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강해
Ⅳ.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능케 하는 것(4:1-23)
A. 중심에 그리스도를(4:1-7)
1) 그리스도 안에서 굳게 섬(4:1-3)
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1] 빌 4:1 바울사도는 3장에 이어 4장 1절에서도 자신이 사랑하며 사모하는 형제들인 빌립보 성도들을 향하여 여러분은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의 형제들이여 주 안에서 굳건히 서 있어라 합니다. 이렇게 굳건히 서 있는 성도들은 당연히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세상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위에 것을 찾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골로새교회를 향하여 천국시민인 너희들은 “위에 것을 찾는 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빌립보 성도들은 물론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역시 부탁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골 3:1-4). 아멘.
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2] 빌 4:2-3 바울사도는 빌립보교회 교인 중 유오디아와 순두게 두 여인이 한마음을 품지 않고 서로 다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한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아마 이들은 자주장사 루디아와 빌립보교회를 열심히 섬겼던 여종들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다투었을까요? 교회 안에서는 열심을 내어 봉사하는 것은 좋으나, 너무 열심을 내다보면 지나친 경쟁심리가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서로간의 시기와 질투로 이어질 수 있는데, 아마 이러한 현상이 이들에게 나타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바울사도는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네게”라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를 통하여 복음에 함께 힘쓰던 두 여인의 다툼을 잘 중재하여 처음과 같은 사랑과 헌신을 할 수 있도록 도우라고 합니다. 또한 정확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으나 글레멘드와 그 외 바울의 동역자들을 도우라고 합니다. 이러한 헌신과 봉사는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노력과 시간과 물질 등이 없어지게 되는, 마치 손해를 보는 것처럼 느껴질지 모르겠으나 약한 자들을 잘 도와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게 하는 것만큼 값지고 귀중한 것이 없다고 봅니다. 특히 이미 “생명책이 기록된 자들”을 도운다는 것은 한 피 받은 형제자매이기 때문에 더욱 귀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 절에서는 전자가 아닌 후자의 사람들을 도우라고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함(4:4)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1] 빌 4:4 바울사도는 여러 곳에서 기뻐하고 또 기뻐하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특히 지금 바울사도의 상황은 우리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죄수와 같은 몸으로 감금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안에서 그것도 한번이 아닌 “항상” 기뻐하라고 합니다. 특히 바울사도가 옥중에 있음에도 하나님과 빌립보 성도들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처럼, 참으로 기뻐할 수 있는 조건이 못 된다고 할지라고 너희들 역시 기뻐하라고 합니다.
[2] 성도들의 기쁨은 초월적인 것입니다. 기쁨의 조건이 되기 때문에 기쁨을 누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조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 자체로 기뻐할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사도가 말하는 기쁨의 삶입니다.
3) 그리스도의 빛 안의 삶(4:5-7)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1] 빌 4:5 바울사도는 너희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관용”(寬容)이란 ‘친절’ ‘참아줌’ ‘보아 넘김’ 등의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특히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당부한 이 관용은 종교적인 관용을 포함해서 윤리적인 관용까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불의를 행하는 것보다 불의를 당하는 편이 낫습니다(고전 6: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관용은 참으로 행복의 본질적인 요소이며 기쁨의 원인이기도 한 것입니다. 특히 바울사도는 이것을 주의 재림으로부터 얻는 위안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을 시키고 있습니다. 즉 모든 약속이 성취될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웠기 때문에 성도들은 비록 박해를 당한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온유와 관대함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자칫 잘못하면 진리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독선과 아집을 일삼게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바로 적용시켜야 할 메시지입니다.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2] 빌 4:6-7 기도와 간구는 그리스도인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 동시에 의무이며, 인생의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인 것입니다(살전 5:17). 여기서 말하는 “기도”는 성도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부르짖음에 대한 일반적인 명칭이라면, “간구”는 일정한 종목을 들어 하나님께 청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도와 간구에는 반드시 감사가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감사함으로 아뢰라”라고 합니다. 왜 감사함으로 아뢰어야 할까요? 첫째, 감사는 기도의 동기가 선함을 입증해 주며 동시에 더 큰 축복을 받게 할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이 무엇보다 소중하며 최우선적인 과제가 되어야 함을 깨닫게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감사한다는 것은 이미 얻은 것에 대한 답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할 때는 의심이 먼저 앞서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간구를 들으시고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임을 염려하지 말고 확신하는 가운데 아뢰는 것이기에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셋째, 기도는 나의 뜻을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진술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나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듣겠다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정욕과 욕심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면 반드시 하나님과 교통에 대한 감사가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뢸 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게 될 것입니다.” 기도가 나의 정욕과 욕심을 위한 것이었다면 성령 하나님께서 생각을 고치게 하실 것입니다. 기도를 동하여 하나님의 평강을 맛보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평강(히브리어로는 샬롬)은 기도의 결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로, 하나님과의 화해, 그의 은총에의 참여, 그와의 연합 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말하는 평화와 확연히 구별되는데, 세상의 평화는 일시적이고 표면적이며 불완전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평강은 영원하며 본질적이며 완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은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분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이해를 초월해서 오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평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지킨다”는 말은 군사용어로 “보초를 서서 방어 혹은 수비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지킴을 내가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강이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평강이 주어가 되어 우리의 마음과 생각, 즉 감정과 사고를 지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결과로 오는 귀중한 선물이 될 것입니다.
B. 하나님은 믿는 자들과 함께 하심(4:8-9)
1) 생각할 것을 생각함(4:8)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1] 빌 4:8-9 바울사도는 마지막으로 빌립보교회의 성도들께 권면을 합니다. 그런데 먼저 주목할 것은 이미 앞에서도 본 바와 같이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이여”라고 말하지 않고 바울사도는 “형제들아”라고 합니다. 전자의 표현은 다분히 사무적인 표현이지만, 후자의 표현은 극히 개인적이며 관계적이며 또한 친밀성을 명확히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바울사도는 그의 서신에 이와 같이 “형제들아”라는 말을 즐거이 사용하는데 그 이유는 성도들은 모두 한 형제요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그 구성원들 간에는 이와 같은 신분관계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 그리고 이제 바울사도는 이러한 형제들에게 다음과 같은 8가지의 덕목을 열거하며, 이러한 덕을 세워갈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은 인간에게 부여된 책임을 하나님께 맡겨 버리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책임 있는 행위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아래의 덕목을 제시한 것입니다.
먼저 무엇에든지 “참되라”고 합니다. 이 ‘참되다’는 말은 거짓이 없다는 것으로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공유적으로 가지는 속성이기도 합니다.
그 다음으로 무엇에든지 “경건하라”고 합니다. ‘경건’이라는 말은 바울사도가 자주 사용하는 말로(딤전 3:8, 11, 딛 2:2), 때로는 ‘종교’라는 말도 포함되어 있는 용어입니다. 따라서 ‘경건하라’는 의미는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살아가라는 의미로 볼 수 있으며, 특히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는 예법과 자중(自重)할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무엇에든지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받을 만하며”, 또한 칭찬할 만하라”고 합니다. 이는 자신의 행위가 곧고 발라야 하며, 도덕적으로 순결하여 죄 없어야 하고, 어딘지 모르게 끌리며 상냥스러운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도 받아야겠지만, 사람에게도 역시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흠이 없어 타인의 모범이 되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다만 이것의 동기가 타인으로부터 칭찬등을 받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동기는 하나님을 기뻐시게 하는 것만이 동기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무슨 “덕”이나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항상 생각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덕”이란 타인에 대한 후덕함과 관대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성품을 지녀라는 의미이며, “기림”(epainos)이란 원뜻은 ‘칭송’, ‘칭찬할 만한 것’이라는 의미로, 여기서는 도덕적이거나 영적으로 칭찬받을 만하도록 하라는 것을 말합니다.
2) 행할만한 것을 행함(4:9)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1] 빌 4:9 바울사도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생각할 것을 생각함은 물론, 이러한 것은 생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할 것을 올바르게 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머리만 클 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인 것입니다. 야고보사도도 같은 말을 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1-26)
[2] 그동안 자신으로부터 듣고 배운 바를 아는데 그치지 말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함이 있을 때에 참 평강의 하나님이 빌립보 교회의 형제 된 성도들에게 함께 계실 것이라 합니다. 특히 여기서 말하는 “계실 것이라”는 의미는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함께 하실 것임을 보장하고 약속하는 의미입니다.
C. 하나님은 인간의 필요를 공급하심(4:10-20)
1) 자족하는 교훈(4:10-13)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 빌 4:10-13 바울사도는 빌립보교회를 통하여 아름다운 섬김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참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그들은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러 차례 헌금을 하였고 에바브로디도까지 직접 로마로 파송하여 바울사도를 돕게 하였는데,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었으나 여의치 못하다가 드디어 에바브로디도가 건강을 회복하여 빌립보교회로 돌아갈 수 있어 그 편에 감사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2] 그리고 이러한 감사편지로 인하여 혹시 빌립보교회에 바울사도 자신이 현재 궁핍을 또 해결해 달라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은 지금 궁핍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다양한 형태로 삶을 경험해 왔는데, 때로는 비천에 처하기도 하고 배부름은 물론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움으로 자족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점은 참으로 바울사도의 인간됨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사도에게 있어 이렇게 자족할 수 있는 힘의 모든 원동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 근거는 무엇이었을까요? 이제 13절을 보십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입니다. 바울사도는 하나님께서 삶의 능력을 주신다면, 우리가 어떠한 처지에 있건 문제 해결자가 주님이시기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이 성경구절만큼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 없을 것입니다. 종종 하나님 앞에서 신중히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지도 않고 어떤 일을 덜렁 결정해놓은 후 누군가가 그런 행동에 대하여 신중하지 못했음을 지적하면, 그 상대방은 이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믿음 없음을 질타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이 성경구절이 이처럼 자신의 어리석은 행위에 대하여 정당성 또는 변명을 하기 위한 근거로 사용되도록 쓰여진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바울사도와 같이 한계상황에 처해 있을지라도,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여의치 못하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환경을 탓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심을 깨닫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할 줄 아는 능력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2) 주고받음의 은혜(4:14-20)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 하였도다
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1] 빌 4:14-16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능력 주심으로 자족할 줄은 알았지만, 분명 그것이 괴로움임에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괴로움에 빌립보교회는 스스로 참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참 잘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빌립보교회는 바울사도의 어려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어떻게 참여한 것입니까? 빌립보교회는 바울사도가 전도여행 중 초기 그리스도인 시절, 바울이 마케도니아를 떠날 때에 그들만이 바울사도를 재정적으로 도왔으며, 그리고 다시 바울이 두 번째 선교여행으로 데살로니가에서 극한 어려움(행 17:5; 살전 2:2)을 당하고 있을 때에 빌립보교회는 그들에게 두 번이나 후원금을 전달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바울사도는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그들에게 재정적인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자비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살전 2:9, 살후 3:7-8), 빌립보교회의 후원은 받았다는 것도 빌립보교회와 바울사도가 자식과 아비의 관계와 같이 친밀한 관계였음을 짐작케 합니다.
17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20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2] 빌 4:17-20 바울사도는 빌립보교회의 헌신이 자신이 선물을 받고자 하는 욕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것을 통하여 빌립보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가 원하는 것은 선물이 아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잠 11:25)는 말씀처럼 이를 통한 영적인 열매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바울사도는 이것을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며, 이를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일 뿐만 아니라, 빌립보교회가 사실 풍족한 가운데 바울사도를 도운 것이 아니라 어려움 중에서도 기쁨으로 헌신하였기 때문에 사도는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의 삶은 물론 교회에 “더욱 풍성한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사실 하나님께 중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이 돌려질 것이라”라고 축복의 기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습니다”라는 “아멘”을 붙이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도 바울사도의 빌립보교회에 대하여 언급한 말씀을 상고해 보면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선물을 받는 사람은 자신의 유익에만 관심을 두지 말고 선물을 마련한 사람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에 감사하며 그를 위해 축복을 빌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선물을 주는 사람은 자기의 주는 행위가 외식적인 행위가 되어서는 안 되며 또 자기의 주는 행위를 사랑의 도구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D. 마지막 인사(4:21-23)
2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22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 이니라
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1] 빌 4:21-22 바울사도는 이제 마지막 인사로 편지를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 각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 문안에 대한 당부는 거저 의례적인 형식이 되어서는 안 되며 구체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 그들의 각각의 사정을 살펴보면서 문안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바울사도는 지금 빌립보교회에 문안함에 있어 자신만이 아니라 자기와 함께 하고 있는 형제들이 같이 빌립보교회에 문안한다고 말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빌립보교회에 문안하지만 그 중에는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 명”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왜 여기 적었을까요? 당시 가이사란 로마의 황제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가이사의 집 사람들”이란 황제의 가문 사람이거나 아니면 황제의 측근으로 황실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첫째로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이 로마의 최고 심장부인 황제가 거하는 곳까지 이르렀음을 그들에게 알릴뿐만 아니라, 둘째로는 “로마가 모든 길의 끝”이라 했던 것처럼 이 복음이 온 세계에 편만해 질 것임을 알리고자 한 것이며, 셋째로는 그러므로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더욱더 복음전파를 위한 아름다운 동역의 삶을 영위함에 있어 비록 현재는 힘들지라도 희망을 가지고 인내하라는 당부를 포함한 것으로 보입니다.
[2] 빌 4:23 마지막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의 심령 속에 오래도록 떠나지 않고 함께하실 것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특히 바울사도가 여기서 다시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는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보면서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역시 지금 여기, 그리고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제3 빌립보서 강해를 마치며
빌립보서의 내용분석과 강해를 이제 마치고자 합니다. 빌립보서의 주제는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라.” 그러면 “기쁨이 넘치리라.”
우리의 삶의 현실이 어떠하건 간에 바울사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할 줄 아는 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빌립보서를 통하여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자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족을 누리십시오. 그 비법은 우리가 강해를 통하여 본 바와 같이 우리의 정체성을 잊지 말고 그리스도인으로 삶을 삽시다. 그러면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은 기쁨이며, 평강일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의 “기쁨의 복음”이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