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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이 소장했던 그림과 안견의 작품으로 보는 조선

작성자古方|작성시간12.08.09|조회수1,225 목록 댓글 0

안평대군이 소장했던 그림과 안견의 작품으로 보는 조선

 

 

안평대군은 조선 세종의 3남으로 그 명필로 이름을 남긴사람입니다.

 

안평대군

이름 용(). 자 청지(). 호 비해당()·낭간거사(매죽헌(). 1418년 세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428년(세종 10) 안평대군에 봉해졌고, 좌부대언 정연의 딸과 혼인하였다. 1430년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쌓았다. 문종 때 조정의 배후에서 실력자로 역할을 하였으며, 1438년 야인을 토벌하여 황보인, 김종서 등 주요 문신들과 친밀하게 지냈다. 인사 행정기관인 황표정사()를 장악하여 둘째 형 수양대군의 세력과 은연히 맞서 있었다. 그러나 1453년(단종 1) 세종의 둘째아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꾸며 김종서() 등을 죽일 때 반역을 도모했다 하여 강화도로 귀양갔다. 그 뒤 교동도()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36세를 일기로 사사()되었다. 시문()·그림·가야금 등에 능하고 특히 글씨에 뛰어나 당대의 명필로 꼽혔다.

 

 

아래의 글은 신숙주가 남긴글 입니다. 동문선에 등재 되어 있는 글로 제목은 畵記 입니다.

신숙주의 문집 보한재집에서 발췌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제목은 보한재집에 있다는 것과 같읍니다.

안평대군의 호는 비해당 낭간거사 매죽헌 등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글에서는 비해당을 쓰고 있읍니다.

안평대군은 그당시 고화 콜렉션을 하였던 모양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 콜렉션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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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제82권 / () / 화기(畵記)  / 신숙주(申叔舟)

 

비해당(匪懈堂)이 서화를 사랑하여, 남이 한 자의 편지 한 조각의 그림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후한 값으로 구입하여 그 중에서 좋은 것을 선택하여 표구를 만들어 수장하였다. 하루는 모두 내어서 신숙주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나는 천성이 이것을 좋아하니 이 역시 병이다. 끝까지 탐색하고 널리 구하여 10년이 지난 뒤에 이만큼 얻게 되었는데, , ()이란 것은 완성되고 훼손되는 것이 때가 있고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운수가 있으니, 오늘의 완성이 다시 후일에 훼손될 것을 어찌 알며, 그 모이고 흩어지는 것도 역시 기필할 수 없는 것이다. 옛날에 한창려(韓昌黎)가 독고생(獨孤生)의 그림에 기()를 하여 스스로 구경하고자 하였기에 나도 짐짓 시를 지어 기록하였으니, 그대는 나를 위하여 기를 지으라.” 하였다. 내가 가만히 들으니 장돈간(張敦簡)의 집에 수장된 그림이 겨우 10여 축밖에 되지 않는데도 오히려 백낙천(白樂天)이 이를 위해 기를 지었다 하는데 하물며 고금을 정선하여 수백 축에 이르렀으니 기를 지어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수장품을 보니 동진(東晋)에서 한 사람을 얻었으니 이른바

고개지(顧愷之). 소자(小字)는 호두(虎頭)이며 널리 배워 재주가 있으며, 그림 역시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으나 스스로 감추고 아끼어 세상에서 그 그림을 보기가 드물다. 지금 각본(刻本)의 수석도(水石圖) 하나가 있는데, 그 정화는 얻어 볼 수 없으나 법도는 아직도 역력히 남아 있어 마치 모장(毛嬙)이나 서시(西施)가 늙어도 맵시가 남아 있는 것과 같다.

()에서 두 사람을 얻었으니,

오도자(吳道子)그림을 잘 그려서 이름이 천하에 떨쳐 한퇴지(韓退之)의 문()과 두자미(杜子美)의 시와 더불어 삼절(三絶)로 병칭되었다. 지금 불화(佛畵) 둘과 위에 소동파(蘇東坡)가 손수 찬을 쓴 화승(畵僧) 둘이 있으며,

왕유(王維)산수(山水)에 정하여 천기(天機)가 이르러 가는 곳마다 누구도 미칠 수 없으니, 더욱 시에서 얻은 것이다. 지금 산수도(山水圖) 하나가 있는데, 물과 산이 다 천연하여 인위적인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에서 여섯 사람을 얻었으니

곽충서(郭忠恕)누관(樓觀)과 대사(臺榭)를 잘 그려 다 고상하고 옛스러워 뛰어나다. 지금 설제강행도(雪霽江行圖) 하나가 있으니, 큰 배가 함께 가는데 인물과 기용(器用)이 정밀하여 비할 데 없으며, 위에 송휘종(宋徽宗)의 어필(御筆)이 붙은 고각임강도(高閣臨江圖) 하나가 있는데, 유사(儒士)가 도인(道人)과 함께 조각배를 타고 각() 아래로 지나가고 사람이 난간에 기대어 익히 바라보는데, 풍치가 쇄략하여 그림인가 실경인가를 깨닫지 못할 정도이며,

이공린(李公麟)자호(自號)는 용면거사(龍眠居士)인데 널리 듣고 정밀하게 알았으며, 그 그림은 뜻을 세우는 것으로 위주하는데 더욱 인물을 잘 그렸다. 지금 영척장가도(寗戚長歌圖) 하나가 있는데, 송휘종(宋徽宗)의 어필로 된 제()에 이르기를, “형기(形氣)가 소쇄하여 그림을 펼쳐놓고 구경할 때마다 남산 백석(白石)의 소리가 어렴풋이 사람의 귀에 들린다.” 하였으며,

소동파(蘇東坡)지금 진서(眞書)로 쓴 조주비(潮州碑) 인본(印本) 하나와 풍죽(風竹)ㆍ설죽(雪竹)ㆍ춘죽(春竹)도가 각각 하나씩 있는데, 전아하고 표일하여 진실로 화가의 격 밖에 있으며,

문여가(文與可)묵죽(墨竹)을 잘하며 소동파와 더불어 가장 서로 친하였다. 지금 풍죽도(風竹圖) 하나와 순죽도(筍竹圖) 넷이 있는데, 큰 줄기가 곧게 빼어나서 만 척(萬尺)의 기세가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운당()이라는 것인가 보다.

곽희(郭熙) 산수와 한림(寒林)으로 한 시대에 독보적이었다. 지금 산수도 둘이 있는데, 하나는 춘경(春景)으로 산장(山莊)에서 잔치를 파하고 말을 건널목에 세웠으며, 하나는 추경(秋景)으로 강촌에서 고기를 낚기 위하여 낚싯대를 쥐고 홀로 앉았으며, 삭풍표설도(朔風飄雪圖) 하나, 하경청람도(夏景靑嵐圖) 하나, 수석도(水石圖) 하나, 풍우도(風雨圖) 하나, 강설도(江雪圖) 하나, 재학도(載鶴圖) 하나, 고목평원도(古木平遠圖) , 산수도 하나가 있는데, 다 웅장하고 기이하여 필세가 날아 움직이며, 평사낙안도(平沙落雁圖) 하나, 강천모설도(江天暮雪圖) 하나가 있다. 그 서릿바람에 국화가 비치는데 거문고를 안고 멀리 바라보는 것이나, 눈이 갠 장강에 외로운 배를 타고 홀로 낚시질하는 것이 각각 한가하고 방랑한 취미가 깃들었다. 임정도(林亭圖) 하나, 급우도(急雨圖) 하나가 있는데 다 선면(扇面)이며, 투우도(鬪牛圖) 둘이 있는데, 힘차게 밀고 대드는 품이 몹시 기력이 있어 보이며,

최각(崔慤)화조(花鳥)를 잘하여 한때에 추앙을 받았다. 지금 추화야압도(秋花野鴨圖) 하나가 있는데, 바람과 이슬이 처량하고 터럭과 깃이 스산하다.

 

()에서는 21명의 것을 얻었는데,

조맹부(趙孟頫)서화가 무리에 뛰어났다. 지금 행서(行書) 26점과 묵죽 둘이 있으며,

선우추(鮮于樞)조맹부와 더불어 함께 글씨를 배웠는데, 지금 초서(草書) 여섯이 있다.

왕공엄(王公儼)화초(花草) 금수(禽獸)를 잘하였는데, ()만 취하여 이루었으나 저절로 생기가 있다. 목화도(木花圖) 열이 있는데, 송이가 모두 만개한 가운데 새들이 서로 우짖으며, 화초도 넷과 과목도(果木圖) 넷이 있는데, 꽃과 열매와 초충(草虫)이 선명하고 생동하며, 패하노자도(敗荷鷺) 하나, 황응도(黃鷹圖) 하나, 해청도(海靑圖) , 도화요자도(桃花鷂子圖) 하나, 아골도(鴉鶻圖) 하나가 있는데, 혹은 깃을 거두고 몸을 우뚝 세웠고, 혹은 날아가며 날쌔게 치닫는 형상이 각각 핍진하다.

사원(謝元)과 진의보)는 역시 화조(花鳥)를 잘 그렸다.

사원지금 해당절지도(海棠折枝圖) 하나가 있는데, 정결하고 간략하여 조화(造化)에 방불하며,

진의보(陳義甫지금 매화도(梅花圖) 하나, 행화도(杏花圖) 하나가 있는데, 구슬 같은 꽃망울이 햇볕에 어울리고 진기한 새들이 목청을 뽑아 우짖는다.

유백희(劉伯熙)ㆍ이필(李弼)ㆍ마원(馬遠)ㆍ교중의(喬仲義)ㆍ유도권(劉道權)ㆍ안휘(顔輝)ㆍ장언보(張彦甫)ㆍ고영경(顧迎卿)ㆍ장자화(張子華)ㆍ나치천(羅稚川)은 모두 산수로 유명하였다.

유백희(劉伯熙필세가 호방하고 건장하며, 기암(奇巖)과 노목(老木)에 장기(長技)가 있는데, 지금 강정설제도(江亭雪霽圖) 하나, 장림설만도(長林雪滿圖) 하나, 춘효연람도(春曉烟嵐圖) 하나, 장강도(長江圖) 하나가 있다.

이필(李弼은 필세가 정미하여 누각(樓閣)과 인물에 장기가 있는데, 지금 등왕각도(滕王閣圖) 하나, 화청궁도(華淸宮圖) 하나, 소상팔경(瀟湘八景) 각각 하나, 이십사효도(二十四孝圖) 열 둘, 고목도(古木圖) 하나, 현애준각도(懸崖峻閣圖) 하나가 있다.

마원(馬遠필세가 고상하고 우아하여 더불어 견줄 사람이 없을 정도인데, 지금 장송모사도(長松茅舍圖) 하나, 계거관분도(溪居灌盆圖) 하나가 있다.

교중의(喬仲義)한 자의 산과 한 치의 나무도 법도에 벗어나지 아니하였는데, 지금 염채산수(染綵山水) 여덟이 있다.

유도권(劉道權더욱 농담(濃淡)을 잘 하였으며, 지금 수묵산수도 하나가 있다.

안휘(顔輝)암석(巖石)과 인물을 잘 그렸는데, 지금 산중간서도(山中看書圖) 하나, 유림채약도(幽林採藥圖) 하나, 화불(畵佛) 셋이 있다.

장언보(張彦甫)지금 계산우과도(溪山雨過圖) 하나, 절안도(絶岸圖) 하나, 장림권운도(長林捲雲圖) 하나, 수묵운산도(水墨雲山圖) 하나, 예중(倪中)의 시가 있는 송석도(松石圖) 하나, 게해사(揭奚斯)의 시가 있는 그림 일곱이 있는데, 산은 파랗고 구름은 하얗고 암담(暗淡)하고 평원(平遠)하여 다 비범한 취미가 있다.

고영경(顧迎卿)지금 청산백운도(靑山白雲圖) 하나가 있는데, 유심(幽深)하고 한가하여 매우 고상한 풍치가 있다.

 장자화(張子華)지금 소림소산도(疏林蕭散圖) 하나, 산수도 하나가 있고, 나치천은 지금 설산도(雪山圖) 하나가 있는데, 각각 절묘한 경지에 이르러 기격(氣格)이 청신하다.

화마(畵馬)로 유명한 이는 주랑(周朗)과 임현능(任賢能)인데,

주랑(周朗지금 희마도(戱馬圖) 하나, 목마도(牧馬圖) 하나가 있고,

임현능(任賢能지금 견마도(牽馬圖) 하나가 있다.

설창 부도(浮屠)로서 난죽(蘭竹)을 잘 그렸는데, 지금 광풍전혜도(狂風轉蕙圖) , 현애쌍청도(懸崖雙淸圖) 하나가 있다.

철관은 왜승(倭僧)으로 산수를 잘 그렸는데, 실제의 모습과 같게 하는데 뜻을 두었으나, 호방하고 표일한 기운이 적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승기(僧氣)가 있다고 비평하였다. 그러나 이로써 가볍게 여길 수 없으며, 지금 산수도 둘, 고목도(古木圖) 둘이 있다.

식재(息齋)ㆍ진재(震齋)는 그 이름이 유실되었다. 그러나 식재의 대그림과 진재의 용그림은 다 고수였다.

식재 지금 채죽(彩竹) , 금성도(金聲圖) 하나가 있고,

진재 지금 운룡도(雲龍圖) 하나가 있다.

 

송민(宋敏)ㆍ왕면(王冕)ㆍ섭형(葉衡)ㆍ지유(知幼)는 어느 시대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송민은 지금 묵죽도(墨竹圖) 하나가 있는데 풍격이 특절하여 천하에 짝이 없고,

왕면지금 묵매도(墨梅圖) 다섯이 있는데, 각각 시가 있어 운치가 청아하고 서법(書法)이 훌륭하여 삼절(三絶)이라 칭할 만하며,

섭형(葉衡)지금 수죽도(脩竹圖) 하나가 있는데, 역시 시가 있어 매우 청절(淸絶)하고,

지유는 지금 묵죽도 둘이 있는데 역시 가작이다.

 

우리 조정에서 한 사람을 얻었으니,

안견(安堅)이다. 자는 가도(可度), 소자(小字)득수(得守)이니, 본래 지곡(池谷) 사람이다. 지금 호군(護軍)으로 있는데, 천성이 총민(聰敏)하고 정박(精博)하며 고화(古畵) 많이 열람하여, 다 그 요령을 터득하고 여러 사람의 장점을 모아서 모두 절충하여 통하지 않는 것이 없으나, 산수가 더욱 그의 장처로써 옛날에 찾아도 그에 필적할 만한 것을 얻기 드물다. 비해당(匪懈堂)을 따라 교유한 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그의 그림이 가장 많다. 지금

 

팔경도(八景圖) 각각 하나, 강천만색도(江天晩色圖) 하나, 절안쌍청도(絶岸雙淸圖) 하나,

분류종해도(奔流宗海圖) 하나, 천강일색도(天江一色圖) 하나, 설제천한도(雪霽天寒圖) 하나,

황학루도(黃鶴樓圖) 하나, 등왕각도(滕王閣圖) 하나, 우후신청도(雨後新晴圖) 하나,

설제여한도(雪霽餘寒圖) 하나, 경람필련도(輕嵐匹練圖) 하나, 제설포겸도(霽雪舖縑圖) 하나,

수국경람도(水國輕嵐圖) 하나, 강향원취도(江鄕遠翠圖) 하나, 기속생화도(起粟生花圖) 하나,

춘운출곡도(春雲出谷圖) 하나, 유운포학도(幽雲蒲壑圖) 하나, 광풍급우도(狂風急雨圖) 하나,

규룡반주도(虯龍反走圖) 하나, 장림세로도(長林細路圖) 하나, 은하도괘도(銀河倒掛圖) 하나,

절벽도(絶壁圖) 하나, 묵매죽도(墨梅竹圖) 하나, 수묵백운도(水墨白雲圖) 하나, 산수도 둘,

노안도(蘆雁圖) 하나, 목화도(木花圖) 둘, 장송도(長松圖) 하나가 있다

 

 또 고화(古畵)로 누구의 작품이라 이름하기 어려운 것이 열하나인데, 거북 하나, 배꽃 하나, 살구꽃 하나, 송학(松鶴) 하나, 화압(花鴨) 하나, 사우(四牛) 하나, 왕발(王勃)의 사적에 대한 인본(印本)이 하나, 후원산수(後園山水) 하나, 아골(鴉鶻) 하나, 누각(樓閣) 하나, 고목산수(古木山水) 하나이다.

 

모두 오대(五代)에 걸쳐 35명을 얻었는데, 산수를 그린 것이 84, 조수(鳥獸) 초목을 그린 것이 76, 누각 인물을 그린 것이 29점이며, 글씨가 또 33점으로 합하면 2 22축이 된다. , 독실한 애호가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처럼 많이 수집할 수 있겠는가. 나는 비록 일찍이 이 방면을 해득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그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다. 무릇 그림이란 것은 반드시 천지의 조화와 음양의 운행을 궁구하여, 온갖 물건의 정과 온갖 일의 변화가 가슴속에 서린 뒤에 붓을 들고 종이에 대면 정신이 모이고 생각이 합치되어, 산을 그리고자 하면 산이 보이고 물을 그리고자 하면 물이 보이며, 무릇 그리고 싶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 물건이 보일 때에 붓을 휘둘러 그에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슴에 서린 물()의 가형(假形)을 통하여 그 안에 있는 진상(眞狀)을 빼앗을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이 화가의 법이다. 이를테면 마음에서 터득하고 손에 응하면, 마음과 손이 서로 잊어버리고 몸은 물()과 더불어 화()하여, 조용하고 단아하여 마치 조화가 본래 단분(丹粉)의 밖에 있는 것이라서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것을 구경하는 자가 능히 저의 충담(沖澹)하고 고아(高雅)한 것으로써 나의 성정을 즐기고, 그림속의 호건(豪健)하고 진려(振厲)한 것으로써 나의 기운을 기르면 어찌 보익됨이 작다 하겠는가. 더구나 물의 이치를 정밀히 연구하며 널리 듣고 많이 아는 것에 이르러서는 장차 시()와 더불어 공을 같이 할 것이니, 모르겠구나. 세상 사람이 과연 여기에 미치는 자가 있을런지.

  --------------------------------------< 이상 인용: 고전db>----------

 

1. 안평대군이 수집한 서화는 모두 222개입니다. 동진/당/송/원/명(?조선) 의 5대 에서 얻었읍니다.

    이 한대목에서도 가슴이 뛰는 것을 느낍니다.

    五代라는 표현을 쓰면서 동진/당/송/원/조선의 역사적 기년이 이어지는 관점에서

   오대 입니다.    동진/당/송/원/명 이라고 하는 익숙한 기년개념의 5대로 보이는데 신숙주는 명이

   들어갈 것 같은 자리에 我朝 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이 아조가 조선인지 명인지는 모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그것이 조선이라고 알고있읍니다. 신숙주가 조선인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가 알고있는것 처럼 조선이라는 나라이름이  1392년에 세워진것인가?

    신숙주의 글들을 읽어보면 그는 조선이 1392년에 세워진 것이 아닌듯이 말하는 것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하여튼... 이글에서는  조선이 선지 얼마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안평대군이 수집을

    한것이라 그런가 조선의 그림은 안견의 것만 나옵니다.    

     이 것은 원(고려)을 이은것이 조선이라는 뜻이기도 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때 이 송/원은 고려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역으로 비슷한 시기의 신라 고려는 진정 수집할

    가치가 있는  아무런 그림/글씨도  남기지 못한 나라 였을까? 자기나라의 것은 하나도 없읍니다.

    고서화 수집을 하면서 고려 신라의 것은 하나도 등장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도 수상합니다.

    고려 조선이 서화에 무지하여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면 안평은 어떠한 문화적 토양위에서

   서화에 대한  감식안을 가졌을 것인가? 사람은 아는 만큼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안평대군은 서화가 풍부하고 이러한 화제가 풍성한 조선(대륙)에서 자라서 성장하여 심미안이

     발달 한 것입니다. 또한  조선이 정말로 한반도 구석에 있는 비루한 나라라면 어떻게 저 많은

    유명한 그림을 수집할 수 있었을까?   일부 송나라의 그림은 송휘종의 어필이 있는 매우 희귀한

    것도 있읍니다. 그러한 것을 조선에서 쉽게 구할수 있었을까? 물론 안평대군의 신분이 왕족으로써

    그러한 위치를 이용해 구할수 있었겠지만 그게 그렇게 쉬웟을까?

     명나라의 왕족 귀족의 수집도 있었을 테고 또는 그 작가들의 후손이 가보로 지키거나 해서 쉽게

     구해지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조선의 경우에도 수많은 왕족과 귀족이 있었을 것이고

    그들로 수집하는 것이 있엇을 터 입니다.

     왕족이라해서 쉽게 구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안평대군은 명/조선이 같이 존재하는 그런 상태에서 그림을 구한 것이 아니고 

     대륙의 조선에서 그곳에 산재해 있던 그림을 모은 것으로 보입니다.

 

2. 안평대군이 수집한 목록중에 안견이 그린 목록이 눈길을 끕니다.

    안견은 안평대군(비해당)과 친분을 쌓아서 그와 교류을 많이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한 이유로 안견의 그림을 많이 소장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현재 알려진 안견의 작품은 몽유도원도가 전해지며 ,

    전칭작품(傳稱作品)으로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외에 기록으로 전해지는그의 작품으로는 

    <비해당25세진〉〈이사마산수도(李司馬山水圖)〉〈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팔준도(八駿圖)〉

    <임강완월도(臨江玩月圖)〉〈묵죽도(墨竹圖)〉〈적벽도(赤壁圖> 입니다.

        

    그러나 위의 신숙주의  기록에서는 안견이 남긴 작품은 더있읍니다.      

    " 팔경도(八景圖) 각각 하나, 강천만색도(江天晩色圖) 하나, 절안쌍청도(絶岸雙淸圖) 하나,

    분류종해도(奔流宗海圖) 하나, 천강일색도(天江一色圖) 하나, 설제천한도(雪霽天寒圖) 하나,

    황학루도(黃鶴樓圖) 하나, 등왕각도(滕王閣圖) 하나, 우후신청도(雨後新晴圖) 하나,

    설제여한도(雪霽餘寒圖) 하나, 경람필련도(輕嵐匹練圖) 하나, 제설포겸도(霽雪舖縑圖) 하나,

    수국경람도(水國輕嵐圖) 하나, 강향원취도(江鄕遠翠圖) 하나, 기속생화도(起粟生花圖) 하나,

    춘운출곡도(春雲出谷圖) 하나, 유운포학도(幽雲蒲壑圖) 하나, 광풍급우도(狂風急雨圖) 하나,

    규룡반주도(虯龍反走圖) 하나, 장림세로도(長林細路圖) 하나, 은하도괘도(銀河倒掛圖) 하나,

    절벽도(絶壁圖) 하나, 묵매죽도(墨梅竹圖) 하나, 수묵백운도(水墨白雲圖) 하나, 산수도 둘,

    노안도(蘆雁圖) 하나, 목화도(木花圖) 둘, 장송도(長松圖) 하나가 있다"

 

    와 같이 더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읍니다. 이 작품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있을까?

    아니면 모두 사라진 것일까? 왜 우리의 기록실은 이러 작품이 알려지지 않았을까?

       

       이중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이 황학루도등왕각도 적벽도 입니다.

       이 누각들은 흔히 그당시 명나라가 있었다는 대륙에 있던 역사적으로 유명한 누각들입니다.

       수많은 명사들이 이에대한 시와 그림을 남기고 있읍니다. 현재의 시각으로

       황학루는 양자강변 남쪽의 무창에 있고 등왕각은 강서성의 남창이란 곳에 있읍니다.

       안견은 이 그림을 상상으로 그렸을까?  아니면 직접 안평대군을 모시고 다니면서 그린것일까?

      

       아마도 상상으로는 그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상상으로 등왕각 황학루를 그려놓고 좋아라 하는 안평과 안견 신숙주가 상상이 됩니까?

       터무니 없는 일입니다. 상상화가 아닙니다.

       지금 유명한 화가에게  한번도 가보지 않은 명승지 한곳을 말하고 그리라고 명령하라해서

       그릴수 있을까?  말이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안평대군(비해당)과 안견은 조선의 땅인 그곳에서 황학루와 등왕각을 유람하면서

      그린 것이 틀림없읍니다.

       또한 적벽도를 그렸는데 그 적벽을 가보지도 않고 상상으로 또는 말을 듣고 또는 남이 그린

       그림을 보고 그렸다면 조선의 화가들은 모두 화가라기보다는 만화가 입니다.

 

3. 위의 기록에는 없지만 역시 전해지는 그림으로 소상팔경도가 있읍니다.

    아래 그림은 안견의 그림이라고 전해지는 소상팔경도 입니다. (안견작이라는 증거가 없는 상태)

 

1첩, 산시청람(山市晴嵐), 푸른기운의 산간 마을                        2첩, 연사모종(煙寺暮種), 안개낀 산사 황혼의풍경소리

 

 3첩, 어촌석조(漁村夕照), 어촌에 물든 저녁 노을                      4첩, 원포귀범(遠浦歸帆), 멀리 포구로 돌아오는 배

 

 

 5첩, 소상야우(瀟湘夜雨) 소상강에 내리는 밤비                        6첩, 동정추월(洞庭秋月), 동정호에 비치는 가을 달

 

7첩,  평사낙안(平沙落雁), 모래밭에 내려앉는 기러기                   8첩, 강천모설(江天暮雪), 저녁 무렵 산야에 내린 눈

 

 소상 팔경도는 현재 대륙에도 있으나 이것과 다른 풍경입니다.또 다른 그림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화가마다 다르게 그릴 것입니다.

 소상팔경도는 많은 작가가 그렸읍니다. 이러한 그림을 상상으로 그렸다는것이 가능 할까?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는 소상팔경시첩과 짝을 이루는 작품으로 瀟湘 은 동정호 남쪽

     의 소수와 상수가  합쳐지는 곳의 경치입니다.  소상팔경도는 전해지지 않고 소상팔경시첩만

      전해지고 있읍니다.

      시첩은 아마도 인쇄를 하거나 필사를 하여 많이 전해진것으로 보입니다.

      놀라운 것은 안평대군이 그림은 안견으로 하여금 그리게 하고 시첩에는 당대의 명사를 망라하는

      사람을 동 원하여 소상의 아름다움을 시로 짖게 한 것입니다.서문을 쓴 이영서를 비롯하여

     하연, 김종서, 정인지, 조서강, 강석덕, 안지, 안숭선, 이보흠, 남수문, 신석조, 유의손,

     최항, 박팽년, 성삼문, 신숙주, 윤효동, 김맹, 석 만우 등 열 아홉 명의 시를 수록하였읍니다.

  

       조선의 한반도에서 저 대륙 동정호 남쪽의 소상강 의 경치를 시로 읊으라니...

       가능이나 할까요? 그당시 북경에 한번 가는 것도 쉬운일이 아니건만 그보다 3배 5배 먼거리에 있는

       그곳에 가보고 오라 했을까? 당연히 한반도 조선에서 그 곳은 갈 수가 없는 곳이고 또 가본적도

       없는 곳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가보지도 않은곳을 시로 읊으라고 부탁을 하고 그 부탁을 받고 상상으로  시를

       만들었다면......!!

       만약에, 정말로 그랬다면 명을 내린 안평대군이나 명을 받든 19명의 신하들이나

       이게 뭐 하는 것입니까? 한때 유행하던 "이게 뭡니까?"  바보들의 행진 같지 않읍니까?

 

        글을쓴자중에는 김종서 박팽년 성상문 같은 지조가 대쪽같은 충신 들도 있고

        당대의 학자들인 하연 안숭선 최항 정인지 신숙주 같은 이들도 있읍니다.

        생소한 조서강 강석덕 안지 이보흠 남수문 신석조 유의손 윤효동 김맹 석만우 도 있읍니다.

        세종시대에는 안평대군의 권력(세종의 동생)이면 어짜피 상상으로 시를 만들라고 할 것이면  

        이러한 생소한 자들  대신 당대의 명사를 총동원했을 것입니다.

       

       이들은 바보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고 모두들 그곳 소상강에 가본 자들인 것입니다.

        명사들중에는 소상강에 가보지 않은 자들은 모두 빠진 것입니다.

        그들19명은 모두 대륙에서 있던자들이고 그 근처에서 성장하던 자들이거나 그 지역에 갔다온

       자들일수 밖에 없읍니다. 그러니 저 대륙은 조선의 땅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안견의 소상팔경도와  명사들의 소상팔경시첩이 짝을 이루어 탄생한 것입니다.

       소상강(소수와 상수)이 조선의 영역에 있으면

       동정호 황학루 등왕각도 조선에 있을수 밖에 없읍니다.

 

 

4.또다른 그림으로 팔준도가 있는데 이것은 풍경화가 아니고 말 그대로 8마리의 말 그림입니다.

8마리의 말은 그 유래가 2가지 있는데 하나는  주나라의 목왕이 8마리의 말 고사가 있고  또 하나는

이성계가 오랑캐를 평정할때 이 8마리의 말이 수행했다고 해서 그린 조선유래의 팔준도가 있읍니다.

조선의 조정에서 팔준도 에 관련하여 수많은 글과 그림을 남김니다.

 

먼저 주 목왕에 관한 팔준도 입니다. 주 목왕의 8마리 말은 전쟁이야기가 아니고 신선놀음하듯 유람할때

수행한 8마리 말입니다. 대개 평화로운 그림일 것입니다.

이그림은 이태리인으로 청나라에서 활동한 양세령이라는 자의 팔준도로 기백이 넘치는 화풍이라기 보다는 평화로운 모습입니다.

 

이그림은 역시 팔준도로 중국 현대화 입니다.

 

아래그림은 국내 모 박물관에 소장된것으로 그 작자가 윤덕희 라는 분이데 제목이 팔준도 입니다.

이그림은 윤덕희 라는 분의 그림으로 공재 윤두서의 아들입니다..

아마도 17세기 초의 그림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윤덕희 라는 분의 이그림은 다른 글(연행기: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는 청나라인이 소장한 화첩에 들어있는 그림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청인이 그 그림첩을 신주단지 모시듯이 하는데 조선의 사신박지원에게 그 그림들의 설멸을 달아달라고 부탁을 하고 박지원이 그 설명을 달아주고 있읍니다. 그림의 가치는 없는 듯이 말하고 있읍니다. . 실제로 이 그림은 모 박물관에 소장된 것인데 화첩을 펼쳐 놓은 것 같읍니다.

--------연행기 중의 열상화보에 나오는 팔준도 --------------------

 

관내정사(關內程史)

 7월 24일 경자에 시작하여 8월 4일 경술에 그쳤다. 모두 11일 동안이다. 산해관(山海關)으로부터 연경까지 이르기가 모두 6백 40리다

가을 7월 24일 경자(庚子)

    (전략)  

이때 소주(蘇州) 사람 호응권(胡應權)이란 자가 화첩(畵帖) 하나를 가지고 왔는데, 겉장에는 어지러운 초서(草書)를 썼으되 먹똥이 거듭 앉아 비눌지고 더할나위 없이 해져서, 한 푼어치도 못 되어 보이건만 호생(胡生)의 거조를 보니 마치 세상에 다시 없는 보배인 듯 사뭇 조심조심하여 이를 받들고 꿇어앉아서 여닫는 데도 오직 깍듯이 한다. 정군(鄭君)이 침침한 눈으로 두 손에 이를 움켜 쥐고 책장을 풍우처럼 재빨리 넘기니, 호생이 얼굴을 찡그리며 못마땅해 하는 기색이다. 정군이 다 보고는 획 집어 던지면서,

겸재(謙齋)현재(玄齋)가 모두 되놈의 호이구먼.” 하기에, 나는 웃으면서,

“아니 보아도 잘 알 일이지.” 하고, 호생더러,

“당신은 이걸 어디서 구하셨소.” 하고 물으니, 그는,

“아까 초저녁 때 귀국 김 상공(金相公)이 우리 점포에 오셔서 팔고 갔소. 김 상공은 믿음직한 사람이옵고 또 나와는 정분이 자별하여 친형제나 다름 없습니다. 문은(紋銀 품질이 우수한 은) 3냥 5푼으로 샀으니 만일 장황(裝潢)을 고쳐 놓으면 7냥은 실히 가리다. 다만 그린 이의 관지(款識)가 없사오니, 바라옵건대 선생께서 이를 일일이 고증해서 적어 주시옵소서.”

하고는, 이내 품 속에서 붉은 주사 한 홀(笏)을 꺼내어 패물로 주며, 화자(畵者)의 소전(小傳)을 간곡히 부탁한다. 주인도 주과를 내어 왔다. 대개 우리나라의 서화 권 중에는 연호(年號)도 없고 이름을 적기도 꺼리며, 시축(詩軸)의 끝에도 흔히들 ‘강호산인(江湖散人)’이라 하였을 뿐 어느 때 어느 곳 아무 성 어떠한 사람의 솜씨인지 알 길이 없다. 이제 이 책 가운데도 간단한 두 글자씩 된 별호(別號)가 적혀 있기는 하나 분명하지 않아서 누가 누군지를 분간할 수 없으므로, 정군이 겸재ㆍ현재를 되놈이라 한 것도 괴이한 일은 아니다. 정군은 한어(漢語)가 서투른데다 또 이가 성기어서 달걀 볶음을 매우 좋아하므로, 책문에 들어온 뒤로 늘 하는 한어라고는 다만 ‘초란(炒卵)’뿐인데, 그나마 혹시 말할 때 잘못 비어질까, 듣는 사람이 잘못 들을까 두려워하여, 가는 곳마다 사람을 만나면 문득 ‘초란’ 하고 불러 보아서 그 혀끝이 돌아가는가를 잘 가늠하므로, 정(鄭)을 ‘초란공(炒卵公)’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리나라 광대놀음에 탈쓴 것을 ‘초란(俏亂)’이라 부르는데, 중국말로 계란볶음이라는 ‘초란’과 발음이 근사하기 때문이다. 주인이 곧 가서 한 쟁반을 지져 가지고 왔다.

그러나 행적이 마치 음식을 빼앗아 먹은 것같이 되었으므로 한바탕 웃고 나서 주인에게 사연을 말하고 값을 치르려 하니, 주인이 도리어 몹시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여기는 음식점이 아니어요.”

하고 자못 노여워하는 기색까지 있기에 나는 곧 대강 그림 옆에 적힌 별호(別號)를 상고하여 그들의 성명을 적어서 사례하였다.

            ================(여기까지가 연행기 이며 이 연행기에 별첨된 기록이 아래의  열상화보입니다)===============

            열상화보(冽上畵譜)

 

이조화명도(二鳥和鳴圖), 충암(冲菴 호). 김정(金淨)의 자는 원충(元冲)이요, 명(明) 가정(嘉靖)때 사람이다.

한림와우도(寒林臥牛圖) 김식(金埴).

석상분향도(石上焚香圖) 이경윤(李慶胤)은 학림정(鶴林正)이다.

녹죽도(綠竹圖), 탄은(灘隱 호).이정(李霆)의 자는 중섭(仲燮)이요, 석양정(石陽正)이니, 익주군(益州君)의 지자(枝子)이다.

묵죽도(墨竹圖) 위와 같다.

노안도(蘆雁圖) 이징(李澄)의 자는 자함(子涵)이요, 호는 허주재(虛舟齋)니, 학림정(鶴林正)의 아들이다.

노선결기도(老仙結綦圖), 연담(蓮潭 호). 김명국(金鳴國)이니, 명(明) 천계(天啓) 연간 사람이다.

연강효천도(煙江曉天圖) 임지사자도(臨紙寫字圖), 공재(恭齋 호).윤두서(尹斗緖)의 자는 효언(孝彦)이니, 강희(康熙) 연간 사람이다.

춘산등림도(春山登臨圖), 겸재(謙齋 호).

정선(鄭歚)의 자는 원백(元伯)이니 강희ㆍ건륭 연간 사람이다. 나이 80이 넘어서도 겹돋보기 안경을 끼고 촛불 아래에서 가는 그림을 그려도 털끝만큼도 그릇됨이 없었다.( ---->이당시에도 조선에는 안경이 보편적이였던거 같읍니다.)

산수도(山水圖)네 폭인데, 겸재.

사시도(四時圖) 여덟 폭인데, 겸재.

대은암도(大隱巖圖) 겸재. 이 위의 것은 모두 ‘정선(鄭歚)’ㆍ‘원백(元伯)’이라는 소인(小印)이 있다.

부장임수도(扶杖臨水圖), 종보(宗甫).조영석(趙榮祏)의 자는 종보요, 호는 관아재(觀我齋)니, 강희ㆍ건륭 연간 사람이다.

도두환주도(渡頭喚舟圖), 진재(眞宰 호).김윤겸(金允謙)의 자는 극양(克讓)이니, 강희ㆍ건륭 연간 사람이다.

금강도(金剛圖), 현재(玄齋 호).심사정(沈師正)의 자는 이숙(頤叔)이니, 강희ㆍ건륭 연간 사람이다.

초충화조도(草蟲花鳥圖)여덟 폭인데, 현재. ‘심사정사인(沈師正私印)’과 ‘현재(玄齋)’라는 소인이 있다.

심수노옥도(深樹老屋圖), 낙서(駱西).윤덕희(尹德熙)의 자는 경백(敬伯)이니, 공재(恭齋)의 아들이다.

백마도(白馬圖) 군마도(羣馬圖) 팔준도(八駿圖) 춘지세마도(春池洗馬圖) 쇄마도(刷馬圖)

이상은 모두 낙서의 ‘윤덕희사인(尹德熙私印)’과 ‘낙서(駱西)’라는 소인이 있다.

무중수죽도(霧中睡竹圖), 수운(峀雲 호). 유덕장(柳德章). ‘수운사인(峀雲私印)’이 있다.

설죽도(雪竹圖)‘수운(峀雲)’이란 두 글자와 ‘수운(峀雲)’의 인이 있다.

검선도(劒仙圖), 인상(麟祥).이인상(李麟祥)의 자는 원령(元靈)이요, 호는 능호관(凌壺觀)이니, ‘이인상(李麟祥)’의 인이 있다.

송석도(松石圖), 원령.‘인상(麟祥)’이란 인과 ‘기미삼월삼일(己未三月三日)’이란 소지(小識)가 있다.

난죽도(蘭竹圖), 표암(豹菴 호).강세황(姜世晃)의 자는 광지(光之)니, ‘표암광지(豹菴光之)’의 인이 있다.

묵죽도(墨竹圖)위와 같다.

추강만범도(秋江晩泛圖), 연객(烟客). 허필(許佖)의 자는 여정(汝正)이니, ‘연객(烟客)’이라는 소인이 있다

 

         ----> 열상화보라고 하는 그림책이 청인이 부탁한 화집이며 그 그림속에 윤덕희의 펄준도가 있읍니다.

                   화집의 이름이 열상화보인지는 정확하지 않읍니다.   그러나 대개 이

                   열상冽上 이라는 말은 열수冽水  지방을 말하는 것으로 양자방언 이라는 유명한

               책에서  열수는 조선과 요동 사이라고 하고 있읍니다.

                  지금 이 박지원이 지나는 곳은  요동을 지나  산해관을 빠져가고 있는 중입니다.

                  정확히는 산해관을 지나 연경가는 길목인 고 우북평땅인 영평부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아마도 지은이는 그래서 열수 지방에서 본 화첩이라는 의미로 열상화보라고 기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부기록에서는 한강이 열수라고도하고 한강의 입구는 열구 라고 하여 헷갈리게 하는 것

      이 많읍니다만 한강의 입구는 한구 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한자는 다릅니다.列水)

                  저는 열수가 이곳 요동지방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열수를 가지고도  엄청나게 할 말은 많읍니다 만 이 글의 주제가 아니라 미루겠읍니다.

                   그렇다면 저 박물관에서 소장한 화첩에는 저 그림들이 모두 있던가 해야 할 것이며  한편 어떻게

                   이그림이 청인의 손에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 왔을까? ... 아니면 모작이던가?

                  물론 이 기록의 화첩에 있는 팔준도가 박물관에서 소장한 것과 같은 것이라는 증거는 없읍니마

                   아예 청나라가 조선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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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인용글은 주나라 목왕에 대한 팔준도 입니다.

홍재전서 제1권 / 춘저록(春邸錄) 1 ○ 시(詩)

주 목왕(周穆王)의 팔준도(八駿圖)에 제하다

옛날엔 화산에 놓아 맘대로 오고 가게 했는데 / 昔放華山任去來

지금은 채찍에 몰려 또 요대로 가 있구나 / 今焉驅策又瑤臺

아 네 준마의 골격이 때를 잘못 타고나서 / 嗟渠駿骨非時出

부질없이 당년에 목야에서 돌아온 걸 생각하누나 / 謾憶當年牧野回

 

청음집 제13권 / 칠언장편(七言長篇)

사군(使君) 이한(李 )이 소장하고 있는 조자앙(趙子昻)의팔준도(八駿圖)에 제하다

여덟 마리 용 교교해 진정 천리마이거니 / 八龍矯矯眞天駟

목왕께서 그를 타고 삼만 리를 갔었다네 / 穆王騎之三萬里

하늘에서 신마 낸 건 필시 타게 한 것으로 / 天生神物必待駕

또한 그때 그 당시에 조보란 자 있었다네 / 亦有當時造父者

요지에서 춤 끝나고 황죽도 다 말랐으매 / 瑤池舞散黃竹枯

지금 와선 영락해져 그림 속에 들었다네 / 零落秪今歸畵圖

어느 누가 그렸기에 묘한 재주 발휘했나 / 圖畵何人擅竗技

오흥학사 같은 이는 이 세상에 또 없다네 / 吳興學士世無二

깊이깊이 생각하여 조화 솜씨 구사하니 / 沈吟繹思驅造化

비바람은 삽상하고 귀신들은 몰아치네 / 風雨颯爽鬼神咤

하늘과 땅 온갖 만사 천백 번이 변한 뒤에 / 乾坤萬事百變後

어느 누가 이 그림을 영원토록 전할 건가 / 誰遣此圖傳不朽

이후께서 그림 얻어 쌍벽인 양 중히 여겨 / 李侯得之重雙壁

정성 다해 내게 제시 써 달라고 부탁하네 / 慇懃勸我添毫墨

예로부터 좋은 물품 편안함을 열었거니 / 古來殊産啓逸豫

포초에다 악와 신마 한나라 때 노래했네 / 蒲梢渥洼歌漢世

그댄 듣지 못하였나 / 君不聞

무왕께서 목야에서 상나라를 이긴 뒤에 / 武王牧野旣克商

만 마리 말 구름처럼 화산 남쪽 풀어놓고 / 如雲萬匹華山陽

비록 준마 있더라도 수레 끌게 하였단 말 / 雖有駿馬但使服車箱

 

       ----->청음의 지인이 조맹부(조자앙)의 팔준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그 그림이 주나라 목왕의

                 8준마 입니다. 조선에서는 원나라의 명필 조맹부의 그림도 쉽게 얻을수 있었나 봅니다.

                 원나라가 망한지 300년이 넘는시점에서 조선에서 조맹부의 그림이 돌아다니고 있을정도로

                 다작을 한것인지 아니면 조선이 원(고려?)의 땅에 일어나 그러한 것이 흔한것인지는 모르겠읍니다.

                조맹부는 같은 나라 사람이어서 쉽게 구한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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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음글은 이성계에 관련된 8준마 입니다. 전쟁과 관련된 용맹하고 힘찬 모습일 것입니다.

세종때 화가 안견을 시켜 8준도를 그리고 신숙주 성삼문 등 많은 사람들이 그 그림에 찬을 올리고 있읍니다. 그 그림은 힘차고 씩씩한 모습으로 그렸을 것입니다.

 

동문선 제3권 / 부(賦)

여덟 준마의 그림을 읊은 부[八駿圖賦]  / 신숙주(申叔舟)

 

신(臣)이 듣잡건대, 아조(我朝)가 기업을 북방에서 비롯한 뒤 세 성인(聖人 목조(穆祖)ㆍ익조(翼祖)ㆍ도조(度祖))이 서로 이어 충효(忠孝)로 가문(家門)을 전하고 위엄과 덕이 날로 성(盛)하였나이다. 그때가 고려(高麗)의 말기(末期)라 쇠란(衰亂)이 이미 극도에 달했사온데, 하늘이 동방을 돌보시와 우리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을 내시니, 대왕께서 조상의 업(業)을 이어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건지시려고 마음을 두사 분연(奮然)히 몸을 돌아보지 않으셨나이다. 그리하여 지정(至正) 22년 임인(壬寅) 봄에 홍건적(紅巾賊)을 평정하시고, 그해 가을에 나하추[納合出]룰 동쪽으로 몰아내고, 홍무(洪武) 3년 경술에는 북쪽으로 원(元) 나라의 남은 무리를 동녕(東寧)서 평정하시고, 10년 정사(丁巳) 여름에는 남쪽에서 왜구(倭寇)를 지리산(智異山)서 이겼사옵고, 그해 가을에 동정(東亭)에서 싸우시고, 13년 경신(庚申)에 인월역(引月驛)에서 싸우셨으며, 18년 을축(乙丑)에 토동(兎洞)에서 싸우시고, 21년 무진(戊辰)에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는 의거(義擧)를 하였사오니, 무릇 27년간에 전후 몇백 번의 싸움이었나이다. 그리하여 만사일생(萬死一生)으로 위난(危難)을 무릅써 마침내 도적을 평정하고 백성을 도탄(塗炭)에서 건지시와,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임금에게 돌아와 마침내 큰 업을 세우시고 덕택을 후세에 길이 끼쳤사옵니다. 그런데 적을 무찔러 함락시키고 나라를 깨끗이 맑힌 공적은 실로 말 위[馬上]에서 얻었사오니, 말의 공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음이 마땅하오이다. 그 중의 가장 준마(駿馬)로서 공이 있은 말이 여덟이 있었사온데, 이제 우리 전하(殿下 세종)께서 명하여 그림을 그리고 찬(贊)을 붙여 오래 전하게 하라 하옵시니, 그 선대(先代)의 공적을 추모하고 편안 중에서도 위험했던 일을 잊지 않으시와, 후손(後孫)을 위하여 교훈을 끼쳐 주시는 뜻이 참으로 간절하시옵니다. 성자(聖子)ㆍ신손(神孫)이 이로써 전조(前朝)의 나라 얻기는 어렵고, 나라 잃기는 쉬운 것을 거울삼고, 조종(祖宗)께서 그것을 어렵게 얻었음을 생각하시와, 그리하여 여덟 준마의 공을 잊지 않으시면 이는 곧 동방 억만세에 끝없는 다행이겠나이다. 신(臣)이 외람되게 시종(侍從)의 반열에 있어서 이 성사(盛事)를 보았사오니, 노래하여 기림[頌]이 제 구실이라, 삼가 절하옵고 머리를 조아려 부(賦)를 드리옵나이다

 

성인이 자리에 계셔 / 聖人在位
삼가고 애쓰심이 / 祗懼勵精
무릇 30년에 / 凡三十年
정치와 교화가 훌륭하고 밝으사 / 治敎休明
사방에 염려가 없고 / 四境無虞
조야가 태평했다 / 朝野晏清
이에 수성하기 어려움을 알고 / 於是知守成之不易
안락의 해독을 생각하여 / 念燕安之鴆毒
창업의 어려움을 추모하고 / 追惟刱業之艱難
성조의 크신 공적을 선양할 제 / 敷揚聖祖之義烈
여덟 준마의 미미한 것까지 / 乃至八駿之微
포장하여 높이는 축에 있게 하였다 / 亦在褒崇之列

             (후략 .... )

 

    ---> 팔준도 부에 들어있는 이 위화도 회군(1388)까지 "27년동안 몇백번의 싸움 "을 언급하는데

            1361년부터 1388년까지 입니다. 1388년이 홍무 21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읍니다.

            시에서는 무릇 30 재위에 있으면서 평화를 이루었다고 또한 기록하고 있읍니다.

            재위기간은 명태조 주원장의재위기간과 완전 일치합니다.

            실제 주원장은(1368-1398) 30 재위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이성계의 퇴위연도와 같읍니다.

            30 재위기간이 주원장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신숙주는 이성계와 함께한 8준마를 이야기 하기위해 이성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성계는 30년간 재위한 성인이며 명태조 고황제라는 주원장의 주인공입니다.

            따라서 주원장은 이성계의 행적을 베낀인물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글에서 시사하는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라서 별개의 내용으로 준비 하려합니다.

 

동문선 제44권  / 표전(表箋)

집현전 진 팔준도 전(集賢殿進八駿圖箋)  /성삼문(成三問)

 

하늘이 도와 임금을 내시니 성인은 천 년의 운수를 맞추셨고, 땅에서 쓰이는 것은 말[馬] 같은 것이 없으며, 신물(神物)은 한 시대의 재능을 바쳤기로, 감히 새 그림을 만들어서 예감(睿鑑)에 올리옵니다.

그윽이 생각하오면, 왕자의 작흥(作興)에 있어어도 역시 축산(蓄産)에 힘입어 성공하였습니다. 촉한(蜀漢)의 왕은 적로(的盧)를 타고서 능히 단계(檀溪)의 액을 면하였고, 금(金) 나라 태조는 자백(赭白)을 타고서 곧장 흑수(黑水)의 깊은 물을 건너갔으니, 진실로 큰 업이란 돌아갈 데가 정해져 있사오매, 미물(微物)도 또한 그 힘을 분발하는 것이옵니다.

우리 태조(太祖)께옵서 용맹은 하늘에서 타고나시고 덕은 오직 날로 새로우시매, 고려의 운수가 끝날 무렵에 외부의 적이 자주 틈을 노리니 나라를 위하여 적개심을 품고 백성 보살피기를 상처입은 것을 대하듯 안쓰러워하셨습니다. 의기(義旗)를 한번 돌이키자 백성은 화난을 면하게 되었고, 신과(神戈)를 사방으로 휘두르매 삼한(三韓)은 청명한 세상을 이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비록 원근(遠近)이 지극한 인(仁)을 당적(當敵)할 길이 없었지만 근골(筋骨)은 먼저 크나큰 임무에 부지런하셔서, 친히 시석(矢石)을 무릅쓰시매, 몸은 상처에 피곤하였습니다.

이 시절을 당하여 세상에 이름난 인재만 용의 비늘에 붙어 절개를 다한 것이 아니오라, 기르는 짐승 같은 천물(賤物)까지도 제 몸을 바쳐 수고를 맡을 것을 알아서, 혹은 사냥터를 달리기도 하고, 혹은 싸우는 진중을 출입하여 주선(周旋)하는 데 힘을 다하고 걸음걸이는 사람을 따르는데, 그 크고 건장한 체격은 이미 익숙한 모습을 볼 만하고, 달리는 곳에는 앞설 놈이 없어 참으로 사생(死生)을 의탁할 만하더니, 마침내 그 장기를 발휘하여 큰 업을 이룩하는 데 도움되었으니, 어찌 영걸(英傑)만이 유독 능연각(凌煙閣)에 오르리오. 권기(權奇)로 소릉(昭陵)에 참열하게 된 것을 믿을 만하옵니다.

삼가 생각하오면, 도(道)는 생성(生成)에 흡족하시고, 공은 조화(造化)에 참예하시고, 선대의 뜻을 잘 계승하시고 선대의 일을 잘 기술하시어 삼가 수성(守成)만 하시고, 선대의 공을 계승하시고 선대의 정책을 드러내어 창업(創業)이 쉽지 않음을 생각하시며, 사랑은 견(犬)ㆍ마(馬)에게도 버리지 않으시고, 신의는 돈(豚)ㆍ어(魚)에까지 미치며, 특히 윤음(綸音)을 내리시어 도찬(圖贊)을 지어 올리게 하셨습니다.

신 등은 모두 조전(雕篆)의 기술로써, 외람되게 문한(文翰)의 직을 맡아온즉, 하물며 이 칭송이야. 바로 직분이옵기로 삼가 사적에 실린 것을 상고하고 겸하여 부로(父老)의 말을 채택하여, 화사(畵師)로 하여금 모형을 그리게 하고 졸한 글을 엮어서 공적을 기록했사오니, 터럭이 꼬부라진 한혈(汗血)은 완연히 당시의 용모와 같고, 늠름한 자태와 높은 공로는 거의 뒷사람의 안목을 놀라게 할 것이며, 상서로움은 하도(河圖)와 더불어 나란히 가고 노래를 지으면 천마가(天馬歌)를 누추하다며 차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 한가한 틈이 나시오면 한 번 보아 주시옵소서. 그 덕을 칭찬하고 그 힘을 칭찬하지 않은 것은 선니(宣尼 공자(孔子))의 말씀을 따랐고, 아들에 전하고 손자에게 전하여 길이 성조(聖祖)의 공을 살필 수 있사옵니다.

 

-----> 신숙주와 성삼문이 지어 올린 팔준도 글 입니다.

           전쟁수행한 8마리의 관한 것이고 특히 성삼문의 글에서 그 말들은 한혈마 라고 명기 하고

           있읍니다. 한혈의 특징이 터럭이 꼬부라진 것이라는데 털이 곱슬한 것이라는 것 같읍니다.

           여기서 말하는 터럭은 어느 부분일까?   아마도 말 갈기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한혈마는 한나라 무제가 서역 대완에서 구하였다는 명마의 대명사로 쓰이는 천리마입니다.

조선의 이성계는 어떻게 이러한 한혈마 8마리을 구해서 전장을 돌아다녔을까요? 아마도 이 말을 구하기 쉬운 곳에 있었기 때문이였을 것입니다.

             혹자는 그 한혈마가 지금의 Akhal teke (애칼텍)이라는 종자의 말이라고 합니다.

일설에는 대완이 지금의 페르가나 분지 지역이라고 하고 있읍니다.

천산의 서쪽/ 파미르의 서쪽입니다.

 

전세계적으로 명마로 이름이 났으나 세계적으로 희귀종으로 3500 두 정도 있다고 합니다. 그 종자의 원산지는 지금의 투르크 메니스탄이라 합니다. 여러 사연을 거쳐 이 종자가 러시아로 들어갔고 초기에는 코카서스 산맥 북변에서 대규모 생산하다 지금은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의 농장에서 길러내고 있다고 합니다. 한마리의 가격이 엄청나게 비싸고 투르크메니스탄에서는 엄격히 국외반출을 제한하고 있다고 합니다.

The Akhal-Teke is a horse breed from Turkmenistan, where they are a national emblem.[1] They are noted for their speed and for endurance on long marches. These "golden-horses" are adapted to severe climatic conditions and are thought to be one of the oldest surviving horse breeds. There are currently about 3,500 Akhal-Tekes in the world, mostly in Turkmenistan and Russia, although they are also found throughout Europe, Australia and North America.

The breed became popular with the Russians, who established a breeding population at their state stud farms. Many Akhal-Tekes were bred at the Tersk Stud in the northern Caucasus Mountains, and later moved with the head breeder Vladimir Petrovich Shamborant to the Dagestan Studfarm.

 

특징으로는 빠르고 강인하고 인내심이 강하다고 합니다. 한혈이라는 말 자체가 달릴때 목에서 피와같은 땀을 흘리기 때문이며, 또한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강해 한사람만 따른다고합니다.

 

아쉽게도 그 팔준도는 지금 전해지지 않고있어 어떠하였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힘찬 모습의 그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래 그림들은 팔준도라는 제목으로 대륙에서 그려지고 있는 그림입니다. 원형의 팔준도를 상상하면서 참고로 퍼왔읍니다.

 

         --------------------------팔준도 그림들 모음(현대화)-----------------

 

 

 

 

 

 

 

 

여기에 나오는 그림은 모두 현대 중국대륙의 화가들이 그린 현대화 입니다.

이 그림들을 여기에 굳이 올린 이유는 그 팔준도의 원형이 대륙어디엔가 남아 있다는 방증으로

올린것입니다.

특이하게 마지막 그림은 무언가 옛날고사를 상기하는 그림같읍니다. 말고삐를 잡고 있는 사람의 의상이 명나라 내지는 조선의 복장으로 보입니다. 청나라의 변발도 아니고.....

 

 희한하게도 현대 중국대륙에서 이 팔준도는 다른뜻으로 그 그림이 사용되고 있읍니다.

'팔 '이라는 숫자와 '말'이라는 말의 어감이 합쳐져서 성공을 가져다 준다는 의미로 그려지고 있읍니다.

중국어를 몰라 어떻게 발음되어 성공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나라에서 달마도를 가져다 놓고 희망을 갖는 것과 비슷한 습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팔준도를 조선 이성계의 공적을 기리는 한혈마 8마리의 씩씩한 기상과 비교하면

어딘지 모르게 희화적입니다. 팔준도가 대륙에 남아 그 용어 까지도 유전되다가 이렇게 와전된것은 아닌가 합니다. 조선에서는 이 팔준도를 그린 화가가 상당히 있는것 처럼보입니다.

아마도 안견이 그렸다는 팔준도는 위의 그림처럼 씩씩하고 힘찬 모습이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외국 어디에선가 발견되는 고래의 팔준도가 있다면 그것은 조선의 것일 것입니다.

 

       조선은 대륙에 있었다는 또다른 조그마한 증거입니다./끝

 

출처-http://cafe.daum.net/munmoo-chosunsa/3U53/47?docid=1I1L3|3U53|47|20111011155723&q=%BF%AD%BB%F3%D6%A9%DF%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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