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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方文字. 古文

우리고사성어-채갱불망,책루조옥,처선지용,처용지애,척귤지정,천생배필,청사등롱.

작성자古方|작성시간13.06.03|조회수425 목록 댓글 0

菜羹不忘(채갱불망)
菜:나물 채, 羹:국 갱, 不:아니 불, 忘:잊을 망.
어의: 나물국을 잊지 못하다. 청백리 김장생이 공부할 때 소금으로만 밥을 먹다가 나중에 나물국을 먹으니

 그   맛이 좋아 잊지 못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어려운 시절을 잊지 말고 교훈으로 삼으라는

 뜻으로 쓰인 다.
출전: 대동기문(大東奇聞)
  조선 제13대 명종(明宗) 때의 대학자 김장생(金長生.1548~1631)은 본관이 광산(光山)이요,

호는 사계(沙溪)이며, 시호는 문원(文元)으로 임진왜란 때 큰 전공을 세웠다.
  그는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가례집람(家禮輯覽)>.<상례비요(喪禮備要)>,<개장의(改葬儀)>

,<제의정본(祭儀正本)>,<예기기의(禮記記疑)>,<송강행록(松江行錄)> 등 2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특히 예론(禮論) 등을 깊이  연구하여 아들 집(潗)에게 계승시켰으며,

조선예학(朝鮮禮學)의 태두로 예학파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는 정묘호란(丁卯胡亂)을 겪고 난 다음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후진들의 교육에 전심하여,

 문하에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의 학자를 배출했다.
  그가 84세로 일생을 마치자 제자 송시열은 다음과 같이 그를 기렸다.
  “사계 선생은 젊을 때부터 한 번도 자기 집 밖에서 여색을 범한 일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 황강공이 평안감사로 있을 때 아버지를 다라 평양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도사(都事). 감사 밑에 있는 벼슬아치)로 있던 사람이

기생을 시켜서 갖은 방법으로 유혹하게 했으나 끝까지 흐트러짐이 없었다.”
  김장생은 엄격한 스승 송익필(宋翼弼)과 이이(李珥)에게서 글을 배웠다. 그가 송익필의 집에 기거하면서

 공부를 할 때 스승의 집이 가난하여 간장 하나 없이 소금만으로 밥을 먹어야 했다. 그러다가 집에 올 일이

 있어 오는 도중에 하인의 집에 들러 나물국을 얻어먹게 되었다. 소금반찬만 먹던 그의 입에는

나물반찬이 어지나 맛이 있었던지 그 나물국을 평생 못 잊어 했다.
  그는 제자 송시열, 송준길과 함께 서인(西人)의 중심으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이룩하여

 영남학파(嶺南學派)와 더불어 학문의 쌍벽을 이루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柵累造獄(책루조옥)
柵:목책 책, 累:더할 루, 造:만들 조, 獄:감옥 옥.
뜻: 울타리를 자꾸 만들다 보면 나중에는 자기가 앉은 자리가 감옥이 된다.

 즉 반대파를 배척하기 위하여 외부

     와 대화를 단절시키면 종래에는 자신이 고립되어 외톨이가 된다는 뜻이다.
문헌: 오상원 우화(吳尙源 寓話)
  살쾡이가 어쩌다 한 나라를 손아귀에 넣게 되었다. 그렇게 나라를 차지하기는 했으나 앞으로

닥쳐올 일들이 불안했다. 자기의 힘이 권좌를 누리기에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손아귀에 들어온 권좌를 그대로 내놓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른 동물들의 인심을 사기 위해 나라 안에 살고 있는 모든 동물들을 모아놓고 자기의 뜻을 공포했다.
  “그대들의 뜻이 곧 나의 뜻이요. 나의 뜻이 곧 그대들의 뜻임을 나는 믿고 있다.

그러니 모두들 기탄없이 내가 하는 일에 각자의 뜻을 밝히도록 하라.”
  그러나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많은 동물들이 살쾡이가 하는 일마다 어쩌니 저쩌니 시비를 걸었다.

불안해진 살쾡이는 급히 늙은 산양을 불렀다.
  “이러다간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다. 그러니 불평분자들을 모조리 나라 밖으로 추방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데……?”
  “그것은 아니 될 말씀입니다. 먼저 백성이 있고 나라가 있는 법입니다. 백성들이 불평을 한다고 나라 밖으로

하나 둘 몰아내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자고로 백성이 성하면 나라도 성하고, 백성이 쇠하면 나라도

쇠한다고 했습니다. 불평을 하는 백성들을 추방하다 보면 마침내 백성도 쇠하고 나라도 쇠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떡해야 좋단 말인가?”
  살쾡이는 쓴 입맛을 다시며 여우를 부르자, 여우가 말했다.
  “고을 밖에 사방으로 높게 울타리를 둘러치고 불평을 하는 자들을 그 울타리 밖에서 살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이웃 나라와의 경계에는 망루를 세워 단단히 감시를 하면 이웃 나라로 도망가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늙은 산양이 이를 가로막고 나섰다.
  “그렇게 된다면 온 나라 안을 감옥으로 만드는 결과가 되지 않을 까 두려움이 앞섭니다.

어느 때나 백성들에게는 적고 많고 간에 불평이 있는 법입니다. 그것을 너그러이 받아 주시는 것이

 바르게 다스리는 길이라고 생각됩니다.”
  “내 일에 반대하는 놈들은 바로 나를 업신여기는 놈들임이 분명하다. 그래도 관대하란 말인가?”
  살쾡이는 산양의 말이 못마땅해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여우에게 당장에 불평분자들을 가려내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살쾡이가 하는 일에 불평을 하던 백성들이 하나하나 가려졌다. 그리고 고을 밖에는

높은 울타리가 사방으로 쳐지고 불평분자들은 울타리 밖으로 모두 쫓겨났다. 늙은 산양도 그 속에 끼여 있었다.
  울타리 안은 평온했다. 그러나 그 평온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병아리처럼 순종하던 백성들 사이에서

또 불평의 소리가 수군수군 들려오기 시작했다.
  눈치 빠른 여우가 아뢰었다.
  “이들도 역시 울타리 밖으로 쫓아낸다면 결국 그 전에 쫓겨난 무리들과 합세하여 불평은 더욱 커지고 후에

더 큰 화근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하오니 이놈들은 전번 울타리 안쪽에 또 울타리를 치고

 그곳에서 별도로 살게 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그래서 먼젓번 울타리와 새 울타리 밖에는 쫓겨난 백성들이, 그리고 새 울타리 안에는 말없이 순종하는

백성들만 살게 되었다. 그러나 새 울타리 안의 평온도 잠깐일 뿐, 순종하던 백성들 사이에 또 불평이 일어났다.

그러자 이번에도 이들을 쫓아내기 위해 또 안쪽으로 새로이 울타리를 만들었다.

그렇게 불평분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자꾸자꾸 울타리를 만들다 보니 살쾡이는 마침내 자기가 거처하는

 바로 밖에까지 울타리를 만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늙은 산양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불평하는 백성을 울타리 밖으로 쫓아낸 게 아니라 자기가 울타리 속에 갇혀 버렸군.”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處善之勇(처선지용)
處:곳 처, 善:선할 선, 之:어조사 지, 勇용기 용.
뜻: <처선>의 용기라는 말로, 조선 연산군 시절의 내시 김처선의 강직한 행동에서 유래했다. 최악의 상황이 닥

     칠 것을 알면서도 불의에 맞서 바른 말을 하는 용기를 이르는 말이다.
문헌: 조선오백년야사(朝鮮五百年野史),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조선의 10대 연산군(燕山君.1476~1506)의 성품이 날로 포악해지고 방탕이 극에 달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정 대신들은 직언을 했다가는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 번했으므로 아무 말도 못하고 오히려 아첨만 일삼았다.
  환관 김처선(金處善.?~1505)은 나라꼴이 이 지경인데도 아무도 용기있게 나서서 간언(諫言)하는 사람이 없음을 안타까워한 나머지 자신이 죽음으로써 바로잡을 결심을 하고 가족들에게 말했다.
  “내가 오늘 입궁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테니 그리 알라.”
  그러고는 집을 나섰다.
  그날도 연산군은 많은 궁녀들을 거느리고 자신이 창안한 음란한 놀이 처용희(處容戱)를 벌이고 있었다.
  김처선이 분연한 자세로 연산군에게 말했다.
  “늙은 놈이 지금까지 네 분의 임금을 섬겼고, 글도 조금 읽었습니다마는, 고금에 전하와 같은 분은 처음입니다. 부디 이성을 찾으시어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선정(善政)을 베푸시옵소서!”
  배석했던 대신들은 질겁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불같이 노한 연산군이 김처선을 향해 직접 활을 쏘니 화살이 그의 옆구리에 박혔다. 그래도 그는 의연하게 말했다.
  “늙은 내시가 어지 목숨을 아끼겠습니까? 전하께서 오래도록 용상을 지키시지 못할까 봐 그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더욱 화가 난 연산군은 이번엔 김처선의 다리를 쏘았다. 그가 스러지자 연산군이 소리쳤다.
  “일어나서 걸어라. 어서 걸으란 말이다!”
  김처선은 연산군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전하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걸어다닐 수 있습니까?”
  그래도 김처선이 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자 연산군은 그의 다리와 혀를 자르게 하여 죽이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도 분이 풀리지 않아 그의 가족들까지 참수하고, 그래도 모자라 그의 부모의 무덤까지 파헤치게 했다.
  비록 환관(宦官)이긴 했으나 김처선은 용기 있는 신하(臣下)였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處容之哀(처용지애)
處:곳 처, 容:얼굴 용, 之:갈 지, 哀:슬플 애.
 뜻: <처용>의 슬픔이라는 말로, 신라시대에 아내를 역신에게 빼앗긴 <처용>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연인의   

      변심을 이르는 말이다.
문헌: 삼국유사(三國遺事)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 때에는 나라가 평안하여 서라벌 성안 백성들의 집은 모두 기와집이었고, 초가집은 한 채도 없었다. 거리엔 항상 피리소리가 흐르고, 기후가지도 사철 온화하여 삶이 매우 순조로웠다.
  어느 날, 헌강왕이 신하들을 데리고 개운포(開雲浦. 지금의 울산) 바닷가로 소풍을 나갔다. 그런데 대낮에 갑자기 바다에서 구름이 몰려와 사방이 어두컴컴해졌다. 갑작스런 변괴에 왕이 놀라니 일관(日官)이 말했다.
  “전하! 이것은 동해의 용(龍)이 무언가 불만이 있어 조화를 부리는 것입니다. 하오니 이를 풀어주는 조치를 해 주셔야겠습니다.”
  이에 왕이 그 근경에다 절을 짓겠노라고 약속을 하자 날씨가 금방 개었다. 왕은 일행이 머물던 그곳을 구름이 걷힌 곳이라 하여 개운포(開雲浦)라 명명했다.
  약속을 받은 동해의 용은 기뻐하며 아들 일곱을 데리고 왕 앞에 나타나 춤추고 노래했다. 그리고 일곱째 아들 처용(處容)을 왕에게 딸려 보내 정사를 보좌케 했다. 왕은 처용에게 급간(級干) 벼슬과 함께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짝지어 주었다. 처용은 밤만 되면 달빛이 밝게 비치는 월명항(月明港)에서 춤추며 놀았다.
  처용의 아내는 무척 아름다웠다. 때문에 그녀를 흠모하는 역신들이 사람모습으로 변장을 하고 밤중에 처용의 집으로 찾아와 그녀와 동침했다. 처용이 외출했다가 늦게 돌아와 보니 잠자리에 두 사람이 누워 있었다. 그러자 그는 노래를 지어 부르며 춤을 추었다.

     서라벌 밝은 달밤에 밤들이 노닐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일러라.
     둘은 내해인데 둘은 뉘해언고.
     본디 내해지마는 앗긴 것을 어찌할꼬.

  그러자 역신이 처용의 노래를 듣고 그 너그러움에 탄복하여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제가 공의 아내를 사모해 오다가 오늘 밤 그녀를 범했는데도 공은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시고 참으로 감복하는 바입니다. 맹세하노니 이후로는 공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만 보아도 그 안엔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그후로부터 사람들은 귀신을 물리치고자 할 때에는 문간에 처용의 얼굴을 그려 붙였다.
  헌강왕은 개운포에서 돌아와 곧 영취산 동쪽 기슭에다 절을 세우니 망해사(望海寺), 또는 신방사(新房寺)라고 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擲橘之情(척귤지정)
擲:던질 척, 橘:귤 귤, 之:어조사 지, 情:뜻 정.
뜻: 귤을 던져 애정을 표시한다는 말로, 고려시대 궁중여인들이 외간 남자를 유혹할 때 귤을 던졌던 고사에서

     유래했다. 남몰래 은근히 통정하는 행위를 말한다.
문헌: 고려사최세보전(高麗史崔世輔傳)
  고려 제19대 명종(明宗) 때 무관 최세보(崔世輔. ?~1193)는 판이부사(判吏副事)로 있으면서 뇌물을 많이 받아 거부가 되었고, 그 영향으로 아들 최비(崔斐)는 동궁(東宮)의 태자를 모시게 되었다. 그런데 최비는 외모가 출중하여 그 모습에 반한 태자의 비첩(婢妾)들이 귤을 던져 은근히 유혹하여 마침내 사통하게 되었다.
  당연히 엄중 처단될 일이지만 대장군 이의민(李義珉)이 그를 아껴 왕에게 직접 변호하여 무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와 정을 통한 비첩들에게는 그 죄를 물어 모두 비구니로 만들어 버렸다.
  최비는 여전히 간통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궁중의 풍기가 대단히 문란하고, 무신들의 행패가 심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궁중에서 여인이 남자를 유혹할 때는 귤을 던져 주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후일 최충헌(崔忠獻)이 집정(執政)하자 최비를 남방으로 귀양 보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天生配匹(천생배필)
天“하늘 천, 生:날 생, 配;짝 배, 匹:짝 필.
 뜻: 태어날 때 하늘이 정해준 배우자. 조선 선조 때 재상 윤명렬 부부에게서 유래한 말로, 운명적으로 맺어진

      부부를 말한다.
문헌: 매산집(梅山集), 고금청담(古今淸談)
  조선 제22대 정조(正祖) 때, 윤명렬(尹名烈.1762~1832)은 대단한 추남이었다. 어찌나 못생겼는지 과거에 합격하였으면서도 정승 채제공(蔡濟恭)의 눈 밖에 나 이름을 삭제당할 정도였다. 실의에 빠진 윤명렬이 어느 날 관상을 보니 관상쟁이가 말했다.
  “당신은 지극히 가난한 궁상(窮相)이니 그냥 가시오.”
  그 자리에는 여러 재상 가문의 자제들이 많이 있어서 부끄럽기도 하려니와 분하기도 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튿날, 뜻밖에도 관상쟁이가 윤명렬의 집으로 찾아와서 말했다.
  “어제는 아주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내가 어제 한 말은 전혀 거짓말이고 어른의 상은 어제 내가 했던 말과는 정반대로 지극히 귀한 사람이 될 상입니다. 내가 그 자리에서 사실대로 말하면 다른 대갓집 자제들이 시기를 하여 어른에게 해를 입힐까 걱정이 되어서 그랬던 것이니 널리 이해하십시오.”
  몇 해 후,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의 싸움이 심하여 청나라 황제로부터 이에 대한 해명을 하라는 독촉을 받고 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보고자(報告者)로 윤명렬을 파견했다.
  그는 청나라에 가서 그 임무를 원만히 마무리 지었고, 그 공으로 강원감사(江原監司)가 되었다.
  그런데 윤명렬의 부인도 처녀 적에 얼굴이 못생겨서 나이가 먹도록 출가를 못하다가 뒤늦게 윤명렬에게 시집와서 아들 넷을 낳았다. 그 맏아들은 판관(判官), 둘째아들은 목사(牧使), 셋째와 막내아들도 과거에 합격하였으며, 윤명렬 자신도 훗날 재상에 이르니 가문이 두루 번창하였다.
  노년에 접어들자 윤명렬이 부인에게 말했다.
  “내가 아니었으면 당신은 그 얼굴로 시집갈 길이 없었을 것이고, 나 역시 당신이 아니었더라면 이 얼굴로 장가를 들 수 없었을 것인데, 이제 우리는 등과한 아들 4형제를 둔 훌륭한 부부가 됐으니 이야말로 하늘의 뜻으로 맺어진 천생배필(天生配匹)인가 보오.”
  그는 새삼 감회에 젖어 지난날을 회상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靑紗燈籠(청사등롱)
靑:푸를 청, 紗:깁 사, 燈:등 등, 籠:대그릇 롱.
 뜻: 조선시대에 궁중이나 벼슬아치들이 사용하던 등• 대나무나 쇠살로 둥글거나 사각으로 틀을 만들고 

몸체는  파란 운문사(雲紋紗)로 두른 후 위아래에 붉은 천으로 동을 달아서 만들었다. \인생의 새 출발을 상징하는  의미로 쓰인다.
문헌: 조선풍물기(朝鮮風物記)


  청사등롱은 조선시대 정삼품에서 정이품의 벼슬아치가 밤에 사용하던 등롱이다. 그 모양은 대나무로 둥글게, 또는 사각으로 틀을 만든 후, 푸른 운문사(雲紋紗)로 몸체를 감고, 붉은 천으로 위아래에 동을 달아서 그 안에 촛불 혹은 등불을 밝히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 등롱의 용도가 전통 혼례에서 신랑(新郞)이 신부(新婦) 집으로 갈 때 앞세우고 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즉 우주 만물의 음양 화합을 기원하는 의미와 함께 집안의 번성을 축복하는 상징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혼례는 두 집안의 만남임과 동시에 하늘이 점지해 준 천생연분을 맞는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로 한 집안의 잔치이자 마을의 잔치이기도 하였다.
  또 남자가 결혼하는 것을 ‘장가간다.’ 또는 ‘장가든다.’고 하는데 이는 혼례식을 여자의 집에서 치렀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된 것이다. 또 장가가는 날 신랑이 백마(白馬)에서 내려 신부 집에 들어설 때 얼굴의 하반부를 가리는 파란 부채나, 신부가 초례청(醮禮廳)에 나올 때 수모(手母: 신부를 시중드는 여자)가 신부의 얼굴을 가리는 붉은 부채는 신랑 신부가 총각 처녀라는 표시이고, 부채를 거두는 것은 동정(童貞)을 주고받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혼례식을 올리고 신랑이 신부 집에서 3일 밤을 보낸 후 비로소 신부가 신랑 집으로 들어가는데 이를 ‘시집간다.’고 한다.
  청사초롱에서 홍색은 발전과 번영으로 양의 기운을 뜻하고, 청색은 포용과 탄생으로 음의 기운을 상징한다. 청사초롱에 밝히는 촛불은 축원, 제사, 고사 등 정성을 드리는 의례에 사용되는 불빛이다. 그래서 촛불은 어둠을 밝힘은 물론 인간의 마음을 정화하여 신성을 일깨우게 한다고 전한다.
  그래서 초는 성체이고 불꽃은 신성을 의미한다. 또 붉은색과 청색은 우리나라의 태극기의 홍색과 청색의 의미와 같은 것이다. 역학(易學)에서 태극은 우주 만물의 근원이 되는 본체(本体)라고 한다.
  어쨌든 청사초롱 불 밝히는 날은 좋은 날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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