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끄리 개혁>
라마 5세가 1868년(태국 불력 2111년)에 15세로 즉위한 것은 라마 4세가 아닌 유력 귀족인 분낙 집안에 의한 것이었다. 그 시대에 왕의 섭정이었던 사람은 쏨뎃짜오프라야 포롬마하씨스리야웡(สมเด็จเจ้าพระยาบรมมหาศรีสุริยวงศ์) 추웡 분낙(ช่วง บุนนาค)이었다.
당시 태국에는 부왕제도가 존재했었는데, 그것은 왕이 수도에 있지 않을 때에 왕을 대신해서 정치를 다스리기 위해서 였다. 부왕은 보통 왕이 임명해야만 하지만, 그 당시에는 분락 집안의 승인을 받아 위차이창이 부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이러한 것을 싫어한 라마 5세는 1873년에(태국 불력 2416년) 20세에 "Young Siam(กลุ่มสยามหนุ่ม)" 이라는 신문을 발행하고 분낙 집안과 유착되어 있던 위차이창 부왕을 비판했으며, 그 다음 해에는 그 비판으로 인해 부왕 궁전은 무장을 하게 되었다. 그것을 알게 된 라마 5세는 당황하여 무장 해제를 요구해, 결국 문제는 이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것은 라마 5세에게 큰 충격이 되었고, 이 충격으로 인해 왕궁에 반 분낙화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지방 행정면에서는 당시 '짜오 무엉' 이라는 일종의 지사에게 그 지역의 내정을 맡겼는데, 재정적으로는 중앙 정부에 연동하지 않고 모두 직접 관리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가끔 반대 세력이 되는 경우도 발생했다. 그 밖에 란나타이 왕조, 빠타니 왕조 등의 지방 왕족이 있었는데, 그들 지방정치와 비끗거림은 어쩌면 내전으로 뒤엉키거나, 어쩌면 태국 영토를 노리는 영국 프랑스 세력에 점령되어 버릴 위험에까지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불안정감은 라마 5세에게 태국을 근대적인 국가 운영체제로 바꿔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했다. 그 후 1882(태국 불력 2425년)에 섭정 추웡 분락이 죽게 되고, 1885년(태국 불력 2428년)에는 위차이창 부앙도 죽고 나서 담롱 라차누빱밥어 황손 등의 왕족을 받아들여 라마 5세는 본격적인 국가개혁에 착수하게 되었다.
● 노예, 인민해방
태국에서는 그 당시에는 노예가 있었다. 그것은 엄밀하게 노예가 아닌 계약에 의한 일시적인 신분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으로, 매매도 가능했다.
그것은 그 당시 분락 집안의 주요한 재산이었으나 라마 5세는 인도적 의의를 이유로 들고 노예를 해방해서 평민으로 해주었으며, 또한 지방에서는 호적에 의해 지사 감독과 노역에 시달리던 '쁘라이'라고 불리는 인민을 해방시켰다.
결과적으로는 서구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결국 '방임형 국가'가 없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후에 부드러운 불평등 조약 개정을 돕게 된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이 업적에 의해 태국에서는 라마 5세를 받드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 업적에 의해 라마 5세는 대왕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또한 서양에서는 창작 영화 '아난다와 왕(King & I)'의 소재가 되었으며, 당시 왕궁에 고용되었던 교사인 아난다가 소년시대 줄라롱컨에게 'Uncle Tom'을 읽게 해서 노예해방을 하게 되었다는 설이 설득력있는 속설이 되고 있다.
● 교육제도
라마 5세에 의한 교육제도 확충은 국가를 근대화시키는 것에 맞추어, 근대 국가에 어울리는 인제를 육성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우선은 왕실 전용 학교의 확충과 의무교육제도를 도입했고, 왕실사제에 대한 유학도 추진시켰다.
이러한 풍습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으며, 태국 사회에서는 중류급 이상의 자식이 해외에 유학하는 것은 일종의 패션처럼 되어버려 현재 관료 대부분이 해외 유학경험자들인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라고 볼 수 있다.
● 군사제도
라마 5세는 육군을 중심으로 군대를 근대화시켰다. 그것은 지방이 중앙편입에 반대하고 무장봉기를 일으킬 때를 대비해서 필요한 정책의 하나였다.
뒤에 말하겠지만 후에 각지에서 실제 반란이 일어나 그 근대화된 조직에게 무너지게 되었다. 이 지방반란의 진압은 일부에서는 비판을 받았지만, 영국과 프랑스 세력이 지방이 통제가 되지 않는다는 빈틈을 이용하여 침략해 오는 것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에 높이 평가받을만한 가치가 있었다.
이러한 효과가 있는 군사개혁이었지만 엘리트화된 군대가 나중에 군사정권의 태두를 낳았고, 민주화 후에 국가가 정체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 교통, 통신
라마 5세는 철도와 도로를 정비하고, 내정의 통일화를 그렸다. 그것은 보조하기 위해 전화, 통신, 우편을 정비했다. 또 수도도 정비했다.
● 지방행정
우선 위의 내용에 있었던 지방의 권력자인 위임정치를 폐지했다. 그 후에 몬통이라 불리는 州 제도를 도입해서 그 아래에 무엉(道), 엄퍼(郡), 땀본(町), 무반(村)을 두고 중앙 집권국가를 완성했다. 그것은 그 후에 프랑스와 영국과의 국경을 결정할 때에 유효하게 작용했다.
● 영토 양도
개혁 중에서도 가장 큰 상처였던 것이 6회에 걸친 영토분할이었다. 현재의 캄보디아, 라오스를 프랑스에게 빼앗겼고, 말레이 반도의 일부도 영국에게 빼앗겼다.
그러나 어느 정도 근대화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노골적인 침략이 불가능했다는 것, 영국과 프랑스의 완충지대로서 태국을 두는 것이 침묵의 약속이었기 때문에 식민지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잃어버린 영토는 대단히 커서 30만 평방 킬로에 달했다고 한다.
● 결과
결과적으로는 차크리 개혁은 거의 성공했다고 볼 수가 있다. 분락 집안의 지배를 벗어나 완전한 왕권정치를 수립했고, 인도차이나 제국이 차차 침략되고 있는 와중에 근대화를 결심해 서양세력의 진입을 막았다는 것이 큰 진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군사강화에 의한 군사정권의 대두와 강력한 중앙집권화에 의해 지방반란 등도 일어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이싼 지방의 천년왕국과 태국 남부의 반란이다.
현재 이산에서는 거의 그러한 반란의 움직임이 없어졌지만, 태국 남부 특히 야라, 나라티왓, 쏭크라 3개 도를 중심으로 하는 반발운동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