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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방서예자료[881]곽여(郭輿)선생 장원정응제야수기우(長源亭應製野叟騎牛)

작성자古方|작성시간21.07.30|조회수179 목록 댓글 0

 

고방서예자료[881]곽여(郭輿)선생 장원정응제야수기우(長源亭應製野叟騎牛)

 

곽여(郭輿) 장원정응제야수기우(長源亭應製野叟騎牛)

​            곽여(郭輿)의 소 타는 시골노인

太平容貌恣騎牛 (태평용모자기우)

半濕殘霏過壟頭 (반습잔비과롱두)

知有水邊家近在 (지유수변가근재)

從他落日傍溪流 (종타락일방계류)

태평스러운 얼굴로 편안하게 소를 타고

보슬비에 반쯤 젖어 언덕머리 지나가네.

강가에 집이 가까이 있는줄 알고

그 사람을 따라 지는 해도 시냇가를 따라가네.

 

태평스런 얼굴, 아무렇게나 소를 탔다
안개비에 반쯤 젖어 밭둑 지나간다
물가에 오니 집에 다 온 걸 알겠구나
저 지는 해도 따라왔네 개울물과 함께


 野叟騎牛(야수기우)- 郭輿(곽여)

 소타고 가는 시골 늙은이     

● ○ ○ ● ○ ○ ◎

太 平 容 貌 恣 騎 牛   태평스런 모습에 아무렇게나 소를 타고

태평용모자기우

 

● ● ○ ○ ○ ● ◎

半 濕 殘 霏 過 壟 頭   안개비에 반쯤 젖어 밭둑길을 지나간다.

반습잔비과롱두

 

○ ● ● ○ ○ ● ●

知 有 水 邊 家 近 在   알겠다, 집 가까이에 물가가 있음을

지유수변가근재

 

○ ○ ● ● ○ ○ ◎

從 他 落 日 傍 溪 流  소탄 노인을 쫓아 지는 해도 시내 곁을 따라 흐른다.

종타락일방계류

 

 【 註釋 】野叟 야수(강호에 묻혀 사는 늙은이/野人), 貌 모(모양/얼굴),

恣 자(방자하다/마음 내키는 대로 하다), 騎 기(말을 타다),

恣騎牛 자기우(편안한 자세로 아무렇게나 소를 타다),

濕 습(축축하다/젖다), 殘 잔(해치다/남다, 나머지),

霏 비(눈이 펄펄 내리다/조용히 오는 비), 殘霏 잔비(그쳐가는 비/안개비),

壟 롱(언덕/밭이랑), 壟頭 롱두(밭머리/밭둑길),

從他 종타(그를 좇음/소탄 늙은이를 좇음), 傍 방(곁)

 

【 構成 및 韻律 】7언 절구로 平起式평기식이며,

韻字는 平聲 ‘尤’韻 ‘牛 ․ 頭 ․ 流’자 이다.

(참고 : ○ 평성, ● 측성)

                      

【 作者 】郭輿곽여(1058 문종12~ 1130 인종 8) : 고려 예종 때의 문인이다.

본관은 청주, 자는 夢得몽득이고, 호는 東山處士동산처사이며, 시호는 眞靜진정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내시에 소속되었다가 홍주사를 맡아 외직으로 나갔을 때

長溪草堂장계초당을 짓고 여가를 즐기다가 곧 관직을 버리고 금주로 은거하였다.

예종이 즉위하자 그를 불러들여 선생의 대우를 하였으며,

예종과 談論唱和담론창화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를 金門羽客금문우객이라 불렀다 한다.

다시 사퇴하고 성 동쪽 若頭山약두산에 살면서 동산처사라고 자호하였다.

예종이 산재를 지어주고 虛靜齋허정재라는 편액을 하사하였으며,

예종이 산책 때 들러 함께 시를 읊고 즐겼다고 한다.

 

【 評說 】 소타고 가는 시골 늙은이

시골 노인이 석양에 아무렇게나 소를 타고 가는 태평스런 모습을 그린 詩이다.

이 詩는 원래 제목이 ‘長源亭應製野叟騎牛’장원정응제야수기우이다.

 즉 장원정이라는 정자에서 시골노인이 소를 타고 가는 것을 보고

王名왕명(예종)으로 지은 것이다.

 

곽여가 임금인 고려 예종을 모시고 개성 근교에 나가 민생을 살피던 중

소를 타고 지나가는 노인과 마주쳤다. 예종의 명으로 즉석에서 이 詩를 지어 올렸다.

자연 속에서 평생을 욕심 없이 낙천적으로 살아 온 한 늙은이가, 아무렇게나 소를 타고

밭머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집이 물가 근처에 있었는데, 마침 지는 해도

늙은이를 따라 흐르는 시내물 위로 지고 있었다.

소를 타고 가는 늙은이의 평화스런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이것이 바로 자연과 동화된

天眞천진 그 자체가 아닐까? 푸른 소(靑牛)를 타고 유유히 함곡관을 나서는

老子노자와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仙風선풍이 감도는 소를 타고 가는 늙은이의 도인 같은 풍모를 미화한 것도 그

렇거니와 소 탄 늙은이를 조용히 뒤쫓아 가면서 일거수일투족을 음미하고

이를 詩로 읊은 작자 일행의 관심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李仁老이인로는 ‘破閑集’파한집에서 “어찌 다만 仙風道韻선풍도운이라고만 하랴,

사람의 마음을 통째로 움직이기에 족하다.”고 감탄했다 한다.

 

 곽여(郭輿.1058.문종 12∼1130.인종 8)

    고려 초기의 문신. 자 몽득(夢得). 시호 진정(眞靜). 

우복야참지정사(右僕射參知政事) 상(尙)의 아들. 

과거에 급제 후 궁중의 합문지후(閤門祗侯)로 있다가 홍주(洪州)의 수령으로

나갔다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 금주(金州)의 초당(草堂)에 돌아갔다.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세자일 때 사귄 정으로 불러서 궁중에 있게 하고, 

선생으로 대하여 담론(談論)하기를 즐겼다. 

뒤에 물러날 때 왕이 성동(城東)의 약두산 일봉(若頭山一峯)을 주어,

 거기 서재를 짓고 머무니, 왕이 산책을 나오면, 들러 함께 시를 읊고 즐겼다.

 그가 죽은 뒤 왕이 정지상(鄭知常)을 시켜 <산재기(山齋記)>를 쓰게 하고

시호를 내렸다.- 이홍직 : <국사대사전>(백만사.1975) -

 

고려 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자는 몽득(夢得)으로 곽상(郭尙)의 아들이다.

 어려서 꿈에 어떤 사람이 여(輿)라고 명명하였으므로 이름을 삼고

몽득으로 자를 삼았다. 어려서부터 맵고 냄새나는 채소를 먹지 않았으며, 

여러 아이들과 함께 놀기를 싫어하고 항상 홀로 한방에 거쳐하여 학문에 힘썼다.

문과에 급제하여 내시부(內侍府)에 속했다가 합문지후(閤門祗侯)를 거쳐

홍주사(洪州使)로 나아가 홍주를 다스렸다. 홍주목사로 있을 때

성 바깥 시냇가에 작은 암자를 짓고 장계초당(長溪草堂)이란 이름을 붙이고

공무의 여가만 있으면 매양 그곳에 가서 휴식하였다. 임기가 차서 돌아와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이 되었다가 사직하고 김해(金海)의 초당(草堂)에 은거하였다.

1105년 예종이 즉위하자 세자일 때 사귄 정으로 불러서 궁중

순복전(純福殿)에 있으면서 왕의 스승으로 담론(談論)에 응하였다

. 이에 사람들이 그를 금문(金門, 대궐문)의 우객(羽客, 신선)이라고 하였다.

1115년 왕이 미복으로 곽여(郭輿)[1058~1130]가 있는 순복전에 가서

주연을 배설하고 근신들과 함께 글을 강론하다가 새벽이 되어서 헤어진 일이 있다.

1116년 종친과 곽여를 불러 주연을 베풀고 왕이 시 세편을 짓고

곽여에게 화답시를 지어 올리게 한 일도 있다. 

왕이 그가 오래 궁중에 있음에 혹 나가 놀기를 생각할까 하여

서화문(西華門) 밖에 별장(別莊)을 주었다. 

송나라로 사신가는 왕자지(王字之)와 문공유(文公裕)를 위하여

자기 별장에서 전송하는 연회를 차리고자 왕에게 청하였더니

왕이 주과(酒果)를 내렸는데, 정도에 지나치게 성대하여

당시의 여론이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 뒤 그가 궁중에서 물러가서 은거할 것을 요구하자 왕이

성동(城東) 약두산(若頭山)에 집을 짓고 살게 하였다. 

그는 호를 동산처사(東山處士)라 하고 거처하는 방을 허정당(虛靜堂),

 서재를 양지재(養志齋)라 이름지었다. 왕이 친히 편액을 써서 하사하였다.

예종 때 하루는 왕이 산재(山齋)에 미행(微行)하였더니

곽여가 마침 서울에 올라가 없자 오래 산중에서 배회하다가

벽상(壁上)에 시부(詩賦)하고 돌아온 일도 있다. 

또 뒤에 산재에 행행(行幸)하였다가 만나자 손을 잡고 반가워 외쳤다고

하니 예종이 대단히 대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종신토록 결혼하지 않았으며 산재에서는 다만 비첩(婢妾)만 데리고 있었다. 

그는 몸이 부대하고 수염이 없었으며 눈은 구슬 같았다.

1130년(인종 8) 졸하였는데 향년이 72세였다. 왕이 슬퍼하여

근신을 보내어 제(祭)를 지내고 진정(眞靜)이라 증시(贈諡)하였다.

 지제고(知制誥) 정지상(鄭知常)에게 명하여 산재기(山齋記)를 짓게 하고

비석을 세웠다. 상당구 명암동 약수터의 청원사에 제향되고 근년에 영정이 봉안되었다.

그는 서사(書史)를 섭렵하여 도(道) 석(釋) 의약(醫藥) 

음양(陰陽)의 설까지 보면 곧 외워 잊지 않았으며, 

사(射) 어(御) 금(琴) 기(碁)도 못하는 것이 없었다.

시조 2수가 전하여 그의 작품이라 하나, 확인할 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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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문우객(金門羽客) 곽여(郭輿)>

곽여(郭輿)는 곽상(郭尙)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냄새 나는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여러 아이들과 같이 놀지 않고, 항상 홀로 있었다. 역학등제(力學登第)한 후

합문지후(閤門祗侯)가 되었다.

후에 홍주(洪州) 지방관으로 나간 후 개울 위에 장계초당(長溪草堂)을 짓고,

 신선 같이 지냈다. 16대 예종(睿宗)은 그를 궁중 순복전(純福殿)에 있게 하고,

 선생이라 하였다. 항상 검은 건을 쓰고, 학창의(鶴氅衣)를 입고, 

도사생할(道士生活)을 하였다. 

그러므로 그를 금문우객(金門羽客: 왕궁 안에 있는 궁궐의 신선)이라 화였다

. 다시 성동에서 살 때 초당을 지어놓고, 동산처사(東山處士)라 하였다.

곽여는 키가 크고 수염이 없으며, 눈은 구슬 같았고, 

서적을 많이 읽어 도(道)ㆍ석(釋)ㆍ의약(醫藥)ㆍ음양(陰陽) 등을 잘 알았다.

 또 사어금기(射御琴碁)도 잘했다. 그러나 홍주(洪州)에 있을 때

기녀(妓女)를 친해 서울로 데려왔고, 다시 기녀(妓女)의 나이 늙어 가자,

 보내고, 산재(山齋)에서 자기 집 비첩(婢妾)을 데리고 놀았다.

이때는 고려의 전성시대로, 신선적인 생각이 많았고, 

또 금문우객(金門羽客)이라는 선골도풍(仙骨道風)인 사람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곽여(郭輿)도 끝까지 기녀(妓女)니 비첩(婢妾)을 두고, 

즐겁게 지낸 것은 현세신선(現世神仙)이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

 

<시조>

오장원(五丈原) 추야월(秋夜月)에 에엿블손 제갈무후(諸葛武候)

갈충보국(竭忠報國)다가 장성(將星)이 떨어지니

지금히 양표충언(兩表忠言)을 못내 슬허 하노라.

 

남양(南陽)에 궁경(躬耕)혐은 이윤(伊尹)의 경륜(經綸)이요,

삼고초려(三顧草廬)홈은 태공(太公)의 왕좌재(王佐才)라.

삼대후(三代後) 정대인물(正大人物)은 무후(武候)ㅣ런가 하노라.

 

☞주석

<에엿블손> : 가련한 것은

<갈충보국(竭忠報國)> : 충성을 다하여 나라의 은혜를 갚음

<장성(將星)> : 장군의 이칭(異稱) 어떤 사람에게든지 각각 그 응한 별

<지금히> : 지금토록

<슬허> : 슬퍼

<남양(南陽)> : 중국 하남성 신야현의 서쪽. 이곳에 제갈공명이 숨어살던 와룡강(臥龍岡)이 있음.

<궁경(躬耕)혐> : 궁경함. 몸소 농사에 종사함.

<이윤(伊尹)> : 은(殷) 나라의 현상(賢相). 처음 신야(莘野)에서 밭을 갈다

탕왕(湯王)의 초빙으로 출사하여 탕왕을 도와 걸(桀)을 침.

<경륜(經綸)> : 천하를 다스림. 제도를 세워 국가를 경리(經理)함.

<삼고초려(三顧草廬)> :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유비(劉備)가 남양 융중에 있는

제갈량의 초려를 세 번 찾아간 일.

<왕좌재(王佐才)> : 왕을 보좌하기에 족한 재능, 또는 그 사람. 여상(呂尙)을 일컬음.

<정대인물(正大人物)> : 바르고 위대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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