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은(牧隱)선생시조
백설이 자자진 골에(이색)
백설이 자자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목은 이색 (1328~1396) 고려말의 대유학자로 공민왕때 문하시중
우국충정을 담은 노래로 여기서 세 가지는
'구름: 이성계의 신흥세력
'매화: 우국지사
'석양: 고려 왕조를 의미.
백설이 자자진 골에(이색)의 핵심 정리
[이 작품은] 고려의 국운이 쇠퇴해 가는 상황에서 느끼는 회한을 상징적 소재의 대비를 통해 풍자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갈래 : 평시조, 서정시
*성격 : 비유적, 풍자적, 우의적, 우국적
*제재 : 백설, 구름, 매화, 석양
*주제 : 고려의 국운 쇠퇴에 대한 한탄과 우국충정
*특징 :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냄.
백설이 자자진 골에(이색)의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고려 유신인 이색이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는 모습과
우국충정(憂國衷情)의 마음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지고 있는 시조이다.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색은 자신이 충성을 다했던 고려 왕조가 무너지고
신진 세력인 이성계 일파를 중심으로 한 조선 왕조가 들어서자
이에 대한 회한과 안타까움을 우의적, 풍자적 방법으로 드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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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이 잦아진 골짜기에 구름이 험하게 일고 있구나
(나를) 반겨 줄 매화는 어느 곳에 피어 있는가?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을 몰라 하노라.
요점 정리
지은이 : 이색
연대 : 고려말
종류 : 평시조
표현 : 비유적, 풍자적
성격 : 우의적
제재 : 매화(우국지사), 고려의 쇠잔
주제 : 우국 충정(憂國衷情)과 고려 멸망의 한탄 / 혼탁한 정치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
내용 연구
백설[흰 눈, 이 시에서는 고려 유신을 비유]
이 자자진[잦아진, 녹아 없어진, 거친 기운이 잠잠해지거나 가라앉다]
골[골짜기에]에
구름[구름이, '구름'은 '무상', '허황' 등의 속성. 여기에서는 조선의 신흥 세력 / 신흥 사대부]
이 머흐레라[험하구나]
반가온[반가운]
매화[ '지조, 충성, 정렬'등의 속성. 여기서는 우국지사 또는 청절을 비유]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 해질 무렵. 기울어진 고려의 국운 비유 / 쓸쓸한 정서를 부각시킴]
에 홀로 서 있어 갈 곳을 몰라 하노라.
[한다. '생각한다'의 뜻]
이해와 감상
고려의 유신(遺臣)으로 기울어 가는 나라를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우의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석양(夕陽)에 홀로 서 이셔 갈 곳 몰라 하노라' 하는 탄식 소리는 그래도 어디선가 나타나 주기를 바라는
'매화(憂國之士)와 연결되고 있고, '백설 → 고려 유신, 구름 → 신흥 세력인 이성계 일파, 매화 →우국지사,
석양 →기울어져 가는 고려' 등을 상징하고 있으며, 우국의 정이 간접적으로 나타나 한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심화 자료
이색(李穡)
1328(충숙왕 15)∼1396(태조 5).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찬성사 곡(穀)의 아들로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진사가 되고, 1348년(충목왕 4)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351년(충정왕 3) 아버지 상을 당해 귀국해 1352년(공민왕 1) 전제(田制)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이듬해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해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1354년 제과(制科)의 회시(會試)에 1등, 전시(殿試)에 2등으로 합격해
원나라에서 응봉 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 겸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事郎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지냈다.
귀국해 전리정랑 겸 사관편수관 지제교 겸예문응교(典理正郎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藝文應敎)·중서사인(中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 해 원나라에 가서 한림원에 등용되었으며 다음 해 귀국해
이부시랑 한림직학사 겸사관편수관 지제교 겸병부낭중(吏部侍郎翰林直學士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兵部郎中)이 되어
인사행정을 주관하고 개혁을 건의해 정방(政房)을 폐지하게 하였다.
1357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어 유학에 의거한 삼년상제도를 건의, 시행하였다.
이어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지공부사(知工部事)·지예부사(知禮部事) 등을 지내고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남행할 때 호종해 1등공신이 되었다.
그뒤 좌승선·지병부사(知兵部事)·우대언·지군부사사(知軍簿司事)·동지춘추관사·보문각과 예관의 대제학 및 판개성부사 등을 지냈다.
1367년 대사성이 되어 국학의 중영(重營)과 더불어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을 학관으로 채용해 신유학의 보급과 성리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1375년(우왕 1) 왕의 요청으로 다시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政堂文學)·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했고
1377년에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88년 철령위문제(鐵嶺衛問題)가 일어나자 화평을 주장하였다. 1389년(공양왕 1)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이 강화로 쫓겨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왕을 옹립, 즉위하게 하였다.
판문하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창왕의 입조와 명나라의 고려에 대한 감국(監國)을 주청해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다.
이 해에 이성계 일파가 세력을 잡자 오사충(吳思忠)의 상소로 장단(長湍)에 유배,
이듬해 함창(咸昌)으로 이배되었다가 이초(彛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청주의 옥에 갇혔으나
수재(水災)로 함창에 안치되었다.
1391년에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졌으나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이에 관련해 금주(衿州)로 추방되었다가 여흥·장흥 등지로 유배된 뒤 석방되었다.
1395년(태조 4)에 한산백(韓山伯)에 봉해지고 이성계의 출사(出仕) 종용이 있었으나 끝내 고사하고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에 별세하였다.
그는 원·명 교체기 때 천명(天命)이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보고 친명정책을 지지하였다.
또 고려 말 신유학(성리학)의 수용과 척불론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유교의 입장으로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즉 불교를 하나의 역사적 소산으로 보고 유·불의 융합을 통한 태조 왕건 때의 중흥을 주장했으며,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척불론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해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등 억불정책에 의한 점진적 개혁으로
불교의 폐단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한편 세상이 다스려지는 것과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성인(聖人)의 출현 여부로 판단하는 인간 중심,
즉 성인·호걸 중심의 존왕주의적(尊王主義的)인 유교역사관을 가지고 역사서술에 임하였다.
아울러 그의 문하에서 권근(權近)·김종직(金宗直)·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해 조선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장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寧海)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서 제향되며, 저서에 ≪목은문고 牧隱文藁≫와 ≪목은시고 牧隱詩藁≫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東文選, 朝鮮金石總覽, 李朝建國의 硏究(李相佰, 乙酉文化社, 1949), 李穡硏究(李銀順, 梨大史苑 4, 1962), 牧隱硏究(孫洛範, 國際大學人文科學硏究所論文集 3, 1975), 李穡의 佛敎觀(安啓賢, 趙明基博士華甲記念佛敎史學論叢, 1965), 李穡(李相殷, 高麗·朝鮮初期의 學者 9人, 1974), 牧隱 李穡과 그의 政治思想에 관한 硏究(朴珠, 曉星女子大學論文集 25, 1982).(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웅순의
우리 시조를 찾아서
백설이 잦아진 골에 …
- 목은 이색 -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 있어 갈 곳 몰라 하노라
이색은 이성계와는 막역한 친구였다. 1389년 이성계 일파는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즉위시켰다.
이색이 이를 규탄하다 장단 ․ 함창 ․ 청주 ․ 한주 ․ 금주 등지로 유배당했다.
장자 종덕은 액살 당하고 나머지 아들들도 유배되었다.
문생이었던 정도전 ․ 조준 등도 이색에게 등을 돌렸고 정도전은 이색의 탄핵에 앞장까지 섰다.
세상 인심은 그를 떠났고 해는 서산에 기울고 있었다.
'백설이 잦아진 골에……'는 이때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의 운명 앞에 그는 풍전등화였고 외로운 매화 한 송이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그는 붓을 꺾었다. 그렇게도 좋아했던 시도 던졌다.
이색은 시만도 6000여수에 달했던 당대 제일의 문장가였다.
그에게 시는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으며 제자를 가르칠 때도 시로 강론했고,
정사를 말할 때도 시로 행했다. 참으로 시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가 붓도 던지고 시도 던졌으니 조선의 건국은 그에게는 죽음과도 같았다.
이름도 쓰지 않겠다는 참담한 심정이 당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남아있다.
나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통곡하여 무슨 말을 하리오. 한 때 같이 죽지 못하였음이 한 이었고,
이 몸도 이미 이 지경에 이르 렀 으니 다만 백이 ․ 숙제와 같이 수양산에서 고사리나 캐 먹 고 싶으나 그것도
무슨 심정으로 주나라(조선) 곡식을 먹으리오. 나머지는 다 쓰지 못하겠고 망국 의 죄인이니 이름을 쓰지 않겠소.
-『목은선생연보』65세조
태조는 이색에게 출사를 종용했으나 끝내 그는 거절했다. 망국의 사대부는 살기를 도모하지 않으며 해골을
고향 산천에 묻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한 충절에도 태조는 끝까지 그를 친구의 예로 극진히 대접했다.
색이 나아가 뵙고 하는 말이 "개국하는 날 어찌 나에게 알리지 않았습니까? 만약 나에게 알렸 다면
읍양하는 예를 베풀어서 더욱 빛났을 것인데 어찌 말 장수로 하여금 추대하는 수석이 되게 하셨습니까? 라고 하였다.
이것은 배극렴을 두고 풍자한 것이었다. 남은이 옆에 있다가 "어찌 그 대 같은 썩은 선비에게 알리겠는가"라고 하니
왕이 은을 꾸짖어 다시는 말을 못하게 하고 옛날 친구의 예로 대접하여 중문까지 나가서 전별하였다.
-『태조실록』권 9
이색(1328~1396)은 고려말 성리학의 대학자이다.
부는 문효공 이곡으로, 자는 영숙, 호는 목은이며 본관은 한산이다.
충숙왕 15년(1328)에 경상도 영해부에서 출생했으며 14세에 성균시에 합격,
20세에 원에서 국자감 생원으로 3년간 수학했다. 귀국해서 26세에 문과에 급제했고
공민왕 14년(1365)에는 첨서밀직사사, 40살에 성균대사성을 지냈다. 우왕의 사부로 우왕 14년(1377)에
문하시중 ․ 한산부원군 등 최고의 직을 받았다. 『목은시고』,『목은문고』가 저서로 남아있다.
그는 포은과 더불어 고려 사직을 위해 끝까지 사투했으나 거대한 시대의 흐름은 어쩔 수 없었다.
태조 5년 신륵사로 가는 도중 병을 얻어 69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여주 강가에서 정도전 등
반대파들이 보낸 독주에 사사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어 후세 사인의 의혹에 씁쓸함을 남겼다.
이색은 불교에 대해서도 해박했다. 산사에 출입하면서 많은 승려들과 교유했다.
8세 때 서천 기산의 숭정산에서 공부했으며, 강화 교동의 화개산, 한양의 삼각산,
견주의 감악산과 청룡산, 서주의 대둔산, 평주의 모란산 등도 그가 즐겨 찾았던 곳이었다.
이색의 학문은 이제현으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문익점, 이존오 등과 교류했고 고려 삼은 길재는
스승 이색으로부터 큰 가르침을 받았다. 조준, 하륜, 권근, 황희, 변계량, 맹사성 등 많은 지식인이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
그는 당대 제일의 정치가였고 문장가였으며 대석학이었고 위대한 교육자였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국정을 쇄신하고자 사투했으나 이성계와 맞서다 끝내 조선 건국의 비운을 맞고 말았다.
사림 정신의 거두 길재가 그의 문하에서 나왔으니 그는 조선 학맥의 근원이 되었다.
훗날 불교 신봉자라 하여 다소 폄하되기도 했으나 학문과 정치에 거족을 남긴 성리학의 대가였으며
고려 충절의 사표였다. 충청도 서천 기산의 문헌 서원, 청주의 신항 서원에 배향되었다.
충절, 선비의 고장 충청도. 이제는 함께 이색의 고향 서천의 문헌서원에 가보야야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잘 살고, 바르게 사는 것인지 한 번쯤 물어보아야하지 않겠는가.
시조는 역사이다. 면면이 내려왔던 사림의 선비 정신이 서원에는 남아 있을 것이다.
600여년이 흐른 지금도 우리들을 일깨워주는 죽비가 되어 남아 있을 것이다.

서천군 기산면 소재 문헌서원

이색 영정
<시조시인 ․ 평론가 ․ 중부대교수>
- 대전일보 2009.7.9
백설(白雪)이 자자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온 매화(梅花)난 어내 곳에 픠었난고
석양에 홀로 셔 이셔* 갈곳 몰라 하노라.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바라보는 시적 자아의 고뇌를 그린 시조이다.
목은 이색은 고려말의 학자이며 공민왕 때 등용되어
최고의 관직에 올랐으나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의 부름에도 끝내 거절하고 숨어 살았다.
李齊賢과 쌍벽을 이루는 문장가로서 조선 중엽까지 文風을 주도하였으며,
저서로는 <牧隱集>이 있다.
*위 작품에서 시어들은 상징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초장의'백설'은 고려의 유신을,'구름'은 조선건국을 주도한 신흥세력을,
중장의 '매화'는고려말의 우국지사를,
종장의 '석양'은 기울어져 가는 고려왕조를 의미하고 있다.
* 이러한 시어를 빌어 작가는 고려말이라는
역사적 전환기에 멸망해 가는 왕조를 바라보며 느끼는
안타까움과 회한을 절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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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자진-녹아내린, 잦아 없어진.
*머흐레라-험하구나.{머흘다.(옛)-험하다.사납다.}
*셔 이셔-서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