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8일, 오전 2시 30분, 나는 평소보다 읽찍 일어나 네팔 치트완 사역지 방문 여정과 짐을 챙긴 후, 4시 20분에 집 문밖을 나섰다. 작년 5월 내 아내 친구들의 베트남 다낭지역 여행 때 입었던 옷차림에서 초록색 바지를 겨울 내의와 검정색 방한 바지로 바뀐 것 말고는 같았다. 강추위 일기예보에다가 해외로 문해교육 선교 첫나들이 길손 의상에 의미를 더 보태보려고 까막눈의 설음에서 해방된 동대문 옷도매상 사장님이 선물했던, 그리고 해마나 겨울이 되면 내가 즐겨 입고 있는 검정색 방한복을 입고 떠나려고 시도했었지만 포기했다. 무더위 우기가 시작된다는 방글라데시 현지 날씨와 네팔의 치트완까지 다녀오는 복잡한 경유지와 촉박한 시간 이 문제가 되어 결국 여름용 바람막이 등산복이 최종 낙찰되었다.
작년, 베트남 현지에서 구입했던 보라색 여행가방에는 팬티 하나, 양말 두 컬레, 보라색 넥타이 하나, 와이셔츠 하나, 여름 양복바지에 베지색 콤비 상의 한 벌, 그리고 비라카미 사랑의 집 후원자 및 지도자 연찬회에서 지급 받았던 여름용 티 하나와 치약, 치솔, 수건 하나가 내 1주일간의 생활용품이었다. 하나가 더 있다면 일주일 간 매일 두알씩 억어야 하는 루치 고혈압 약이 담긴 플라스틱 상자 하나였고, 그 외 다른 것들은 방글라데시 GLMT TTW(Tutor Training Workshop)에서 사용할 물품과 선물꾸러기였다.
아파트 지층 주차장을 지나 새벽 버스를 잡으러 가는 나의 해외 선교 첫걸음은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볍게 채근해서 떠나보려고 피나게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갈 길은 멀어도 오늘도 걷는다.'라는 카카오톡 히스토리 창의 내 경귀 글이 문득 떠오르면서 내 안에서 무엇인가 울컥 솟구치려는 울음 섞인 분노의 파도 소리가 감지되었다. 나도 모르게 나는 '주여!' 하고 입을 열었다. 따뜻한 인사 한마디도 못나누고 먼길을 떠났다가 내 집으로 영영 돌아오지 못해도 나는 내 길을 가야만 한다. 왜냐하면 내가 그분과 이웃에게 진 사랑의 빚이 너무나 많고, 감사하고, 엄중하기 때문이다.
새벽 4시 30분이 훌쩍 넘어가려고 했다. 마을버스를 기다리던 마음을 고쳐 먹고 내게 다가온 택시를 이용하기로 했다. 한푼이라도 아껴써야 할 이유가 내게 있었다. 이번 방글라데시 치타공과 네팔의 치트완을 향해 선교사역을 떠나게 된 것은 갑자기 기획된 여정이라서 준비한 돈이 전혀 없어서 여기 저기서 빌려서 가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삶이 늘 그랬듯이 이번의 해외사역 첫나들이에서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이 은혜의 열매로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란 생각이 들었다.갑자기 고 라이스 선교사가 78살의 노구를 이끌고 가난한 나라를 찾아나설 때의 모습이 상기 되었다. 나는 그에 비하면 청년이란 생각도 들었다.
방글라데시 치타공으로 가는 경유지 태국 방곡에서 타이항공의 장시간 출발지연으로 동행하던 이성호 박사는 매우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역했다. 특히, 장거리 해외나들이에 비해 여행준비가 잘되어 있지 못한 것이 발견되었다. 떠날 때의 한국 날씨에 맞춰 한겨울 옷차림을 한 것이 문제였다. 더위와 사투하며, 거기에가 무거운 짐까지 전달해주게 된 남의 물건 때문에 땀을 뻘뻘 흘려야만 했다. 공항 화장실에서 물로 땀을 식히는 그의 모습이 안타까워서 두꺼운 방한복 외투를 내 등가방에 넣어 부담을 덜어주었다. 방콕 공항을 떠난 지 약 2시간 30분만에 방글라데시 치타공에 도착했다.국제 로밍 서비스가 신청되어 있어서 인지 치타공에 도작하자 마자 한국대사관 발 ' IS 테러리스트 위험 지역에 도착했으니 조심하라'는 메시지가 연속해서 내게 날아들었다.
공항 밖으로 나오자 총으로 무장한 군복차림의 군인들이 호르라기를 불어대며 고압적 자세가 느껴지도록 질서를 잡고 있었다. 70,80년 대 군사정권 시절, 우리나라의 옛 모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철창 밖의 사람들이 군중을 이루어 방문자를 먼거리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우리를 먼저 알아보고 달려온 정00 아시아포커스 대표와 반갑게 조우했다. 내 핸드폰의 문자 보내기 서비스에 에러가 나 우리가 장시간 방콕 공항에 발이 묶여 있다는 글을 그에게 전했었지만 연결이 안되었었다, 허나 그는 그 사실을 먼저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오늘 한국의 봉사자들이 귀국을 했기 때문에 공항에 나오기 전에 연락을 그들로 부터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네팔의 판다 교수가 30분쯤 지나면 우리와 만나게 되니 함께 치타공 자택으로 가자고 제의를 했다. 긴 시간을 허비한 줄로만 알았더니 판다 교수와 함께 동행할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우리는우리를 인도하시는 그분께 찬양의 마음을 담아 대화를 주고 받았다.
우리가 기거할 숙소는 정 대표의 자택 4층의 게스트룸이었다. '방글라데시 아시아포커스 방문을 환영합니다'란 한글이 영어 인사말과 함께 우리를 반겨주었다. 박 사모님 정성이 담긴 손님맞이 게스트 룸 거실의 대형 원형식탁에서 우리는 커피와 고구마와 과일을 들면서 반가운 소식과 방문 덕담을 주고 받았다. 방이 여러 가 마련되어 있으니 합숙을 해도 좋고, 각자 선택해서 개별로 이용해도 좋다는 박사모와 정 대표의 친절한 안내에 따라 우리는 각자 방으로 입실 했다. 내일 일정을 준비할 겨를도 없이 나는 침대에 누어 있다가 깊은 잠에 빠졌다. 박 사모께서 손수 준비한 아침식탁 앞에서 이성호 박사와 판다 교수가 간밤에 모기에게 물린 얘기를 꺼내는 바랍에 우리는 모기와 관련된 최근의 소두증 바이러스 이슈를 화제로 대회ㅡㄹ 나누었다.
이곳은 이슬람 국가이기 때문에 공식 종교행사가 금요일에 이루어진다고 했다. 고아원의 원아들과 직원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두 번 드리게 되어 있었다. 오전 9시는 일반인들이 드리는 예배이고, 11시 예배는 중고등학교 학생 중심의 예배였다. 예배를 드리기 전 고아원에 들렸을 때였다. 정 대표가 원아실로 들어서자 아이들이 '파파, 파파, 파파...'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내가 마치 1965년부터 2년 동안 청주시 탑동 요한 선교사 사택을 중심으로 신학교, 기숙사, 교회, 고아원, 영아원, 맹아원 등이 집결되어 있던 그 동산 마을에 달려와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숯빛갈로 화장을 한 것처럼 피부가 가무잡잡한 아이들과 보육원 가족들이 있는 그 방을 향해 우리는 달려가 살펴보았다. 정 대표는 아이들에게 가지고 온 간식으로 과자를 나누어주면서 그들과 사랑의 마음을 주고 받고 있었다,
어미 제비가 먹이를 물고 집 둥우리로 날아왔을 때, 새끼 제비들이 노란 입을 크게 벌리면서 어미로부터 먹이를 받아먹는 모습이 내 눈 앞에 나타났다. 갑자기 내 눈 언저리가 촉촉해지면서 가슴이 뭉클했다. 이곳 원아들 중 막내라고 하는 아이를 안고 소개하는 정 대표의 얼굴에서 나는 그분과 그의 가족이 이곳에 머물러 있는 목적과 존재의 의미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예배 시간이 되어 우리는 2층 예배실로 가는 층계로 행했다. 가을하늘 보다 엷은 빛깔의 얇은 이슬람복장 분위기가 물씬풍기는 박 사모의 손 을 잡고 아장아장 예배실 층계를 오르는 막내 아이의 행복한 눈빛이 내 마음 사랑의 촛대에 불꽃을 밝혔다.
예배는 내 어린시절 우리 마을의 예배당이 그랬듯이 남녀의 좌석이 지정되어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여자들의 지정석이 왼쪽에 배치되어 있는 점이었다. 나는 오른쪽 남자 좌석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자리를 잡았다. 내 앞의 바로 앞 자리에 남자 인형처럼 귀여운 세 남자 아이가 맨발로 들어와 공손히 앉았다. 이어서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아가 여자석 줄 맨 앞에 와서 앉아 기도 하는 모습이 내 눈에 보였다. 눈이 부시도록 하얀 드레스 차림의 까만 피부의 얼굴이 내 눈과 마주 칠때, 나는 달려가 않아주고 싶도록 사랑스럽고 예쁜 그 여아의 모습에 내 마음을 빼았겼다. 주께서 저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기뻐하실까? 이런 생각이 들면서 그 아이를 돕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쳤다. 나는 한참 동안 그런 내 마음 속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지극히 소박한 이슬람식 전통악기 종류로 준비된 복음성가당의 찬양으로 예배가 시작되었다. 아이들의 모습과 예배자들의 광경을 동영상으로 담고 싶어서 예배 중 촬영을 해선 안된다는 나의 소신도 무너뜨린 채 카메라로 그들의 모습을 담아냈다. 사도신경 신앙고백이 현지언어로 고백돌 때, 나는 언어로 내 신앙을 고백하려고 했으나 그들의 언어어에 묻혀 나도 모르게 방언을 하듯 그들을 따라 중얼거렸다. 예배 인도자 현지인은 우리 일행을 소개했고, 정 대표의 방글라데시어 통역으로 내가 준비해간 말씀 시편 121편에 담겨 있는 메시지를 전했다. 영어로 설교를 하려고 하자 이곳 예배자들 중 대분이 영어를 잘 알지 못해서 한국어 설교를 방글라데시어로 동시통역을 했다.
내 모국어로 전하는 말씀의 농도와 깊이는 예상외로 강한 톤의 사랑의 강물이 되어 예배자들의 마음의 빈자리로 생수처럼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내 마음 속에도 새 생명의 강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내가 이곳 방글라데시에 오기 직전 전혀 알지도 못하는 작곡가 이종록 형제로부터 선물로 받은 '사랑의 눈물'에 관한 작품과 사연을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오늘은 어린이날/ 창밖에 다가온 초여름 하늘을 쳐다봅니다/ 내 어린시절 초가 지붕에 올라가/ 노래하며 바라보던 하늘이네요/ 오늘은 어린이날/ 창밖에서 서성거리는 내 어머니를 쳐다봅니다/ 아, 저기 울고 있는 시골교회 풍금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노래하네요/ 어머니,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랑의 눈물 입니다./ 사랑의 눈물이 가장 맑고 깊습니다/ 사랑의 눈물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내 어머니 백명식 권사의 눈물 기도 소리를 듣고 내가 죽도록 가기 싫었던 '교육대학'에 가서 시험을 보게 된 이야기와 너무 가난해서 자살까지 시도했던 아픈 이야기와 나를 도와주었던 선생님과 친구들과 이웃, 그리고 내 부모의 이야기를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나는 그들에게 질문을 하듯이 호소했다. "왜 우리가 여기에 와 있을까요?" " 사랑의 빚 때문에 여기에 와 있습니다." "이 시편의 저자는 산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 산을 조성하시고 저자를 보호하시고 양육하시고 치료하시며 인도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볼 수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마음의 눈으로만 그분의 존재를 볼 수 있으며, 우리 하나님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보다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사랑의 빚을 갚을 능력을 주시고 축복하십니다."
나는 고 라이스 선교사가 GLM을 한국에 설립하러 왔을 때, '이제 한국이 복음의 빚을 갚아야 합니다'라고 외쳤던 기사문을 보여주며 그는 한국의 GLM 창립 동역자로서 내게 사랑의 빚을 갚으러 세계의 곳곳을 찾아나설 것을 권면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여러분의 파파인 정 대표도 그 중의 한 일꾼이라고 말하면서 정 대표에게 사랑의 비젼을 주신 그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여러분은 정 대표의 동역자이면서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결론을 지었다.
11시 예배 때는 학생들의 예배이므로 그들의 꿈과 사랑과 삶의 도전을 제시하기 위해서 야베스의 기도를 가지고 설교 했다. 고아원 원생들로서 역경과 싸우면서 자기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준비해야 할 기본 자세로서 야베스의 기도문을 그들에게 내 삶에 나타난 하나님의 실증적인 사례를 들어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 세상에는 여러가지의 많은 학교가 있지만 사랑을 가르치는 학교는 하나님만이 세우실 수 있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교육 방법이며, 하나님만이 성취하실 수 있는 가르침의 결과로 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그 사랑의 대안학교는 그분이 언어로 조성하신 우주이며, 교육방법은 사랑을 알게하는 방법으로서 고난과 시련과 인내의 방법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이며, 교육결과는 사랑의 성품과 행동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그런 인재를 길러내는 동역자가 되고 싶은 마음에서 방글라데시의 아시아포커스에서 학생들을 처음 만났다고 말했다.
나는 우주 창조론에 근거해서 만든 GLM 선교사 김남현 박사의 우주 질서 이론을 쉽게 풀어서 설명한 후, 여러 학생들 중, 방글라데시어 알파벹 48개 카드를 만든 후, 그 카드 모두를 섞은 다음 공중에 흩날렸을 때 땅에 떨어뜨려 알바벡 순서를 100% 맞도록 한다면 내가 모은 재산을 그 학생에게 다 주겠다고 말했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했을 때 약 80명 중 1명이 손을 번쩍드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당황하지 않고 그 학생을 불러내어 내가 가지고 갔던 야베스의 영어기도문이 있는 작은 책을 선물로 주고 그 학생에게 본문을 읽도록 했다. 그런데 그 학생은 잘 읽지 못했다. 그 학생은 이 고아원에서 바보 취급을 당하고 있는 지적 장애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바보같은 용기를 오히려 칭찬하면서 격려차원에서 준비해간 삼색볼펜인 'GLMT 국제문해교육원 www.glmt.kr'로고가 찍힌 기념품과 야베스의 기도문 책을 그에게 선물했다.
2016.2.21. GLMT수료식 직전 강의에서 나는 이 학생과의 에피소드를 들려주면서 내가 집필하고 있는 '빵점을 좋아하시는 우리 하나님'이란 책을 쓰고 있는 집필 배경을 설명했다. 벽지 시골 학교 현직에서 근무할 때, 방과후에 한글미해득자 지도할 때, 빵점을 맞은 학생을 행복하게 해 주는 전략을 소개해주었다. 곧 빵점을 채점한 용지의 위치를 다르게 하면 110점이 될 수 있는 사례를 들었다. 하나님의 일로 glmt 사역을 딸 때 지도자는 항상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하며, 지식과 말보다 사랑의 행동이 국제문해교사가 더 갖추어야 할 지도자의 소양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