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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복을 받기 위해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죄가 되는가?

작성자이병천목사|작성시간23.12.23|조회수4 목록 댓글 0

복을 받기 위해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죄가 되는가?

 

십일조는 한국교회에서만 드린다는 말도 안되는 웃기는 주장을 펼치며,

아래와 같은 무식하고 어리석은 질문들을 마구 쏟아내는 자를 보았다.

한심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또 혹시 이런 것에도 미혹되는 분들이 있을까 해서 질문과 답변의 형식으로 정리해 본다.

 

Question 1.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닌 북이스라엘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제단을 많이 만들면 만들수록 죄가 되었던 것처럼, 복을 받기 위해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죄가 된다?

 

Answer.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닌 북이스라엘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제단을 많이 만들면 만들수록 죄가 된다는 것은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그것과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믿음으로 복을 받기 위해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당혹스럽다. 성경은 십일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민 18:21-24) 『[21]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22] 이 후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에 가까이 하지 말 것이라 죄값으로 죽을까 하노라 [23] 그러나 레위인은 회막에서 봉사하며 자기들의 죄를 담당할 것이요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기업이 없을 것이니 이는 너희 대대에 영원한 율례라 [24]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주었으므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

 

(말 3:9-10) 『[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마 23: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고전 9:13-14) 『[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십일조를 제사의 율법과 관련지을 때, 구약시대에 회막과 성전의 제단에서 일하는 레위인들의 사례비를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려야했다면, 신약시대에는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들의 사례비를 위해 교인들이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주님께서 명령하셨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조건이라는 말씀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것에 대하여 상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이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Question 2.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배하기 위한 율법이 하나의 관습이 될 때, 하나님이 그것을 비판하시고 저주하신다는 선지서들의 기록처럼, 십일조도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배하는 마음이 아닌 복을 받기 위한 관습이 된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비판하시고 저주하신다?

 

Answer. 결코 그렇지 않다.

 

(마 23: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예수님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십일조에 대하여,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없는 십일조는 필요 없으니 더 이상 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으셨고, 그것과 함께 십일조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십일조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배하는 마음이 아닌 복을 받기 위한 관습이 된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비판하시고 저주하시는 것이 아니라, 십일조를 그대로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배하는 마음과 함께 드려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인 것이다. 말라기 선지자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주를 받은 이유는 그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었지, 그들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배하는 마음이 아닌 복을 받기 위한 관습으로 드렸기 때문이 아니었음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다.

 

(말 3:8-9) 『[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Question 3.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의 말씀을 따라 간다면 모든 것이 잘 된다. 성공한다. 부자된다.”고 하는 형태의 가르침이 성경의 가르침과 반대가 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된다?

 

Answer. 결코 그렇지 않다. 성경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 15:4-5) 『[4]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수 1:7-8) 『[7]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사 1:19-20) 『[19]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20]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시 1:1-3)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잠 10:22)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의 말씀을 따라 간다면 모든 것이 잘 된다. 성공한다. 부자된다고 하는 형태의 가르침이 성경의 가르침과 반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과 정확히 일치되는 가르침인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반대하는 것이 반성경적이며 마귀, 사탄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고 경계해야 할 것이다. 마귀, 사탄이 하는 일이란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넘어트릴 때 그랬듯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인용하되 전체적인 말씀(성경)이 아닌 부분적인 말씀(성경)의 인용으로 말씀(성경)과 반대되는 교리를 만들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예로 공생애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해 사탄이 시편 91:11-12의 말씀을 인용하였지만, 중간의 핵심구절인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를 살짝 빼내고 교묘하게 인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시 91:11-12) 『[11]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마 4:5-6)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를 살짝 빼내고>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Question 4. 십일조는 구약의 하나님의 명령이고, 구약에는 다른 다양한 명령들이 있는데, 왜 다른 명령들은 지키지 않고 오직 십일조만 지키라고 하는가?

 

Answer. 이 질문자에게 오히려 되묻고 싶다. 도대체 그 어느 누가, 도대체 그 어떤 교회에서 구약의 다른 명령들은 지키지 않고 오직 십일조만 지키라고 하고 있는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일점일획조차도 놓치지 않으려는 대다수의 건강한 교회들을 엉뚱하게 싸잡아 함부로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Question 5. 십일조는 문자 그대로 지키라고 하면서 왜 다른 제사제도나 정결법은 문자 그대로 지키라고 안 하는가? 왜 구약의 다른 율법의 말씀들은 그대로 적용이 되면 안 되고 십일조만 신약시대에 적용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Answer. 율법에 기록된 속죄의 제사예법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완성되어졌기에 폐하여졌으나(히10:1-18), 율법에 기록된 거룩한 삶과 헌신의 규례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영원한 삶의 기준으로 여전히 유효한 것이기 때문이다(마5:17-20). 십일조는 본래 속죄의 제사예법에 속한 것이 아니고 우리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또 하나님의 땅을 세내어 사는 하나님의 소작농(小作農) 인생이기에 하나님께 드려지는 소작세와 같은 것임을 예수님께서 포도원 소작농의 비유로 말씀해주셨다(마21:33-46, 막12:1-12, 눅20:9-18). 십일조는 율법과 제사예법이 제정되기 430년 이전인 아브라함, 야곱 때에도 이미 시행되고 있었다(창14:20,28:22,갈3:17). 엄밀하게 보자면, 십일조는 율법에서 나온 것도, 제사예법 때문에 나온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은 예수님의 이 비유를 듣고 곧 바로 예수님께,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라는 교묘한 질문을 드렸다. 이때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함을 아시고,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라는 질문을 하셨고,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라는 그들의 말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을 하셨다(마22:15-22, 막12:13-17, 눅20:19-26).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것”이란, 레위기 27:30~33에서 보듯이, 십일조를 의미하는 것이다. 로마황제 가이사의 나라에서 가이사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지불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듯,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세금인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말씀이다.

 

한 동전의 양면처럼, 천보만보 양보하여 십일조가 율법에서 언급된 것도 사실이기에 십일조를 제사의 율법과 관련된 것으로 취급하더라도, 죽을 자들인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레위 계통의 제사직분이 바꾸어졌기에 제사의 율법도 바꾸어졌지만, 죽지 않는 영원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인 예수님은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직분이 갈리거나 바꾸어지지 않으며, 십일조는 본래 멜기세덱의 반차에 속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히 7:11-24) 『[11]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에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12]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 [13]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14] 우리 주께서는 유다로부터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15]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16] 그는 육신에 속한 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 [17] 증언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18]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19]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20] 또 예수께서 제사장이 되신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21] (그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이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23]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히 7: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십일조는 본래 영원한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드려지는 것이었기에,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십일조도 바꾸어지지 않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제사율법과 관련하여 십일조를 구약시대에는 죽어가는 레위인들이 받았지만, 본래 십일조는 영원히 살아있는 제사장 멜기세덱이 받는 것이고, 그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우리의 영원한 제사장이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의 속죄의 은총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지금도 여전히 그 십일조가 유효한 것임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히 7:6-8, 킹흠정) 『[6] 그 혈통이 레위 사람들로부터 나온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받고 약속들을 가진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느니라. [7] 낮은 자가 더 나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는다 함에는 결코 논란의 여지가 없느니라. [8] 또 여기서는 죽는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으나 저기서는 살아 있다고 증거를 얻은 이가 받느니라.』

 

Question 6. 구약의 십일조는 십일조를 드리며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었다. 구약의 다른 율법의 말씀들은 문자로 적용하지 않으면서, 왜 십일조만 문자로 적용하는가? 십일조만 강조하고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서의 삶의 모습은 왜 강조하지 않는가?

 

Answer. “구약의 십일조는 십일조를 드리며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라고 했는데,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물론 마음과 믿음이 없는 형식적인 십일조라면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십일조 자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믿음의 증거이지, 어떻게 십일조보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만 그렇게 집착하는 지가 의문이라 하겠다. 설혹 그런 상황일지라도 예수님은 그런 형식적인 십일조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십일조의 정신을 회복한 상태로 그 십일조를 계속해서 드려야 함을 말씀하셨다.

 

(마 23: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예수님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십일조에 대하여,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 그것과 함께 십일조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십일조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배하는 마음이 아닌 복을 받기 위한 관습이 된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비판하시고 저주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십일조를 계속해서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 즉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배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Question 7. 한국교회의 십일조는 개발독재의 이데올로기와 기복주의가 결합된 좋지 못한 전통인데, 민주화가 된 지금의 대한민국사회에서도 그대로 지켜야 하는가? 십일조가 아닌 교회회비, 교인회비의 형태로 바꾸어 드리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Answer. 십일조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가르침이지, 개발독재의 이데올로기와 기복주의가 결합된 한국교회의 좋지 못한 전통이 결코 아니다. 살아계신 주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기독교신앙이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따라가는 신주주의(神主主義)인 것이지, 사람들에 다수에 의해 결정되는 민주주의(民主主義)가 결코 아니다. 한국교회의 십일조는 개발독재의 이데올로기와 기복주의가 결합된 좋지 못한 전통이라는 그런 무식한 말을 어찌 그리도 용감하게 할 수 있는 것인지가 의문이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문제가 되고 교회회비, 교인회비의 형태로 바꾸어 드리는 것은 괜찮다는 것인가? 인본주의적인 그 말의 논리가 원숭이 사육사의 간사한 조삼모사(朝三暮四)와 무엇이 다른 것인가를 묻고 싶다.

 

Question 8.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해 교회의 헌금이 얼마나 사용되는가? 한국교회의 십일조가 사라져야 하고, 한국교회가 십일조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Answer. 교회가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설혹 그런 부분에서 문제가 있는 교회가 있다 치더라도, 한국교회의 십일조와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한국교회의 십일조가 사라지고 한국교회가 십일조를 강요하지 않는다면 그런 교회의 그런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 수 있다는 말인가? 오히려 현대의 교회들이 놓쳐버린 신명기 14:22-29에 기록된, 매 3년마다 추가로 드려지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한 이웃구제용 십일조를 가르치고, 그 구제용 십일조로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야말로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돌봐야 할 교회의 사명을 완수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아닐까? 이상의 질문을 하는 사람이야 말로 과연 얼마만큼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한 헌금을 하고, 또 그런 사역들을 펼치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다.

 

이상의 질문거리들을 도출시킨 목사라는 그 사람이, “구약의 말씀을 함부로 가져와서 해석도 없이 문자적으로 오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했는데, 참으로 어이가 없다는 말 밖에는 ... 구약의 말씀을 정확히 읽고 이해한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상과 같은 엉뚱한 질문들을 그리도 용감하게 쏟아내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로구나!라는 생각을 해 본다.

 

Question 9. 십일조는 돈이 아닌 농산물로만 드리는 것이었다?

 

구약의 십일조는 정말로 돈이 아닌 농산물과 가축들에만 적용되는 것이었고, 돈이 아닌 농산물과 가축으로만 드려야 했는가? 그렇지 않다. 시대적 정황상 성경에 컴퓨터산업이라는 말이 등장할 수 없는 것처럼, 농업과 축산업으로 살아가던 그 당시의 시대적인 정황과 이 시대의 시대적인 정황과의 차이에서 생기는 표현상의 문제일 뿐이다. 성경기록 당시의 농산물과 가축들이라 함은 오늘날의 개념으로볼 때 산업전반을 일컫는 용어임을 알아야 한다.

 

(대하 31:5-6) 『[5] ... 이스라엘 자손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과 밭의 모든 소산의 첫 열매들을 풍성히 드렸고 또 모든 것의 십일조를 많이 가져왔으며 [6] 유다 여러 성읍에 사는 이스라엘과 유다 자손들도 소와 양의 십일조를 가져왔고 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별하여 드릴 성물의 십일조를 가져왔으며 그것을 쌓아 여러 더미를 이루었는데』

 

특별히 율법에 정통한 유대인들로 철저히 구별된 삶을 열망하며, 그렇게 살아가던 바리새인이 무엇이라고 기도했는지 알고 있는가?

 

(눅 18:12, 현대인) 『나는 일 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며 모든 수입의 십일조를 바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이 기도는 구약시대로부터 유대인들에게 전수되어진 전통적인 십일조란 모든 수입의 십일조였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참고적으로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이 바리새인의 신앙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구약율법을 중시하던 그 당시 유대인들의 십일조의 기준을 단편적으로라도 엿볼 수 있는 구절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는 말씀을 하셨다.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단지 십일조가 아니라 자신들이 가진 전부를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고 사도들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그것을 나누어주는 사역을 하였다.

 

(행 4:32-35)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하나님께서 정말로 돈이 아니라 정성과 사랑을 느끼고 싶으니 자율적인 헌금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셨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다.

 

(말 3:7-10) 『[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 [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돈이 아니라 정성과 사랑을 느끼고 싶어 하시기에 자율적인 헌금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재물에 대한 탐심을 경고하시면서 자율적인 헌금을 드릴 줄 모르는 부자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책망을 듣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눅 12:20-21)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의 재정운영원칙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다.

 

(마 6:19-21,33)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하나님께]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눅 16:11,13)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구약과 신약은 전체적으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하나님의 한 말씀이며, 영원무궁토록 변함없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본질에 관한 진리의 말씀으로, 구별된 각각의 말씀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통일된 하나의 말씀임을 알아야 한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영원무궁토록 변함이 없으신 진리의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의 말씀도 그 내용과 기준에 있어서 영원무궁토록 변함이 없는 진리의 말씀인 것이다. 영원무궁토록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과 신약은 점진적인 계시로 이루어져 있기에 부분적으로 보면 다른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전체적인 조합으로 볼 때 완벽한 하나의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은 그 본질과 원리에 있어서 영원무궁토록 동일한 것이며, 전체적으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계시이지 시대에 따라 그 기준과 내용 혹은 요구조건이 바꾸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세대주의적 성경관을 조심해야 하며, 성경은 전체를 하나로 이해해야함을 알아야 한다.

 

(시 14: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이상의 성경구절을 전체로 보지 않고, “다윗의 시, 하나님이 없다.”라는 식으로 어느 한 부분만을 인용한다면, 전체적으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강조하려는 다윗이의 말이지만, 다윗을 무신론자로 오해하는 어리석음을 낳게 될 것이다. 성경은 전체를 하나의 흐름으로 봐야지 부분 부분을 따로 인용하고 해석한다면 성경구절들로 반성경적인 교리들을 만들어낼 수도 있음을 알고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일컬어 이단(異端)이라 칭하는 것이다. 성경의 신약과 구약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된 전체로 보지 않고, 세대주의적 관점으로 보는 자들을 조심하고 경계하기 바란다. 그들은 정통의 탈을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단(異端) 의 길을 제시하는 사악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그런 까닭에 있었을 것이다.

 

“(사두개인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22:29)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막7:8,9,13)

“화 있을찐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눅11:52)

 

이상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오해하는 잘못된 종교지도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잘못된 길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참상을 불러오는 것이다.

당시의 그와 같은 종교적인 상황을 놓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15:14)

“...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마16:6),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았다 ”(마16:12)고  하였다.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과 함께 폐하여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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