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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빙크-[4] 일반계시의 가치

작성자lawhelp|작성시간15.12.27|조회수235 목록 댓글 0

[4] 일반계시의 가치

 

계시에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있는데, 때로는 일반계시의 의의와 가치를 완전히 무시하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특별계시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제한하거나 심지어 아예 부인하고 일반계시만을 강조하는 부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앞([3] 일반계시)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는 은혜와 보존이라는 점에서 이들은 서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서로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상호 관계 속에 있다. 그리고 또한 이들 둘 다 동일한 사람들, 즉 그 당시 존재하던 인류 전체를 향하여 주어졌다는 점에서 계시의 편면성만을 주장하는 견해에 대해서는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경은 창조로부터 가인과 아벨의 기사, 그리고 셋 가문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오랜 동안 순전하게 보존된 사실, 그러나 셋 자손과 가인의 자손들이 서로 혼인을 했고 결국은 그들로 인하여 땅에 부패가 만연하게 되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홍수를 통하여 노아와 그의 가족 등 여덟 명만이 살아남았는데, 이러한 과정 속에서도 하나님은 쓸어버리심(extirpation)과 함께 보존하심(preservation)이라는 언약은 계속되었다. 이것이 소위 무지개 언약인 동시에 자연 언약이며, 이 언약으로 말미암아 홍수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물에 대한 질서가 생겨나 사람에 대해 금지 사항과 제한 사항들이 주어지고 법과 규례들이 어디서나 나타났다. 하나님께서는 사람 속의 야수성(野獸性)을 억제시키며 그에게 예술과 과학에서, 국가와 사회에서, 일과 소명에서 자기의 재능과 정력을 개발하도록 기회를 주시며, 이렇게 해서 역사를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조건을 이루시는 것이다.

 

그러나 홍수 이후의 인류들이 비옥한 시날 평지에 살면서 부와 권력이 커지자 곧바로 자기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동시에 인류의 흩어짐을 막고자 높은 탑을 지을 계획을 세우고,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적대하는 소위 바벨탑을 세우는 세상왕국을 건설하려 한 것이다. 하나님은 여기에 다시 개입하셔서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 흩어지게 하셨고, 성경은 이것을 민족들과 족속들과 언어와 방언들이 생겨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류가 다시금 하나가 되는 일이 과연 있게 된다면 그것은 바벨탑 같은 것을 중심으로 외형적으로 기계적으로 뭉치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의 변화로 말미암아 하나의 동일한 머리 아래 모이는 것으로(1:10), 모든 사람을 새 사람으로 만드는 평화를 일구는 창조를 통해서(2:15), 성령으로 말미암는 중생과 새롭게 됨을 통해서(2:6), 또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동일한 빛 속에서 행하게 됨으로써(21:24) 이루어질 것이다. 인류가 참된 하나 됨은 속에서 시작하여 이루어져 가는 내적인 역사를 통해서만 회복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처음 언어의 혼잡이 내적으로 작용하여 근본적으로 흐트러진 바로 그 하나 됨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하나 됨을 위하여 가짜의 하나 됨은 뒤집어 진 것이므로, 세계 국가가 깨어진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존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지금까지 서로 관련을 맺고 있었던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발아래에서 다시 서로 만나기까지는 잠정적으로 서로 분리된다. 하나님의 도와 규례에 따라 행하도록 이스라엘이 분리되며, 또한 여호와께서 다른 민족들을 자기들의 길을 가도록 허용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발아래 다시 서로 만나기까지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잠정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벨탑 이후에 각 민족과 나라를 흩어서 자기들의 길을 가도록 하셨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이 민족들에 대해서 전혀 관심도 없으시고 오직 자기들의 운명에 맡기는 식의 내버려두셨다고 해석해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불합리한 해석이다. 성경은 경계를 세우심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도 기업을 주셨고, 나아가 자연과 역사 속에 주어지는 그의 계시를 통하여 모든 사람의 마음과 양심에 그의 음성을 들려 주셨다(19:1). 세상 창조 이래로, 하나님은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그가 지으신 만물을 통해서 드러내 보이셨다(1:19-20).

 

따라서 이방 민족들은 이스라엘 자손처럼 율법을 받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그들도 율법에 명령된 것을 때때로 행함으로 도덕적 본성 속에 자기들이 자기들 자신에게 율법이 되며, 그들의 행위에 뒤따라 양심의 음성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에게 종교적이며 도덕적인 지각이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계속해서 돌보아 오셨다는 것을 입증한다. 말하자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또한 하나님이셨던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지어졌으며, 사람들의 빛과 생명이 그 말씀 속에 있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그들에게 생명을 주셨으며, 또한 의식, 이성, 그리고 지성을 통하여 세상에 나오는 모든 이들 하나하나를 비추어 주신 것이다(1:3-10). 그러므로 이러한 빛을 통하여 애굽, 앗수르와 바벨론으로 이어지는 문명이 발달하게 되었는데, 이 바벨론의 고대 문화야말로 그 문서들과 천문학, 수학, 날짜 계산법 등과 더불어서 우리의 문화가 세워진 기초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명사 전체를 종교적, 도덕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바울 사도가 잘 자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것으로부터 깊은 불만족감과 환멸을 얻게 된다. , 이방인들이 일반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 않았고, 감사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여져서 미련한 마음이 어둡게 되었고, 스스로 지혜롭다고 이야기하면서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네발 달린 동물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어버렸다(1:21-23). 그러므로 인류는 그 문명의 기나긴 여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았고 그에게 감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믿음을 벗어나, 온갖 종류의 다신론적인 관념들과 미신적인 행위들로 이어지는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고등종교와 하등종교를 설령 구분하려고 한다고 하더라도 이들 간에는 사실상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문제는 기독교 신앙, 기독교 민족들에게서도 부패하면서 이런 동일한 관념과 행위들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이교(異敎)의 관념과 행위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상 숭배와 형상(形象) 숭배가 그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우상숭배란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의 자리를 다른 무엇을 가져다 놓고 그것을 섬기거나, 그 하나님과 더불어 다른 무엇을 함께 놓고 그것을 동시에 섬기를 것을 의미한다. 둘째, 그런 우상숭배에 사람과 세상에 대한 온갖 그릇된 생각들이 뒤따라 이어진다는 것이다. 종교란 사람이 하나님과 맺는 관계로서, 다른 모든 관계들을 지배하는 것이요, 따라서 사람과 세상, 만물의 기원과 본질과 목적에 대한 명확한 견해를 상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육체적인 것과 도적적인 것,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 이 땅에 속한 것과 하늘에 속한 것들이 서로 혼동되고 뒤섞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지각이 없으므로 죄에 대한 지각도 함께 결핍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죄의 비참도 알지 못한다. 셋째, 열방의 모든 종교들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인간의 힘으로 구원을 얻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우상숭배는 자연히 자기 의지에 근거한 종교로 이어진다. 그리고 여기에 언제는 미신과 점술과 마술이 뒤따른다. 그 결과 결국은 종교라고 하지만 사람이 중심이요, 어디까지나 사람이 자기의 구원을 얻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강의 스케치를 통하여 이교들의 특징을 살펴보았는데, 이제 좀 더 정형화된 이교에 대하여 몇 가지 더 언급하고자 한다. 주전 7세기경의 페르시아 짜라투스트라(Zarathustra: 조로아스터)나 주전 6세기의 공자(孔子), 주전 5세기의 인도의 불타(Buddha)와 주후 7세기 아라비아의 마호메트는 갈등으로부터의 화해를 시도하고 깊은 부패 상태로부터 종교를 끌어올리려 애쓴 사람들이며, 굳이 이러한 사람들은 사기꾼이기보다는 성실한 사람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이 깨달은 종교적 의식 사이의 갈등으로 인하여 영혼으로 씨름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허락된 빛을 통하여 그들은 참된 행복을 얻는 더 나은 길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개혁된 종교들 역시 대중들의 우상숭배와 정도 차이만 있을 뿐,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짜라투스트라는 선과 악 사이의 대조를 강조함으로 인하여 선한 신과 악한 신을 구분하게 되었고, 결국은 자연세계와 인간세계와 동물세계 등 모든 것에까지 확대되는 이원론으로 인하여 삶이 절단되는 실질적인 효과가 생기게 되었다. 공자의 유교는 하나의 국가종교로서, 그 자체 속에 자연의 신과 조상 숭배가 함께 결합된 종교적 요소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것이었다. 불교는 처음에는 사실상 종교가 아니었으나, 고통을 악의 근원으로 제시하면서 금욕과 의식을 무()로 돌리는, 존재를 없애는 것을 구원의 길로 제시하는 하나의 철학이었다. 그리고 마호메트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알고 있었으나, 그의 종교 설교가의 모습이 점점 정치가와 법 제정자의 모습으로 바뀌어가므로, 그가 세운 종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교제에 대한 여지를 전혀 남기지 않았다. 결국 이슬람에서는 감각적인 욕망들을 전적으로 만족시키는 것이 하늘의 구원이었다.

 

일반계시 전체를 조감해보면, 한 편으로는 모든 사람들에게 종교적이며 윤리적인 감각이 있는 것이나 거짓과 진리, 선과 악, 의와 불의,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하여 어느 정도 각성이 있는 것이나, 사람들이 결혼과 가정, 사회와 국가의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나, 짐승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안팎으로 온갖 통제장치들을 통해서 억제 받는 것이나, 이런 한계의 테두리 내에서 사람들이 온갖 종류의 영적이며 물질적인 것들을 생산하고 분배하며 누린다는 것이나, 모두가 일반계시의 덕분이다. 요컨대 인류는 일반계시에 의해서 그 존재가 보존되며, 그 통일성이 유지되고, 그 역사가 지속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 큰 가치가 있으며 풍성한 열매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인류가 그 계시의 빛을 동해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의 지혜는 사람이 그 정신의 어둠과 그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그에 주어진 선물들을 올바로 사용하지 못했다. 따라서 빛이 어둠 속에 비친 것은 사실이지만 어둠이 그것을 깨닫지 못했고(1:5), 말씀이 세상 가운데 계셨으나 세상을 그를 알지 못했고(1:10), 나름대로 지혜가 있었지만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고전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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