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제 독야청청하리라.
죽음 앞에서도 임금에 대한 충절을 지키고
육시형을 받고 죽기 전에
지었다는 성삼문의 시조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죽음으로 신의를 지킨
여섯명의 신하~
사육신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유성원 이개 하위지 이외에
70여명이 세조2년
단종복위운동을 도모하였다가
김질의 배신
발고로 처형을 당했다고 한다.
"병자사화"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
이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었다가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제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리라
대여섯 살 때,
시골 허름한 초가집 안방 윗목 벽에
아버님이 붙여놓은 사육신(死六臣) 중
매죽헌 성삼문(成三問)의 시조
'절의가(絶義歌)'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고
그냥 입에 붙어있어 달고
다녔던 시조였었는데,
토씨 하나 안틀리고
지금까지 입에 붙어있는 걸 보면..
얼마나 철필로 마음에
새겨놨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세뇌가 무서운거...^^
나중에 알고 보니,
집현전 학사인 성삼문이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큰 역할을 했는데
수양대군(세조)에게 반기를 들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기 전,
바로 죽음 직전에 남긴 시조라고 한다.
아깝고도 아까운 조선의
절신(節臣) 성삼문의
'절의가(絶義歌)'였다.
바로 단종에 대한 자신의 절개(節槪)와
의리(義理)를 노래한 시조다.
의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7-8)
바로 선인(善人)이 '단종'이었다면
그를 위해 용감히 죽은 자는
바로 성삼문이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다는 말이다.
인간적으로 보면 참 대단한 사람이다.
그런데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면서
우리같이 선인(Good man)도 아니고
죄인(惡人)인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이다.
바로 그 이유는 '사랑'이었으며
죽으심 그 자체는
사랑의 '확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눈길이 가는 말씀이 들어온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아직'은 어떤 일이
완성되기 전이라는 부사다.
그 어떤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부활하신 후이기에
그 뒷 문장은 반대의 결과로 나타난다.
바로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예수님이 우리 죄 때문에 죽으시고
그 결과로 우리를 의롭고
거룩하게 만들어 놓았단 말씀이다.
(히10:10)
그 거룩은 우리의
어떤 노력과 전혀 상관이 없다.
전적인 예수님의 희생에 따른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지금'의 우리 상태는?
'죄인되었을 때 ⇔ 의인되었을 때'
이 반대의 등식이 성립하기에
우린 우리 모습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의인'으로 보신다는 말씀이다.
바로 "의인(The Righteous)"이다.
죄인은 위와 반대의 길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 생각을
일치시키는 것,
그게 믿음이다.
그래야 한 마음이 되지 않겠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의롭게
만드신 예수님을 믿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겸손'이라는 이름을 앞세워
"죄인"의 길에서 돌아서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잘 모른 채...
우리는 사육신의 성삼문처럼
온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하면서까지
몸을 바쳐 희생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지만,
예수님 때문에 너무나 황공하게도
그보다 더한 영원한 '의인',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의로운 사람이,
의(義)의 옷을 입은 사람이 되었다.
가만 생각해 보라~~
이 어찌 놀랍고, 감사하고,
기이한 일 아닌가를...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부른다.
이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무엇이 되어야 하겠는가?
의인인가? 죄인인가?
무엇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닌
이미 의롭게 해 놓으신 사실을
마음에 믿으면 되는
아주 쉬운 길이 있다.
우리 앞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