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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한시]춘흥(春興)/정몽주

작성자어람. 최증수|작성시간11.04.25|조회수187 목록 댓글 0

 

 

 

          정몽주(鄭夢周)의 ‘춘흥(春興)’ 해제(解題)


      ‘춘흥(春興)’ : 봄날의 흥과 운치


    春雨細不滴 : 춘우세부적 : 봄비 가늘게 와 소리 없더니

 

   夜中微有聲 : 야중미유성 : 밤들어 빗소리가 조금 나누나

 

   雪盡南溪漲 : 설진남계창 : 눈 녹아 남쪽 내에 물이 넘치리

 

   草牙多小生 : 초아다소생 : 새싹도 얼마만큼 돋아나리라

 


   1. 지은이 : 정몽주(鄭夢周) 소개


   1337~1392. 고려 말기의 학자 · 정치가.

   본관은 영일(迎日). 초명은 몽란(夢蘭) · 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1360년 공민왕 9년에 문과에 응시, 삼장(三場)에서 연이어 장원을 차지해

   제1인자로 뽑혀 1362년 예문검열이 되었다.


   1364년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삼선(三善) · 삼개(三介)를 치고.

   여러 차례 자리를 옮겨 전농시승(典農寺丞)에 임명되었으며

   1367년 성균관이 중영(重營)되면서 성균박사(成均博士),

   1375년(우왕 1),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1384년 정당문학(政堂文學),

   1385년에는 동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했으며

   1388년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임명되었고, 예문관대제학이 되었다.

   1389년(공양왕 1)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여

   이듬해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 봉해지고

   순충논도좌명공신(純忠論道佐命功臣) 호를 받았다.


   유학儒學을 정치 이념으로 세우고자 한 그는

   우리나라 성리학(性理學)의 시조(始祖)로 일컬어진다.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개성에 5부 학당(五部學堂), 지방에 향교를 두어 교육진흥을 꾀했다.

   외교에도 능하여 일본과 명나라에 여러 차례 사신으로 왕래하였으며

   왜구와 여진을 물리치는데도 큰 공을 세웠다.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석(奭)을 배웅하러 나갔던 이성계가

   낙마하여 병석에 눕게 된 것을 기회로

   역성혁명파(易姓革命派)를 죽이려 했다가

   오히려 이를 알아차린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趙英珪) 등의 습격을 받아 죽었다.


   1517년(중종 12)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고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3개 서원에 제향 되었다.

   시조 ‘단심가(丹心歌)’ 등 많은 한시가 전하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문집으로 ‘포은집(圃隱集)’이 전하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2. 해제(解題)

   정몽주(鄭夢周)의 시문은 대부분

   웅혼한 기상이나 곧은 절개를 강조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 글 ‘춘흥(春興)’은 소녀의 마음처럼 섬세하고 여리며 깔끔하다.

 

   봄비가 소리 없이 내려 낮에는 비오는 소리를 들을 수 없더니만

   밤이 되어 사위가 잠들고 조용하니 작지만 빗소리가  들린다.


   지은이는 봄비 오는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생각한다.


   봄비에 겨우내 쌓였던 눈이 녹겠지.

   “봄눈 녹아 흐르는” 물로 앞 냇물이 불어 넘치겠지.

   그러면 새싹도 다들 돋아나겠지.


   지은이는 이렇게 새로운 희망과 기쁨으로 이 봄밤 잠 못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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