篆書( 전서 )
★篆書( 전서 )의 유래
이전의 서체에서 획일적인 변화를 보인 전서(篆書)는 인위적인 수정 작업으로 인해 탄생된 서체였기에 통일된 특징을 갖추기 시작한 최초의 문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문자학의 연구 성과가 이룩되기 시작한 허신의《설문해자(說文解字)》의 기본 제시 자형을 소전(小篆)으로 사용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한자 연구의 오랜 전통과 보편성을 지닌 서체라 할 것입니다.
일반적 한자 구분의 큰 구획인 고문자(古文字)의 마지막 해당 서체인 전서(篆書)를 통해 통일된 서체의 전형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문자문명이 시작된 이래 존재해온 書이니만큼 우리가 그 맥을 짚어감이 바람직할 것이다. 전서는 중국의 문자-상형문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문자의 필요성의 인식이 바로 문자 창조에 이르게 되었고, 그 문자의 표현수법은 귀갑(龜甲-거북이의 등껍질)이나 짐승의 뼈에 새겨진 글자나, 동기(銅器)의 명문(銘文)에 새겨진 글자에서 알 수 있다. 이를 사랑하는 중국 민족은 글자를 표현함에 書의 천재에 의한 글자의 풍을 높이 평가하여,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전(篆) 예(隸) 초(草) 행(行) 해(楷)로 발전하여 書의 체계를 이룬 것이다.
예서 이전의 문자, 즉 甲骨文, 金文, 石文등을 지칭하며, 좁은 의미로는 小篆만을 칭하기도 한다. 전서는 명문(銘文) 금문(金文) 초문(楚文) 등 동기나 석각(石刻)에 의해 표형되었다. 진(秦) 이전에는 여러나라가 분열된 상태에서 그 나라에 맞는 문자를 사용하다가 진나라에 들어와서 시황제에 의해 문자가 통일되었다. 그리하여 문자통일 이전의 진계문자인 주문 -대전(大篆)을 주축으로 이사(李斯)를 통하여 문자를 만들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소전(小篆)이며, 문자통일 이전의 명문(銘文) 금문(金文) 죽간(竹簡) 진공단(秦公段) 석고문(石鼓文)등이 대전에 속하고, 태산각석(泰山刻石)낭사대각석(廊邪臺刻石)등이 소전에 속한다.
대전은 일반적으로 그 모양이나 품세가 정방형이 많은 모양으로 전서의 기본골격인 좌우대칭은 어느정도 이루었으나, 불안정한 모습을 한 것이 많고 약간 유동적인 움직임을 많이 볼 수 있다. 소전은 글자모양이 대전보다 세로로 약간 길어졌고 좌우대칭이 되면서, 움직임이 거의 없는 정적인 상태의 글씨로 엄숙하면서도 긴장된 느낌을 준다.
따라서 전서라함은 일반적으로 소전을 말함이며, 소전은 그후 한전(漢篆)을 거쳐 원(元) 당(唐), 청(淸)에 이르기까지 많은 서예가(書藝家)들이 써 오고 있다.
● 篆書[小篆]의 정의
본래 전서(篆書)는 대전(大篆)과 소전(小篆)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전서의 대표격은 소전(小篆)을 주로 말합니다. 은대(殷代)와 주대(周代)의 갑골문(甲骨文)과 금문(金文)의 사용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졌지만, 주(周)나라 말기의 춘추시대(春秋時代)와 전국시대(戰國時代)를 거치면서 각 지역별 문화의 특성이 독립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문자 역시 각 지역의 국가별로 개별적 특징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진시황(秦始皇)의 전국통일로 인해 모든 문화와 문물의 인위적 통일까지 이어집니다. 역사에 등장하는 진시황의 문자통일(文字統一)이라는 것이 바로 소전(小篆)의 서체로 획일화시킨 것입니다. 사료에 의하면 진시황이 승상(丞相)이었던 이사(李斯) 등이 이전에 흩어져 있던 복잡하고 불편한 문자들을 통일시키게 됩니다.
특이한 점은 진나라가 통일 이전에 사용하던 주나라 선왕(宣王)때 태사(太史)인 사 주(史)가 만들어 주나라 말기 전국시대까지 사용하던 문자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바탕으로 새롭게 개량해서 만들게 되었는데, 통일 이전 사용하던 점과 획의 범위가 복잡한 조형미를 지녔던 문자를 대전[大篆 - 혹은 주의 태사가 만든 글이라는 의미로 주문(文)이라고도 함]이라 하고, 통일된 새로운 문자를 소전[小篆 - 혹은 '진나라의 전서'라는 의미로 진전(秦篆)이라고도 함]이라 합니다. 하지만 진의 흥망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던 소전이었기에, 사용시기는 그리 오래지 않고 곧 새로운 金文字의 서체인 예서(隸書)가 등장하게 됩니다.
● 篆書[小篆]의 특징
앞서 소전(小篆)의 특징이 인위적인 통일이라는 점으로 인해 서체가 거의 획일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갑골문과 금문이 지닌 단점 중의 하나인 동일 글자의 다양한 이체자(異體字)들로 인해 통일성이 부족한 아쉬움이 있는 것에 비해 소전은 인위적으로 통일을 시켰기 때문에 자형의 불일치를 완전하게 해소해 여불위(呂不韋)의 말대로 '一字千金(일자천금)'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한 소전은 자형 자체로 보더라도 이전의 갑골문이나 금문보다 상당하게 상형(象形)의 회화적 성격을 탈피하고 문자의 기호적 성격으로 전환하고 있는 특징을 보입니다.
이와 같이 자형의 일치로 인해 하나의 완전한 글자들로 형태를 지니게 된 소전은 현재까지 문자학(文字學) 연구의 기본적인 자형으로 이어오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 완전한 문자의 특성을 지닌 것은 아닙니다. 가장 미흡한 점이 서체에서 획이 꺾이는 부분을 모두 둥글게 표현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 篆書[小篆]의 가치
소전은 아직 완전한 문자로서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최초로 통일된 한자의 틀이 완성되었다는 점에서 큰 가치를 부여해 왔습니다. 바로 문자학 연구의 중심 자형으로 이어져 왔다는 점이 소전에 대한 바른 이해의 중심이 되고, 현대의 한자를 이해함에 있어 소전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바른 자원(字源)을 얻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문헌이나 금석문에서는 소전의 자형이 가장 오래된 자형이기도 합니다. 또 우리가 접하는 자전들 역시 고서체(古書體)로 소전체를 제시하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한자의 자원을 해설하는 학설은 다양하게 있습니다. 어떤 하나의 학설만이 옳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견강부회식(牽强附會式) 해석의 함정이나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한자 자원의 바른 접근이 있어야 합니다. 갑골문이나 금문이 자원 연구의 중요한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자형(字形)의 불일치나 글자 수의 미비로 인해 다수의 한자를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전의 가치는 한자 이해의 필요불가결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갑골문과 금문으로부터 전서의 소전에 이르기까지 고대 문자의 서체로 규정하는 고문자(古文字)의 전형을 다루었습니다. 현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자의 모양들은 표의문자(表意文字)의 특성을 지녔다고 하면서도 본래 상형(象形)의 원형이 상당히 무너진 형태입니다. 그렇기에 명확한 한자의 이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고문자인 갑골문와 금문, 전서의 서체에 대한 확인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음의 예서(隸書)의 서체부터는 현대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의 모양을 그대로 사용하는 금문자(今文字)로 이어집니다.
●전서의 종류
◆(1) 갑골문
1) 기원 : 현존하는 중국 최고의 문자는 모두 귀갑이나 수골(獸骨)에 새겨진 것이다.
갑골문(甲骨文)이란 귀갑수갑골문(龜甲獸甲骨文)의 약칭으로 결문, 복사(卜辭), 귀갑문자(龜甲文字), 은상문자(殷商文字)라고도 한다. 이는 은(殷) 왕실공문서의 문자기록이다. 귀갑과 수골을 갑골이라고 부르는데, 귀갑중에서도 글자를 새기기 쉬운 腹甲(복갑:거북이의 배껍질)이 주로 사용되었고, 수골에서는 牛甲(우갑:소의 뼈)가 일반적이었으나 사슴, 말, 양, 들소등의 뼈도 사용되었다. 이러한 갑골은 주로 인간생활의 길흉을 점쳐 그 정복의 결과를 기록하는데 사용되었기에 정복문자(貞卜文자字)라고도 불리우고, 복사(卜辭)를 기록하는 이외엔 당시의 제사 수렵 왕실의 대사건등을 기록했다.
이것은 칼로 새겨서 점괘를 얻었기 때문에 결문 또는 복사라고도 부르는 것이다.또 이것이 당시 발견된 장소가 은허(殷墟)이기 때문에 후인들은 이것을 연구하기 위하여 은허문자(殷墟文字), 은허서결, 은허복사(殷墟卜辭)라고 일컬었다.
2) 발견 : 갑골문은 청(淸)나라 광서(光緖) 25년 하남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에서 서북쪽으로 5리 정도 떨어진 소둔촌(小屯村)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이곳은 일찍이 은왕조의 수도였던 자리다. 고증에 의하면 갑골문은 기원전 1300년에서 1100년에 걸쳐서 통용되었던 글자다3000년 동안 매장되어 있었던 갑골문이 19세기말 청에 이르러 발견되었는데, 문자학자인 유악(劉顎)과 왕의영(王懿榮)에 의해 연구되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과거에 사용되었던 문자 중에서 갑골문보다 더 오래된 문자가 발견된 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중국 최초의 문자라고 인식하고 있다. 1954년 서안(西安) 반파촌(半坡村)에서 출토된 앙소문화(仰韶文化)의 채색도기 위에 있는 것은 일종의 부호를 새겨놓은 것이다. 임동채도기(臨潼菜陶器) 위에 새겨진 문자는 1974년 반파촌에서 서쪽으로 거의 10리 정도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도기 위에 대량으로 새겨놓은 문자의 부호다.
청해성(靑海省) 낙도현(樂都縣)의 유만문자(柳灣文字)의 부호는 갑골문과 금문에 새겨져 있는 것과 매우 흡사한 것으로 지금부터 6000년 전 이상의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그러므로 학자들은 갑골문보다 더 오래된 문자가 존재할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3) 서체 : 사용한 도구나 재료가 특수하였으므로 갑골 문자의 서법과 품격은 대부분 곧고 날카로웠다. 대체적으로 모나고 곧으며 가는 획이 많고, 둥글고 굽으며 퉁퉁한 획은 비교적 적다. 대부분 칼로 직접 판 것이며, 혹은 먼저 글씨를 쓴 다음에 판 것도 있는데 써놓고 파지 못한 경우도 있다.
갑골문을 서체적으로 분석한다면 전서의 일종이라 할 수 있으나 짜임새와 필법은 그 나름대로 독특한 경지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또한 독립체에서 합체로 향하고 있으며 대량의 형성자(形聲字)가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진보된 문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수의 글자는 필,획과 부분적으로 아직 완전한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장단과 대소도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대전과 소전에 비교하면 상당히 다른 점이 있다. 그렇지만 필,획에서 힘을 가하고 짜임새에서 성김과 빽빽함을 안배하여 참치를 이루면서 비교적 엄정한 맛을 느끼게 한다.
글자의 짜임새와 전체적인 배치는 매우 타당성이 있으며 형체도 고아한 정취를 느끼게 하는 것을 보아 당시 사람들의 글씨에 대한 기교와 각법이 익숙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갑골문의 필,획이 비록 가늘다 하더라도 법도에 있어서는 오히려 모난 것과 둥근 것, 살찐 것과 마른 것을 잘 살리는 조화를 느낄 수 있다. 필,획에 있어서 모난 것이 대부분이지만 둥근 획도 있다.
둥근 회에서는 고리를 두른 것처럼 둥글게 획을 꺾었는데 이것이 매우 자연스러워 근본적으로 칼을 댄 것 같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서예적으로 볼 때 갑골문 중에서 큰 글씨는 웅장하고 힘이 있으며 깎아지른 듯한 풍모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갑골문자는 먼저 글씨를 쓰고 각을 하였는가 아니면 직접 칼로써 각을 하였는가에 대한 논란이 많았는데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은 먼저 글씨를 쓰고 난 뒤에 각을 하였다고 인정하고 있다.
◆ (2) 금문(金文)
종정문(鐘鼎文)을 금문(金文)이라고도 하며 오로지 은주(殷周)시대에 청동기 위에다 새긴 문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청동기 중에서 종(鐘)과 정(鼎)이 비교적 유명하기 때문에 종정문(鐘鼎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종정문은 직접적으로 갑골문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그것의 형체와 짜임새는 은(殷)나라 말기의 갑골문과 매우 근접하고 있다.
1) 기원: . 종정문은 대부분 종(鐘),정(鼎),이(彛),기(器) 등의 위에다 문자를 새긴 것으로 이중에서도 종과 정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종은 악기의 일종으로 대들보에 매달고 두들겨서 소리를 내는 악기다. 정은 제기에 속한 것으로서 세 발과 두 개의 귀를 가지고 있으며 향로와 비슷한 모양으로 크고 작은 것이 있는데 가장 큰 것은 국가의 보배로 전해져 내려 왔다. 이른바 구정(九鼎)이라고 하는 것은 하우(夏禹) 때 구주(九州)의 금속들을 녹여서 만들었다고 한다.
후세에 발견된 종정문의 대부분은 청동기가 주를 이루며 주(周)나라 때 새긴 것으로 내용은 제사,칙명,정벌,계약 등에 관한 말들이 많으나 명문이 없는 것들도 있다.
곽말약(郭沫若)은 '고대문자지변증적발전(古代文字之辯證的發展)'에서 "은나라의 금문은 글자수가 많지 않은데 이것은 명문이 있는 청동기의 숫자가 적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은 은나라 말경의 작품이다."라고 하였다. 주나라에 이르러 명문은 200내지 300자에 이르게 되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모공정(毛公鼎)으로 499자에 달하고 있다.
고대에 이르러 서체의 풍격이 여러방향으로 변화하였으나, 문자의 모양은 점차 그림의 형태를 벗어나서 성숙되어 갔다. 은대 금문과 비슷한 서고전기의 금문의 풍격은 그림의 맛이 있으나, 후기에 이르면 큰 변화가 생겨 글자수가 점차 많아지면서 획은 고르고 획일적으로 새겨진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산씨반(散氏盤)이 있다. (글자 하나하나가 각기 한칸씩을 차지하는 이 변화는 후세에, 小篆에 큰 영향을 끼쳤다.) 춘추전국시대에 와서 지나칠 수 없는 것이 조서(鳥書)인데, 새를 그린 화문(花紋)이며 필서도 새의 깃모양으로 썼다. 이는 기원이 은대까지 올라가나 춘추전국시대가 전성기이며 병기(兵器)의 문식(紋飾)에 주로 쓰였다
서체 : 은대의 금문은 대다수가 문자와 그림의 중간쯤 되는 글자체였다. 이 글자는 어떤뜻을 가지고 글자위에 덧붙여 통통하게 그려 넣었으므로 글자의 모양은 그림에 가깝고, 획의 굵기도 많이 다르다.
종정문의 명문은 음각으로 낙관을 하였으며 양각으로 본문을 처리하였다. 종정의 주물은 시간과 지역에 따라 다르며 글씨체도 각각 같지 않다.이중에는 갑골의 상형문자나 고문 ,육국(六國)의 이문(異文)들도 섞여 있다.
여기에 새겨진 글씨는 모두가 주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필,획이 갑골문에 비하여 장중하고 응축되어 있으며, 곡선과 직선의 변화도 비교적 많아서 자유로운 풍격을 나타내고 있다. 짜임새를 보면 획들이 서로 호응하고 있으며, 크고 작은 획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고 행간과 글자들도 비교적 정제된 맛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을 볼 때 갑골문 보다는 표현형식이 풍부하지만 명문의 지위와 크기의 제한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배치가 빈틈이 없으며 빙 둘러 채우고 있다. 전해 내려오는 종정문을 보면 편안하고 아름다운 느낌을 주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정밀한 기교를 엿볼 수 있다. 주나라 초기의 명문을 분석하여 보면 필획이 갑골문보다 약간 거칠면서 글씨체는 은대의 것을 답습하고 있다. 성왕(成王)과 강왕(康王) 이후의 명문에 이르면 기교의 발전은 더욱 성숙하여져 점획이 둥글고 글씨체도 온화한 맛을 내며 골격도 갖추어져 비교적 자유스러운 맛을 개척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은 모공정(毛公鼎)과 산씨반(散氏盤)이다. 특히 산씨반은 가로로 쓴 것이든 혹은 세로로 쓴것이든 간에 모두 아주 고르게 배열되어서 한글자 한글자가 그 획이 많든지 적든지 간에 모두 각기 네모칸 하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는 후에 전서(篆書),예서(隸書),해서(楷書)를 쓰는 형식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3) 대전(大篆)
대전
대전은 주나라 선왕(宣王)의 태사인 주가 만든 것인데 그 후에 서진에서 성행 하였고 후대의 사람들은 진나라가 통일한 후의 서체인 소전(小篆)과 구별하고 있다.그런고로 태사 주가 지은 서체를 대전(大篆)이라고 이름 붙였다. 대전의 서체는 전해져 내려오는 작품이 아주 적은데, 일반적으로 석고문(石鼓文)과 조초문이 대표적인 것이다.
조초문은 전국시대 진나라의 석각이다. 이는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공격하고 정벌하던 일을 서술한 것인데, 그 내용은 초나라 왕이 여러 번 맹약을 어기어 진나라 사람이 그를 저주한 것이다. 붓의 획이 빼어나게 힘이 있고 붓을 거둘 때 대부분이 뾰족하였다. 그리고 글자체의 크고 작은 변화가 한결같지 않았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있었으며 서사체의 맛이 있다.
이외에 근대에 와서 진공구가 발견하였는데 그 모양이 단정하고 장대하며 유려하였다. 또 그 서체는 석고문이나 조초문과 대략 비슷하였는데, 모두 진나라가 통일한 후의 소전체의 전신이다. 후세에 대전체를 배우는 사람으로는 民國初의 오창석(吳昌石)이 있으며, 그가 석고문을 임서한 것이 가장 유명하다. 그러나, 오씨는 절대로 석고문을 충실하게 임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양근손(楊近孫)의 기초 위에서 더욱 발전시켜 석고문을 신의 경지에까지 들어 가게 하였고 심지어는 서화(書畵)와 전(篆),각(刻)을 일체로 융화해 석고의 대전체(大篆體) 필법을 관통하여 일종의 건실하고 뛰어난 예술적 풍모를 이룩하였다.
1)석고문: 석고문(石鼓文)은 주(周)나라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중국 최초로 돌에다 새긴 문자다. 이것은 열 개의 북모양을 한 돌에다 주문(籌文)을 사용하여 사언시(四言詩)를 새겨 놓은 것으로 한 개의 크기는 3척여 정도 되며,옛날에 네모난 것은 비(碑)이고 둥근 것은 갈(碣)이라 하였는데, 석고는 원형이었고, 내용은 전국시대 진나라 군주가 사냥을 즐겼던 상황을 적어 놓았기 때문에 엽갈(獵碣)이라고도 한다. 원문은 약 700자 정도인데 현존하는 송탁본(宋拓本)에는 465자가 있다.
석고의 높이는 40cm에서 90cm로 서로 다르면 둘레는 평균 210cm이다. 석고마다 70자의 운문(韻文)이 새겨져 있는데, 끊임없는 자연적인 마멸과 인위적인 침삭으로 지금은 겨우 300자쯤이 남아 있다. 글자 모양은 아래위로 긴 것이 많고 정방형도 있는데, 결구가 뛰어나고 행간도 정리되어 있으며 횡으로도 배열이 같다. 석고문의 서법은 온화하면서도 그윽하고, 필세는 웅건하면서도 두텁고, 소박하면서도 자연미가 있다. 과거에 어떤 사람은 "석고문은 서예가에 있어서 제일 의 법칙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말할 정도로 중요한 서법이다.
석고문은 당초 협서성의 서쪽 서봉상(西鳳翔)에서 출토 되었다.이것을 봉상부자묘(鳳翔夫子廟)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오대(五代)의 난리에 한 번 잃어버렸다. 송(宋)대에 들어와 다시 이것을 수집하여 봉상부학(鳳傷府學)의 서쪽 방에다 보관하였다. 송(宋) 휘종(徽宗) 대관(大觀,1107~1110) 년간에 봉상(鳳翔)으로부터 개봉(開封)으로 옮겨 보화전(保和殿)에 보관하였다. 그러다가 금(金)나라가 송(宋)을 물리친 후에 이것을 다시 북경으로 옮겼으며, 청(淸)나라에 와서는 국자감(國子監)에 보관시켰다. 석고문의 연대에 대하여 장회관(張懷瓘)은 주선왕(周宣王)이라고 하였으며, 한유(韓兪)도 <석고가(石鼓歌)>를 지어 주선왕 때의 작품이라고 하였다. 위응물(韋應物)도 <석고가>를 지어 이것은 주문왕(周文王)때 짓고 주선왕(周宣王) 때 제작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송(宋)나라 정초(鄭樵) 만이 유독 진(秦)나라의 것으로 보고 있다. 사실 석고문은 진양공(秦襄公) 8년(BC 763)의 작품이라는 것이 거의 정설로 되어 있으며 자세한 것은 곽말약(郭沫若)의 <석고문 연구(石鼓文硏究)>를 참고하기 바란다.
석고문이 비록 사주(史籌)에 의하여 쓰여진 작품이 아니지만 글씨체는 소전(小篆) 이전의 형태를 벗어나지 아니한 대전(大篆)의 글씨체에 속한 것으로, 이 분야에서의 유일한 법칙을 간직하고 있다. 석고문의 글씨체는 상당히 규율적이면서 필획이 굳건하고 묵직하며 짜임새도 매우 엄밀하면서 변화가 있다. 장회관(張懷瓘)은 <서단(書斷)>에서 이것을 칭찬하여 말하길 "자체의 형상이 뛰어나 옛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한 글자 한 글자가 주옥 같으며 맥락이 통하고 있어 소전의 조종이 되고 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평을 참고로 하면 석고문의 글씨체와 형상이 매우 훌륭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또한 구슬과 같은 둥근 획이 많고 생동감이 넘치는 획으로 점철되어 있어 , 갑골문(甲骨文)과 종정문(鐘鼎文)의 뒤를 잇고 이사(李斯)의 소전에게는 종주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당대의 서예가인 구양순(毆陽詢), 우세남(虞世南), 저수량(楮遂良)등은 물론이고 송(宋) 이후의 여대 서예가들이 모두 이것을 추종하여 전서의 모범으로 삼고 있다.
2)조초문: 전국시대 진나라의 석각이다. 이는 진과 초과 서로 공격하고 정벌하던 일을 서술한 것인데 진나라 사람이 초왕을 저주하는 내용이다. 붓의 획이 빼어나게 힘이 있고, 붓을 거둘때 대부분이 뾰족하다. 글씨체의 크고 작은 변화가 한결같지 않았고 자연스러웠으며 서사체(그림 그리듯 쓰는 서체)의 맛이 있다. 서체는 석고문이나 조초문이나 대략 비슷하였는데, 모두 진나라가 통일한 후의 소전체의 전신이다 .
◆(4) 소전(小篆)
소전
소전이란 진시황때 이사가 대전의 복잡하고 번잡한 획들을 간단하게 만든 글씨체의 하나로 갑골(甲骨), 종정(鐘鼎), 석고(石鼓)와 구별하여 진전(秦篆)이라고도 부른다. 한(漢)나라 허신(許愼)은 <설문해자(說文解字)>의 서문에서 "7개국의 언어가 다르고 문자의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승상인 이사가 이것을 정리하여 하나로 만들었다. 이사는 <창힐편>을, 중거부령(中車府令) 조고(趙高)는 원력편(爰歷篇)을 <태사령(太史令)>
호무경(胡毋敬)은 <박학편(博學篇)>을 각각 지었는데 모두 대전(大篆)의 복잡한 것을 생략하고간단히 하였으니 이를 소전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장회관(張懷瓘)도 <서단(書斷)>에서 "소전이라는 것은 진시황때 승상 이사가 지은 것으로 대전과 주문의 획을 생략하고 간단히 하였으니이를 진전(秦篆)이라고도 한다."라고 하였다.이사의 소전은 결코 당시 사회에서 통용되었던 문자를 완전히 개조한 것은 아니다. 다만 복잡하고 통용이 되지 않는 문자를 통일시키고 진(秦)나라의 문자와 합치 되지 않은 것을 폐기하여 실제에 적용시키고 쓰기에 간편하게 만들었을 따름이다. 번잡한 것을 고쳐 간단하게 한 것은 당시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여 단행한 일대의 중대한 개혁이다. 동주(東周)이후 제후들은 군웅할거 하여 각자의 정치 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방언(方言)이 생기게 되었다. 진나라가 통일을 한 이후에도 이러한 현상은 계속되어 정치를 실현하고 교화를 함에 많은 지장을 초래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통일시켜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진시황은 이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문자 통일에 대한 일대혁신을 단행하여 대전(大篆)의 복잡한 것을 간단하게 한 소전(小篆)을 정식 문자로 채택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정은 한자(漢字)의 규범화를 촉진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소전의 형체는 둥글면서도 정제되어 있고, 둥글고 모나고 곧바른 획들은 모두 법에 맞으며, 붓을 씀에 있어서는 마치 붓 속에 철을 품고 쓴 것 같으며, 붓의 움직임은 봄에 누에가 실을 토해내는 듯하여 모난 것을 버리고 둥근 획을 취하고 있다. 소전은 또한 상당히 규범적이고, 부수(部首)와 변이 일정한 법칙을 가지고 있으며, 필.획의 둥근 것이나 직선이 모두 단선으로 되어 있고, 굵고 가늠이 변하지 않으며, 비교적 둥근 획으로 간격들이 고르고, 조금 길쭉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글자의 상반부는 비교적 빽빽하고 하반부는 늘씬하고 여유가 있어 부드러운 가운데도 강함을 볼 수 있어 상쾌하고 굳건한 느낌을 준다.
1) 서체 : 정사각형에서 '장방형'이 되었고 획도 시종 굵기가 같으며, 사이가 포백이 고르고 형태는좌우대칭을 이루며, 중심을 잡으면 평형을 이룬다.
2) 작가 작품 : 소전으로 내려오는 작품은 대부분 비각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진시황의 공덕을
찬양 기록한 , 태산각석(泰山刻石) 낭아대각석(廊邪臺刻石)등이 있는데, 모두 이사(李斯)의 글씨이다. 한대에서는 해서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전서는 비석이나 현판에 사용되었다. 전문이 전서로 된 '개모묘석궐명', '숭산소실석궐명', '사삼공산비', '원안비', '원창비'등이다. 그 후 오대시대, 송대, 원대,명대를 거쳤지만 이 시대는 전서의 몰락기였다. 그러다가 금석학과 고증학이 발전한 청에 이르러 부흥기를 맞는데, 등석여(鄧石如)가 나와서 후세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었다.
태산각석(泰山刻石)
이것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동쪽을 순회하면서 태산에 올라갔을 때 당시 승상이었던 이사 등이 진나라의 덕을 칭송하면서 세운 비로 낭야대각석 역산비(繹山碑)와 더불어 이른바 '소전기삼석'(小篆期三石)의 하나이다. 원석은 청나라 건륭 5년에 부서져 지금 열자가 남아 있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탁본은 송 시대에 탁본된 146자이다. 원필로서 자체가 아래위로 길며, 풍격이 혼후하고 아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