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碧潼公派(벽동공파) |
1. 碧潼公派(벽동공파)란 ?
古阜李氏의 세계(世系)는 始祖 문헌공(文憲公) 경조(敬祖)에서 16世孫에 이르러 크게 九大宗派로 나누어지고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서 21개 派로 분파되었다.(현재는 17개파)
9대종파 (晦 ․ 朔 ․ 望 ․ 初 ․ 國 ․ 瑞 ․ 眞粹 ․ 孝樊 ․ 挾) 중에서
(회) (삭) (망) (초) (국) (서) (진수) (효번) (협)
둘째인 삭(朔:16世)자 할아버지 파를 司書公 朔派(사서공 삭파)라 부르고
우리 碧潼公派(벽동공파)는 이 삭파(朔派)에 속한다.
삭(朔) 자 할아버지는 네 아들 <處謙(처겸), 元蘇(원소), 居謙(거겸), 亨蘇(형소)>를 두었는데
둘째가 17世 원소(元蘇) 할아버지이시다.
원소(元蘇) 할아버지도 두 아들<粹(수)와 精(정)>을 두었는데
그 중 둘째인 정(精 :18世)자 할아버지는 평안도 벽동군수(碧潼郡守)를 지내셨으므로 벽동공(碧潼公)이라 부르고 후손(後孫)들을 벽동공파(碧潼公派)라 부르고 있다
2. 선조의 발자취 <벽동공파>
1> 始祖 文憲公敬祖 祭壇碑(시조 문헌공경조 제단비)
<고부이씨 선조의 발자취에 있음>
碑 2 2>2> 古阜李氏 遠祖奉靈壇(고부이씨 원조봉령단)
<고부이씨 선조의 발자취에 있음>
3> 16世 承議郞.侍講院司書公 朔 祭壇碑
(승의랑. 시강원사서공 삭 제단비)
►司書公 朔은 派祖(18世) 碧潼公 精의 祖父
公의 성은 李씨요 諱는 삭(朔)이며 貫은 古阜라. 始祖 고려문하시랑평장사 여산군 시(諡)文憲公 諱 경조(敬祖)의 16世孫이요 조산천호밀직부사 諱 후급(後伋), 명주도감창사 諱 양빈(陽賓), 직제안겸사 諱 시단(時檀), 감찰대부 諱 상(祥), 호부시랑(戶部侍郞) 諱 만중(萬重), 대사간 諱 빈(濱), 삼사우사 諱흥철(興哲), 도승선 諱 배종(培宗), 예부상서 諱 기령(奇齡), 전적 諱 의도(義道) 이는 14내지 5代祖이시다. 고조(高祖)는 부사(府使) 諱 원귀(元貴)요 曾祖는 홍복도감판관(弘福都監判官) 諱 조(祚)요 祖는 판도판서 諱 윤승(尹升)이요 考는 좌우보위승랑장, 평양서윤 諱 문수(文守)요 비(妃)는 좌참찬(左參贊) 전주 崔公 갑룡(甲龍)의 딸이다.
公은 고려 공민왕 4년 乙未생이요 고려 말 진용위별장을 역임하시고 고부 와석동 입석리에 은거하였으나 學德과 명망이 높고 경사에 정통한 公은 조선개국 초에 승의랑(承議郞)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로 초관(招官)되어 世子교육에 一助 하시다. 주거를 부안(扶安)으로 옮긴 후 世宗8년丙午에 卒하시니 壽72歲이시다. 配 이인(宜人)은 한성소윤 부안김공(扶安金公) 세영(世英)이 딸이요 後配 의인(宜人)은 검교(檢校) 영천최공영(永川崔公永)이 딸이다. 슬하에 4男을 두시니.루천불취(屢薦不就)하고 고수동강석천지락(固守東崗石泉之樂)하신 處士 처겸(處謙)과 문장필한(文章筆翰)이 문우일세(聞于一世)한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 원소(元蘇)와 문예(文藝)가 여류(如流)한 侍講院司書 거겸(居謙)과 藝와 書가 심오하나 사적부전(仕籍不傳)인 형소(亨蘇)이다. 孫에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 만(晚)과 지(知)는 처겸(處謙)의 子요 용양위사직겸예문관대제학수(龍驤衛司直兼藝文館大提學粹)와 통정대부(通情大夫)로서 벽동군수겸병마첨절제사(碧潼郡守兼兵馬僉節制使)를 지낸 정(精)은 원소(元蘇)의 子요 봉상사참봉 순조(奉常寺參奉 順祖)는 거겸(居謙)이 子요 生員 조(粗)는 형소(亨蘇)의 子라. 증손에 生員 종의(從義)와 성균관진사 종지(從智)와 종신(從信)과 종원(從元)은 만(晚)의 소생이요 都事 순창군수 원랑(元良)은 화(和)의 소생이요 무과급제절충장군(武科及第折衝將軍)으로 부산첨사(釜山僉使)를 지낸 철동(哲仝)과 세호(世顥)는 수(粹)의 소생이요 장손(長孫)과 문과도사(文科都事)로 기묘사화에 조광조(趙光祖)등 무죄신구(無罪伸救)를 태학유생들과 상소하자 제주도대정현(濟州道大靜縣)에 유배된 명경행의(明經行義)의 사(士) 세번(世蕃)은 정(精)의 소생이요 부호군대손(副護軍對孫)은 순조(順祖)의 소생이요 환(煥)은 조(粗)의 소생이라 현손(玄孫)에 경번(景蕃)은 덕행문명(德行文名) 관우일세(冠于一世)하고 승간(承幹)은 모제김안국문인(慕齊金安國門人)으로 선공감직장(繕工監直長)을 제수(除授)받았으나 고사불취(固辭不就)러니 순효어화중(殉孝於火中)하여 이효몽정(以孝蒙旌)하고 향사청계사(享祀淸溪祠)하다 승호(承湖)는 무과소위장군행의흥위부사직(武科昭威將軍行義興衛副司直)이요 승중(承重)은 무과정략장군행용양위부사과(武科定略將軍行龍驤衛副司果)요 6世孫에 광춘(光春)은 별좌(別坐)로 先考와 如히 이효몽정(以孝蒙旌)하고 영춘(迎春)은 선공감직장으로 증통훈대부군자감정(贈通訓大夫軍資監正)이요 근(根)은 가선대부(嘉善大夫) 중추부동지사겸의금부도사요 7世孫에 만병(萬甹)은 사마시에 합격하여 참봉과 설서(說書)요 경잉(景仍)은 무과만호(武科萬戶)요 경안(景顔)은 조산대부 공조정랑아요 경원(景原)은 贈통정대부 장예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요 10代孫 안국(安國)은 가선대부중추부사요 11世孫 구성(九成)은 文科 통례원우통례(通禮院右通禮)요 13世孫 태상(台祥)은 문과급제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라. 그 외에도 관직과 학문덕행(學問德行)이 은원자(隱遠者)를 모두 기록할 수 없으니 문벌(門閥)이 번연(蕃衍)함을 가히 알겠도다. 불행하게도 公의 墓所를 세원인망(世遠人亡)으로 실전(失傳)한지라 후손들이 봉선지성(奉先至誠)으로 1962年壬寅에 부안군 행안면 진동리 산35번지1에 公의 長子 처사공(處士公)이 안침(安寢)하고 있는 등상갑묘용갑좌원(嶝上甲卯龍甲坐原)에 설단(設壇)하여 세일지존( 歲一之尊)을 봉행하던 차 後孫들이 종회상(宗會上)에서 후어부모이부어선조(厚於父母而簿於先祖)라는 선현(先賢)이 말씀을 상기하며 단비(壇碑)를 국한문(國漢文)으로 개건할 것을 종의(宗議)로 정하고 청여위명(請余僞銘)한대 여이단문고사(余以短文固辭)하였으나 청익심중(請益甚重)하여 난감위기추유보본지성(難堪違其追惟保本之誠)이라 천학(淺學)을 불고(不顧)하고 古阜李氏大同譜와 公의 사단기추모비(祠壇記追慕碑)의 개경(槪梗)를 인용하여 서술(敍述)한 절차가 위와 같은지라.
서기1959년 8월
提川鄕校前典敎 全州李康玉 謹撰
※ 壇은 全北 扶安郡 幸安面 眞洞里 山35번지 甲坐
ㅇ진용위별장(進勇衛別將) :고려시대 정7품의 무관직.
ㅇ승의랑(承議郞) : 고려, 조선시대 정6품의 문관 품계
ㅇ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 : 조선 때 왕세자를 모시고 경서(經書)와 사적(史籍)을 강의하며 도의(道義)
를 가르치던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소속의 정 6품의 관직
<비문(4> 17世 司書公 元蘇 祭壇碑 (사서공 원소 제단비)
派祖(18世 ) 碧潼公 精의 아버지
하늘과 땅 사이에 무릇 혈기(血氣) 있는 족속(族屬)으로서 그 동류(同類) 사랑함을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버이를 섬기기를 죽음에 이르기까지 다함이 없고 그치지 아니함이라. 조수(鳥獸)가 그 무리를 잃고 외로이 고향을 지나면서 부르지져 울고 주춤거리는 것도 이와 같음이라, 조상(祖上)의 墓를 실전하여 시제(時祭)를 행할 바가 없으면 그 청량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서 뿐만 아니라 장차 이마져 잃어버릴 것만 같아서라, 세상(世上)에 고인(故人)이 이름에 母가 없으니 누구에게 물어볼 것인가 그러므로 후인(後人)이 뜻이 일어남으로서 단(壇)을 두어 제사(祭祀)지냄은 보본(報本=태어나온 그 근본을 잊지 않고 갚음) 추원(追遠=조상을 추모함)의 道에 뜻이 맞는 것 같다. 혹후(或厚)함에 지나치다 여길지나 그러나 그 마음이 어진 즉 곧 이는 앎이라. 어느 날 이종채(李鍾埰)와 태수(泰洙) 二君이 종중(宗中)의 부노(父老)의 命으로 나를 같이 방문하여 말하기를 先朝의 의서지장(衣書之藏=묘소)이 본래 고부(古阜) 도순산(都順山)에 있었다고 하나 오래도록 잊고 있어 능히 정이(情理)를 펴지 못하게 되므로 부득기 부풍읍의 남쪽 석제후록(石提後麓)에 나아가 단(壇)을 설립하여 표위(表位)하니 그 자손인 첨사공(僉使公)의 墓의 오른쪽이다. 조부(祖父)가 자손(子孫)을 안아 앉으니 신리(神理)가 양양하여 여재(如在)하니 원컨대 근본을 펴 자손들로 하여금 화목하여 인륜을 잃지 아니하여야 한다. 삼가 살피건 데
公의 諱는 원소(元蘇)요 고부이씨(古阜李氏)이니 고려조(高麗朝)의 여산군(礪山君)이며 문헌공(文憲公)인 諱 경조(敬祖)로써 시조(始祖)로 삼는다. 누대(累代=여러 대)를 世家(여러 代를 두고 나라의 중요한 자리에 있는 집안)로 이어 이조(李朝)에 들어와서는 평양서윤(平壤庶尹)을 역임한 문수(文守)요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에 이른 諱 삭(朔)은 公의 아버지이며 비(妣)는 공인(恭人) 부안金氏이니 少尹인 세영(世永)의 女와 영천催氏이며 검교(檢校)인 영(泳)이 女이니 公은 金氏의 소생이다. 世宗 병인(1445년)년에 시강원사서가 되었으며 문장(文章)과 필체(筆體)가 一世에 드날렸도다. 배위(配位) 또한 기록에 보이지 않으니 甚하도다. 2남을 두어 장자(長子)인 수(粹)는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니 누대(累代)의 아름다움을 이었도다. 次子 정(精)은 벽동군수(碧潼郡守)요 장방손(長房孫=큰아들이 난 손자) 철동(哲仝)은 첨사(僉使)요 차방손(次房孫=둘째 아들)인 세번(世蕃)은 文科하여 도사(都事)이며 기묘사화(己卯士禍)에 耽羅(탐라=제주)에 들어가 子孫이 세거(世居=한 고장에 대대로 살다)하였다. 장증손(長曾孫)인 승간(承幹)은 선공감직장(繕工監直長)에 천거되었으며 효심(孝心)과 학문(學問)으로 명정(命旌=조정에서 정문 지을 것을 명함)하고 향사(享祀=사당을 지어 제사 지냄)하니 이제 子孫이 곳곳에 번성하여 부모에게 효도하고 조상을 추모하는 가도(家道)가 쇠하지 아니하여 멀어도 이르지 아니함이 없이 애연(僾然=어렴프시 보이는 모양)히 보고 기연(氣然=감정이 복 받치는 모양)히 들어서 정성(精誠)이 있으면 神이 있으니 아름답고 빛나서 영험(靈驗)을 발양한다면 묘(墓)와 단(壇)에 무슨 구별이 있겠는가. 저 아침에 죽은 어버이를 저녘에 잊음은 곧 조수(鳥獸)만도 같지 못한 者 여기를 지나면 반드시 이마에 땀을 흘리게 하리라.
서기1969년
康津 金 㽦 撰
※ 壇은 全北 扶安郡 扶安邑 新興里 石堤56번지 寅坐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 : 조선 때 왕세자를 모시고 경서(經書)와 사적(史籍)을 강의하며 도의(道義)를
가르치던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소속의 정6품의 관직
5>118世 碧潼公派 派祖 通政大夫 精(벽동공파 파조 통정대부 정)
공의 휘는 정(精)이요 古阜人이시니 高麗朝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겸 국자감판사(國子監判事) 여산군(礪山君) 문헌공(文憲公) 휘 경조(敬祖)의 18세손이시고 문장명필로 고명하신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 휘 원소(元蘇)의 차자(次子)이시다. 고려 성종(成宗)12년 (1481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경연(經筵), 시강관(侍講官),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역임하고, 성종(成宗)17년 압록강 유역에 위치한 벽동군(碧潼郡) 군수(郡守) 겸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로 부임하여 군수(郡守) 겸 목민관(牧民官)으로서 백성들에게 선정(善政)을 베풀어 군민(郡民)들로부터 신망을 얻고 있던 중 성종(成宗)19년(1488년) 현직에서 서거(逝去)하시니 군민(郡民)들은 선정비(善政碑)를 세워 유덕(遺德)을 영모(永慕)했고 조정(朝廷)에서는 이듬해 정삼품(正三品)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서(追敍)하여 업적을 기렸다.
公의 墓는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산66번지
碧潼公 정(精)의 큰 아들인 장손(長孫)이 후손(後孫)이 끊겨 묘(墓)를 지키지 못하니 차자손(次子孫)인 우리 제주의 자손(子孫)들이 성금으로 그 곳에 제실(祭室)을 신축하고 묘(墓) 관리인을 두어 관리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16일에 제주(濟州) 제족(諸族)들이 현지에 가서 묘제(墓祭)를 지내고 있다.
ㅇ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 :고려시대 종7품의 관직. 조선시대 문하부(門下府)와 승정원(承政院)소속의 정7품.
ㅇ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 조선시대 사간원(司諫院)의 정6품 벼슬. 정원은 2명으로 모두 문관(文官)이었다.
왕에게 간쟁·논박(論駁)하는 일을 맡았을 것으로 보인다
ㅇ경연(經筵) : 조선시대 왕에게 유학의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론하는 일 또는 그 자리.
ㅇ시강관(侍講官) : 조선시대, 경연청(經筵廳)에 속하여 임금에게 경서(經書)를 강의하는 일을 맡아 하던 정사
품 문관
ㅇ이조정랑(吏曹正郞) : 고려와 조선시대 이조(吏曹 : 6조의 하나. 인사관리 담당) 소속의 정5품 벼슬
ㅇ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조선시대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에 속한 종3품 무관벼슬로 목(牧)에서 수령이
겸직함
벽동공파 파조 精공의 묘 <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산66번지>
<비문(碑文)> 碧潼郡守 李公精 墓表 (벽동군수 이공정 묘표)
공의 휘는 정(精)이요 古阜人이시니 高麗朝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겸 국자감판사(國子監判事) 여산군(礪山君) 문헌공(文憲公) 휘 경조(敬祖)의 18세손이시고 문장명필로 고명하신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 휘 원소(元蘇)의 次子이시며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휘 수(粹)의 제(弟)이시다. 高祖 휘 윤승(允升)은 밀직부사(密直副使)이시고 曾祖 휘 문수(文守)는 평양서윤(平壤庶尹)이시며 祖 휘 삭(朔)은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로써 경사에 정통한 학자이셨다.
영명강직(英明剛直)하고 충효인겸(忠孝仁謙)하신 公은 경세제민의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성균관 수학 중 성종12년 문과 급제하여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사간원정언, 경연, 시강관, 이조정랑을 수임하고 성종17년 벽동군수로 취임하셨다. 동군(同郡)은 본래 조명(朝明=조선과 명나라) 접경인고로 병마첨절제사를 겸임하게 된 公은 천부의 문무영자(文武英資)를 발휘하여 민생과 국력의 충실을 기하고 목민관으로서의 치적을 크게 떨치셨다. 公은 청렴(淸廉) 공정(公正) 성실(誠實)로써 군민을 도왔고 사랑하셨기 때문에 公을 하늘같이 믿었고 부모같이 받들었던 군민들은 그 과만(瓜滿)에 앞서 어사(御使)에게 등장(登狀)까지 공(公)의 재임을 요청했었다. 어사(御使)의 치적상주(治積上奏)로 크게 탁용(擢用)되려던 직전 성종19년 현직에서 서거(逝去)하시니 벽동군민(碧潼郡民)들은 선정비(善政碑)를 건립하여 그 덕을 영모하였고 조정(朝廷)에서는 성종20년에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서(陞敍)하셨다. 배(配) 숙부인 한양조씨(漢陽趙氏)는 진사 휘 충손(衷孫)의 따님으로 현량(賢良)의 부덕(婦德)을 구비하여 공(公)의 거관처세(居官處世)에 내조의 공이 많으셨고 2남 1녀를 두었으니 長은 진사 휘 장손(長孫)이요 次는 도사 휘 세번(世蕃)이요 女는 사인(士人) 언양김림(彦陽金霖)에게 출가하셨다. 孫 처사 휘 효원(孝元) 인원(仁元) 신원(信元)은 진사공(進士公)의 소생이요 향정 휘 충현(忠賢) 충효(忠孝)는 도사공(都事公)의 소생이요 외손(外孫)은 지평(持平) 김안제(金安濟) 현감 김선제(金宣濟) 주부 김회제(金懷濟)요 증손 휘 안인(安仁)은 효원(孝元)공의 소생이요 향정 휘 우(宇)와 주(宙)와 관(寬)은 충현(忠賢)공의 소생이시다, 인원(仁元) 신원(信元) 안인(安仁)은 임란의사(壬亂義士)로서 전몰하셨다.
도사공(都事公)은 영명과감(英明果敢)하고 박학독행(博學篤行)하여 정암 조광조(趙光祖)와 공히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여 명경행의(明鏡行義)의 사(士)로 유림의 추앙을 받으셨고 중종8년 문과 급제하여 성균관학정, 경연 사간원정언, 형조좌랑을 역임하고 의금도사(義禁都事)가 되셨는데 중종 기묘사화에 제주(濟州)로 원류(遠流-유배))되어 대정배소(大靜配所)에서 지방유생들을 교육하여 화속성재(化俗成材)에 헌신하시다가 중종21년 병술(丙戌)에 수소종세(守素終世)하시니 교통사정으로 유해운구(遺骸運柩)가 불가능함에 충현공(忠賢公) 형제가 친묘(親墓)를 고도(孤島)에 두고 떠나실 수 없어 대정현(大靜縣)에 정주하셨으므로 제주입도(濟州入島)의 조(祖)가 되셨다. 그 훈도(薰陶)의 영향으로 제주유생들이 학문을 닦아 국시(國試)에 등제한 자가 많았고 그 적거지인 무릉(武陵)과 도원(桃源)이 문화와 학문이 고장으로 발전하였으니 이 지방의 인재양성에 기여하신 그 학덕명망은 우금(于今) 칭송이 자자(藉藉)하고 후손이 번영하여 화벌우족(華閥右族)을 이루었음은 선세(先世)의 수덕선경(樹德善慶)이라 하겠도다. 통례공(通禮公) 구성(九成), 판교공(判校公) 태상(台祥)을 위시로 인재가 배출하였으나 호번(浩繁)하여 기록하지 못한다.
종의(宗議)에 의하여 재일본 順天 종친의 숭조지성(崇祖至誠)으로 묘소석물(墓所石物)을 유신(維新)하고 그 표비(表碑)를 국한문으로 개건(改建)함에 있어 문부형(門父兄)의 명을 승(承)하여 불초 천학불문(淺學不文)을 무릅쓰고 公의 행장(行狀) 가장(家狀) 국사(國史)의 명신록(名臣錄) 유현록(儒賢錄) 기묘록(己卯錄) 고부(古阜) 부안(扶安) 벽동군지 탐라지 제주유배록(濟州流配錄) 등 문헌을 고증하여 公의 행적을 약기하고 그 유풍(遺風)과 명예를 후세에 길이 현창(顯彰)하려는 바이다.
ㅇ문하시랑평장사 (門下侍郞平章事)고려시대에,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최고 중앙 의정 기관)에 둔 정2품
ㅇ국자감판사(國子監判事) 고려시대 유학을 가르치던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 소속의 정3품
ㅇ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 : 조선시대 世子侍講院에 소속한 정6품의 벼슬로 經史와 道義를 가르침
ㅇ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조선 시대에, 예문관의 영예문관사 밑에서 실무를 맡아보던 정이품 벼슬.
ㅇ밀직부사(密直副使) : 고려시대 왕명의 출납, 궁중의 숙위, 군기에 관한 정무를 담당하던 밀직사(密直司 소속
의 종3품 벼슬
ㅇ평양서윤(平壤庶尹) : 조선시대 平壤府에 소속한 종4품 벼슬
단기4306년(1973년) 계축(癸丑) 3월 5일
後孫 기홍(琪弘) 謹識
碧潼公 墓祀와 齋室 (벽동공 묘사와 재실)
(1) 墓祀(묘사)
시제(時祭) 또는 묘제(墓制)는 碧潼公(벽동공) 할아버지 11세손 承文院判校(승정원판교) 台祥(태상)의 行錄(행록)에 廣置祭田而使其祀典(광치제전이사기사전)이라는 대목이 보이나 이는 어디까지나 일과성으로 사료되며 外後裔孫(외후예손)들이 茶禮(차례)라도 지냈는지는 거의 의심스럽다.
20세기 들어서면서 관리인을 상주시키고 종손(宗孫)을 중심으로 몇 년 또는 격년으로 參祭(참제) 하다가 20세기 중엽에 와서 本孫(본손)들에 의하여 매년 奉祭(봉제)가 이루어졌으며 봉향일(奉享日)은 음10월15일 秋祭(추제)로 奉祭(봉제)케 되었다.
1950년대에 와서 諸孫(제손)들이 종사(宗事)에 관심을 갖게 되고 문중사(門中事)를 처리함에 있어 유사(有司=단체일을 맡아보는 직무) 제도가 실시되면서 1962년에 碧潼公派譜(벽동공파보)를 발간하는데 都有司(도유사=종중사무를 맡아보는 우두머리)를 위시하여 派有司(파유사)들이 헌신적인 각고의 노력으로 譜冊(보책)다운 족보(族譜)가 出刊을 보게 되었으며 이어서 씨족의 중심체인 종친회(宗親會)가 결성되고 派祖(파조) 벽동공묘제(碧潼公墓祭)에 三獻官(삼헌관) 兩執事(양집사)를 갖추게 하기 위하여 5명의 時享有司(시향유사)에게 종친회(宗親會) 차원에서 약간의 車馬費(거마비)를 지급하기도 하였다.
1968년 戊申譜(무신보: 7차대동보) 편찬을 계기로 육지부에 있는 타파종친(他派宗親)과의 접촉이 빈번하게 이루어지면서 벽동공(碧潼公) 묘제(墓祭)에 타파종친(他派宗親)들도 多數 참석하게 되었고 종친(宗親)간의 유대도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始祖 할아버님 시향(時享)을 비롯하여 朔(삭)과 元蘇(원소)할아버님과 他傍系祖上(타방계조상)님들의 시향(時享)이 모두 春祭(춘제)로 봉행되고 있었으므로
1971년부터 始祖의 시향일(時享日)등 여러가지 여건을 고려하여 碧潼公 墓祭를 始祖와 같이 춘제(春祭=음3월제사)로 하고 음력(陰曆) 3월18일에 봉제(奉祭)키로 하였다. 이후부터 벽동공파 종친(宗親)들은 4박5일 일정으로 始祖를 비롯 벽동공 할아버님과 上系 조상님의 墓祭에 참여하게 되었다. 최근들어 참례(參禮)인원이 40-60여명에 이르고 긴 일정 및 경비 등을 감안하여 일정을 하루 단축하여 3박4일로 하기로 하고 2003년부터 벽동공묘제(碧潼公墓祭)를 음력 3월16일에 봉향(奉享)하고 있다.
(2) 齋室(재실)
벽산재(僻山齋) <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산655-2번지>
碧山齋記(벽산재기)에 草家丙舍(초가병사=초가집)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齋室(재실)이라기 보다는 管理舍(관리사)에 가까웠을 것으로 여겨진다. 1966년 諸孫(제손)들의 誠金(성금)으로 瓦家(와가) 20평 정도를 신축하고 齋號(재호)를 안동인(安東人) 花山 권순명(權純命)에게 청하니 碧山齋로 정하고 板額(판액)을 걸고 관리해 왔으나 기간(期間)이 오래되어 낡고 齋室(재실)로서의 품위(品位)도 맞지 않으므로 舊齋室(구재실)은 관리사(管理舍)로 전용하기로 하고 1998년 古宅瓦家(고택와가=옛 기와집) 50평의 재실(齋室)을 신축(新築)하여 관리(管理)해오고 있다.
(3) 碧山齋記(벽산재기)
두승산(斗升山)으로부터 一枝(일지)가 비스틈 하고 검푸르게 뻗어난 十里쯤에 월산(月山)이 있으니 陂塘(피당)이 둘러있고 숲이 拱挹(공읍=두 손을 마주잡고 인사함)한 듯하니 여기가 長內洞(장내동)이요 洞府 (동부)에 대야관창광막(大野寬敞廣漠 =넓다)한 곳 이 故碧潼郡守 李公(고벽동군수이공)의 攸藏地(유장지)이며 舊有丙舍(구유병사=북향집)는 그 齋室(재실) 이 蕃衍數千(번연수천)을 헤아리다.顔 楣 (안미=현판)이 없어 그 扁額(편액=액자)을 余(여=나)에게 侈(치=풍부히)토록 한 것은 余居(여거)가 密邇(밀 이=가까이 있음)한 고로 일언(一言)을 드려 도우려하니 余寬(여관)컨데 벽산(碧山)의 본명(本名)은 천마산(天馬山)이니 爽快(상쾌=시원하다)하게 뻗어나고 蒼空(창공)에 이어진 것 같아 혹은 碧蹄(벽제) 또는 벽동(碧潼)이라 하니 公이 살았던 桐鄕(동향)이다.
墓先之義(묘선지의)에 붙여 그 재(齋)에 걸 것인 즉 按察(안찰=자세히 보살펴 조사함)컨대 벽동이공(碧潼李公)의 子孫들은 고부(古阜)로 관(貫)하며 文憲公諱敬祖(문헌공휘경조)를 시조(始祖)로 後孫이 세습 벼슬하여 諱 允升(윤승)은 판도판서요 諱 文守(문수)는 평양서윤이요 諱 朔(삭)은 시강원사서요 諱 元蘇(원소)는 또한 사서(司書)니 公의 高, 曾, 祖, 考로서 四世며
公의 諱는 精(정)이요 성종조(成宗朝)에 문과급제(文科及第) 성균과학정(成均館學正)으로 성(誠)과 근(勤)으로 봉직하여 朝廷(조정)이 嘉尙(가상)하야 장차 세용(世用)코져 군수(郡守)로 나아 가 治績之聲(치적지성)이 有하나 천역(踐歷)치 못하고 몰(沒)하매 부민(府民)이 立碑頌德(입비송덕)하였으며 肖子(초 자) 世蕃(세번)은 文科都事(문과도사)로 篤行好學明經行修(독행호학명경행수)하야 淵源(연원)은 寒暄(한훤=金宏弼)이 요 師友(사우)는 靜菴(정암=趙光祖)이니 乙卯(을묘)에 謫居(적거=유배 보내다) 제주로 불귀(不歸)하여 禮曹佐郞(예조 좌랑) 및 承文院判校(승문원판교)에 數傳(수전)하니 오호(嗚呼)라 도사공(都事公)이 乙卯士禍諸賢(을묘사화제현)에 참 여하니 백세(百世)에 꽃다운 자취가 遺(유=끼치다)하여 後孫에게 선열(先烈)이 광(光)이 일월(日月)과 같이 비춰 진실(眞實)로 후손은 능히 면경(明經)하고 능히 수신(修身)하여 四海昏黑時(사해혼흑시=세상이 어지러울 때)에 碧潼公明靈(벽동공명령)이 地下에서 기꺼히 後孫昌大(후손창대)할 날을 손꼽아 기대할 것이다.
힘쓰고 힘씀이여 詩에 하였으되 風雨( 풍우)가 蕭蕭(소소)하니 鶴鳴(학명)은 불기(不己)로다. 집안을 극진히 한 肖孫(초손) 基休(기휴)씨가 九旬老德(구순노 덕)이라 環域(환역=제주)에서 雅望文行(아망문행)으로 천리(千里)에 馳書(치서)하였으니 余(여=아) 또한 늙고 혼미하나 그 효사(孝思)에 느끼여 光德(광덕)을 힘껏 敍述(서술)하야 奉昻(봉앙)케 함이로다..
世在 戊申(1968) 春 二月中旬 花山 權純命 記
3. 先墓 墓祭日(선묘 묘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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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 |
휘(諱) |
묘 위치(墓 位置) |
향사일 (享祀日) |
배 위 (配 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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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
경조(敬祖) (문헌공) |
(관직) 첨의좌정승 묘 부안군 줄포면 난산리 |
(음력) 3월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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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 15세 |
遠祖奉靈壇 (2世-15世) |
묘 부안군 줄포면 난산리 始祖壇 下 |
(음력) 3월15일 |
◉고부이씨원조봉령단(65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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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世 |
삭 (朔) (사서공) |
(관직) 시강원사서 묘 부안군 행안면 진동리 |
(음력) 3월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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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世 |
원소(元蘇) (사서공) |
관직) 시강원사서 묘 부안군 부안읍 신흥리 |
(음력) 3월17일 |
◉ 18世 수(粹 : 大提學公) ◉ 19世 철동 (哲仝 : 僉使公) ◉ 20世 승간(承幹 : 石湖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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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世 |
정 (精) (벽동공) |
(관직) 통정대부 묘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
(음력) 3월16일 |
配 : 한양 趙씨 묘 공과 합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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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世 |
세번(世蕃) (도사공) |
(관직) 의금부도사 묘 한경면 고산리 신수동139 (신물) |
(음력) 3월10일 12시 |
配 : 월성石씨 묘 서귀포시 회수동 (석굴왓) 향사일- 3월 10일 10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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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世 |
충현(忠賢) (진사공) |
(관직) 성균관진사 묘서귀포시안덕면 사계리2045 산방산 서쪽 박씨밭 |
(음력) 3월11일 12시 |
配 : 동래鄭씨 묘 공과 쌍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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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世 |
우 (宇) |
(관직) 대정향정 묘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산방산 서쪽 박씨밭 |
(음력) 3월11일 12시 |
配 : 광산金씨 묘 군산말오름(서남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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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世 |
광립(光立) |
(관직) 유향좌수 묘 군산 붉은밭(동향) |
(음력) 3월 11일 |
配 : 제주 高씨 묘 군산거슨물(북향) 後配 :金씨 묘공과 쌍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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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世 |
함 (瑊) |
(관직) 유향좌수 묘 서귀포시 월평동(달병듸) |
(음력) 3월11일8시 |
配 : 진주 강씨 묘 하원동 (진정이골) 後配 : 양천 허씨 묘 석굴왓 선영서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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