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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 守 정용하

옛 선비의 향기를 따라

작성자仁守|작성시간26.06.11|조회수72 목록 댓글 0

산천정(山泉亭)

 

 

산천정은 조선 후기 유학자 곡구(谷口) 정봉휴(鄭鳳休, 1782~1854)께서 1840(헌종6) 경에 경북 영천시 임고면 삼매리(매곡마을) 1022번지에 건립한 학구지소로서 초창기 정자의 구조는 좌우 양쪽에 온돌방이 있었고 그 사이에 마루가 있었으며 좌측 방 측면에 부엌이 있어 방에 온기를 보존하고 학문에 전념코자 취사를 위하여 추가로 덧붙인 것으로 보여진다. 지붕은 기와이며 중국 진나라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앙모하였는지 자신의 살림집 뒤, 대나무 숲과 접한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으나 습한 기후 탓인지 100년이 조금 지나자 1955년 경에 소실(消失)되는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소실 당시 마루에는 각종 서적과 목판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고 전해 진다.

 

그로부터 약 10년 후인 1965년 음력 210일에 곡구 정봉휴 선조의 후손으로서 오래전에 고인이 되신 정동헌, 정돈식, 정광식, 정극식, 정홍식 등이 산천정을 현재의 위치인 영천시 임고면 삼매리(매곡마을) 1072번지로 이전하여 중건한 것이다. 그 이유는 조선시대 선비들은 사림(士林:선비들의 단체 또는 선비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감)이라 하여 속세와 멀리 떨어져 기거할수록 자타가 고상하게 생각하였고 이를 선호하는 사상이 주류를 형성하였으나 1960년대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인식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조치로 보여진다.

 

중건한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된 팔작지붕의 구조이며 가운데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型)인데, 정면의 처마 아래에 산천정(山泉亭)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고, 뒤쪽 처마에는 곡구정사(谷口精舍)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다. 양쪽 온돌방 측면에는 쪽마루를 두었고 온돌방 사이 마루에는 확장성을 더하는 출문인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두고 있다. 그 우측의 상단 처마에는 1973년 전주 본관, 중재 이호대(李好大:1901~1981) 선생께서 쓴 산천정기(山泉亭記)편액이 걸려있다. 곡구 정봉휴는 매산 정중기(鄭重器:1685~1757, 영조 때 형조참의) 선생의 증손으로서 경북 의성군 사촌마을에 세거하였던 안동 김씨로서 의금부 도사에 제수된 천사 김종덕(金鍾德)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김종덕의 외아들 김경진(金慶進)의 따님과 혼인하였다(스승의 손녀와 혼인을 했다는 것은 곡구 정봉휴께서 스승의 문하에서 학문이 가장 빼어났음을 뜻함).

 

곡구 정봉휴 선조의 4형제분은 전설상의 네 가지 신령스러운 동물인 기린, 봉황, 거북, () 등이 극진한 조화를 상징하는 와 만나는 삶을 추구하였기에 이름을 각각 인휴(麟休), 봉휴(鳳休), 귀휴(龜休), 용휴(龍休)라고 지었던 것이다. 네 분의 형제는 모두가 보통 사람들과 달리 봄날 같은 화사한 얼굴에 보기 드문 기다란 흰 눈썹과 백설 같은 턱수염을 지녔으며 학덕은 물론이거니와 외모에서부터 특출하였기에 고장의 선비들은 이들 4형제분을 가리켜 조선시대 선비들이 우상처럼 받들었던 상산사호(商山四皓:진시황 때 산시성 상산에 은거한 동원공, 기리계, 하황공, 각리선생을 말함)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네 사람의 형제는 각각의 가족을 거느린 채 ㅁ자 모형의 가옥에 함께 거주하였다고 한다. ()와 예법을 사랑하는 봉황 가문의 후손으로서 장남은 건물의 전면과 후면에 거주하면서 아우들에게 모범을 보이면서 동시에 뒤에서 아우들을 보살피고, 아우들은 측면의 건물에 거주함으로써 좌우의 날개가 되어 장남을 보필함으로써 집안을 발전시킨다는 뜻이 담겨있는데 이것은 삶 자체가 맞춤형 설계도에 의하여 행하여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집안의 모든 일은 사전에 예측하여 대처하였고 반드시 형제들 간에 토의를 거쳐 결정하였으며, 백씨이신 석윤 정인휴(1776~1850)께서는 무소유 정신에 관한 기법을 개발하여 아침과 점심시간 사이에 훈련을 행함으로써 이를 실천하였다. 자신에게는 엄격하게 검소하면서도 고장에 거주하는 가난한 백성들에게 그들의 반감을 사지 않도록 하고자 자신을 지극히 낮추면서 한평생 식량을 베풀면서 구휼(救恤)을 하셨으며 또한 고장의 장(), 다시 말해 군수로 천거되었어도 이를 사양하였던 것이다. 개미굴처럼 우묵한 깊은 협곡 속의 산중마을에 선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던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그곳에 가면 항상 시와 예법이 있었고 학문과 베풂이 있었기 때문이다. 4형제분의 가족과 학문을 탐구하기 위해 임시로 숙박을 의탁한 선비 그리고 노비들을 포함하면 최소한 30~40명이 함께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곡구 선조의 저택에는 상시 50~60여 명의 외부 손님들이(선비) 머물렀으며 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하였다고 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손님을 맞이하는 겸손과 호탕함 그리고 남다른 지도력이 그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한 번 찾아오는 손님은 빠르면 15, 보통은 한 달가량 머물다가 간다고 했다.

 

방문 앞 신발은 부들처럼 놓여있었으며 방안의 옷걸이에 걸린 의복은 상하가 항상 가지런하게 걸려있어야만 했고, 가족들에게 손님은 집 안팎에서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해야 하는 대상으로서 이미 습관처럼 정착되어 있었다고 한다. 4형제분께서는 함께 출타하고 반드시 함께 귀가하였으며 학문 또한 함께하셨다고 한다. 어느 날 창헌 조 처사(趙處士:본명은 조 우각, 영천 자천마을 거주, 한글 가사인 대명복수가지음)께서 곡구(谷口)라는 풍미가 군자(정봉휴 선조)에게 매우 적합하다고 하시기에 어른(정봉휴 선조)께서는 세상 사람들을 속이는 일이다.”며 거부하였으나 아드님(정봉휴 선조의 , 정희승)께서 강화도에 거주하는 하곡 어른(양명학을 체계화한 하곡 정제두 선생)의 근친에게 부탁의 글을 올리게 되어 따르게 되었던 것이다. 곡구란 조선시대 선비들에게는 태산북두와도 같은 중국 한나라 은거 선비인 정 자진(본명:정박) 살았던 고장의 지명이며 특히 가을 경치가 유난히 아름답다고 전해 진다.

 

영천뿐만 아니라 인근 고장에서 까지 선비들로부터 스승으로 추앙받았던 곡구 정 봉휴께서는 화합과 규칙을 특히 강조하셨는데 (화합)는 함께 모여 있어야 곡식이 되고 식량이 되며, (:규칙)은 올곧은 실이 되어 종횡으로 결집 될 때 따뜻한 의복이 되어 공공의 선()이 완성된다.”고 하셨다. 또한 순후한 풍속을 방자하고 열등한 마을에 햇볕으로 전파시켰던 것이다. 연로하신 손님들의 연회 자리에서 자리로 계속 이어져 현인의 행적이라고 거론되었으며, 곡구 선조의 어짊 외에도 절조에 대하여 선비들은 시()를 읊기도 하였다고 한다. 과단성 있는 행동은 샘물이 급하게 흘러가게 하는지라 처소에 머무르며 셀 수 없는 수많은 달을 마중하였기에 대숲을 깨끗하게 청소(참신한 학문을 심화 발전시킴)하셨는데 그런즉 당호가 귀하지 않다고 말하더라도 귀하고, 공경한 덕을 베풀지 않았다고 말하더라도 공경한 것이로다.

 

1965년 당시는 산업화의 초기 단계이면서도 보릿고개 시절로서 정자를 새롭게 건립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후손들이 정자를 중건한 것은 경제적으로는 각자의 삶이 비록 어렵더라도 곡구 정봉휴 선조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고 그 뜻을 후세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이를 계승 발전시키는 것은 우리네 후손들의 의무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시대 상황은 급변하고 있어 다가오는 세상을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산천정(山泉亭)을 지방문화재로 지정함으로써 대외적인 위상 제고와 더불어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전통 문화유산을 지방자치단체와 문중이 합심하여 보존하여야 할 것입니다.

 

 

20266월 후손 정 용하(鄭容廈)

 

 

 ~1965년에 이전하여 중건한 산천정의 모습(2000년 이후 1차 보수를 하였음)~

 

                         ~ 어느 여름날의 매곡마을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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