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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방서예자료[870]정칙(鄭侙)선생7언절구喜賦

작성자古方|작성시간21.07.24|조회수274 목록 댓글 0

고방서예자료[870]정칙(鄭侙)선생7언절구喜賦


永夜無眠,枕上忽聞鷄鳴,喜賦.

[영야무면,침상홀문계명.희부.]

 

永夜無眠數點燈 영야무면삭점등

數=자주삭.

屛間懶僕喚生憎 병간라복환생증
懶=게으를라. 僕-종복. 喚=부를환. 憎=미워할증.

忽聞膊腷隣鷄唱 홀문박픽린계창

膊=포박.물건을 치는 소리. 닭이나 새의 소리.

腷=홰 치는 소리픽. 腷腷膊膊鷄初鳴  古詩 픽픽박박계초명

更覺靈臺爽氣淸 경각영대상기청

靈臺영대=정신.마음.

 

[古方 譯]

긴밤 잠 못 이루다 잠자리에서 갑자기 닭우는 소리 듣고 즐겨 시를 짓다.

길고긴 밤 잠 못 이루니 등블 자주 끗다 켜고

병풍 너머 잠자는 아이 쓸데없이 불러보네

갑자기 이웃집 닭이 훼를 치며 우는 소리에

더욱 더 내 마음이 상쾌하고 맑아지는 것 같네

 

 

[이종묵의 ‘한시 마중’]<29>불면의 밤
동아일보 입력 2012-12-11
 

 
숙종 연간의 문인 조태채(趙泰采)는
‘노쇠함을 탄식하며(歎衰)’라는 시에서
‘병든 치아 있은들 몇 개나 되겠는가?
시든 백발 나날이 빠지니 몇 가닥 남았나?
앉으면 늘 졸음이 쏟아져 잠 생각만 간절하고,
일어날 때 허리 짚고 아이쿠 소리를 지른다
(病齒時存凡幾箇 衰毛日落許多莖
坐常垂首惟眠意 起輒扶腰自痛聲)
’라고 하였습니다. 나이가 든 분이라면 이 구절에 절로 공감이 갈 겁니다.
또 19세기 전후한 시기의 문인 이복기(李福基)는
‘노년이라 잠자는 일이 잘 되지 않아,
초저녁엔 꾸벅꾸벅 깊은 밤엔 말똥말똥
(老年寢事未全成 初夜昏昏後夜淸)’이라 하였는데,
낮에는 늘 꾸벅꾸벅 졸다가 정작 남들이 다 자는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 역시 피해갈 수 없는 노화 현상입니다.

정칙(鄭칙·1601∼1663)이라는 문인은 노년에 불면의 밤을 자주 보냈습니다.
잠을 이룰 수 없어 등잔불을 껐다 켜기를 몇 번이나 반복합니다.
옆방에서 편히 코를 골고 자는 하인이 얄미워서 시킬 일도 없으면서
괜스레 불러 깨워봅니다. 그렇게 뒤척이다 어느새 새벽 닭 울음소리가 들리고
창이 훤해집니다. 이보다 더 반가운 일이 없습니다.
이 분은 생의 마지막 작품으로 비슷한 제목의 시를 지었는데
‘늘그막에 한가하여 일이 없기에, 세월이 오고 가는 것 살펴보노라.
창문 하나 밝았다 어두워지는 사이에,
그저 백년 인생 바삐 감을 알겠네
(老去閒無事 光陰閱往來 一窓明暗裏 惟覺百年催)’라 하였습니다.
누워서 멍하게 창밖을 내다보는 그의 쓸쓸한 눈길이 느껴져 서글퍼집니다.
 
정칙(鄭侙), 1601(선조 34)∼1663(현종 4).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중칙(仲則), 호는 우천(愚川) 또는 와운옹(臥雲翁).

안동 출생. 아버지는 예조참판에 증직된 사신(士信)이며,

어머니는 영춘이씨(永春李氏)로 관찰사 광준(光俊)의 딸이다.

광해군의 폭정을 비관하여 과거응시를 포기하고 글만을 읽다가,

1627년(인조 5) 진사가 되고 이어서 참봉에 올랐다.

1636년 병자호란 직전에 「논시사언죄(論時事言罪)」를 지어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였는데, 경상좌도의 병영 이전 등 7개항의

시폐를 개혁할 것을 요구하고, 왕도정치를 시행해야만 나라가 평안하고

백성도 안락을 누릴 수 있다고 주청하였다. 청나라와 강화가 이루어지자

대명절의를 부르짖고 향리로 돌아가 우천정(愚川亭)을 지어서

후진육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저서로는 『우천문집』이 있다.

 

우천선생문집
정칙 저|木板本 |7卷 4冊 | 30.7×19.5 ㎝ 
이 책은 정칙의 손자 정창흥이 유고를 수집하고 이재李栽에게 편집을 부탁하여 1721년에 원본이 완성 되었다 그러나 간행은 1833년에 후손 정래성에 의해 목판본 7권 4책으로 이루어졌다 서문은 유고를 편집한 이재李栽가 썼고 발문은 책을 간행할 무렵에 류이좌와 정래성이 썼다 권 1~2에 시373 제 권3 에 부 잠 명 문 소 간찰22 편 4권 에 잡저 5권 에 설 발 서 기 전 권6 은 변 축문 제문 묘지명 묘갈명 권7 은 부록으로 이재가 지은 행장 이광정이 지은 묘지명 제문 만사 등이 수록되어 있다 저자는 시문에 모두 뛰어난 문장가로 이름을 얻었는데 한당의 고문을 익혀 일가를 이룬 것으로 평 가된다.
정칙(1601~1663)의 자는 중칙仲則, 호는 우천愚川,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이민성 李民宬의 문인이고 김응조 이시명 류원지 류학 등과 교유하였다. 1627년에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나 출사하지 않고 강학과 저술로 일생을 마쳤다.

 

[출처] 전주류씨 함벽당 종가 : 고서 1 유고 족보 일고 문집|작성자 류병훈

 

 우리 고을 안동에는 옛날부터 비석을 세워 고을 수령의 덕을 칭송하는 경우가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는데, 유독 퇴계 이 선생께서는 그것을 매우 좋게 보시고 말씀하셨다.
  “비석을 세우는 것은 수령이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을 평가하는 것에 가깝다.
더구나 한때의 비난과 칭찬이 반드시 다 공정한 것에서 나온 것은 아님에랴.” 
  사문(斯文) 정립(鄭岦)이 우리 고을에 부임하였는데, 혼조(昏朝)*의 탐학한 정사를
겪은 뒤라 공평한 정사에 사람들이 기뻐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많이들 비석을 세우고
싶어 하여 자재를 모으고 돌을 채취해 두었으나, 끝내 이루지는 못하였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우리 고을에 정공(鄭公)처럼 덕을 펴고 은혜를 베푼 이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만약 이 비석이 한 번 세워지고 나면 정공에게 득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고려 때부터 지금까지 8백 년 동안 유지되었던
우리 고을의 순후한 풍속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될 것이다. 대현(大賢)의
정론을 고려하지 않고, 전고에 없던 일을 처음으로 행한다면 비속하지 않으면 망령된 것이리라.

*혼조(昏朝) : 포악한 임금이 다스리는 혼탁한 조정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광해군(光海君)이 다스리던 때를 가리킨다.

 
吾州。自古無立碑頌邑宰德者。人皆恠之。退溪李先生獨深韙之。以爲立碑。近於評論地主贒否。况一時毁譽。未必盡出於公乎。
鄭斯文岦。來莅吾州。承昏朝叨懫之後。政平人悅。州人多欲立碑。鳩材伐石。而終未就。
自古及近。布德施惠於吾州如鄭公者。不知其幾人。若使此碑一立。非徒有損於鄭公。吾州自麗迄今。八百年淳厚之風。一朝盡矣。其不顧大贒定論。而創爲前古所無之事者。不野則妄矣

 
- 정칙(鄭侙, 1601∼1663), 「안동무비(安東無碑)」, 『우천집(愚川集)』 제4권, 잡저(雜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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