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五言 절구

고방[7231]靑蓮李後白-絶句

작성자古方|작성시간26.06.23|조회수25 목록 댓글 0

고방[7231]靑蓮李後白-絶句 

 

絶句 절구

끊을절 구절구

絶句-네 () 이루어지는 한시(漢詩) 형식

 구가 다섯 자면 오언 절구(五言絶句), 

일곱 자면 칠언 절구(七言絶句) 한다.

 

批: 비평할 비, '비평(批評)하다

이후백의 시는 많지 않은데,

이 시를 보면 진실로 평범함을 뛰어넘었다.

 

細雨迷歸路

가늘세 비우 어지러울미 돌아갈귀 길로

가랑비(는) 돌아가는 길(에) 어지럽고

騎驢十里風

말탈기 나귀려 열십 거리단위리 바람풍

나귀(를) 타니 십 리(에) 바람(부네).

野梅隨處發

들야 매화매 따를수 곳처 필발

들 매화(가) 곳곳 마다 피어서

魂斷暗香中

넋혼 끊어질단 어두울암 향기향 속중

(내) 혼(은) 그윽이 풍기는 향기 속(에서) 끊어지네.

暗香: 그윽이 풍기는 향기.

 

이 작품은 이후백이 유랑 중에 마주한 찰나의 풍경과

그 속에서 느끼는 깊은 정취를 노래한 시이다.

시의 전반부인 “가랑비는 돌아가는 길에 어지럽고,

나귀를 타니 십 리에 바람 부네(細雨迷歸路, 騎驢十里風)”는

가랑비 내리는 가을 혹은 초봄,

나귀를 타고 먼 길을 떠나는 화자의 고독한 여정을 시각적이고 청각적으로 묘사한다.

어지러운 빗줄기와 십 리를 따라 불어오는 바람은,

그가 정치적 풍랑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고자 했던

강직한 지조를 솔직함과 자연스러움으로 투영한다.

 

이어지는 구절 “들 매화가 곳곳마다 피어서,

내 혼은 그윽이 풍기는 향기 속에서 끊어지네(野梅隨處發, 魂斷暗香中)”는

이 시의 감정적 절정을 이룬다.

화자는 길 곳곳에 핀 들 매화의 그윽한 향기(암향)에 취해

자신의 넋(혼)마저 끊어지는 듯한 황홀경을 체험한다.

이에 대해 허균은 “이후백의 시는 많지 않은데,

이 시를 보면 진실로 평범함을 뛰어넘었다”라고 비평하며,

짧은 순간의 감흥을 깊이 있는 예술적 경지로 승화시킨

그의 탁월한 통찰력을 높이 평가했다.

 

이 작품은 독자에게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상황에서도 서두르지 않고

순리를 기다리는 지혜를 가르쳐준다. 어지러운 비와 바람 속에

가려진 길처럼 우리 인생도 때로 방향을 잃지만,

들 매화의 그윽한 향기에 넋을 맡기듯 내면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후백이 쉴 틈 없이 국가의 중책을 도맡아 일하면서도 스스로를 다스렸던 것처럼,

재물에 대한 소욕(小欲)과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는 지족(知足)의 마음은

혼란스러운 세상을 이겨내는 힘이 된다.

 

이후백의 〈절구〉는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고요한 한거(閑居)와 감사의 시간을 선사한다.

가랑비와 바람 속에서도 들 매화의 향기에 집중하는 태도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스스로에 대한 성실한 성찰을 가능하게 한다.

독자는 이 시를 통해 짙은 비구름 너머에도 여전히 삶의 여정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도리를 다하는 인내와 성실이

결국 우리를 다시 밝은 해돋이로 인도할 것임을 확신하게 된다.

 

[출처] 이후백, <절구> 작성자 Wisdom

 

 

원문=靑蓮先生集一 / 五言絶句

絶句

細雨迷歸路。騎驢十里風

野梅隨處發。魂斷暗香中

 

 

 

○이후백(1520~1578):

https://youtu.be/noIXeFjv1fY?si=Md7pzZWWWAzvY3YI

 

1. 어깨너머로 책을 다 외운 ‘천재 작사가’

 

이후백은 1520년에 태어난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10세가 채 되기 전에 서당에서 15명의 형들이 배우는 어려운 책(성리대전 등)을 등지고 앉아 귀동냥만으로 모두 외워버린 엄청난 천재였다. 게다가 일찍이 지은 ‘소상팔경’ 가사가 한양(서울)의 음악계(악부)를 휩쓸며 대유행을 할 정도로 문학적 감각도 뛰어났다. 그 덕에 불과 1535년(만 15세) 향시에 장원 급제하며 일찌감치 한양 문인들 사이에서 유명 인사로 떠올랐다.

 

2.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융통성 제로의 ‘철벽남’

 

그는 원칙을 목숨처럼 지키는 꼿꼿한 성격을 가졌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큰아버지 댁에서 자라며 상을 치를 때, 어른이 단술을 권하자 “비록 단술이라도 ‘술(주)’ 자가 붙었으니 상주로서 마실 수 없다”며 융통성 없는 철벽을 칠 정도였다. 또한 당대 실세였던 이기에게 학문을 배우러 갔다가, 그가 매사를 비밀스럽게 처리하는 것을 보고 “군자의 마음씨가 아니다”라며 며칠 만에 쿨하게 ‘손절’하고 돌아와 버리는 등 부당함과는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

 

3. 혈연 채용(낙하산)을 극혐한 조선 최고의 ‘인사권자’

 

1546년(만 26세) 사마시, 1555년(만 35세) 문과에 급제하며 본격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그는 국가의 인사(채용)를 담당하는 최고 책임자(이조판서) 자리에 올랐다. 하루는 친척이 찾아와 벼슬자리를 청탁하자, 그는 정색하며 인사 추천 명부가 적힌 수첩을 꺼내 보여주었다. 거기엔 이미 그 친척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이후백은 "네 이름이 이미 적혀있어 추천하려 했는데, 네가 입을 열어 청탁했으니 이제 끝났다"며 가차 없이 명단에서 날려버렸다. 인사에 실수가 있으면 “내가 왕을 속였다”며 밤을 새우며 자책할 만큼 공정했던 그는 최고위직에 오르고도 가난한 선비처럼 살아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4. 팩트와 논리로 여론을 뒤집은 ‘명문장가’

 

이후백은 탁월한 논리력과 문장력으로 당대 지식인들을 압도했다. 인성왕후 승하 시 3년 상을 입어야 한다는 논리를 완벽하게 전개하여, 당대 최고의 지식인 류성룡마저 “이 노인의 학문이 이 정도 경지였단 말인가”라며 경복하게 만들었다. 또한 선조 즉위 초, 억울하게 희생된 선비들(을사사화)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왕의 교서를 직접 작성했는데, 그 내용이 너무나 명백하고 통쾌하여 읽는 이들마다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5. ‘워커홀릭’ 만능캐의 58세의 씁쓸한 퇴장

 

그는 1567년(만 47세) 승지, 대사간을 거쳐 1573년(만 53세) 명나라에 외교관(변무사)으로 다녀오는 등 종횡무진 활약했다. 1575년(만 55세)에는 평안도 관찰사로 파견되어 부패를 모조리 혁파하고 흉년과 불안에 시달리던 지역을 단숨에 안정시키는 뛰어난 행정력도 뽐냈다. 하지만 국가의 중책을 쉴 틈 없이 도맡아 일하던 이 워커홀릭은 1578년(만 58세) 호조판서 재임 중, 휴가를 내어 함양으로 성묘를 갔다가 그곳에서 갑작스럽게 병을 얻어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사후 광국공신 2등에 책록되고 연양군에 추봉되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