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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선생의 행초

작성자버들(悠然堂)|작성시간09.07.21|조회수349 목록 댓글 0

공암유목

허목(許穆)의 편지를 첩으로 만든 것으로 광산 김씨 종가에 소장되어 있다. 공암은 허목의 본관인 양천(陽川)의 다른 이름이다. (17세기)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작품이다. 허목은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제자로서 벼슬은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특히 전서에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의 작품으로는 삼척 주동해비(陟州東海碑)가 유명하다. [17세기 축(軸), 56.0×42.0㎝]

 

허목(許穆, 1595년~1682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 및 학자이다. 본관은 양천, 자는 문보(文甫)·화보(和甫)[1], 호는 미수(眉)이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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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편집]

허목은 젊은 시절 과거 공부를 하던 중 의 심기를 거슬러 나라에선 그에게 평생 과거를 못 보게 만들었다. 그래서 스스로 산림에 묻혀 글만 읽다가 효종 때에 56세 나이로 말단 벼슬인 능참봉이 내려졌고 그 후 80세에는 정승까지 올랐다.[2]

일화 [편집]

허목은 송시열과 사이가 매우 나빴다. 어느날 송시열이 중병이 들어 아들을 허목에게 보내 약을 지어오게 했는데, 그 약 중에 비상(독약)이 있었다. 이를 본 송시열의 아들은 비상을 버렸는데, 그 때문에 송시열의 병이 더 중해졌다. 송시열의 아들은 허목에게 가 새로 약을 받아 왔고, 송시열은 병이 나았다. 나중에 이 일을 안 송시열은 아들을 꾸짖고는 허목에게 사과하러 갔다.

허목은 기인으로도 유명한데, 평안 감사 시절에는 한 통인(심부름꾼) 아이의 성이 이씨라고 하자 몹시 이상해했다. 알고 보니 그 통인 아이는 길에서 주워다 기른 아이였다. 허목은 통인 아이에게 생부를 찾아 주고는, 생부모와 양부모 모두에게 효도하라고 말했다.[2]

저서 [편집]

  • 《기언(記言)》
  • 동사(東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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