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창조와 섭리
우리는 바로 앞 장에서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부의 사랑과 성자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 안에 사람의 구원 전체가 내포되어 있는 것을 최종 확인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참되신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대면하며, 또한 우리의 사고와 개념들을 끊어내고 우리를 하나님 자신에게로 인도해 주는 것이다.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은 동시에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이시며, 그의 놀라운 이적과 기사는 물론 창조와 만물의 유지가 그의 일에 속함을 계시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 하나님의 모든 일들, 즉 창조의 일들과 구속의 일들이 그의 생각의 산물임은 물론 그의 의지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것을 성경은 경륜(經綸 시 33:1; 잠 19:21; 사 46:10; 행 2:23), 작정(창 41:32; 시 2:7; 사 10:23; 14:27), 목적(目的 렘 51:12; 롬 8:28; 9:11; 엡 1:1; 3:11; 딤후 1:9), 계획(計劃 행 10:42; 13:48; 17:31; 롬 8:29, 30; 엡 1:5, 11), 기뻐하심(사 49:8; 53:10; 60:10; 61:2; 마 11:26; 엡 1:5, 9) 등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인간적인 표현을 한다면 하나님의 일들 하나하나 앞서서 정신적 고려와 의지적인 결정이 선행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를 경륜이라는 말로 대표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따라서 지혜로우신 하나님은 그의 경륜을 따라 독생자를 주셔서 구원의 길을 열게 하셨으며, 또한 이와 같은 경륜은 탁월하고 놀라우시며(사 28:29; 렘 32:19), 독자적이시며(마 11:26), 불변하며(히 6:17), 무너지지 않기 때문에(사 46:10) 우리가 소망과 확신을 갖고서 미래 속으로 움직여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여호와의 경륜이 맨 처음 드러난 곳이 바로 창조의 사역에서이다. 그런데 세상은 창조가 아니라 진화론(進化論) 또는 발전론을 지지해 오고 있다. 그렇지만 진화론은 진화하는 주체가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되며, 따라서 사물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 될 수가 없다. 특히 진화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하나의 가설로부터 시작하게 되는데, 이들의 접근 방법 속에는 물질이 우선적이며 영원하며 언제나 에너지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유물론(唯物論)으로 나아가거나 또는 에너지가 주된 것이며 오히려 그것이 존재하는 만물의 근거라고 주장함으로 범신론(汎神論) 또는 다신론(多神論)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런데 이들 논의를 자세히 드려다 보면 영혼과 물질, 영과 육체, 보이지 않는 것들과 보이는 것들, 물리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이라는 이원론(二元論)의 딜레마 속에서 헤매고 있는데, 이는 세상의 철학에서 또한 동일하게 잘 드러난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진화론 또는 발전론이 아니라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고 분명히 하면서, 이것을 바로 하나님의 경륜인 창조로 설명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통상 우리는 만물을 무(無)로부터 존재하게 하셨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무로부터’라는 말 자체는 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만물이 존재하게 된 원리나 기원이 될 수 없고, 결국 아무것도 무로부터 올 수 없다는 오해가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존재하게 되었다고 우리는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오해가 없다면 하나님이 세상을 그저 이루신 분만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라고, 즉 세상의 존재 이전에 절대적인 비존재(non-being)가 선행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은 무로부터 세상을 지으셨다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이다. 즉 성경은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존재하셨으나(시 90:2) 세상은 그 시작이 있다는 것이다(창 1:1). 그러므로 하나님이야말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모든 일들의 유일한 절대적인 원인이신 것이다. 보이는 사물들이 나타나는 것들로 지음 받은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지음 받은 것이다(히 11:3).
여호와의 경륜을 따라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다면, 이제 그가 어째서, 그리고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 행하셨는가를 살펴봄이 필요하다. 과학과 철학은 세상을 하나의 필연으로 만들고 또한 그것을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연역해내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해왔다. 즉, 하나님은 너무나 충만하고 풍성하여 통제 불능상태 하에서 세상이 그에게서 끊임없이 흘러나왔다는 식으로 접근하거나, 그 반대로 하나님 자신이 궁핍하고 공허하여 자신을 채우고 자신의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 세상이 존재했다는 식으로 접근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 경우 결국 세상은 하나님께 하나의 필연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이와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위의 두 입장은 어찌되었건 하나님에게서 세상으로 옮아가고, 하나님이 세상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보지만, 성경은 오히려 온 세상과 그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그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런데 창조는 하나님께서 그의 부족이나 필요를 채우시기 위하여 하신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오직 그의 뜻으로 역사하셔서 만물을 존재하게 하셨다는 사실이며, 창조 그 전체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위인 동시에 능력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영원한 뜻이요, 그의 절대적인 주권에 있는 것이다(계 4:11). 따라서 이 창조행위는 그의 지혜로우시고도 거룩한 이유들을 지니고 계신데, 이것은 첫째로는 창조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행위로 제시함으로써 이 점을 입증시켜 주고 있으며(창 1:26; 욥 28:20f.; 잠 8:22f.; 요 1:1-3; 엡 3:9; 골 1:16; 히 1:2), 둘째로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가 그 자신의 존귀를 위하여 만물을 지탱시키시며 다스린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롬 11:36; 시 19:1; 출 14:7; 요 9:3; 사 43:25; 엡 1:6; 요 17:4, 빌 2:10-11).
하나님께서 그의 기쁘신 뜻을 따라 그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을 무로부터 존재하게 하셨는데, 그렇다면 창조가 일어난 방식에 대해서 성경은 무어라 하고 있는가?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는데(창 1:1) 여기서 말하는 태초란 지으심을 받은 그것들이 존재하기 시작한 시점을 가리킨다. 그런데 창조사역 속에는 시간과 공간이 필수불가결의 존재형식이다. 다만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시간 속에서 세상을 지으신 것이 아니라 시간과 더불어 지으셨고 세상과 더불어 시간을 지으셨다”는 점은 잊지 않아야 된다. 그런데 창세기에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 1:1)고 할 때, 바빙크는 이것이 온 우주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이 문장이 그 다음에 이어지는 모든 창조기사를 뭉뚱그려 주는 하나의 작은 설명문 정도로 해석하거나, 또는 이것이 천지를 그 완전한 상태로 존재하게 했음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도 안 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말 성경에는 2절에 “또한”이라는 접속사가 없지만 원어에는 있는데, 첫 번째 해석은 만약 그와 같이 보는 경우 “또한”이라는 말과 충돌된다. 그리고 두 번째 해석 역시 궁창으로서의 하늘은 창세기 1:8에 가서야 비로소 나타나고, 하늘과 땅은 창세기 2:1 이전에는 아직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아가 땅이 혼돈한 상태란, 천사들의 타락으로 인하여 완전하게 이루어진 땅에게 심판이 임한 것으로 생각하는 무리들이 있지만, 이는 창세기 1:3-10에서 묘사하는 혼돈하고 공허한 땅을 정리하고 완성시키는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전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처럼 혼돈하고 공허한 땅을 정리하여 완성한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첫 번째의 역사로 빛을 창조하시므로 이 빛으로 인하여 존재에 구분과 구별이 생기고 형체와 모양, 명암과 색상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의 역사로 해, 달, 별 등 빛을 담는 광명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하여 땅에 새와 고기와 짐승과 사람과 같은 생물들이 거주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창조의 모든 역사를 엿새 동안에 완결되었다(창 1:2; 출 20:11; 31:17)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 엿새에 대하여 상당히 다른 견해들과 자유로운 사색이 있어왔다. 그렇지만 성경은 날에 대하여 밤과 아침으로 재는 것으로 매우 단호하게 말씀한다. 다만 창세기 1:1-2의 내용이 첫날에 앞서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으며 또한 이러한 어두움의 상태가 얼마나 지속되었는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첫 사흘(창 1:3-13)은 우리의 날들과는 매우 달랐을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나흘째 가서야 비로소 해와 달과 별이 형성되었다고 보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사흘은 일상적으로 구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천사들의 타락과 사람들의 타락, 홍수 등으로 인하여 우주에 온갖 변화가 발생했다는 점에서 볼 때 이 사흘 역시 우리의 사흘과는 여러 가지 점에서 달랐다고 보는 것이 개연성이 높을 것 같다. 특히 여섯째 날은 창조의 주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창조의 면류관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시기에 지어졌다.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천지와 만물이라는 명칭 혹은 세상이라는 단어로 묶어 말하고 있는데(창 2:1),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물리적인 지구(삼상 2:8; 잠 8:31) 또는 사람의 거처로서의 땅이란 뜻도 내포하고 있다(마 24:14; 눅 2:1). 우리는 이와 같은 세상에 관하여 그 폭과 길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즉, 세상은 하나의 단위요, 일관성 있는 하나의 전체이지만, 동시에 그 통일성 중에서도 하늘과 땅, 천사와 사람, 생물과 무생물, 영적 존재와 비영적 존재,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녀 등과 같이 풍부한 다양성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창조는 모든 발전의 출발점이었다면 하나님의 창조의 뜻하신 바대로 목적지까지 이끌고 가실 것이므로 시간의 길이와 깊이에서도 그 존재가 계속된다. 성경은 이러한 점에서 오로지 세상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며, 또한 세상이 유한하다는 것과, 또한 세상이 좋다고 가르친다. 물론 마지막 말에 대하여 오늘날 세상적 가치관에 따르면 동의하기 그리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의 솜씨로 지어진 세상은 좋았고 매우 좋았다고 말씀하셨다(창 1:31). 물론 죄가 들어온 후 땅이 저주를 받고 사람이 부패하고 타락함으로 모든 피조물이 신음을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성취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존귀에 굴복시키고 그의 영광을 위하여 섬길 때 우리에게 다시 좋아진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들을 통하여 자연히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그의 섭리(攝理)로 이끌어준다. 즉, 세상 전체나 혹은 그 피조물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된 그 순간부터, 그것들은 곧바로 하나님의 섭리의 보살피심 아래 있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섭리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세상에게 그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창 22:8; 삼상 16:1; 겔 20:6; 히 11:40), 하이텔베르크 요리문답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어디에나 임하시는 능력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섭리와 창조는 긴밀하고 밀접한 동반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마치 시계와 같이 자동 태엽에 감겨 돌아가는 것으로 보는 이신론(理神論)은 창조와 섭리를 분리시킴으로써 결국 하나님을 세상으로부터 배제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칸트와 다윈과 같은 사상가가, 그리고 합리주의와 펠라기우스주의라는 이성만능과 의지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이론이 등장함으로 인하여 중보자 구원사역이 쓸데없는 상황에 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그러나 성경은 피조물의 현재의 존재 자체에도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있으며(롬 11:36), 하나님이 모든 세상을 지으신 그 아들이 그 이후로도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히 1:2-3), 만물에 앞서서 계신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서 있으며(골 1:17), 또한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창조되고 새롭게 되는 것임을(시 104:30) 분명히 하고 있다.
우리는 바로 앞에서 창조와 섭리는 긴밀한 관계에 있다고 보았는데, 이런 점에서 섭리를 가리켜 때로는 계속적인 혹은 점진적인 창조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처럼 섭리를 창조로 이해한다고 해서 양자가 동일한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분명 깊은 상호관계가 있는 만큼 구별하는 것도 중요하다. 만약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구별하지 않고 창조만 강조하다보면 이신론에 빠질 수 있고, 또한 구별을 무시하면 범신론에 빠질 소지도 있다. 성경은 당연히 이신론도 범신론도 이단으로 철저히 배격한다. 창조는 무언가를 무로부터 존재하게 만드는 것을 사시하며, 유지(維持: 보존)란 이미 주어진 존재를 지속하도록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창조는 하나님의 본질과 구별되어야 하며, 이런 점에서 하나님과 세상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께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으로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굽어 보사 모든 인생을 살핀다(시 33:13). 이는 마치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토기를 빗듯이 또한 켜는 자의 손에 들린 톱처럼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섭리의 결과이다.
그런데 혹자는 이처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계시다면 우리의 죄까지 그의 원인으로 보아야 하지 않는가 하는 어리석은 질문을 할 수 있지만, 섭리가 죄도 감찰하신다는 사실과는 관계없이 성경은 또한 죄의 원인은 하나님에게가 아니라 사람에게 있으며, 따라서 죄는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사람의 책임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을 확고하고도 단호하게 주장한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시며 거룩하시며 거짓과는 거리가 먼 분이시다(신 32:4; 욥 34:10). 여기서 보듯이 죄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통치(統治) 아래 있으며,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가 사람의 책임이라는 성경의 두 갈래의 가르침은 하나님과 세상이 한 편으로는 서로 분리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또 한 편으로는 서로 본질적으로 구별된다는 논지가 성립해야만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일어나는 모든 일의 제1의 원인이시지만 하나님 아래서, 또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피조물들이 제2의 원인들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제1원인과 협력(協力)한다는 사실을 신학의 섭리론을 통해서 잘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사에 끔찍한 참사와 재난을 만날 때, 아니 평온하게 살아가는 삶 속에서도 이따금씩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의문의 마음으로 북받쳐 올라 입술로 터져 나오기도 하는 침체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다음 순간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믿는 믿음으로 다시 머리를 높이 들어 올릴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섭리에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유지와 협력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또 한 요소인 통치(統治)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전능자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그분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그의 전능하며 편재하는 능력으로 세상을 지탱하실 뿐 아니라, 만물이 모두 협력하여 모든 것이 그가 정해 놓으신 그 목적에 모아지도록 그렇게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것이다. 그는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시며(딤전 6:15; 계 19:6), 그의 왕권은 영원무궁하도록 지속된다(딤전 1:17). 이러한 점은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고백할 수 있으며, 따라서 섭리를 믿는 믿음은 구속을 믿는 믿음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환난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 등이 우리를 엄섭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하나님의 그 사랑에서 누가 끊을 수 있겠는가?(롬 8:35)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는가?(롬 8:31).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