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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왕휘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序)

작성자古方|작성시간16.04.29|조회수1,395 목록 댓글 0


왕휘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序)









蘭亭序(난정서)                           - 왕휘지(王羲之)

 

永和九年歲在癸丑暮春之初 會於會稽山陰之蘭亭 修契事也
영화 구년 계축년 늦은 봄 초승(3월 3일)에 회계산 북쪽 난정에 모였는데 계제사를 지내기 위함이다.

 

群賢畢至 少長咸集 此地有崇山峻嶺 茂林脩竹
많은 현인들과 젊은이 나이든이 등 모두가 모였다.
이곳엔 높은 산과 험준한 봉우리와 무성한 숲 그리고 대숲이 있다.

 

又有淸流激湍 映帶左右 引以爲流觴曲水 列坐其次
또 맑은 시냇물과 여울이 좌우를 띠처럼 서로 비치며 둘러싸고 있기도 하며,
시냇물을 끌어들여 술잔을 띄울 곡수를 만들고 차례로 줄지어 둘러앉았다.

 

雖無絲竹管絃之盛 一觴一詠 亦足以暢敍幽情
비록 거문고나 피리같은 음악이 있는 성대한 연회는 아닐지라도 술 한잔 마시고 시 한 수 읊으며 그윽한 감정을 나누기에 충분하도다.

 

是日也 天朗氣淸 惠風 和暢 仰觀宇宙之大 俯察品類之盛
이날은 하늘은 깨끗하고 공기는 맑았으며 은혜로운 바람은 따스하고 화창했다.

고개들어 우주의 광대함을 우러러보고 고개 숙여 만물의 풍성함을 살펴 본다.

 

所以遊目騁懷 足以極視聽之娛 信可樂也
자유롭게 눈을 들어 마음 가는 대로 생각을 풀어놓으니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즐거움이 참으로 흥에 겨운 일이로다.

 

夫人之相與俯仰一世 或取諸懷抱 悟言一室之內
무릇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 보며 한 평생을 살아감에 있어, 어떤이는 회포를 풀며 벗들과 한방에 마주앉아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或因寄所託 放浪形骸之外 雖趣 舍萬殊 靜躁不同
또 어떤이는 자기 내면 사상들을 끌어내어 육체 밖에서 마음대로 노닐게 하기도 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비록 취향이 만가지로 다르고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서로 같지 않으니...

 

當其欣於所遇 暫得於己 快然自得
저마다 자신의 취흥이 기쁠 때는 자기 뜻을 주장하며 스스로 득의하여

 

曾不知老之將至 及其所之旣倦 情隨事遷 感慨 係之矣
장차 노년이 다가오리라는 것 조차 잊고 즐긴다.
그러다 그가 즐기는 일에 권태를 느낄 때도 있고,
감정이 옮겨가면서 변하게 되기도 하느니라.

 

向之所欣仰之間 以爲陣迹
이전에 즐거웠던 일이 어느 짧은 순간에 낡은 과거사의 자취로 바뀌어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尤不能不以之興懷 況脩短 隨化 終期於盡
특히 그런 것 때문에 감회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허나 목숨이 길 건 짧 건 모두 자연의 조화를 따라 마침내는 모두가 끝에 이르게 되는 것이거늘.

 

古人 云死生 亦大矣 豈不痛哉
옛 사람이 말하 길 "죽고 사는 것은 매우 큰 일이다"고 하였으니 이 어찌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는가.

 

每攬昔人興感之由 若合一契
나는 옛사람들이 감회를 일으켰던 까닭을 알게 될 적 마다
마치 두 개의 부절을 하나로 맞춘 듯 내 생각과 똑같은 것을 깨닫는다.

 

未嘗不臨文嗟悼 不能諭之於懷 固知一死生爲虛誕
그러니 옛 사람들의 문장을 대할 때 마다 탄식하고 슬퍼하지 않을 수가 없어
마음을 달래려고 해도 쉬 달래지지 않는다.
죽고 사는 일이 서로 같은 일이라는 말은 허황된 말이다.

 

齊彭爲妄作後之視今亦猶今之視昔悲夫
팽조처럼 오래 사는 일과 일찍 죽는 일이 서로 같다고 하는 말 역시
함부로 지어 낸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후세 사람들이 지금 사람들을 볼 때도 또한 우리가 옛사람들을 보는 것과 같을 지니 이 또한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故列敍時人 錄其所述 雖世殊事異 所以興懷 其致一也 後之覽者 亦將有感於斯文
그리하여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이름을 순서 대로 적고 그들의 시들을 여기에 수록하였다. 비록 세상이 달라지고 세태도 변하겠지만 감회를 일으키게 되는 이치는 서로가 같을 것이다. 후세에 이 글을 읽는 사람도 또한 장차 이 문장에 대하여 감회가 있으리라.



천하제일행서(天下第一行書)라 불리는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序)
동진(東晉)의 다섯 번째 임금 목제(穆帝)가 즉위한지 9년이 되던 해인 영화(永和) 9년(서기 353) 음력 3월 3일, 당시 회계내사(會稽內史)이자 우군장군(右軍將軍)이던 왕희지(王羲之)는 자신의 아들 7명을 포함한 당시 사족(士族)들과 명사(名士)등 41명의 동진(東晉)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회계현(會稽縣)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소흥현(紹興縣) 난정(蘭亭)에 초청해 대규모 연회를 연다.
이러한 연회는 배타적인 동진(東晉)시대 귀족문화의 특성상 사족(士族)들 간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음으로 여러가지 형식을 통해 자주 열리곤 했는데 삼월 삼짓날 계사(契事)의 형식을 빌린 모임이었다.

이날의 모임은, 술잔을 물에 떠내려 보내는 동안 시(詩)를 짓지 못하면 벌주(罰酒)로 술 서(3)말을 마시는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였으며, 당시 참석한 사람 중 유명 인사였던 왕희지(王羲之), 사안(謝安), 손작(孫綽)등 26명은 시(詩)를 지었고, 나머지 15명은 시(詩)를 짓지 못해 벌주(罰酒)를 마셨다. 이날 지은 시(詩)를 모아 철(綴)을 하고, 그 서문(序文)을 왕희지(王羲之)가 썼고, 당시 참여한 인사 중 가장 문명(文名)이 높았던 손작(孫綽)이  집회를 마무리하는 후서(後序)를 썼다. 이중 왕희지(王羲之)가 쓴 서문(序文)이 바로 그 유명한 "난정서(蘭亭序)"이다.

 
당(唐)나라 때 하연지(何延之)가 기술한 난정기(蘭亭記)를 보면, 당시 왕희지(王羲之)는 거나하게 술이 취한 상태에서 잠견지(蠶繭紙)에  서수필(鼠須筆:쥐수염으로 만든 붓)로 28행, 324자를 써 이 작품을 완성하였다고 하는데, 글 중 특히 갈지(之)字가 가장 많아 24자가 들어갔으나 자획에 변화가 일어 한 글자도 똑같이 쓴 글자가 없었다.
술이 깬 후 수 십 번을 다시 써도 이에 미치지 못하여 스스로도 "神의 도움을 받았다"라고 감탄 하였고, 왕희지 자신도 매우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난정서. 모본(神龍本)인데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많은 도서(낙관)들이 찍혀 존귀함을 느끼게 한다. 낙관에는 신품(神品), 소장자 이름, 장서각, 열람자 등이 포함되어 있다)

 

 왕휘지 글을 너무나 좋아한 당태종은 손에 어렵게 넣은 난정서를 평생 곁에 두고 애지중지 하였는데, 자신이 운명(殞命)할 때 난정서(蘭亭序)를 자신과 함께 순장(殉葬)할 것을 유언으로 명하니, 난정서(蘭亭序)는 당 태종 능(陵)인 소릉(昭陵)에 같이 묻혀버렸다. 이때부터 난정서(蘭亭序)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고 역사서들은 기술하고 있다. 중국 사람들은 지금도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는 돈으로는 도저히 그 가격을 매길 수 없다 하여, 무가지보(無價之寶)라 부르면서 국가적인 보물로 여기지만
정작 그 원작(原作)은 사라져 버리고 없는 전설 속 작품이 된 것이 바로 난정서(蘭亭序)이다.
원본을 베껴 쓴 유명한 임본(臨本)및 모본(摹本)만도 500여 종이 넘고, 임본(臨本)및 필사본들의 글자가 조금씩 서로 제 각각인지라 진본(眞本)의 글자가 어떠했는지 조차도 알 수 없는 작품이 되버렸으니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영원히 사라지고 없은 글... 난정서(蘭亭序)
지금도 북경 고궁박물원에는 몇 종의 난정서 필사본들을 전시하고 있다. 당 풍승소 모본을 다시 신룡본이 모본한 것.

또 원나라 때 조맹부가 쓴 모본. 송나라 구양순의 임사 정무본(定武本)등이 현존하는 대표작으로 북경 고궁박물원에 소장 돼 있다.
그외에도 송나라 때 인종 조정 모본. 탁본으론 수나라 개황이 쓴 모본. 청나라 강희 황제가 쓴 모본, 청나라 강판교 모본등도 마찬가지로 박물관 소장품이다.

그 외에도 개인이 소장한 수 많은 모본들이 진본을 가장한 체 대를이어 내려오는것 또한 많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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