草繩爲決(초승위결)
草:풀 초, 繩:줄 승, 爲:할 위, 決:맺을 결.
뜻: 새끼줄이 결정하다. 즉 새끼줄의 상태에 따라 일이 결정된다는 말로 두 머슴에게서 유래했다. 어떤 일을 결
정함에는 그 중심적 역할을 하는 일이 따로 있다는 의미로 쓰인다.
문헌: 한국오천년야사(韓國五千年野史)
어느 마을에 두 젊은이가 부자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살았다. 둘은 집안이 가난해서 간신히 끼니를 이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건넛마을 대감댁에서 머슴 두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두 사람은 곧장 찾아가서 자기들을 써 달라고 간청했다.
“그래, 너희 둘이 머슴살이를 하겠다고? 보아하니 힘든 일을 해보지 않은 것 같은데 할 수 있겠느냐?”
“예. 대감마님. 농사일이라면 안 해 본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일을 하는데 중요한 것은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또 머리를 써서 효율적으로 하는 명석함이 아니겠습니까?”
대감은 두 사람의 말을 듣고 그들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 좋다. 그런데 얼마 동안이나 내 집에 있을 생각이냐?”
“예, 삼 년 동안 성실하게 일하여 새경을 모을 생각입니다.”
두 사람은 그날부터 성실하게 일을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익힌 터라 어떠한 일이든 척척 해냈다. 힘겨운 일도 마다하는 법이 없었다. 대감은 마음이 흐뭇했다.
어느덧 삼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받은 새경으로 얼마간의 땅을 마련한 두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였다. 그들이 떠날 때가 되자 대감은 몹시 섭섭했다.
“여보게들, 몇 년 만 더 있어 주게. 내 새경을 두 배로 올려 줌세.”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었으니 이제 돌아가서 부모님을 봉양하며 살까 합니다.”
기특한 그들의 말에 대감도 더 이상 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떠나야지. 그동안 일을 열심히 해주어서 고맙네. 그런데, 마지막으로 오늘 저녁에 가는 새끼를 한 다발씩만 꼬아 주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 사람은 시원하게 대답을 했지만 다른 한 사람은 몹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제기랄! 떠나가는 날까지 일을 시킬 게 뭐람.”
“하지만 대감님의 마지막 부탁인데 모른 척해서야 되겠나?”
“하고 싶으면 너나 해. 나는 볼 일이 있어 나갔다 올 테니까.”
한 사람은 나가고 남은 젊은이는 혼자서 부지런히 새끼를 꼬았다.
한편, 밤이 깊어서야 돌아온 젊은이는 친구가 꼬아 놓은 새끼를 보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부랴부랴 새끼를 꼬기 시작했으나 졸립기도 하고 성의가 없다 보니 새끼가 되는 대로 울퉁불퉁 꼬아졌다.
다음날 아침, 두 사람은 각각 자기가 꼰 새끼줄을 가지고 대감에게로 갔다.
“대감마님, 말씀하신 새끼줄을 여기 가져왔습니다. 이제 저희들은 떠나도 되겠지요?”
“그래, 수고들 했네. 떠나는 날까지 내 청을 들어주었으니 그 대가로 선물을 주고 싶네. 그 새끼를 들고 나를 따라오게.”
대감은 두 사람을 광으로 데리고 가서 말했다.
“자네 두 사람이 성실하게 일해 준 덕분에 나는 더 큰 부자가 되었네. 자, 보게나.”
그러고 보니 그곳에는 엽전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자, 여기 있는 엽전들을 자네들이 꼰 그 새끼줄에 꿸 수 있는 만큼 최대한으로 꿰어 가지고 가게.”
너무 뜻밖의 말이라 두 사람은 깜짝 놀라 멍하니 서 있었다.
“무엇들 하고 있나? 어서 엽전을 꿰지 않고…….”
두 사람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엽전을 새끼줄에 꿰기 시작했다.
그런데 새끼줄을 가늘고 고르게 잘 꼰 젊은이는 엽전을 많이 꿸 수 있었으나, 굵고 거칠게 꼰 젊은이는 도무지 꿸 수가 없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성실하게 일했던 젊은이는 제대로 된 새끼줄 덕분에 엽전을 많이 꿰어 와 부자가 되고, 게으름을 피운 젊은이는 엽전 몇 닢만을 들고 올 수밖에 없었다.
시종여일(始終如一)이라는 말처럼 처음과 끝이 같을 때 아름다운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追鷄之犬(추계지견)
追:따를 추, 鷄:닭 계, 之:어조사 지, 犬:개 견.
뜻: 닭을 쫓는 개라는 말로, 어떤 일을 하다가 실패했을 때의 낭패감을 이르는 말이다.
문헌: 한국문화상징사전(韓國文化象徵辭典)
새벽을 알리는 닭은 빛의 도래를 예고하고, 날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상에서 생활하는 태양의 새이다. 그래서 닭은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으로, 혼돈에서 조화로 이행하는 우주적 질서를 예고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천황이란 닭이 머리를 고고하게 쳐드는데서 유래했고, 지황이란 날개를 가지고 퍼덕거리는 데서 유래했으며, 인황은 꼬리를 치켜세우면서 크게 우는 데서 유래했다. 그래서 닭을 신성조(神聖鳥)로 치기도 한다.
마당에서 모이를 쪼아 먹고 있는 닭에게 황소가 말을 건넸다.
“나는 허구한 날 온갖 힘든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먹는 것은 겨우 콩 껍질 아니면 짚 나부랭이인데 너는 온종일 하는 일도 없이 놀면서 맛있는 곡식만 먹으니 참으로 부럽구나.”
황소의 이야기를 듣고 닭이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 너는 배운 것이 아무것도 없잖아. 그래서 힘든 일을 해도 먹는 게 변변찮은 거야. 나는 학문이 깊어서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 주기 때문에 그렇게 힘든 일을 안 하고도 좋은 곡식만 먹는 거란다.”
옆에서 보고 있던 개가 끼어들었다.
“닭, 이 고얀 녀석아. 그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어디서 함부로 하는 거냐? 황소는 그렇다 치고 나만 해도 밤잠을 자지 않고 도둑을 지켜 주는 대가로 겨우 버리는 밥이나 얻어먹는데, 뭐? 네가 학문이 깊어서 좋은 쌀을 먹는다고?”
개의 질타에 닭이 다시 거만하게 말했다.
“무슨 섭섭한 말씀! 나는 이렇게 좋은 비단옷을 입고, 머리에 붉은 관을 썼으니 벼슬한 양반이 분명하잖아.”
“흥! 잘도 끌어댄다.”
“너희들은 멍청해서 모르겠지만 내가 먼동이 터 올 때마다 ‘꼬끼요’ 하고 우는 것도 다 뜻이 있는 거란 말이야. 한자로 쓰면 고할 고(告)자와 그 기(其)자, 중요 요(要)자, 즉 ‘고기요’이니, 이는 중요한 것을 알린다는 뜻이란 말이야. 생각해 봐! 개, 네가 짖는 소리엔 아무런 뜻도 없잖아?”
닭은 한껏 뽐내며 말을 이었다.
화가 난 개는 분을 참지 못해 닭에게 달려들어 볏을 물어뜯어 버렸다. 그러자 닭이 홱 뿌리치고 지붕으로 올라가 개를 내려다보며 놀렸다.
“이 녀석아, 여기는 올라올 수 없지?”
개는 닭을 놓치고 씩씩거리며 지붕만 쳐다보고 있었다.
닭의 볏이 톱니처럼 된 것은 이때 개에게 물렸기 때문이고, 이렇게 해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는 말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抽卒倒首(추졸도수)
抽;뺄 추, 卒:군사 졸, 倒:쓰러질 도, 首:머리 수.
뜻: 부하들을 빼내 그 대장을 쓰러지게 하다.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던 송립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
로, 기둥을 빼내 집이 무너지게 하는 것처럼 어떤 일을 타개하는 결정적 전략을 뜻한다.
문헌: 춘파당일월록(春坡堂日月錄)
조선 제16대 인조(仁祖) 때 무관 송립(宋岦)은 대를 이어 국가에 충성을 바친 충신이었다.
그의 나이 11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송립의 아버지는 의병이 되어 왜군과 사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때문에 송립은 집안을 이끌어 가느라 나이 30이 넘어 광해군 8년 때서야 무과에 급제했다.
그는 성격이 대담하고 두뇌가 명석해서 급제하자마자 대번에 이괄(李适) 장군의 마음에 들었다.
이괄은 인조반정 후 평안병사가 되자 송립을 데리고 임지로 갔다. 그때 벌써 난을 일으킬 마음이 있었던 이괄은 임지에 도착하자 송립에게 말했다.
“송 군관, 당장 자산 고을로 가서 군량미를 모아 주게, 필요하면 강권을 써도 좋네.”
이괄의 속뜻을 모르는 송립은 그의 지시대로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그러던 중에 이괄의 반란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나라의 녹을 먹는 군인이 반란을 도모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는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날로 자원해서 이괄의 반란군에 가담했다. 그러자 송립의 숨은 뜻을 모르는 이괄은 매우 좋아하며 말했다.
“송 군관, 고맙소. 후일 거사가 성사되면 그대를 크게 중용하겠소. 지시한 군량은 어찌 되었소?”
“네, 명령하신 대로 자산 고을에 모아 두었습니다.”
“잘했소. 앞으로 송 군관을 절대 신임하겠소.”
이괄은 새삼스럽게 송립의 손까지 잡으며 말했다.
“내 그대에게 장병 3천을 줄 테니 선봉장이 되어 관군을 격파해 주시오.”
그렇게 해서 이괄의 신임을 얻은 송립은 되도록 많은 군사를 배정 받은 후, 그 군사들을 모두 거느리고 탈출함으로써 이괄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렇게 해서 송립은 난을 평정하는 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그 후, 송립은 병자호란에도 목숨을 걸고 싸워 벼슬이 정2품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畜心同人(축심동인)
畜:짐승 축, 心:마음 심, 同:같을 동, 人:사람 인.
뜻: 동물의 마음도 사람의 마음과 같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인권은 물론이고, 동물까지 존중하는 것을 의미한
다.
문헌: 지봉유설(芝峰類說)
고려 말기에서 조선 세종(世宗) 시대에 이르기까지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던 문신 황희(黃喜.1363~1452)는 본관이 장수(長水)이고, 호는 방촌(庬村)이며, 시호는 익성(翼城)으로 영의정을 18년간이나 역임했다.
그는 인품이 후덕하고 생활 또한 청렴했다.
그가 젊었을 때, 하루는 누런 소와 검은 소 두 마리로 논을 갈고 있는 농부에게 물었다.
“어느 소가 일을 더 잘 하오?”
그러자 농부는 가까이 와서 소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짐승의 마음도 사람의 마음과 똑같습니다. 만약 잘하고 못 한다는 평을 직접 듣는다면 잘한다는 말을 들은 소는 기뻐하겠지만 못 한다는 말을 들은 소는 기분이 좋지 않을 것입니다.”
황희는 짐승들의 마음까지 헤아리는 농부의 인품에 크게 감동하여 평생의 교훈으로 삼았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忠不避死(충불피사)
忠:충성 충, 不:아니 불, 避:피할 피, 死:죽을 사.
뜻: 충절은 죽음도 피하지 않는다. 선조 때의 충신 고종후의 삼부자가 왜적을 무찌르려다 모두 순절한 고사에
서 유래했다. 충성이 대단한 것을 이른다.
문헌: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고종후(高從厚.1554~1593)는 조선 제21대 영조(英祖) 때 사람으로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낸 고경명(高敬命.1533~1592)의 큰아들이다. 그가 24세에 문과에 급제해서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나이가 60이 넘어 노쇠한 고경명이 그에게 말했다.
“내가 비록 늙었으나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더욱이 나는 누구보다도 나라의 녹을 많이 먹은 사람이니 지금이야말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때다. 그래서 의병을 모집하여 주상(主上)의 뒤를 따르고자 한다.”
그의 말 속에는 분연한 기개가 넘쳤다. 고종후가 말했다.
“네, 아버지. 저도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둘째 아들 인후(因厚)도 따라나섰다.
“형님, 저도 아버님을 보필하겠습니다.”
고경명은 친구 유팽로(柳彭老)와 협동하여 천 명이 넘는 의병을 모집하여 금산(錦山)에서 왜군과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상대방은 잘 훈련되고 신무기를 가지고 있는지라 갑자기 편성된 의병과는 전력 차이가 심했다. 그래서 아버지 고경명과 동생 인후를 비롯하여 많은 병사들이 죽고 말았다.
고종후는 스스로 나서서 의병을 진두지휘하면서 길을 바꾸어 남쪽으로 내려갔다. 부대가 하동에 이르렀을 때 진주성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곧바로 진주성(晋州城)으로 갔다.
그들이 진주성에 들어간 날은 성이 왜군에게 포위된 지 9일째 되는 날이었다. 피로에 지친 병사들을 독려하여 진주성으로 들어가 최선을 대해 싸웠으나 장수 황진(黃進), 김준민(金俊民), 정상윤 등이 속속 죽어 가자 병사들은 사기가 떨어지고, 진주목사마저 도망쳐 버려 왜병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고종후는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최후까지 용감하게 싸웠으나 워낙 중과부적이어서 사로잡힐 위기에 몰리자. 남강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그는 훗날, 나라를 구하려다가 목숨을 바친 공로가 인정되어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추증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衝意突厄(충의돌액)
衝:부딪칠 충, 意:뜻 의, 突:나타날 돌, 厄:재앙 액.
뜻: 의견이 충돌하면 뜻하지 않은 재앙이 돌발한다는 말로, 모든 일은 순리대로 해야 한다는 뜻.
문헌; 유달순한담(劉達順閑談)
홀어머니를 모시고 옹기(甕器) 장사를 하여 근근이 생계를 꾸려가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심성(心性)이 착하여 어머니를 효성스럽게 모셨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입맛이 없다며 진지를 드시지 않았다.
청년은 그런 어머니를 보고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고기를 사 드리기 위해서 옹기그릇을 지게에 지고 시장으로 팔러 나섰다.
그가 산 중턱에 올라 옹기 지게를 세워놓고 잠시 땀을 식히고 있는데 갑자기 거센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치더니 지게를 넘어뜨려 옹기그릇들이 다 깨지고 말았다.
상심한 청년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생각 끝에 고을 원님을 찾아가 하소연했다.
“저는 어머니를 모시기 위하여 옹기장사를 하는데 오늘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어와 옹기그릇이 다 깨지고 말았습니다. 식사도 드시지 못한 채 저만 기다리시는 어머니께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난감합니다. 하오니 좋은 방도를 좀 강구해 주십시오.”
자초지종을 다 들은 원님이 이방을 불러 말했다.
“여봐라, 지금 부둣가로 나가서 남쪽으로 가려는 배 주인과 북쪽으로 가려는 배 주인을 찾아 데리고 오너라.”
그래서 두 선주가 영문도 모른 채 붙들려 오자 원님이 물었다.
“너는 언제 북쪽으로 떠나려고 하느냐?”
“예, 남풍이 불기만 하면 떠날 겁니다.”
“그래? 그럼 지금까지 물 하고 있었느냐?”
“어서 남풍이 불어라 하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래, 그랬겠지.”
원님은 이번에는 남쪽으로 가려던 배 주인을 향해 물었다.
“너는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느냐?”
“예, 북풍이 불기만을 기도드리고 있었습지요.”
원님은 두 배의 주인을 나란히 앉혀 놓고 불호령을 내렸다.
“너희 둘이 서로 ‘북풍아 불어라, 남풍아 불어라.’ 하고 빌고 있으니 바람이 어떻게 할 줄을 몰라 뱅뱅 돌다가 회오리바람이 되어 여기 이 사람의 지게를 넘어뜨려 옹기그릇이 모조리 깨어지고 말았다. 따라서 너희 둘의 죄가 적지 않으니 벌을 받겠느냐, 아니면 옹기그릇 값을 내놓고 가겠느냐?”
원님의 불호령에 놀란 선주들은 옹기그릇 값을 내놓고 도망치듯 가 버렸다. 원님은 청년에게 옹기그릇 값을 주면서 말했다.
“네 효성이 지극하도다. 어서 가서 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하도록 하여라.”
이렇게 해서 청년은 고기를 사서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七朔偉人(칠삭위인)
七:일곱 칠, 朔:달 삭, 偉:훌륭할 위, 人:사람 인.
뜻: 일곱 달 만에 태어난 큰 인물이라는 말로, 한명회에게서 유래했다. 태어날 때에는 부족해도 나중에 잘 되는
경우를 일컫는다.
문헌: 추강냉화(秋江冷話), 해동잡록(海東雜錄)
조선 제7대 세조(世祖)에서 성종(成宗)에 이르기까지 영화를 누렸던 한명회(韓明澮.1415~1487)는 본관이 청주(淸州)이며, 호는 압구정(鴨鷗亭)이며,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그는 칠삭둥이로 태어났으나 일등공신을 네 번, 영의정을 두 번, 국구(國舅: 임금의 장인, 예종 비 장순왕후(章順王后)와 성종 비 공혜왕후(恭惠王后) 의 부친)를 두 번이나 지내는 화려한 삶을 살았다.
그는 안을 수도 없는 칠삭둥이 미숙아로 태어난 데다가 부모까지 일찍 여의어 늙은 여종이 돌봐 길렀는데 뜻밖에 무럭무럭 잘 자랐다.
그 후 영통사(靈通寺)라는 절에 들어가 공부하는 동안 권남(權擥.1416~1465)과 막역지우로 사귀며 수양대군을 도와 군기녹사(軍器錄事)가 되었다. 그 후 수양대군이 세조(世祖)로 등극하자 우승지(右承旨)가 되어 단종 복위 운동을 저지했다. 그 공로로 도승지(都承旨), 이조, 병조판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이어 우의정, 좌의정, 그리고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1453년에 단종(端宗)이 폐위될 때는 김종서(金宗瑞),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을 참형하게 한 후, 일등공신이 되어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죽은 후에는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연산군의 어머니 윤비(尹妃)의 폐위에 가담했다 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 무덤을 파서 관을 쪼개어 목을 베는 극형)를 당했다가 훗날 다시 복원되었다.
지금 서울 강남구의 압구정동이라는 이름은 그곳에 있었던 그의 별장, 압구정자에서 유래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七歲立春(칠세입춘)
七:일곱 칠, 歲:해 세, 立:설 립, 春:봄 춘.
뜻: 일곱 살에 입춘방을 쓰다. 즉,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한다는 뜻.
글씨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에게서 유래했다.
문헌: 대동기문(大東奇聞)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조선 말기의 서예가로서 역대 명필들의 글씨 중 장점을 모아서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 즉 추사체를 완성시켰다. 그는 벼슬을 이조참판까지 지냈고, 학문연구에는 실사구시(實事求是)가 중요함을 역설했다. 그는 유난히 호가 많은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추사(秋史), 완당(阮堂), 시암(詩庵), 과파(果坡), 노과(老果) 등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글씨를 잘 써서 일곱 살 때 대문에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는 입춘방을 써 붙였다. 그런데 마침 재상 채제공(蔡濟恭)이 지나다가 그 글씨를 보고 그의 아버지 김노경(金魯敬)과는 사이가 좋지 못한데도 집 안으로 들어갔다. 김노경은 의외인지라 놀라 물었다.
“대감이 어인 일이십니까?”
“아, 대문에 붙어 있는 글씨가 너무 좋아 누가 썼는지 궁금해서 들렸소이다. 대체 누구의 글씨입니까?”
김노경이 아들이 쓴 글씨라고 하자 채제공이 말했다.
“이 아이는 반드시 명필로 크게 될 것이오. 그러나 글씨의 대가가 되면 운명이 순조롭지 않을 터, 그러므로 글씨 공부는 그만두고 글공부에 힘스는 것이 좋은 것이오.”
그러나 그의 글씨 공부는 멈추지 않았고, 글공부도 뛰어난 재질을 보였다. 나중에 김정희는 윤상도(尹尙度)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귀양을 갔다가 8년 만에 돌아오는 역경을 겪었다.
그는 24세 때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곳에서 당대의 거유(巨儒) 완원(阮元), 옹방강(翁方綱) 등과 막역하게 사귀면서 그들의 필체를 연구, 그들의 장점을 모아 자기만의 독특한 서체를 체계화시켰다.
그의 글씨는 패기가 충천하며 필력이 힘차 감히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일가를 이루었다.
예서(隸書), 행서(行書) 외에 모든 서체에 뛰어났지만 그 중 예서와 행서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여 내외의 격찬을 받았으며, 조선 후기의 서예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채제공의 말대로 글씨 탓이었는지 그의 일생은 순탄치 못했다. 벼슬도 이조참판에 그쳤고, 자손 또한 없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