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의 묘와 사위 이석형의 묘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능원리에 포은 정몽주 선생 묘소와 손서(손녀사위)인 연안 이씨의 묘소가 나란히 있다. 이곳이 명당이라 해 풍수 학인들이 많이 참관을 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의 진짜 명당은 정몽주 묘소가 아니라 연안 이씨 묘소이다. 저헌(樗軒) 이석형과 부인 연일 정씨를 합장한 묘이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고 있다. 고려 말 충신인 정몽주의 묘소는 본래 개성의 풍덕에 있었다. 그가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 의해 피살(1392년)된 뒤, 태종 6년(1406년) 3월에 풍덕에 초장하였던 묘소를 현재의 위치인 모현면 능원리 문수산 기슭으로 옮겨 부인 경주이씨와 합장한 것이다.
피살된 선생의 시신을 어느 스님이 가매장해 두었는데 이방원이 태종으로 등극한 후, 포은 선생을 다시없는 충신이라 하여 사면복권을 단행하였다. 그래서 유족들은 태종의 허락을 받고 선생의 유해를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옮기려고 했다.
천묘 일행이 지금의 용인군 모현면 능원리 근처에 이르자 갑자기 바람이 불어 앞에 세운 명정(銘旌)이 날아가 버렸는데, 당황한 일행이 명정을 쫓아갔으나 명정은 잡힐 듯 하면서 계속 날아가더니 어느 한 곳에 이르러 멈추었다. 다시 명정을 찾은 일행이 길을 떠나려 하자 이번에는 상여가 움직이지를 않았다. 이상하게 여겨 지관으로 하여금 명정이 떨어진 곳을 감정케 하니 천하에 없는 명당이었다. 유족들은 회의 끝에 고향까지 갈 것이 아니라 선생의 영혼의 뜻인 듯 하니 이 자리에 산소를 쓰자는 합의를 보았으나 이미 날이 저물어 작업을 할 수 없어 다음날 아침에 일을 하기로 하고 인부들만 산소 자리를 지키게 한 후 주변에 숙소를 정했다.
이때 유족 대표로 나선 사람 중에 선생의 손녀가 끼어 있었다. 그날 밤, 그 터를 욕심낸 손녀가 인부들에게 독한 술을 먹여 잠을 재운 후, 밤새 산소자리 아래의 연못(명당수)에서 물을 퍼 날라 그 터에 물을 퍼부었다. 다음날 아침 사람들이 올라와 보니 이게 웬일인가. 어제 분명히 천하의 명당이라고 생각했는데 땅이 물에 젖어 축축하지 않는가. 결국 회의 끝에 그 옆자리의 두 번째로 좋다고 꼽힌 곳에 산소를 쓰고 말았다.
그런데 훗날 손녀가 자신의 남편이 죽은 후 그 터에 산소를 썼고 그 이후로 연안 이씨의 후손들이 대발복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영일 정씨와 연안 이씨는 사돈 간임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사이가 되었으며, 손녀에겐 ‘출가외인’이란 불명예스런 딱지가 붙었다고 한다.
포은의 묘역에는 묘표와 신도비가 전하는데 묘표는 조선 중종 때에 태학생들이 포은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중종에게 청원하여 세운 것이라 하는데, 조선조에 비석을 세웠음에도 전면에 「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처음 세울 때 조선의 직함이었던 영의정을 추증하여 무덤 옆에 세웠더니 곧 벼락이 쳐서 비석을 부숴버리는지라 고려의 문하시중으로 고쳤더니 지금까지 무사하다는 일화가 전한다. 충신의 고고한 절의가 사후에도 청청히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신도비는 조선 숙종 때에 세웠는데, 현종 때의 문신 김수증(金壽增)이 썼고 글은 송시열(宋詩烈)이 지었다 한다.
지금도 선생의 묘소는 연일정씨 포은공파의 종손에 의해서 잘 돌보아 지고 있으며 해마다 서너 차례의 시제를 지내는데 그 중에서 가을에 모셔지는 시제는 그 규모가 워낙 방대하여 방송국에서 헬기를 동원하여 촬영해 갈 정도라고 한다. 또한 포은의 묘소를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모현면 능원리는 연일정씨 포은공파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어쨌든 이 고장의 지명도 원래는 쇄포면이었으나, 포은 선생의 묘소가 능원리 문수산에 모셔진 후로 충현을 사모한다는 뜻에서 1411년부터 모현(慕賢)면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정몽주와 이석형의 묘(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포은 정몽주의 묘
이석형의 묘 (좌우에 2개의 명당 즉 쌍유혈이다.)
전설에 의하면 정몽주의 묘를 처음에는 豊德郡(풍덕군)에 썼으나 후
에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遷墓(천묘)할 때 緬禮行列(면례행렬)이 용인군 수지면의 경계에 이르자 앞세웠던 銘旌(명정 : 죽은 사람의 관직 성명을 적은 旗)이 바람에 날아가 現墓所(현묘소)의 자리에 떨어져 이곳에 安葬(안장)하였다 한다.
포은 정몽주선생의 묘는 을좌 신향에 술파, 저헌 이석형선생의 묘는 진좌 술향에 술파. 여기는 쌍유혈로 이석형의 묘소가 이 龍脈(용맥)의 主穴(주혈)이며 포은 정몽주의 묘소는 次穴(차혈)이다.
포은 정몽주 선생은 너무도 유명하여 설명은 생략하고 이석형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한다.
연안 이씨의 시조 茂(무)는 당나라의 장군으로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평정한 다음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황해도 연안 지방에 자리잡고 가문을 일으켰다.
樗軒(저헌)이란 호를 가진 이석형은 그는 세종 때 진사 생원 문과 등 三場(삼장)을 장원했고, 文臣重試(문신중시)에서도 장원을 했다 한다.
연안 이씨 가문은 조선시대에 相臣(상신) 8명, 대제학 8명, 청백리 7명, 문과급제자 250여명을 배출한 名門이다.
특히 이석형선생의 玄孫(孫子의 孫子)인 月沙 이정구는 조선시대에 손꼽히는 한문학의 대가로서 인조 때 좌의정과 정승 셋과도 안 바꾼다는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두 가문을 비교해보면 주혈과 차혈의 발음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는 독자 여러분들도 이해가 될 것입니다.
- 용어 설명 -
쌍유혈 : 여성의 가슴처럼 두개의 명당이 나란히 있는 것
遷墓(천묘) : 묘를 옮기는 일
을좌 신향 : 동남방과 서북방을 뜻함
술파 : 서북방을 뜻함
진좌 술향 : 동남방과 서북방을 뜻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