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창작을 위한 몇 가지 단상 1. 시작하며 고등학교 시절 문예반을 지도하셨던 선생님께서는 시에 대해서 말씀하시길 시란 ‘언어로 짓는 사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詩)라는 말의 한자어가 말씀 '언(言)'과 절 '사(寺)'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왜 하필이면 말씀 ‘言’자에 절 ‘寺’자를 붙였을까? 하고 질문하셨지만 나는 그 뜻을 몰랐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그 뜻을 말씀해주셨는데, 절은 구도자들이 수행하는 곳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시인들도 구도자의 정신과 자세로 시를 쓰라는 뜻에서「시(詩)」자가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절 ‘사’자가 가질 ‘지’로 새롭게 해석되지만) 그때 저는 그 말뜻을 깨우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와서 생각해보면 그 심오한 뜻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 저 역시 컴퓨터를 이용해 시를 쓰는 일이 많아졌는데, 막상 컴퓨터 앞에 앉으면 깜박이는 커서가 ‘빨리 써, 빨리’ 하고 저를 보챕니다. 그러나 첫 행조차 쉽게 시작할 수 없어 나는 늘 막막하고 불안하기만 합니다. 어쩌면 저 아득히 높은 벼랑에 내몰린 기분 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저는 그 벼랑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날마다 안간힘을 씁니다. 그것도 아주 처절하게 말입니다. 2. 살기 위해 쓰는 시 만약 누가 ‘시를 왜 쓰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분명히 대답할 것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오늘도 시를 쓴다”고 분명히 대답할 것입니다. 또 누가 시가 밥이 되냐고 물으면, 나는 또 분명히 말할 것입니다. “내 정신의 밥이 곧 시다”라고. 하얀 쌀밥이 사람들의 배를 부르게 하지만, 시는 내 정신을 살찌우는 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한 편의 시를 가슴에 넣고 하루를 너끈히 살아가는 시인도 있고, 또 한 편의 좋은 시가 가슴속을 따뜻하게 해서 평생을 시에 기대면서 풍요롭게 살아가는 시인들도 있다고 합니다. 시인은 한 끼의 밥은 굶을 수 있어도, 정신의 허기를 참을 수 없습니다. 이는 일반 사람이라면 몰라도 시인 자신을 황폐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시가 <밥의 길>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시로써 <배가 부르는 시인>은 분명히 있습니다. 시인이 되려고 마음먹은 사람들이 돈도 밥도 안 된다고 주저하고 두려워한다면, 이런 사람들은 아예 다른 길로 가야지 시인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피나는 노력 없이, 오랜 습작기간 없이 시인이 되려 하고 좋은 시를 쓰겠다는 생각은 좋지 않은 생각입니다. 애초부터 그런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유명한 철학자 니체는 일찍이 <좋은 글은 피의 여로를 거쳐야 한다.>고 했으며, 또 <피로 쓴 글만이 진실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불멸의 명작을 남긴 플로베르는 글쓰기의 어려움을 가리켜, <내 심장과 두뇌를 짜서 그걸 고갈시키는 과정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모두 작품 쓰기가 어렵다는 걸 나타내는 말들입니다. 플로베르는 또 <한 마디의 말을 찾기 위해서 나는 하루 종일 내 머리를 쥐어짰다.>라고 토로한바 있습니다. 오늘날 활동 중인 시인들이나 시인 지망생들조차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이 두 사람이 얘기한 것은 그만큼 시인 정신이 치열해야 한다는 것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글을 쓰면서도 제 자신에게 반문해 봅니다. <나는 과연 피의 여로를 거쳤을까? 내 심장과 두뇌를 짜서 토로하는 과정을 얼마나 거쳤을까?>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자신에게 나를 다그치면 저는 말문이 콱 막힙니다. 제 나름대로는 많은 밤을 피 흘리는 것처럼 지샌 적도 있고 또 실제 수많은 파지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파지를 버린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그렇게 해서 겨우 남는 한 편의 시, 그 시를 만나기 위해서 몇 달이 걸리기도 하고, 몇 년이 걸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시는 피를 짜내는 고통이 있어야 탄생하는가 봅니다. 그렇다고 위대한 시, 훌륭한 시, 좋은 시가 태어나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결국 어떤 시를 몇 편이나 만드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시를 쓰느냐가 더 중요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3. 메모, 번개같이 스치는 그 시상을 잡자 저는 늘 주머니에 메모용지를 넣고 다닙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시상이 떠오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 시상을 잊어버릴까봐 재빨리 메모를 합니다. 차를 운전할 때 갑자기 왜 근사한 생각들이 많이 떠오르는지, 그래서 그 생각이 나를 떠날까봐 황망히 길 가장자리에 정차하고 메모를 합니다. 언젠가 제 기억력만 믿고 떠오르는 생각을 암기하면서 가다가 막상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는 외웠던 생각들이 무엇이었는지조차 모를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 일을 자주 겪다보니 그 예방책으로 메모를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지요. 문득문득 떠오르는 생각, 그것을 메모하고 언제라도 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정말 붙잡아야 할 것들을 메모해 두지 않으면 금세 죄다 사라지니까요. 이런 메모들이 어느 날 모여서 한 편의 시로 태어납니다. 메모하는 습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지요. 어쩌면 시라는 것이 예수의 고난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환희도 십자가의 수난 뒤에야 비로소 오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만큼 시 쓰기가 힘들다는 것이지요. 어떤 이는 시를 쓰는 행위를 불교의 소신공양(燒身供養)으로 보고 그 결과물을 등신불(等身佛)로 비유해 말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시를 위해서는 오체투지(五體投肢)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뜻일 테지요. 스스로의 몸을 완전히 바닥에 엎드려서 낮춰야만 합니다. 치열하지만 아주 겸허해야 합니다. 겸허함 속의 치열함이 필요한 것이지요. 겸허한 마음으로 치열하게 시를 써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힘든 시하고 한 몸이 되어 평생을 살아야만 합니다. 그 과정이 아무리 괴롭더라도 말입니다. 이성복 시인은 시를 <맨몸으로 철조망을 통과한 사람들의 등판과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이 시인의 말은 전율을 느끼게 합니다. 정말 시를 쓰는 자체는 삶의 문제입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때, 희망이 너무 넘쳐도 시가 안 되고, 또 절망에 너무 질식해서도 시가 되지 않습니다. 적당한 부정과 긍정이 이중적으로 교차하는 그 자리에서 꽃은 피어납니다.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면 자기 폐쇄성에 빠지고 말기 때문이지요. 4. 방법론적 시, 낯설게 하기 첫째, 마음속에 생물을 넣고 다녀야 합니다. 언젠가 습작하는 사람이 시 한 편을 보여주는데 소쩍새가 겨울에 울고 있었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소쩍새는 초여름부터 웁니다. 그래서 <없는 것을 상상력으로 만드는 것은 정말 좋지만 실제로 있는 것을 왜곡시키는 것은 안 된다>고 말해준 적이 있습니다. 여름에 우는 새를 겨울에 운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살아있는 식물과 새소리, 즉 생물을 넣고 다녀야지 역동적인 시를 쓸 수 있습니다. 둘째, 변화에 민감해야 합니다. 계절과 날씨의 변화에도 민감해야 합니다. 비가와도 그만, 달이 떠도 그만, 눈이 와도 그만, 종소리를 들어도 아무 감흥이 없다면 그 순간부터 생각은 죽어버립니다. 죽은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있는 시를 쓸 수가 있겠습니까. 셋째, 낯설게 하기를 해야 합니다. <낯설게 하기>라는 단어는 러시아의 형식주의자들이라고 일컫는 문학 이론가들이 있었는데 <시의 기능은 사물의 낯설게 하기>라고 쓴 데서부터 기인했다고 합니다. 낯설게 하기의 본보기의 시로 김광균의 ‘추일서정’의 첫 구절을 봅시다. 첫 구절에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라는 대목이 있는데 그 당시로는 얼마나 새로운 인식입니까. 또 영국 작가 체스터튼은 가로수를 가리켜 <노상 누워 있던 땅의 일부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벌떡 일어선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이 또한 얼마나 새로운 인식입니까. 넷째, 구태의연한 관습적인 인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래된 낡은 관습에서 벗어난 시를 앞으로 좀 더 부지런히 써야 합니다. 다섯째, 좋은 시를 부지런히 읽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시를 쓸 때에는 남의 작품을 보지 마세요. 보게 되면 비슷비슷한 시를 쓰게 될 테니까요. 그때는 아주 자신이 읽은 시를 떠나 보내세요. 완전히 자물통을 채워놓고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쓰는 게 좋습니다. 여섯째, 동심으로 돌아가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어린애가 처음 세상을 보았을 때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러나 그 순간은 얼마나 신선했겠습니까. 시인은 이런 발상을 해야 합니다. 매일매일 나이만 먹다가 나는 늙었는데 하면서 왜 자기를 빨리 늙게 합니까. 주름살이 늘어서 늙는 게 아니고 영혼이 깜깜해질 때 늙는다고 했습니다. 나이가 많이 든 사람이라도 마음이 늘 살아있고 마음에 언제나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겠다는 사람은 얼굴이 훨씬 젊어 보입니다. 화장을 해서 젊게 보이는 게 아니고 마음을 색칠하라는 얘기입니다. 일곱째,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시를 잘 써도 자기 인생이 들어가 있지 않거나, 존재의 가치가 없거나, 현실과 너무 분리되었거나, 음풍영월조의 시는 가치가 없습니다. 어떤 방법을 써도 시가 안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우울하고 죽어야 되나 살아야 되나 하면서 새벽시장도 가보고 미친 듯이 다녀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낯선 곳도 가보고 어디 가다가 노을을 보고 앉아서 펑펑 울어보기도 하고 나를 자꾸 닦달을 해야 됩니다. 고목도 바람이 흔들어주지 않으면 죽습니다. 남이 잘 때 잘 것 다 자고 남이 먹는 것은 다 먹고 배가 불러서야 어디 시가 되겠습니까? 5. 글을 마치며 오관을 가진 우리 시인들이 허물도 하나 벗지 않고 고통도 받지 않고 고뇌도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어려운 시를 쓸 수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저와 함께 모든 시인들이 시에 대해서 더욱 치열해지자고 간곡히 부탁하고 싶습니다. 이 치열함이 새로운 삶의 기폭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 치열한 깨우침이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만들면서 동시에 정신의 밥을 제공하기 때문이지요. 잘 산다는 것은, 우리 시인에겐 시로 된 정신의 밥을 제대로 먹으면서 살아야 비로소 잘 사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한 편의 감동을 주는 시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시에서 그 시를 쓴 시인의 아픈 삶이 그대로 녹아있어야 감동을 느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가슴으로 쓴 시, 즉 시의 진정성이 곧 감동으로 연결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끝으로 함민복의 <긍정적인 밥> 시 한 편을 읽으면서 제 글을 마칠까 합니다. 시 한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
출처: 동해로 가는 동행 (새벽문학관)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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