다.
 비장애인 여러분, 어느 순간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안 아파 본 사람은 아픈 사람의 심정을 모른다고 하지요. 부탁드립니다. 장애인의 사회 참여에 함께 힘을 보태어 주십시오. 능력 있고 열정 있는 장애인들이 이 사회 속에서 제 몫을 다할 수 있도록, 함께해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날 되시고,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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