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청(崔惟淸) 遊奉嚴寺(유봉엄사)
春盡山花掃地無 (춘진산화소지무)
綠林高下鳥相呼 (녹림고하조상호)
故知楊柳風流在 (고지양류풍유재)
飛絮時來繞座隅 (비서시래요좌우)
봄이 다 가니 산꽃도 떨어져 없고
푸른 숲 위아래에선 새만 서로 부르네
양류가 멋 있는 줄 새삼 알겠고나
버들개지는 날아와 자리를 맴도네
고전원문출처= 동문선(東文選) 卷之十九 七言絶句
※崔惟淸(최유청 1095∼1174)고려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
본관 창원(昌原). 자 직재(直哉). 시호 문숙(文淑). 예종 때 문과에 급제,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으나 인종 초 이자겸(李資謙)의 간계로 파직당하였다가
이자겸 몰락 후 다시 출사(出仕)했다.좌사간(左司諫) ·시어사(侍御使) 등을 역임하고,
1132년(인종 10)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때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왔다.
1142년 간의대부(諫議大夫)로서 금나라에 가 책명(冊命)을 사(謝)하고 돌아와
호부시랑(戶部侍郞)이 되고, 이어 동북면병마부사(東北面兵馬副使) ·승선(承宣)이 되었다.
1149년(의종 3) 참지정사판상서형부사(參知政事判尙書刑部事) 등을 거쳐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고,
1151년 판병부사(判兵部事)를 겸임했다.
이 해 처남인 낭중(郞中) 정서(鄭敍) 등이 참소를 입은 사건에 연루,
남경유수사(南京留守使)로 좌천되었으며, 이어 1157년 충주목사(忠州牧使) 등으로
좌천되었다. 1161년 봉원전대학사(奉元殿大學士)에 이어 다시 중서시랑평장사에 올랐으며,
1172년(명종 2) 수사공집현전대학사판예부사(守司空集賢殿大學士判禮部事)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경사(經史)와 불경(佛經)에 밝았으며 글씨도 잘 썼다.
저서에 《남도집(南都集)》 《유문사실(柳文事實)》 《최문숙공집(崔文淑公集)》
《이한림집주(李翰林集註)》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