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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여의 왕 금와와 하백의 딸 유화

작성자마고지나|작성시간04.03.25|조회수349 목록 댓글 0
 

동부여의 왕 금와와 하백의 딸 유화





“주몽은 동부여왕 금와金蛙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와 사귀어 낳은 아들이었다.”


이 한 줄의 글에는 엄청나게 많은 고대의 역사가 숨어 있다. 그러나 설명이 없다. 그러므로 역사를 밝힐 수 있도록 문헌고증에 의한 추론이 필요하게 된다. 그 다음에 할 일이 추론을 논증할 수 있는 고고학적인 뒷받침이다. 


위 글에 동부여東扶餘가 등장한다. 동부여가 나오니 북부여에 대하여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하백河伯이 등장한다. 하백이 누구인지도 풀어야 한다. 하백의 딸 유화柳花에 대해서도 알아보아야 한다. 이 수수께끼의 인물들에 대한 의문을 풀고 난 다음이라야 고주몽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동부여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예인濊人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현재 한반도의 동북부에 살고 있었다. 송화강 상류에서부터 동남쪽으로 지금의 한반도 북부에 해당하는 곳에 살았다. 고고학자 최무장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공통점을 가진 많은 고고학적 유물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고고학자들은 서단산西團山문화가 예문화에 속한다고 주장하였다. 문화의 상한선은 서주西周시대에 해당하며, 예인이 서주시대에 동북지역에 거주했음을 밝혔다.


현재의 함경도와 지나의 연변지구도 예에 속해 있었다.(<부조예군지인夫祖濊君之印>) 동예東濊(동부여의 전신)는 인구가 2만호에 28만여 인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후한서무제기後漢書武帝紀>) 그러나 2만 호에 10만인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고도 하였다.(<삼국지동이전三國志東夷傳>)


맥족은 동쪽으로 농안農安, 요원遼源에 이르고, 서쪽으로 통유通楡, 심양瀋陽에 이르고, 남쪽으로 본계本溪, 단동丹東에 이르며, 북쪽으로 지지할(제제합이齊齊哈爾)이 이르렀다. 그 동쪽은 예, 서쪽은 동호東胡, 남쪽은 동이東夷라고 하였다. (<예맥> 최무장)

예보다 먼저 상주商周시대에 맥족이 있었다. 북장의 유목민을 맥이라고 하였다. 이들을 구맥九貊이라고 하였는데, 풍이족 출신의 한인천제가 구주九州에 봉했던 그의 자손들(<부소보서>)이 맥족의 조상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시경노송詩經魯頌>에서, 회수淮水가에 살던 회이淮夷를 만백蠻貊이라고 하였다. 만蠻자에 충虫자가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뱀을 종족의 아이콘으로 섰던 풍이족의 후예로 볼 수 있다.


발이發夷의 발發은 맥과 발음이 같은데, 발해연안에 살았던 종족을 말한다. 이외에 북발北發, 맥국貊國, 백민白民(부여의 조상, 백은 하백으로 볼 수 있는데, 맥인의 한 갈래로 본다.), 고이高夷(맥족의 한 갈래로 고구려의 조상으로 본다)는 바다 밖, 즉 산융山戎(지금의 대능하 유역)과 숙신肅愼(지금의 송화강 동쪽) 사이에 있었다. (<예맥> 최무장)

맥국은 연에게 멸망당하였다. 연이 진에게 멸망한 이후에 부여가 생길 때 부여의 주축이 되었다.


해모수가 고조선의 제 47세 고열가단군 57년이 되는 해인 임술 원년(서기전 239)에 부여를 세우니, 이 나라를 북부여라고 하였다. 북부여의 4세 단군 고우루 때 가섭원으로 천도하여 동부여로 부르게 되었다.

이어서 고두막, 고무서, 해부루, 금와로 이어진다.  


금와가 하백녀 유화와 사귀어 고주몽을 낳았다. 하백은 원래 황하와 인접지역을 다스리는 임금의 호칭인데, 우리 역사에서 하백이라는 호칭이 처음 나오기 시작하는 때는 배달나라에 속한 단국檀國의 제 2세 홍제洪帝 때이다. 제곡고신帝嚳高辛 밑에 있던 곤오昆吾가 고신의 학정을 피하여 홍제에게 귀순하고, 고신이 수분하綏芬河 동쪽을 침범했을 때, 이를 물리쳐 그 공으로 봉작하게 된 것이 하백河伯이라는 관작이었다.


곤오의 딸을 하백녀라고 하였고, 하백녀는 단군왕검의 부인이 되었다. 그로부터 47세가 흘러 고조선이 멸망하였고, 북부여를 지나 동부여에 들어서 하백녀가 나타났는데, 하백녀라면 곤오의 후손으로 볼 수 있다. 곤오가 한인천제의 직계후손이므로 하백녀 유화 또한 한인천제의 직계후손이 된다고 하겠다.


따라서 금와왕과 유화의 관계를 바람을 피우는 그러한 남녀관계로 보아서는 아니 되고, 당시의 사회제도나 풍습을 살핀 연후에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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