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무심(無心)탄 말이 아마도 허랑(虛浪)하다
중천에 떠이셔 임의(任意)로 단이면서
굿타여 광명(光明)한 날 빗츨 덥퍼 무삼하리요”
[정의]
1371년 (공민왕 20)에 공주에 거주하던 이존오(李存吾)[1341~1371]가 지은 시조.
[개설]
「구름이 무심탄 말이」는 시조집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전한다.
이존오가 우정언의 직책에 있을 때, 공민왕의 신임을 등에 업고 국정을 전횡하며
풍속을 어지럽히는 신돈의 무리들을 탄핵하다가
장사(전라도 무장, 현 전라북도 고창) 감무로 좌천되었다.
뒤에 향리인 공주의 석탄(石灘)에 돌아와서도
나라를 걱정하였는데, 이 시조는 곧 신돈을 위시한 간신배들이
아직도 임금의 총명을 흐리게 하며
국정을 농단하는 것을 비난하여 읊은 것이다.
[구성]
평시조 3장으로, 초장은 국정을 어지럽히는 간신배들을 구름에 빗대고,
중장은 횡포를 자행하는 모습을, 종장은 임금의 총명을 가리는 행동을 나타낸 것이다.
[내용]
시조 원문은 다음과 같다. “구름이 무심(無心)탄 말이 아마도 허랑(虛浪)하다
중천에 떠이셔 임의(任意)로 단이면서/ 굿타여 광명(光明)한 날 빗츨 덥퍼 무삼하리요”
이를 현대어로 바꾸면 다음과 같다. “구름이 무심하단 말 아무래도 허랑하다
중천에 떠 있어 멋대로 다니면서/구태여 광명한 날 빛을 덮어 무삼하리요”
이를 풀이하면 초장은 구름이 아무 생각 없이 떠다닌다는 말이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다고 하여,
소인과 간신배들이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이라 의심한다.
중장은 그들이 거칠 것 없이 횡포를 자행하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종장에서는 끝내 임금을 속여서 장차 어떻게 하려느냐고 그들을 비난하면서
동시에 나라 걱정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특징]
평시조 형식과 자수가 초장 3·4·3·4, 중장 3·4·3·4, 종장 3·5·4·3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의의와 평가]
「구름이 무심탄 말이」는 형식상으로 고려 후기에 정제된 평시조의 정형적 틀을 보여주고 있다.
내용상으로는 언관(言官)으로서 직간(直諫)을 서슴지 않았던 고려 말 신흥사대부의 충절의식이
잘 드러난 시조라고 할 수 있다. 이존오의 사후에 공주 지역 유림들이 조선 중기부터
공주의 충현서원에 배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구름이 무심탄 말이 / 이존오 (1341~1371) 구름이 무심탄 말이 아마도 허랑하다 중천에 떠 있어 임의로 다니면서 구태여 광명한 날빛을 덮어 무삼하리오 |
구름이 무심(無心)탄 말이 아마도 허랑(虛浪)하다
중천(中天)에 떠 있어 임의(任意)로 다니면서
구태여 광명(光明)한 날빛[日光]을 따라가며 덮나니
이 작품은 서른 둘의 나이로 요절한 이존오(李存吾)가 지은 작품으로 전한다.
두 개의 사상(事象) 즉 "구름"과 "날빛"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파악하는 일이
이 작품을 이해하는 관건이다. 해와 달은 하늘의 질서 곧 천문(天文)의 질서에 따라 운행되며
정해진 자리를 갖고 있다. 해와 달은 물론 별들도 하늘의 일정한 고정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고대의 천문학에서는 하늘을 28영역으로 분할하고 각 영역의 중심이 되는 별로써
28개의 별자리의 이름을 지어 이들 별의 운행 질서를 연구하였다.
28개의 별자리 사이에는 층위가 존재하였고 그러한 층위를 바탕으로 28개의 별자리가
하나의 질서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천문적인 질서는 인간 사회의 질서와
상동 관계로 인식되었다. 정해진 자리와 층위를 전제로 하는 천문의 질서란
계급과 역할의 층위와 차이를 전제로 하는 인간 사회의 질서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한 인식 체계가 이미 고대에서부터 마련되고 유지되었던 까닭에 해와 달과 별은
각각 인간 사회의 제왕(帝王)과 군왕(君王)과 보신(輔臣)을 비롯한 신하의 문화 상징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에 비해 "구름"은 정해진 자리가 없이 대기의 이동에 따라 부유(浮游)한다.
대기의 이동에서는 달이나 별과 같은 운행의 질서를 찾기 어렵다.
"구름"이 인간 사회의 조화로운 질서의 상징이기도 한 천문의 질서 체계 안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왕조국가 시대 "구름"과 같이 차별을 전제로 한 질서 체계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던 인간 집단으로 우리는 승려와 같은 종교적 수행자 집단을 쉽게 떠올릴 수 있고,
이 작품에서의 "구름"도 바로 그와 같은 인물이나 집단을 비유한 것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무심(無心)"은 이해 관계에 얽히지 않은 순수한 마음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진리(眞理)는 인간이 세상의 온갖 사상(事象)에 대하여 무심(無心)할 때 객관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해 관계를 떨쳐버리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어서
거의 대부분의 인간은 늘 이해 관계에 얽혀 살고 있는 것이다. 조화로운 질서를 수립하고
유지하는 데에는 이해 관계를 초월한 인간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일찍부터 수양(修養)은 바로 그와 같은 인간이 되는 방법으로 인식되고 활용되었던 것이다.
수양이 지향하는 최종 단계의 마음 상태가 바로 무심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공민왕(恭愍王)이 신돈(辛旽)을 중용(重用)한 까닭도 그가 이해 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인물이어서 전제 개혁(田制改革)을 비롯한 개혁을 추진하는 데 있어 적임자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유가적 질서를 추구하던 집단이 좌주(座主)―문생(門生) 관계를 형성하여
정치 세력화하고 있었는데, 공민왕은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신돈은 종의 아들로 때어났고 그러한 출신 때문에 승려이면서도 사회 활동이 활발하지는 않았다.
공민왕은 바로 그 때문에 신돈을 기왕의 기득권 세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개
혁을 추진할 수 있는 적임자로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돈이 중심이 된 개혁이 지향하는 질서는 차별을 전제로 한 유가적 질서와는
모순된 것이었다. 유가적 질서를 추구하는 집단의 반발은 당연히 예견되는 것이었다.
특히 신돈의 권력이 자의적(恣意的)으로 행사됨에 따른 폐단은 유가적 질서를 추구하는
인물로 하여금 왕조국가의 질서를 와해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갖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신돈이 개혁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을 시기 이존오(李存吾, 1341∼1371)는
우정언(右正言)의 자리에 있었다. 정언은 시정(時政, 국정 운영)에 대한 의견을 국왕에게
직언(直言)하는 소임을 맡은 자리이다. 그가 신돈을 왕조 국가의 질서를 허물어뜨리는
죄인으로 규정하고 공민왕에게 그의 죄상(罪狀)을 직언한 것은 그의 소임을 다하는
행동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유신(儒臣)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공민왕은 이존오의 신돈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이존오가 신돈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죄의 진상을 밝혀 처벌을 요구하자 공민왕은 오히려 그를 힐책하였다.
또 공민왕은 자신이 신돈과 함께 호상(胡床)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신돈을 질책하여
호상에서 떨어지게 한 이존오를 무장감무(茂長監務)로 폄직(貶職)하여 내쫓았다.
이러한 역사 사실과 "구름"과 "해" 등을 상징으로 활용해 온 문화 관습을 고려할 때
이 작품의 초장에 나타나 있는 "구름"이 "무심(無心)"하다는 사회의 일반 통념을 뒤집는 목소리는
바로 신돈과 같은 승려에 대한 비판으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광명한 날빛"을 따라 다니며 덮는 형국은 신돈에 의해 공민왕의 성은(聖恩)이 가리워지고
그의 덕화(德化)가 세상에 미치지 못하는 형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이 이존오가 지은 것이라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언제 지어졌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이존오가 정치 무대에서 활동한 시기는 신돈이 활동한 시기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신돈이 반역죄에 걸려 죽은 해에 이존오도 죽었다. 서로 다른 입장과 사상을 추구하면서도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존오는 유가적 질서를 추구한 인물이고 또
그의 짧은 정치 활동 기간에 가장 중요하고 시급하게 다가왔던 문제라면 그와 같은 질서를
회복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던 신돈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이존오를 비롯한 유신들이 신돈과 대립 갈등하던 역사적 맥락에 놓여야 그 의미가 온전하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짧은 형태의 노래가 이존오와 같은 인물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와 그에 대한 진지한 생각을 담아내는 틀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는 어떤 질서를 만들어가야 하는가는 문제도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두 사람은 서로 다른 해답을 제시하였지만 다같이 당대의 지식인이었음도 분명하다.
이존오가 추구한 질서와 신돈이 추구한 질서, 둘 가운데 어느 것이 인간이 지향해야 할
소망스럽고 바람직한 질서인가는 문제뿐 아니라 어느 것이 당대의 국가와 사회의 제반 조건에
부합하는 것이었는가는 문제도 진지하게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이존오 李存吾. 1341(충혜왕 복위 2)~1371(공민왕 20).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경(順卿), 호는 석탄(石灘)·고산(孤山).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한 뒤, 수원서기를 거쳐 사관이 되었다.
1366년 우정언이 되어 신돈(辛旽)의 횡포를 규탄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샀으나
이색(李穡) 등의 변호로 극형을 면하고 장사감무로 좌천되었다.
후에 석탄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울분으로 병이 나서 죽었다.
신돈의 전횡을 풍자한 시조 1수를 비롯하여, <<청구영언>>에 시조 3수가 전한다.
문집으로 <<석탄집(石灘集)>> 2권이 전한다. 대사성에 추증되었으며,
여주의 고산서원, 부여 의열사, 무장 팔충현사에 제향되었다
금강일보,승인 2019.12.18 18:23,중부대 명예교수
두거는 가곡의 다섯 번째 곡이다. 이수대엽의 파생곡으로 머리를 든다는 뜻으로
두거는 중거, 평거보다 먼저 파생된 곡이어서 많은 부분에서 초수대엽, 이수대엽과 닮아있다.
초장: 구름이 무심탄 말이
2장: 아마도 허랑하다
3장: 중천에 떠있어 임의로 다니면서
4장: 구타여
5장: 광명한 날빛을 덮어 무삼하리오
구름이 무심하다는 말은 거짓되고도 믿을 수가 없다.
국권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다니는 간신, 신돈이 왕의 총명을 가리고 있음을 개탄한다는 내용이다.
신돈이 왕의 신임을 등에 업고 정사를 좌지우지하자 이존오는 좌사의대부 정추와 함께
“요망한 물건이 나라를 그르치니 그냥 둬선 아니 되옵니다.”
“당장 신돈을 파면하고 일당 요물들을 모조리 처단하소서.”
왕이 진노했다. 이존오가 대궐로 들어가 보니 신돈은 왕과 함께 평상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존오는 분기탱천해 신돈을 향해 호통을 쳤다.
“이 늙은 중놈아, 이 어찌 방자 무례하더냐.”
“냉큼 내려오지 못하겠는가.”
신돈이 겁에 질려 평상에서 급히 내려왔다. 왕은 더욱 진노해 이존오를 옥에 가뒀다.
이로 인해 이존오는 장사 현감으로 좌천됐고, 공민왕 17년(1368년)에는 벼슬에서 물러나
공민왕 20년, 이존오의 병은 더욱 심해졌다.
몸을 추스르며 그가 물었다.
“신돈의 세력이 아직도 성하느냐?”
“그렇다.”
“신돈이 죽어야만 내가 죽을 것이다.”
그 말을 하고 바로 숨을 거두었다.
사람들은 석탄을 ‘진정 나라의 정언(正言)’이라고 칭송했다.
왕은 그의 충성을 기려 성균관 대사성에 추증했고, 그의 아들 래에게 ‘간관 이존오의 아들
이존오의 나이 32세였고, 그가 죽은 3개월 후 신돈이 처형당했다. 그의 시조 3수가 ‘청구영언’에 전해지고,
남창 우조 두거의 사설에는 ‘구름이’, ‘태산이’, 계면조 두거에는 ‘악양루에’, ‘이몸이’ 등이 있고,
가곡 두거 ‘구름이’는 이 시대에 한 번쯤 되새겨 볼 만한 시조가 아닌가 생각한다.
출처 : 금강일보(http://www.gg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