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해인 헌종3년(1837) 김유근은 공조판서(1월 19일)겸 가례도감 제조가 되어(2월 6일) 11세인 헌종의 왕비를 8촌 아우 김조근(1893~1844)의 따님(10세)으로 결정해 안동김씨 세도의 기틀을 더욱 다져 놓는다. 그러나 호사다마로 이해 겨울에 김유근은 중풍에 걸려 실어증의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한편 김노경은 헌종 4년(1838) 3월 30일에 73세로 서거한다. 그는 안동김씨 세도의 그늘 아래서 30여년 권좌에 앉아 부귀를 누리다가 익종 대리청정 시에 왕세자의 측근으로 안동김씨를 배신했다 하여 말년은 4년동안 고금도에 위리안치되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세도를 잡은 김유근의 배려에 의하여 판의금부사의 요직에 복귀해 있다. 돌아간 것이다.
그래서 추사가 복상을 위해 일체의 관직에서 물러나니 추사는 세도 쟁패의 와중에서 일시 무관한 상태가 된다. 그러나 추사가 상을 지내는 동안 김유근이 병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폐인이 되자 안동김씨의 세도는 몹시 흔들리게 됐으니 대왕대비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듯 조인영과 권돈인을 주축으로 하는 풍양조씨 세력이 점차 자리를 굳혀간다.
이에 안동김씨들은 심각한 위기감 속에서 추사가 탈상하고(生父인 까닭에 기년복(朞年服)을 입어 1년만에 탈산했다.) 헌종 5년(1839) 5월 25일 형조참판으로 복귀하자 그의 거취를 예의주시한다.
그런데 결국 그들이 우려하던 대로 추사는 조인영, 권돈인과 삼위일체가 되어 요로의 자리를 장악하면서 요로의 자리를 장악하면서 헌종의 친정을 도모해가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7월 17일에는 권돈인으로 이조판서를 삼고 10월 21일에는 조인영을 우의정으로 올려놓더니 헌종 6년(1840) 6월에는 추사를 동지부사로 임명한 것이다.
안동김씨들은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사태가 벌어졌다고 판단했다. 대청통으로 청에 가기만 하면 청의 학예계를 주름잡으면서 무궁한 영향력을 행사할 추사가 조씨 세력의 핵심이 되어 연행한다는 것은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나 마찬가지 격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안동김씨들이 체면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최후 수단을 강구하게 된다.
우선 안동김문 중에서 김유근을 대신할 수 있는 인재로 지목되는 대왕대비의 6촌 남형(男兄, 오빠) 김홍근(金弘根, 1788~1842)을 6월 30일자로 대사헌에 임명하고 7월 4일에는 권돈인을 이조판서에서 형조판서로 옮겨 놓은 다음 7월 9일에는 김유근 따님의 시아버지인 이기연(李紀淵, 1783~1858)을 판의금부사로 임명한 뒤에 7월 10일에 김홍근이 사직소를 올리면서 엉뚱하게 10년전에 일어났던 윤상도옥를 재론하고 김노경 부자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미 그것은 김유근이 다시 세도를 잡으면서 사면했던 옥사로 이를 재론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데 불쑥 이를 들고 나왔던 것이다. 이를 위해 안동김문은 이미 이 옥사를 일으킨 장본인인 김우명(金遇明)을 지난해부터(6월 17일) 대사간의 자리에 앉혀 대기시키고 있었다. 양사가 계획적으로 들고 일어났으니 빠져나갈 길은 없었는데 가장 앞장서서 이를 구원해야 할 권돈인으로 하여금 이 옥사를 직접 다스리게 해 당혹과 혼란으로 더욱 갈피를 잡을 수 없게 함으로써 함정으로 몰아넣었다.
그래서 7월 11일에는 우선 추사 형제들을 사판(仕版)에서 간거(刊去)함으로써 일단 추사의 연행길을 막아놓고 7월 12일에는 김노경을 추삭(追削)했다. 그러자 추사는 11일에 일단 동대문 밖 검호(黔湖) 별서(別墅)로 나가 대기하고 있게 되는데 이 옥사가 워낙 무옥(誣獄)인 때문에 조파에서도 만만히 물러서려 하지 않았던 듯 그 진위를 가리려는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판의금부사 이기연이 옥사를 다스려 나가는 동안 안동김씨가 바라는 방향으로 이 옥사를 얼버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그것은 김유근이 다시 세도를 잡으면서 사면했던 옥사로 이를 재론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데 불쑥 이를 들고 나왔던 것이다. 이를 위해 안동김문은 이미 이 옥사를 일으킨 장본인인 김우명(金遇明)을 지난해부터(6월 17일) 대사간의 자리에 앉혀 대기시키고 있었다. 양사가 계획적으로 들고 일어났으니 빠져나갈 길은 없었는데 가장 앞장서서 이를 구원해야 할 권돈인으로 하여금 이 옥사를 직접 다스리게 해 당혹과 혼란으로 더욱 갈피를 잡을 수 없게 함으로써 함정으로 몰아넣었다.
그래서 7월 11일에는 우선 추사 형제들을 사판(仕版)에서 간거(刊去)함으로써 일단 추사의 연행길을 막아놓고 7월 12일에는 김노경을 추삭(追削)했다. 그러자 추사는 11일에 일단 동대문 밖 검호(黔湖) 별서(別墅)로 나가 대기하고 있게 되는데 이 옥사가 워낙 무옥(誣獄)인 때문에 조파에서도 만만히 물러서려 하지 않았던 듯 그 진위를 가리려는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판의금부사 이기연이 옥사를 다스려 나가는 동안 안동김씨가 바라는 방향으로 이 옥사를 얼버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복잡한 가족 관계가 이 옥사를 바로 다스리지 않을 수 없게 했을 것이다. 그 장형(長兄, 첫째 형)인 우의정 이지연(1777~1841)의 며느님은 조만영의 따님이었고 중형(仲兄, 둘째형) 이회연(李晦淵, 1779~1850)의 며느님은 조인영의 따님이었으며 그 자신은 추사 조부 김이주와 8촌형제간인 김윤주(金胤柱, 1721~1793)의 사위로 풍양조씨 집안 및 추사 집안과 무관한 사이가 아니었다. 이에 안동김씨의 기대를 외면하고 정직하게 이 옥사를 다스려나갔던 것이다.
그 결과 윤상도는 전승지 허성(許晟, ?~1840)이 시켜서 이 무옥을 꾸며냈고 허성은 안동김씨로 윤상도 옥이 일어났을 때 제일 앞장서서 이를 탄핵했던 당시의 대사헌 김양순(金良淳, 1776~1840)의 위협과 지시를 받고 이를 진행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결국 이 무옥은 김유근이 시켜서 일을켰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이에 당황하게 된 안동김문은 대왕대비를 움직여서 이를 역률(逆律)로 다스려 우선 7월 28일에 윤상도 부자를 잡아 올리고 8월 11일에는 이들 부자를 능지처참(陵遲處斬, 사지를 찢고 목을 자름)하여 입을 봉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