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漢詩)와 함께하는 역사산책(15講)
정몽주(鄭夢周)
고려 충숙왕 때 뛰어난 외교가이자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평가받은 고려 말기의 충신.
정몽주(1337-1392)의 본관은 영일(迎日). 초
명은 몽란(夢蘭)·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인종 때 지주사(知奏事)를 지낸 습명(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성균관 복응재생(服膺齋生) 운관(云瓘)이다.
1367년 성균관이 중영되면서 성균박사에 임명돼 <주자집주>를 유창하게 강론,
당시 유종으로 추앙받던 이색으로부터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평가받았다.
얼마 후 왜구가 자주 내침해 피해가 심해지고 화친을 도모하기 위해 보내진
나흥유가 투옥됐다 돌아오자, 보빙사로 일본에 보내져 국교의 이해관계를 잘 설명해
일을 무사히 마치고 고려인 포로 수백 명을 구해 돌아왔다.
그러나 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척하는 데에 반대해 뜻을 같이하던
이성계를 찾아가 정세를 엿보고 돌아오던 중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 등의 습격을 받아 사망했다.
고려 말기에 들어서 법의 자의적 운영에 대한 폐단을 시정하고자 통일된
법전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대두되었는데, 정몽주는 〈지정조격 至正條格〉·〈대명률 大明律〉,
그리고 고려의 고유형법을 수집·연구하여 왕에게 바쳤다.
또한 지방관의 비행을 근절시키고,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했다.
한편 당시 풍속에 불교의 예법을 숭상하는 것을 비판하고 사서인(士庶人)으로 하여금
〈주자가례 朱子家禮〉에 의거해서 가묘(家廟)를 세우고 조상에 제사지내도록 했으며,
개성에 5부학당(五部學堂), 지방에 향교를 두어 교육진흥을 꾀했다.
시문에 능하여 시조 〈단심가丹心歌〉를 비롯하여 많은 한시가 전하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문집으로 〈포은집〉이 전한다. 조선시대에 주자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도통(道統) 중심의 문묘종사(文廟從祀)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때 도통의 기준을 주자학의 학문적 공적으로 한 공적론(功積論)과 의리명분으로 한
의리론(義理論)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는데 결국 주자학의 학문적 성숙이 심화되면서
후자를 대표하는 정몽주를 문묘에 종사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1517년(중종 12)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3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선생의 묘지는 경기용인시 처인구에 있다.
단심가(丹心歌)
정몽주(鄭夢周)
此身死了死了(차신사료사료) 이 몸이 죽고 죽어
一白番更死了(일백번갱사료) 일백 번 고쳐 죽어
白骨爲塵土(백골위진토) 백골이 진토로 되어
魂魄有也無(혼백유야무) 넋이라도 있거나 없거나
向主一片丹心(향주일편단심) 임 향한 일편단심을
寧有改理也歟(녕유개이야여) 어찌 고칠 리가 있을까.
조선 제3대 태종이 된 이방원의 하여가 (何如歌)에 답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신하의 충성심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노래이다. 이방원은 정몽주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우는 일에 가담할 뜻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하여가를 지어 그의 마음을 떠보았다.
이방원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고 유혹했으나 정몽주는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라고 받아치며 유혹을 뿌리쳤다 한다. 절박한 상황에서도 다양하고 묘미있는 표현을 보여준 작품이다. 이 노래는 조선의 개국과정에서 반대파의 주장을 대변했으나, 개국 후에는 신하의 충성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사회개혁보다는 질서유지가 더 중요하다는 쪽으로 노선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포은집·해동악부 등에는 한역시가 실려 있으며, 청구영언과 가곡원류의 각 이본 및 그밖의 많은 책에 실려 있다.
선죽교(善竹橋)
이덕무(李德懋)
血激轟椎走水中(혈격굉추주수중) 울리는 쇠몽치 소리에 피가 솟구쳐 물속으로 흐르니
群魚怫鬱鯁皆紅(군어불울경개홍) 고기들도 화가 나서 뼈속까지 모두 붉어졌네.
持毫滿蘸橋痕紫(지호만잠교흔자) 선죽교 붉은 흔적에 붓을 푹 담구어
寫出悲詞泣鬼雄(사출비사읍귀웅) 슬픈 노래 써서 귀신 두목 울려 보려네.
激 격할/부딪힐 격 轟 울릴 굉 椎 쇠몽치/등골 추
拂 떨칠 불 怫 답답할/울적할 불 鬱 막힐 울
怫鬱(불울) 불평이나 불만으로 화가 치밀고 속이 답답함.
鯁 생선뼈 경 蘸 담글 잠 痕 흉터 흔
포은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 일파가 휘두른 철퇴를 맞고 쓰러졌으며,
그가 흘린 피가 물에 흘러 고기들도 성을 내고 지느러미에 붉은 물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덕무의 시적 상상력은 포은의 충절을 무한한 존경심으로 승화한다.
선죽교 위에 지금도 홍건한 피 흔적에 붓을 적셔 진혼가를 써서
정몽주에게 바친다는 것이다. 참으로 멋들어진 시임을 알 수 있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조선후기의 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무관(懋官),
호는 형암(炯庵)·아정(雅亭)·청장관(靑莊館)·영처(嬰處)·동방일사(東方一士)·신천옹(信天翁).
박학다식하고 고금의 기문이서(奇文異書)에도 달통했으며,
문장에 개성이 뚜렷해 문명을 일세에 떨쳤으나, 서자였기 때문에 크게 등용되지 못하였다.
청나라에 건너가 학문을 닦고 돌아와 북학발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박제가ㆍ이서구ㆍ유득공과 함께사가(四家)라 이른다. 저서에 청장관전서가있다.
명성이 정조에게까지 알려져 1779년에 박제가·유득공·서이수와 함께
초대 규장각 외각검서관이 되었다. 비속한 청나라의 문체를 사용해
박지원·박제가 등과 함께 문체반정(文體反正)에 걸려 정조에게 자송문(自訟文)을
바치기까지 했으나, 질병으로 1793년에 죽었다. 정조는 생시의 업적을 기념해
장례비와 아정유고(雅亭遺稿)의 간행비를 내어주고,
1795년 아들 이광규(李光葵)를 검서관으로 임명하였다.
[출처] 한시(漢詩)와 함께하는 역사산책(15講)|작성자 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