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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감]]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작성자새벽(艮齋)|작성시간10.11.03|조회수532 목록 댓글 0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만일 어떤 사람이 삼세 일체의 부처를 알고자 한다면(若人欲了知三世一切佛), 마땅히 법계의 본성을 관하라(應觀法界性).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다(一切唯心造).”

화엄경(華嚴經)의 핵심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일체의 제법(諸法)은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의 나타남이고, 존재 자체는 오직 마음이 지어내는 것일 뿐임을 강조한다.

잠결에 목이 말라 물을 마셨는데 새벽에 일어나 보니 해골에 괸 물이었음을 알고, 사물 자체에는 정(淨)도 부정(不淨)도 없음을 깨달았다는 원효(元曉)의 일화는 일체유심조를 단박에 설명한다.

: 한 일
: 모두 체
: 오직 유
: 마음 심
: 지을 조

화엄경()》의 중심 사상으로, 일체의 제법()은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의 나타남이고,

존재의 본체는 오직 마음이 지어내는 것일 뿐이라는 뜻이다. 곧 일체의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에 있다는 것을 일컫는다.

실차난타()가 번역한 《80화엄경》 보살설게품()에 다음과 같은 4구의 게송이 나온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삼세 일체의 부처를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본성을 관하라().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다()."

《화엄경》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게송으로, 삼세불은 과거불·현재불·미래불을 가리킨다.

이 일체유심조의 경계는 모든 것이 마음으로 통찰해 보이는 경계로,

 마음을 통해 생명이 충만함을 깨닫는 경계이다.

곧 유심은 절대 진리인 참 마음[]과 중생의 마음[]을 포괄하는 것으로,

일심()과 같은 뜻이다.

일체유심조와 관련해 자주 인용되는 것이 신라의 고승 원효()와 관련된 얘기다.

원효는 661년(문무왕 1)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당항성(:)에 이르러 어느 무덤 앞에서 잠을 잤다.

잠결에 목이 말라 물을 마셨는데, 날이 새어서 깨어 보니 잠결에 마신 물이 해골에 괸 물이었음을 알고,

사물 자체에는 정()도 부정()도 없고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에 달렸음을 깨달아 대오()했다는 이야기이다.

원효는 그 길로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왔다.

[출처]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 | 네이버 백과사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화엄경〉의 핵심사상을 이루는 이 말은 "세상사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뜻이다.

슬프고 짜증나는 일도, 한 생각 돌이키면 편안해 지는 법이다.

그러나 이 법구(法句)에는 논리적 결함도 있는 듯이 보인다. 우리 마음이 저 뜰앞의 소나무를 만든 것은 아니잖는가.

 하늘의 흰구름을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마음이 만들었다"는 표현은 지나친 과장이 아닐까.

분명히 우리들 마음이 이 세상의 객관대상을 만들어 낸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대상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마음에 달려 있다. 유식(唯識)에서는 일수사견이라는 비유를 든다.

같은 것을 동시에 바라보는 데에도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은 사람들은 물을 보면,

누구나 마신다든지, 발을 담그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지옥의 중생들은 물을 피고름으로 본단다.

 물고기는 그냥 사는 집일 따름이다. 즉 물이라는 객관적 형태를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천차만별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낙엽 지는 호숫가에서 첫사랑을 속삭였던 이는 물만 보면 다정하고 아름다운 감정이 솟구친다.

즉 물에 대한 객관적이고 교과서적인 해석은 존재할 수 없다. 물은 결국 우리들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만약 지금 견딜 수 없는 고통과 미움에 시달리는 이가 있다면, 옛 기억을 떠올려 보자.

 죽을 것만 같았던 그 고통의 시간들이 지금 와서 생각하면 모두 부질없는 번뇌망상이다.

마찬가지의 논리로 지금의 현실도 언젠가는 추억이 될 따름이다. 문제는 고통이 아니라,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 들이느냐 하는 상념의 차이다. 이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도 마찬가지이다.

신문 사회면으로만 본다면 이 세상은 저주와 불행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아름다운 면으로 보면, 여전히 세상은 따스하다. 문제는 어느 쪽에 액센트를 두는가 하는 점이다.

시끄럽고 말 많은 세상을 보면서, 그래도 살만하다고 느끼게 하려면 불교가 바로 서야 한다.

그래서 세상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불교가 되어야 한다.

-정병조 동국대교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에 대한 오해
우리가 흔히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 한다. 그러나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는다. 통상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 할 때, 그것은 욕구, 욕망하는 바 대로 된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욕구와 욕망은 마음이 아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논다면 그것은 마음이 아니다. 또 생각과 행동이 따로 논다면 그것도 마음이 아니다. 가짜다.

마음이란 것은, 뜻과 경계가 정확하게 어우러질 때, 그러니까 개인적인 차원으로 봤을 때는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딱 어우러질 때 그걸 마음이라 한다. 주변 관계로 봤을 때는, 주체와 객체와 거기에 놓여진 사물 물건 이것이 통할 수 있는 어떤 결합점을 마음이라 한다. 그 맥점을 잡으면 문제 해결의 지혜와 방편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게 ‘일체유심조’ 법문의 이치다.

달리 말하면, 주관의 분열이 없이 나의 심성이 통합되어 있고 그리고 주관과 객관세계가 모두 통합될 때, 상호 연관관계와 작용관계가 정확하게 되어 있을 때, 그 상태를 마음이라 한다. 그 상태에서는 뭐든지 지은대로 된다는 것이다.

기존 철학 이론에 적용하면, 감각-지각-표상-사고, 이 사자가 일치되는 것을 존재의식이라 하는데, 사자가 일치할 때 그걸 심(心)이라 한다. 일치 하지 않는 것은 허위의식이다. 마음이 아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잘못 와전이 되어서, 슬픈 것도 괴로운 것도 마음먹기 나름이다, ‘아 괴롭지 않다’고 생각하면 안괴롭다, 이런 기가 막힌 논리를 들고 나오는데, 어떤 선각자도 그런 마음을 가르친 적이 없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마음을 이야기한 적 없다. 주객이 따로 노는 마음을 말한 적이 없다.

정말 내가 마음으로 보는가, 망상으로 보는가는 큰 차이가 있다. 문제를 진실된 마음으로 볼 때, 진짜 문제가 보이고 해답이 보인다. 그런데 단순한 나의 욕구, 희망, 감각 이런 걸로 문제를 대하고 바라보기 때문에 회답이 안 나온다. 그런 마음을 먹고서 ‘마음 먹기 나름이다’고 강변하기 때문에 미망 속에 계속 허우적거리고 더욱 깊이 나락으로 빠지게 된다.

배영순(영남대 국사과교수/ baeysoon@yumail.ac.kr)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삼계자심환(三界自心幻)

 

 

 

 

참 멋진 말입니다.

 

本來無一物 : 본래 실체 있는 물건은 단 하나도 없음이요,

一切唯心造 : 일체가 오로지 마음이 만든 것이요,

三界自心幻 : 욕계/색계/무색계가 스스로의 마음의 환영이다.

 

 

우리는 나도 실체가 있다고 여기고, 우리가 접하는 이 세상도 실체가 있다고 여깁니다.

 

근데 부처님께서는 그 반대로 말씀하셨죠.

실체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게 無我입니다.

無我란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 입니다.

 

몸과 마음은 있으나, 그 실체가 없다라는 뜻 입니다.

쉽게 말하면 허상이란 뜻이지요.

 

그래서 無我보다는 空이 진리에 더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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