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忠孝禮,전통文化

[스크랩] [[소개]]창녕조씨(昌寧曺氏) 시조의 탄생 설화

작성자새벽(艮齋)|작성시간09.07.27|조회수228 목록 댓글 0

창녕조씨(昌寧曺氏) 시조의 탄생 설화


 창녕조씨(昌寧曺氏) 부제학공파지선록(副提學公派知先錄) 사실(事實: 계유보[癸酉譜], 정해보[丁亥譜], 경진보[庚辰譜]에 실려 있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비조(鼻祖)는 신라부마(新羅駙馬)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으로 성(姓)은 조씨(曺氏)이며 휘(諱)는 계룡(繼龍)인데 관직(官職)이 태사(太師)에 이르렀다. (:신라의 관제[官制]를 살펴 보건데 아찬[阿湌] 각간[角干] 등의 작호[爵號)]는 있으나 태사[太師] 또는 부원군[府院君]은 없으니 그것은 혹시 후세[後世]의 존칭[尊稱(]을 그대로 적은 것은 아닐런지?)


 매계가첩(梅溪家牒)을 살펴보면 『신라 때 한림학사(翰林學士) 이광옥(李光玉)의 따님 휘() 예향(禮香)이 청룡질(靑龍疾)을 얻어 화왕산정(火王山頂)에 있는 용담(龍潭)에서 목욕을 하다가 용왕(龍王)의 아들 옥결(玉玦)을 만나 계룡(繼龍)을 낳게 되었는데 겨드랑이 밑에 조자(曺字)가 새겨져 있다고 하여 성(姓)을 조()라고 하였다. 』고 하였다.

 세속에서 전해 내려오는 바에 의하면 조씨(曺氏)의 시조모(始祖母) 휘() 예향(禮香)은 태어나면서부터 복질(腹疾)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화왕산상(火王山上)의 용지(龍池)가 대단한 영험(靈驗)이 나타난다고 하니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기도(祈禱)하면 틀림없이 효과를 볼 것이오』하므로 그 말대로 길일(吉日)을 가려 용지로 올라가 목욕을 하고 기도를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운무(雲霧)가 일어 대낮이 캄캄해지고 물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듯 하였으나 어디로 가는지는 몰랐었다.

 이윽고 운무가 걷히면서 저절로 못 가운데서 솟구쳐 나왔다. 이때부터 병은 낫고 태기(胎氣)가 있어 아들을 낳았는데 꿈에 한 장부가 나타나서 말하기를 『그대는 이 아이의 아버지를 아시오, 이름은 옥결(玉玦)인데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잘 양육하면 크게는 공후(公侯)가 될 것이고 적어도 경상(卿相)은 될 것이오. 그리고 자손(子孫)이 만대(萬代)토록 번창할 것이오.』하며 일러 주었다.

 그의 아버지 한림학사 이광옥(李光玉)이 그 사실을 왕에게 아뢰어 ‘왕이 조계룡(曺繼龍)이라는 성명(姓名)을 내리고 장성함에 이르러서 진평왕(眞平王)의 사위가 되어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封)해졌으니 이분이 사실 조씨의 시조이다’라고 하였다. (昌寧曺氏 副提學公派 知先錄 一卷 世德錄. 13~14쪽) 그리하여 창녕조씨(昌寧曺氏)의 시조가 되고, 창녕(昌寧)을 그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가문을 빛낸 인물


 고려시대에 좌정승을 지낸 조익청(曺益淸)을 비롯하여 문하시중을 지낸 조민수(曺敏修), 조선시대에 부제학을 지낸 조상치(曺尙治), 공조판서를 지낸 조비형(曺備衡), 세종 때에 영의정을 지낸 조석문(曺錫文), 예조참판의 조효문(曺孝門), 대사헌의 조숙기(曺淑沂) 등 많은 관직자들을 배출하면서 번성하였다. 성종 때의 성리학의 대가로서 당시 사림간에 대학자로 추앙되었고, 김종직과 더불어 신진사류의 지도자였던 조위(曺偉)는 가문의 번영을 더하였다. 조신(曺伸)과 조한보(曺漢輔)는 시인과 학자로서 명성을 떨쳤고, 조계상(曺繼商)은 1495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대사헌, 공조판서를 지냈으며 조광원(曺光遠)은 152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조식은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여 당시 유학계의 대학자로 추앙되었다. 그는 지리산에 은거하며 성리학을 연구, 여러 대가의 서적을 섭렵하여 독특한 학문을 이룩했으며 조정에서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퇴하고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해방 후의 조만식(曺晩植. 1883~1950) 선생은 민족운동가로 너무나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인도의 독립운동가 간디의 무저항주의와 민족주의를 자기사상과 민족운동의 거울로 삼아 연정회(硏政會), 신간회(新幹會),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 등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시켰으며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창녕조씨(昌寧曺氏)유적지


 화왕산은 선사시대 화산으로 지금 3개의 못은 화산의 분화구가 있으며, 창녕 조씨(昌寧曺氏)의 득성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득성 설화가 전해져 창녕 조씨(昌寧曺氏) 득성비와 용지(龍池) 3기가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득성 설화는 1760년대(영조대)에 만들어진 <여지도설> 창령조와 1832년에 작성된 <경상도읍지> 창녕조 그리고 1895년에 작성된 <영남읍지> 창령조 등에 기록되어 있다. 용지는 득설 설화를 간직한 곳이며 득성비는 득성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1897년 (광무1년) 당시 경상남도 관찰사 조시영이 세웠다. 득성비는 길이 2.5m 폭 1.46m의 자연석에 (창녕조씨득성지지(昌寧曺氏得姓之地)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유적지는 경상남도 창영군 창영읍 옥천리에 있으며 경상남도 기념물 제 246호로 지정 되었고 지금도 잘 보전되어 있다.

다음검색
스크랩 원문 : 우리문화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