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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간증문]수술실에 가기까지( 2)

작성자마라토너|작성시간08.10.24|조회수48 목록 댓글 1
2002년 1월 13일 전날 근무를 끝내고 아침일찍 서울 아산병원에 도착했다.

누가 안내를 해주시는 분도 없고 막실려온 피투성이의 환자들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는 간호사들과 인턴 선생님들의 분주한 몸놀림을 붙잡고 일반외과 병동을 물으니 여기란다.

장기이식센타 담당여선생님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찾아 연락하니 지금 바쁘니까 응급실에서 혈액체취와 일련의 검사를 하고 있으라고 한다.

난 불쾌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표시할 대상도 없이 바빠서 정신없는 응급실 직원들에게 장기 이식 하러 왔다고 하니까 이상한 사람을 보듯이 쳐다본다. 그분들도 의아해 하며 장기이식센타 직원에게 전화를 해보더니 날 참 신기한 사람도 다있다 싶은듯 바라본다.

간이침대도 없이 서서 혈액을 20앰플쯤을 세시간 정도에 걸쳐뽑고 혈압체크를 5앰플 뽑고 한번씩 하는 식으로 하고나선 저녁때까지 여러가지 기억도 없을정도의 여러가지 검사를 하였다.

저녁때가 다 되어도 난 누구에게 안내되어지지 않은상태에서 나혼자 응급실의 이방인으로 유일한 건강인인 채로 어정쩡하게 구석에 서 있었다.

피를 자주 여러번 빼서인지 기분이 영 가라앉은상태 였고 난 그래도 내 인생의 중요한 결정으로 여기를 왔는데 여기선 별로 필요치 않은 사람으로 여겨 지는것 같아 마음이 영 좋지 않았다. 그래서 장기 이식센타에 다시 전화를해서 지금의 내심정을 이야기하고 이건좀 심하지 않느냐고 말을 했더니 여선생님 한분이 미안하다고 어쩔줄 몰라 하며 내려 왔다.
애교섞인 항의를 하면서 검사가 끝났으니 가겠다고 했더니 지금부터 일주일 동안계속 검사를 한다고 한다. 입원실을 황당하게도 1인실밖에없다고 해서 초호화스런 입원실에서 하루를 보내게 되었고 내가근무 하는 직장에 전화해서 내일부터 연가신청을 대신 해줄것을 부탁하였다.

내일 검사를 위한 밤10시 부터 금식을 하게 되었고 물도 먹지 못하는 금식이 얼마나 고통스런운것인지 알게 되었다.

다음날 3시 정도 까지 다시 피를 뽑고 CT, MRI등 검사와 대기를 끝내고 나니 얼마나 허기가 지는지 정말 그 괴로움과 의사선생님들과 검사하시는 기사님들이 조금씩 내게 관심을 보이며 장기기증을 하는 의도를 물어서 그래도 조금은 간이식 수술에대한 실감을 하고 있었다.

하루중 유일하게 먹는 저녁은 정말 푸짐하게 나왔고 배가 고파 검사가 끝나면 매점에가서 이것저것 사먹고 난뒤인데도 10시부터 금식을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그걸 대비해서 깨끗하게 먹었다.

둘째날은 내가 1인실의 방값을 알고나서는 절대 그럴수없다고 우겨서 2인실로 옴겼다.
일인실은 298,000원으로 그돈은 전액 이식을 받는분의 부담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간 2인실에는 강릉분인 연세가 78세나 되시는 건장하신 할아버지와 함께 하게 되었다.

노인께서는 먼저 젊은이가 병원에 멀쩡해 보이는데도 입원해 있다는것에 아주 흥미가 많아서 자신의 무지하게 썩어있는 양 다리와 놀라서 찾아온 아들들보다 내게 관심이 많아 내얘기를 듣고 찾아오는 모든이에게 내 얘기를 자랑삼아 말하셨고 자신의 모든손님들께 나를 소개 했다.

난 민망하기도 하고 그분의 치료과정에 놀라서 그분께 더 친하게 대하게 되었다. 밤이면 신음을 하시는 노인의 옆에서 이야기를 하며 밤을새우고 아침이되면 각종 검사를 받으며 배가고프고 목이 말라 미칠것만 같았지만 내가 선택한 길이기에 누구에게 무어라 말할것은 아니었다. 특히 피를 자꾸 빼기 때문에 목이 말라 견디기 힘들었다.

2일째 입원해 있는날 첫 간조직검사를 했는데 얼마나 아팠는지 검사는 30분정도에 끝났는데 4시간을 엎드려 아파서 울고 있을수 밖에 없었다.

초음파실로 가는데 미리부터 침대를 가져와 온몸을 묶고 들어가니까 약간의 주의사항을 일러주면서 움직이면 간조직을 잘못건드릴수 있으니 아파도 참으라고 한다.

뭔가 시원한 윤활유 그리이스같은 액체를 갈비뼈 주변에 바르고 마취를 한뒤 공기총으로 갈비뼈사이의 공간을 초음파로 비추면서 구멍을 뚫어 간조직의 우엽과 좌엽 몇군데를 떼어 내었다.

마취는 앞부분에 했는데 아프기는 반대편인 등허리 쪽이 결리고 뒤틀려 견딜수가 없었다. 얼마나 아픈지 마취하고 다시 하자고 울었다.두번정도 조금씩 쉬면서 30분 정도 하고 나니 끝났다고 모래주머니를 주면서 이후의 주의사항을 알려 주었다.

모래주머니를 구멍을 뚫은 오른쪽 갈비뼈 쪽에 대고 비스듬이 누워있던 4시간은 정말 움직일수도 없고 옆구리가 켕기고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때문에 군에서 받던 기합보다 더 힘든 시간이었다.

얼마나 아프고 두려웠던지 이러다 죽을수도 있다는 생각에 어머님께 전화를 했다.

어머님은 " 지금어디니" "예 근무중이에요" "응 근데 왜 전화했어" "예 괜히 엄마가 보고 싶어서"
"어이구 나이를 꺼꾸로 먹는구먼, 애들은 다 잘있지 그래 근무 잘해라" 어머니는 평소처럼 간결하고 명료하게 자기 하실 말씀만 하시곤 끊으셨다. 서러움이 밀려왔다.

매일 반복되는 금식과 다음날 부터 시작되는 소변검사. 혈액검사 조직검사... 거기다 밤이면 함께계신 할아버지의 신음과 그가족들의 염려섞인 한숨에 잠을 잘수가 없는 시간들. 그렇게 1주일이 정말 한달은 되는것 같았다.

그때 같이 근무하느 친구들이 방문해 주지 않았다면 아내도 오지 않았던 그시간은 정말 적막하기만 했다.수술전날인가 친구들과 한번 올라온 아내는 다단계판매회사에 빠져 있어서 어디서 무었을하는지 전화를 해도 바쁘다고 금방 끊고 나타나질 않았다.

수술전 단계로 아내의 동의가 꼭 필요하기에 불러들인 아내는 남들앞에선 무척이나 다정한 부부인양 내 몸에 달라붙어 안으며 날 염려 하였는데 그렇게 다정히 하고는 30분도 안되어 바쁘다고 떠날 사람이었다.

그사람에게 서운한 감정은 지금도 변함이 없으니 아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드디어 수술날짜가 잡혔다.

2002년 1월21일 아침06시에 수술날짜가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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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주려죽을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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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한맘으로 | 작성시간 08.10.25 정말 대단하십니다 간이식수술을 말로만 들었는데 무척 힘들다는것을 알게해주시네요 이웃을 위해 몸을 떼어준다는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정 말 부럽습니다 이 글을 읽고 내려오니 부끄럽고 그 용기에 눈물이 계속 흐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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