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암(自菴)김구선생의 축수가 권창호 포항문화원장 소장
오리의 짧은 다리 학의 다리 되도록애 검은 가마귀 해오라비 되도록애 향복무강(享福無疆)하샤 억만세를 누리소서
1. 오리의 짧은 다리 - 원문에는 '올해 댤은 다리'로 되어 있다. 2. 되도록애 - 애는 되도록을 힘주는 말씨. 될 때까지 3. 해오라비 - 해오라기의 옛말 4. 향복무강(享福無疆)하사 - 언제까지나 복을 누리시어 5. 억만세 - 억만 년
오리의 짧은 다리가 학의 다리처럼 길어질 때까지, 검은 까마귀가 해오라기처럼 흰 털과 깃이 될 때까지, 무궁투록 복을 누리시며 억만 년까지라도 잘 사소서.
어느 달 밝은 밤에 김구가 옥당에 수직(守直)하게 되매, 낭랑한 목소리로 책을 읽고 있었다. 중종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달이 밝은지라 후원에 나왔다가 그대의 맑은 음성에 마음이 끌리기로 찾았노라. 이런 때에 어찌 군신의 예를 가릴 것이랴. 마땅히 붕우로써 사귈지어다'하시며 별감으로 하여금 주찬(酒饌)을 가져 오게 하고, 군신이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이다가 노래도 잘할 터이니 한 번 불러 보라고 함에감격하여 즉석에서 연시조 두 수를 지어 바쳤다. 그 중의 하나이다. 이 시조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표현하여, 영원한 복을 축수하고 있다. 오리의 다리가 학의 다리같이 될 수는 없을 것이며, 까마귀가 백조가 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될 때까지 오래 오래 사셔서 이 나라 이 백성을 다스려 달라고 비는 마음을 어찌 지나친 과장이라고만 하겠는가? 우리 시가에 있어서 이런 유형의 비유는 흔히 쓰이는 것이다.
이 유래를 보면 중종 임금은 멋을 아는 분이고, 김구는 재치있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멋과 재치 뒤에 숨어 있는 두 분의 사람됨을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
중종은 연산의 폐정을 바로잡고, 널리 인재를 등용한 임금으로 신하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신 분이었고, 김구는 선비로서 제세의 큰 뜻을 품고 있던 사람으로 중종에 대하여 평소 존경과 충성이 두터웠던 것이다. 이런 두 사람이었으므로 이런 운치 있는 이야기를 남기게 되었을 것이다.
<오리의 짧은 다리> 【시조】- 김구(金絿) 오리의 짧은 다리 학의 다리 되도록애 검은 가마귀 해오라비 되도록애 향복무강(享福無疆)하샤 억만세를 누리소서. 【어구 풀이】 <오리의 짧은 다리> : 원문에는 '올해 댤은 다리'로 되어 있다. <되도록애> : 애는 되도록을 힘주는 말씨. 될 때까지 <해오라비> : 해오라기의 옛말 <향복무강(享福無疆)하사> :언제까지나 복을 누리시어 <억만세> : 억만 년 【현대어 풀이】 오리의 짧은 다리가 학의 다리처럼 길어질 때까지, 검은 까마귀가 해오라기처럼 희게 될 때까지, 무궁토록 복을 누리시며 억만 년까지라도 잘 사소서. 【해설 지은이가 달밤에 옥당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중종 임금께서 그 소리를 들으시고 술을 내리시며, 노래도 잘할 터이니 한 번 불러 보라고 술가지 내다주시매, 감격하여 즉석에서 지은 연시조 두 수를 지어 바쳤다. 그 중의 하나이다. 김구의 <자암집(自庵集)>에 따르면, ‘중종깨서 달밤에 자암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노래도 잘 할 터이니, 한 번 부르라고 술까지 내리어 명하므로, 즉창(卽唱)으로 지은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 시조의 배경이 되어 있는 중종(中宗)은 조선 역대 왕 중 가장 호학(好學)하던 명군(明君)의 한 분인 성종(成宗)의 둘째아들이요, 또 유래 드문 폭군이었던 연산군(燕山君)의 뒤를 이은 임금이요, 근 40년간이나 장기(長期) 재위(在位)한 임금이다. 【개관】 ▶지은이 : 김구(金絿) ▶갈래 : 평시조, 서정시 ▶성격 : 축수가(祝壽歌) ▶주제 : 임금님의 향복무강을 빎 ▶출전 : <자암집(自菴集)> 【감상】 중종은 명군 성종의 둘째 아들이요, 폭군 연산군의 뒤를 이여 근 40년간이나 선정을 베푼 어진 임금이다. 청년 시절을 연산군 치하에서 지내 온 지은이가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현군을 맞이하여 온 백성의 숭앙을 받는 임금의 남다른 총애에 대한 감격이기에 각별한 데가 있을 것이 아닌가. 이런 배경으로 미루어 볼 때, 이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사실도 납득이 될 것이다. 중종은 즉위하자 연산군의 폐정(弊政)을 바로잡고, 문벌세가(門閥勢家)의 횡포를 막고자 현량과(賢良科)를 채택하는 등 쇄신책을 썼다. 여기에서 이 노래의 뜻이 풀린다. 지은이 김구는 20세 전후를 연산군 치하에서 보냈다. 그러므로 이 시조의 본뜻은, 단순히 중종(中宗)이라는 한 임금으로부터 개인적인 은총을 받았다는 데 대한 단순한 감격과 같은 것은 아예 아니다. 지은이도 제세(濟世)의 포부에 살던 선비인 만큼 그리 졸(拙)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므로 서정개신(庶政改新)으로 혁세(革世)의 의지를 보인 중종에 대한 국민적 존경의 뜻으로 노래한 것임을 이해해야만 이 시조 전체의 참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이상보 : <명시조감상>(1970) - 이 시조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표현하여, 영원한 복을 축수하고 있다. 오리의 다리가 학의 다리같이 될 수는 없을 것이며, 까마귀가 백조가 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될 때까지 오래 오래 사셔서 이 나라 이 백성을 다스려 달라고 비는 마음을 어찌 지나친 과장이라고만 하겠는가? 우리 시가에 있어서 이런 유형의 비유는 흔히 쓰이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 고려가요의 <정석가> 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라 하겠다. 불가능한 현상을 제시하고 그 절대성을 강조하는 수법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일종의 종교적인 신념이나 염원 같은 것이 깃들어 있음을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짧은 오리의 다리가 학의 다리같이 될 수는 없는 것이며 검은 까마귀가 흰 백로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조는 불가능한 것, 비현실적인 것을 가능한 것, 현실적인 것으로 표현하여 영원한 복(福)을 축수(祝壽)하고 있다. 물론 이는 지나친 과장이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 가능성의 유무를 떠나 그 표현 안에 담긴 의미를 읽어야 한다. 이렇게 오리가 학이 되고 까마귀가 백로가 될 때까지 임금께서 오래오래 사셔서 이 나라 백성을 다스려 달라고 비는 마음을 어찌 지나친 과장이라고만 하겠는가. ------------------------------- ☞ (주) 김구가 중종에게 바친 시조 두 수 중 나머지 한 수는 다음과 같다. 【시조】 나온댜 금일이야 즐거온댜 오늘이야. 고왕금래(古往今來)에 유(類)없는 금일이여 매일이 오늘 같으면 무삼 성이 가시리. 【현대어 풀이】 좋구나 오늘이여! 즐겁구나 오늘이여! 옛날에도 다시 없는 오늘이여! 날마다 오늘만 같다면야 무슨 걱정이 있겠다고 속을 썩히겠는가?
조선 중기의 문신 및 서예가. 字는 대유(大柔), 호는 자암(自菴), 아버지는 증좌승지(贈左承旨) 계문(季文)이며, 어머니는 증숙부인(贈淑夫人) 전의이씨로 현감(縣監) 겸인(兼仁)의 딸이다. 한훤당 김굉필의 문인으로 1507년(중종 2) 생원 진사 양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13년(중종 8) 별시 문과 2등 1인으로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가 되고 저작박사, 수찬, 교리등을 역임하였으며 이조좌랑에 옮겼다가 곧 정랑으로 승진되었다.
안평대군 한호(한석봉) 양사언으로 더불어 조선전기 4대 서예가로 알려졌다. 그의 글씨체는 독특하여 인수체(仁壽體)라고 하였으며 중국 사람들이 그의 글씨를 다 사가지고 가서 현재는 거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사간원 헌납, 사간, 장악원정을 거쳐 홍문관 응교, 전한으로 이배(移拜)되었으며 항상 응교를 겸임하였다. 한 때 성균관 사성으로 휴가를 받아 옥당에서 글을 읽었는데 어느날 밤 촛불을 밝히고 글을 읽을 무렵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보니 임금이 서 있고 그 옆에 별감이 술병을 들고 서 있었다. 깜짝 놀라 엎드리니 중종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달이 밝은데 글 읽는 소리가 들리기에 내 여기에 왔노니 어찌 군신의 예가 필요하리요" 하며 술을 같이 마셨다. 곧 승정원 동부승지에 오르고 좌승지로 승진 되었다가 부제학에 이르렀고 호당에 들어갔다. 이 때 중종은 조광조, 김구, 김식, 김정등 젊은 사류를 등용하여 성리학을 장려하고 문민정치를 구현하여 왕도정치를 실현하고 종전의 제도를 혁신하려 했다. 그러나 남곤, 심정등이 원한을 품고 임금에게 대역으로 모함하여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나 나이 31세로 개령에 유배되었다가 곧 남해로 귀양중 화전별곡을 지었는데 문학적인 작품으로 유배가 아니고서는 생각해 낼 수 없는 귀한 소산이 아닐 수 없고 이런 작품은 음양으로 후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1531년(중종 26) 임피(臨陂: 현 옥구군)로 이배(移配)되었다가 1533년(중종 28) 석방되어 향리로 돌아와 보니 그 동안 부모가 구몰하였다. 부모의 산소에 가서 통곡하다가 기절까지 하였고 여막을 지어 조석으로 통곡함에 풀이 다 말라 버렸다 하며 이로 인해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효우가 돈독하였고 학문이 고매하였으며 조선 전기, 중기 4대 명필의 한사람이며 서울 인수방(仁壽坊)에서 살았으므로 공의 서체를 인수체라고 한다. 선조조에 광국원종 1등공신에 추록되고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추증 되었다가 영조때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가 증직되었다. 시호는 문의공(文懿公)이며, 예산의 덕잠서원(德岑書院), 임피의 봉암서원(鳳巖書院), 남해의 죽림서원(竹林書院), 장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에 배향되었다. 묘(墓)는 예산군 신암면 종경리이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國史大事典, 東國筆苑, 海東名臣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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