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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평시조 /두류산 양단수를 / 조재석 (여창으로 ....)

작성자无耳朶(무이타)|작성시간20.08.15|조회수601 목록 댓글 0



첨부파일 평시조(두류산 양단수)임종1.mp3

      

                          ▶ 대금반주 ; 황영달

                            ( 평시조 대금음원에 노래를 얹어 불러 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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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문학

지리산의 두 갈래 흐르는 물을 옛날에 듣기만 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복숭아꽃이 떠내려가는 맑은 물에 산 그림자까지 잠겨 있구나.

아이야, 무릉도원이 어디냐? 나는 여기인가 하노라.

square06_red.gif 요점 정리

지은이 : 조식(曺植)

연대 : 조선 명종 때

갈래 : 평시조, 연시조 전 10수

성격 : 강호 한정가(閑情歌), 자연과 인정의 노래

표현 : 문답법. 영탄법, 자연의 아름다움을 시각적으로 표현

구성 :

   초장(기) : 말로만 들은 두류산 양단수

   중장(승) : 실제로 본 두류산 양단수 승경

   종장(전,결) : 무릉을 실감케 하는 선경

제재 : 두류산

주제 : 지리산 양단수의 승경(勝景)을 찬미(讚美)함. 절경에 대한 감탄. 자연에의 귀의(歸依)

출전 : 해동가요(海東歌謠)

square06_red.gif 내용 연구

두류산(頭流山) : 지리산의 별칭

양단수(兩端水) : 두 갈래로 갈라진 물줄기. 물 이름

녜 듯고 : 옛날에 듣고

산영(山影)조차 : 산 그림자까지

잠겻셰라 : 잠겼구나. 잠겨 있구나

무릉(武陵) : 무릉도원의 준말로 도연명이 지은 <도화원기>에 나오는 이상향

마지막 종장은 영탄조로 이어지던 시상이 종장의 문답법에 의해 변화미를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시상의 전개는 주제를 강하게 표출하는 효과도 있다. 그리고 '아이야'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 국문학자가 들려주는 시조 이야기

조식의 ‘ ‘두류산 양단수를…’

석야 신웅순(시조시인·평론가·서예가,중부대 명예교수)

위대한 인물 탄생은 예로부터 신이한 이야기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술사가 예언했습니다.

“이 땅에 닭띠 해에 꼭 성현이 태어날 것이다.”

어느날 조식의 아버지 꿈에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천상의 신선이 나타나 말했습니다.

“신유년에 사내 아이가 태어날 것이니 잘 키우도록 하여라. 큰 학문을 이룩하게 될 것이다.”

이 때부터 어머니 이씨 부인은 태기가 있어 이듬해 신유년에 사내 아이를 낳았습니다. 남명이 바로 그였습니다.

남명 조식은 지금의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인 경상도 삼사현 토골에서 태어났습니다.

남명은 8,9세 때 심하게 아픈 적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픈 아들이 걱정 되었습니다. 어린 남명은 아픈 데도 불구하고 기운을 내어 병이 나아지고 있다고 어머니께 짐짓 거짓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머니, 하늘이 사람을 낼 때 어찌 헛되이 냈겠습니까? 하늘로부터 반드시 부여 하는 바가 있어 제게 이룰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하늘의 뜻이 여기에 있는데 제 가 어찌 일어나지 못하겠습니까?”

어린 남명은 죽을 염려가 없다는 말로 오히려 어머니를 위로했습니다. 남명은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남다르고 비범했습니다.

부친 조언형은 강직한 성품을 지닌 선비였습니다.

부친께서는 무고죄로 조정으로부터 벼슬을 빼앗기고 억울한 누명까지 쓴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로 자리에 누웠고 급기야는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떴습니다. 남명은 이를 지켜 보아야했습니다. 3년간의 시묘살이를 끝냈습니다. 남명은 아버지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기 위해 조정에 상소를 올렸습니다. 조정은 이를 받아들여 부친의 벼슬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벼슬에 환멸을 느낀 남명은 이 후 과거의 길을 포기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남명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것이었습니다.

어느날 남명은 어머니께 말씀 드렸습니다.

“어머니! 지금 조정에는 간사한 무리들이 권력을 휘둘러 걸핏하면 어진 선비들을 몰아 죽이고 있습니다. 조정에 남아 있는 벼슬아치들은 대부분 구차하게 녹봉을 챙기며 그 목숨 보전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어머니께서도 저의 성격을 잘 알고 계시는데 어떻게 이런 간악한 사람들에게 굽실거리면서 벼슬하라 하십니까. 자 칫 바른 말을 하다가 그들의 뜻을 어기면 목숨마저 부지하기 힘듭니다.(김권섭, 선비의 탄생) ”

남명은 유난히 총명했고 남달리 학문을 좋아했습니다. 그런 남명이었기에 과거의 길을 포기한다는 것은 어머니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하고 싶은 학문에 매진하도록 하라.”

지혜로운 어머니는 간곡한 아들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어머니의 사려 깊은 이해로 남명은 피비릿내 나는 을사사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22살 되던 해 남명은 김해에 사는 풍족한 집안 출신인 조수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남명은 벼슬도 없이 학문에만 매진하는 처사로 언제나 가난은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모시고 부유한 김해 처가를 찾았습니다. 처가인 탄동에서 산해정을 짓고 오랫동안 후진 교육에 힘썼습니다. 산해정은 높은 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본다는 뜻으로 남명은 거기에서 학문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대는 외로울까 외롭지 않을까?

소나무가 이웃이 되어 있는데

바람 불고 서리치는 때 아니더라도

싱싱한 모습에서 참다움을 볼 수 있네

-「산해정에 대를 심으며」

조씨 부인은 14년이 지나서야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들도 아버지와 똑 같이 9살 때 중병을 앓았습니다. 남명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아들도 병마를 훌훌 털고 일어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아들은 아비의 가슴에서 영원히 잠들고 말았습니다.

집도 없고 아들도 없는 게 중과 비슷하고

뿌리도 꼭지도 없는 이내 몸 구름과 같도다

한평생 보내면서 어쩔 수 없었는데

여생을 돌아보니 머리 흰눈처럼 어지럽도다

-「아들을 잃고서 」

이 후 조씨 부인은 아들을 낳지 못했습니다. 부인은 아이를 낳지 못해 늘 마음을 졸이며 지내야했습니다. 그렇다고 남명은 아내를 구박하거나 업신여기지 않았습니다. 살뜰한 아내와의 정은 없었지만 그는 평생 아내에게 은혜와 의리를 저버리지는 않았습니다. 남명은 뜻이 있어 아내를 처가에 두고 김해를 떠나 그의 고향 합천 삼가인 토골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여기에서 계복당 · 뇌룡사를 짓고 문인들과 함께 제자들의 교육에 전념하였습니다. 혼자 사는 남명에게는 음식이며 옷가지이며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후 은진 송씨를 첩으로 맞아들여 세 아들을 얻었습니다.

남명은 벼슬길에 나아가라는 이황의 권고도 거절했고 여러 차례 왕의 부름도 거절했습니다.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했습니다. 그럴수록 그의 명성은 자꾸만 높아져 갔습니다.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겼세라

아희야 무릉이 어디뇨 나는 옌가 하노라

두류산은 지리산의 다른 이름입니다. 백두산 줄기가 이곳까지 뻗었다하여 명명한 이름입니다. 양단수는 두 줄기로 갈리어 흐르는 물을, 무릉은 무릉도원, 별천지, 선경을 말합니다.

두류산 양단수를 예전부터 듣고 이제 와 보니 복사꽃 뜬 맑은 물에 산그림자조차 잠겼구나, 아희야 무릉도원이 어디메냐. 내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여기가 아니더냐.

누구나 다 살고 싶어 하는 곳이 이상향 무릉도원일 것입니다. 남명도 그런 무릉도원에서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에게 무릉도원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바로 사는 여기 두류산 양단수에 있었습니다. 이상보다는 현실을 중시한 이유가 이 시조에서도 보입니다.

그는 현실 비판에도 직언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명종이 남명에게 단성현감 자리를 내렸습니다. 이 때 죽음을 각오하고 임금님께 그 유명한 을묘사직소인 ‘단성소’를 올렸습니다. 명종을 고아로 문정왕후를 과부로 불렀습니다. 상당히 과격한 발언이었습니다.

“……(전략) 나라의 근본은 없어졌고 하늘의 뜻도 민심도 이미 떠나버렸습니다. 큰 고 목이 백 년 동안 벌레에 먹혀서 그 진이 다 말라버렸으니 언제 폭풍우를 만나 쓰러질 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중략) 낮은 벼슬아치는 아랫자리에서 술과 여색 에 빠져 있고 높은 벼슬아치는 윗자리에서 빈둥거리며 뇌물을 받아 재물 불리기에 여 념이 없습니다. 오장육부가 썩어 배가 아픈 것처럼 온 나라의 형세가 안으로 곪을 대 로 곪았는데도 누구 한 사람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문정왕후께서는 신실하고 뜻이 깊다 하나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는 아직 어리시니 다만 돌아가신 임금님의 한 고아에 불과합니다. 백 가지 천 가지로 내리는 하늘의 재앙을 어떻게 감 당하며 억만 갈래로 흩어진 민심을 어떻게 수습하시렵니까.

……임금으로서의 원칙을 세우십시오. 임금에게 원칙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 게 됩니다.”

상소문을 받아본 명종은 본질은 외면한 채 ‘고아’와 ‘과부’라는 상상도 못 할 극언에 격노하며 조식을 불경죄로 처벌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명종은 스물을 갓 넘은 나이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탓에 모친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했습니다. 윤원형을 비롯한 외척들은 권력을 마음대로 농간했고, 급기야 임꺽정의 난과 왜구의 침략 등 국내 외의 혼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통을 받는 것은 오로지 민초들뿐이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사관은 말했습니다.

“왕이 신하의 상소에 대해 답을 하지 않고 도리어 문책하는 것은 자유로운 언로 를 막는 것이다.”

“이 이후로 온 나라의 선비들은 임금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게 되어 모두 비위 맞추는 데로 몰리게 될 것이다”

이렇게 기록하며 애석해 했습니다.

임금이 얼마나 진노하였는지 다시는 남명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죽음과 맞선 이런 발언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남명은 이렇게 불의와는 일체 타협을 하지 않았습니다.

회갑을 맞이한 남명은 삼가 도통을 떠나 지리산 덕산으로 세 번째 거처를 옮겼습니다. 거기에다 산천재를 짓고 죽을 때까지 학문과 후진 교육에 힘썼습니다. 산천은 주역에 나오는 말로 ‘하늘의 형상을 본받아 독실한 마음으로 공부하여 그 덕을 날로 새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봄산 어디인들 방초야 없겠는가

다만 천왕봉이 상제와 가까이 있음을 사랑해서이네

맨손으로 왔으니 무엇을 먹을 건가

은하수 맑은 물이 십리에 흐르니 먹고도 남으리

-「덕산복거」

이 시에서 남명은 지리산 가운데 덕산으로 거쳐를 정한 이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학문만을 했으니 만년으로 갈수록 남명은 더욱 곤궁해져갔습니다.

봄산인들 어디 꽃 같은 먹을 풀들이야 없겠습니까. 천왕봉이 절대자와 가까이 있음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맨손으로 왔으니 무엇을 먹을 것인가. 은하수 맑은 물이 십리에 흐르고 있으니 먹고도 남는다고 했습니다. 바로 내 사는 여기가 무릉도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남명은 적실 소생이 없어 자기 명의로 되어 있는 토지와 장자로서의 권리를 동생인 조환에게 전부 물려주었습니다. 이제 남명은 맨손이었습니다.

남명은 이런 시도 남겼습니다.

청컨대 천섬 들어가는 큰 종을 보소서

크게 치니 않으면 소리나지 않는다오

어떡하면 저 두류산 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까

천석종은 크게 쳐야합니다. 거기에 맞는 당목으로 쳐야 소리가 납니다. 자신의 뜻을 큰 종, 천석종에 비유했습니다. 벼슬과 재물에 몸과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 지리산 같은 존재가 되겠다는 웅지가 들어있습니다. 남명은 그런 뜻을 세우고 그런 경지를 추구하고자 했습니다.

남명이 대곡 성운을 만난 것은 18살 서울에 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조석으로 학문을 토론하고 잠도 같이 자면서 인간적인 교감을 나누었습니다. 이후 남명과 대곡은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평생지기가 되었습니다. 대곡은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형이 을사사화로 화를 입고 있을 때 수많은 선비가 죽는 것을 보고는 속리산으로 들어가 농사 지으며 은거했습니다. 중종과 선조 임금이 여러 차례 불렀지만 벼슬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지함 ·서경덕·조식 등 명현들과 교유하며 학문에 전념했습니다.

대곡이 김해에 있는 남명을 찾았습니다. 거기에서 대곡은 여러 날을 머물면서 세상을 걱정하며 학문을 논했습니다.

기러기 홀로 남쪽 바닷가로 날아가니

가을 바람에 나뭇잎이 떨어지는 때가 되었구나

땅에 가득한 곡식을 닭이나 따오기는 쪼지만

푸른 하늘 구름 밖에서 세상사를 잊고 지낸다네

-「남명에게 부치다」

사람들은 닭이나 따오기와 같이 땅 위의 곡식을 탐내지만 남명은 구름 밖에서 초연히 살아가는 선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곡은 이렇게 남명의 정신 세계를 누구보다고 잘 이해하고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남명은 한사코 지리산 속으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대곡이 물었습니다.

“그 곳에 가면 무엇이 그리 좋은가.”

“지리산에 들어가면 눈이 푸르러진다네.”

“맑은 마음을 지닌 사람만이 이 즐거움을 안다네.

남명의 대답은 간명했습니다.

그 후 25년이나 지나 이제 남명은 대곡이 살고 있는 속리산을 찾았습니다. 10여일을 지내면서 그 동안 쌓였던 그리움을 하나하나 풀어냈습니다. 그리고는 1566년 명종이 재야에 묻힌 선비들을 한양으로 불렀을 때 둘은 마지막으로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재회하지 못했습니다.

남명이 죽었을 때 대곡은 묘갈문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벗을 사귀는 일도 반드시 신중하였다. 그 사람이 벗 삼을 만한 사람이면 비록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왕처럼 높여 예의를 차려 존경했다. 그 사람이 벗 삼을 만한 사람이 못될 경우에는 비록 벼슬이 높을 지라도 마치 흙먼지나 지푸라기처럼 보아 그들과 같이 남아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이런 까닭에 교우가 넓지 못했다. 그러나 공이 사귀어 아는 사람들은 모두 학행과 문예가 뛰어난 당대의 이름난 선비들이었다.

우암 송시열은 대곡의 묘갈명에서 두 사람과의 관계를 이렇게 썼습니다.

대곡선생은 남명과 가장 막역한 친구였다. 대개 남명이 깎아지른 듯한 천 길 낭떠러 지와 같은 기상을 지니고 있다면 선생은 순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지녔다. 남명이 말하 기를 “대곡은 다듬은 금붙이나 아름다운 옥 같아서 내가 미치지 못한다” 라고 하였다.

이것이 남명의 면모였습니다.

남명은 젊은 시절 청송 성수침과도 어울려 놀기도 했습니다. 『어우야담』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습니다.

남명은 청송 성수침과 어려서부터 서로 벗을 하였다. 일찍이 성수침과 기생집에 가서 놀았는데 기생들과 어느 날 만날 약속을 정하였다. 마침 그날 다른 일이 생겨서 약속을 어길 상황이 되었으나 남명은 아무리 기생이라도 약속을 어기면 안된다고 하면서 억지 로 그 약속을 지켰다. 그래서 훗날 대인이 되었다.

기생 같은 하찮은 존재라도 약속을 지켰으니 대인이 될 자질을 갖추었고 또 마침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향시 때 경상 좌도에서는 퇴계가 경상 우도에서는 남명이 일등을 했습니다. 이들은 학문과 인품이 뛰어났으며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습니다. 이렇게 해서 퇴계학파, 남명학파는 우리나라 사상계의 큰 두 흐름을 형성했습니다.

퇴계와 남명은 서로 명성을 듣고는 있었지만 직접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고작 세 번의 편지를 주고 받았을 뿐이었습니다. 이무렵 퇴계는 기대승과 편지로 이기론에 대해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남명은 퇴계의 생각과도 달랐습니다. 학문의 본질은 말보다는 실천하는 데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후대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퇴계와 남명을 이렇게 썼습니다.

중세 이후에는 퇴계가 소백산 밑에서 태어났고 남명이 두류산 동쪽에서 태어났다. 모 두 경상도의 땅인데 북도에서는 인을 숭상하였고 남도에서는 의를 앞세워 유교의 감화 와 기개를 숭상한 것이 넓은 바다와 높은 산과 같게 되었다. 우리의 문화는 여기에서 절정에 달하였다.

퇴계는 성리학의 뿌리인 인을 숭상하고 남명은 생활을 중시하는 의를 실천했습니다. 당시의 유학자들은 형이상학적인 논의만 일삼았지 남명처럼 실질적인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남명은 경과 의를 강조했습니다. ‘경’으로서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서 외부 사물을 처리해간다는 경의협지(敬義夾持)를 표방했습니다.

그는 거울 같은 맑은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항상 ‘칼’과 ‘방울’을 갖고 다녔습니다. 이를 ‘경의검’, ‘성성자’라고 하였습니다.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 라는 문구를 새긴 칼을 항상 차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칼은 이름이 '경의검‘이 되었습니다. ‘성성자’는 주자의 ‘경’ 4개 종목 중의 하나인 ‘상성성법(常惺惺法)’에서 ‘성성’을 취했습니다. 항상 마음을 초롱초롱 각성의 상태로 유지한다는 의미입니다. ‘거울, 방울 ,칼’은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환웅이 환인에게 받은 천부인 셋을 상징합니다. 그는 이를 수양의 도구로 삼았습니다. 그에게는 평생 스승이 없었습니다. 높은 경지에 이른 것은 이러한 자신의 치열한 수양 때문이었습니다. 스승이 있다면 그것은 지리산이었고 경의검과 성성자였습니다.

남명이 덕산의 산천재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루는 산천재 뜰 안에 자라고 있는 소태나무의 껍질로 국을 끓였습니다. 이 때 강당에서 쉬고 있었던 동강 김우웅과 내암 정인홍을 불러 그 국을 먹도록 했습니다.호방 화급한 성격의 내암은 아주 쓰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 국을 토해버렸고 도량이 넓었던 동강은 끝까지 참으로 그 쓰디쓴 소태국을 다 먹었습니다.이를 보고 남명은 동강을 외손서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정우락,남명의 이야기)

칼은 내암 정인홍에게, 방울은 외손서인 동강 김우웅에게 전했다고 합니다.

조식의 대표적인 문인으로는 정구․곽재우․정인홍․김우웅․이제신․김효원․오건․강익․문익성․박제인․조종도․곽일․하향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경상 좌도의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고 경상 우도의 학풍을 대표했습니다.

남명은 왜적을 경계할 것을 제자들에게 항상 말해왔습니다. 그의 실천적 학문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진가를 발휘했습니다. 경상도의 의병장들이 모두 남명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국가의 누란의 위기 앞에서 제자들은 투철한 선비정신을 발휘했습니다. 그 중엔 남명의 외손서 곽재우 장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정신은 조선말 의병에까지 이어졌습니다.

남명은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사회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비판의 자세를 취했습니다. 단계적이고 실천적인 학문 방법을 주장하였으며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경상우도의 특징적인 학풍을 이루었습니다.

남명 조식은 퇴계 못지않은 매화 애호가였습니다. 지리산 자락에 산천재를 짓고 제자들을 키우면서 매화나무를 심고 매일 천왕봉을 바라보며 말년을 보냈습니다. 그가 뜰에 심은 매화나무 ‘남명매’가 지금도 남명 같이 고고한 꽃을 피우며 고매한 향기를 풍기고 있습니다.

남명은 조선 선비 가운데 기절로서 으뜸이었습니다. 인, 의, 진실, 거짓도 이익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그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님의 의과 기가 더욱 그리워지는 때입니다.

찾아가는 길

산천재

사적 제 305호 경남 산천군 시천면 원리

주간한국문학신문,202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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