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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작성자예사랑.|작성시간16.02.23|조회수238 목록 댓글 0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면서 겪는 고난과 고통의 문제는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면서 늘 우리를 괴롭혀왔다.

 

 

아주 오래 전에 욥은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그리하면 그 보좌 앞에 나아갈 것이라”(욥 23:3)고 부르짖었다.

 

이렇게 부르짖는 사람은 단지 욥뿐만은 아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고난과 고통 속에서 절규하고 있다.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어찌하여 이런 일을 허락하십니까?”
“하나님이 내게 관심을 갖고 계시다면 왜 이렇게 행하시는가?”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왜 하나님은 나를 떠나셨는가?”

 

 

 

내가 아는 한 젊은 그리스도인 여성은 암에 걸린 교회 목사님이 완쾌되도록 몇 달 동안 기도했으나, 결국 목사님이 돌아가시자 이렇게 말했다. “온 교인이 기도에 매달려 부르짖었지만, 하나님은 그 젊은 목사님을 고쳐주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저는 이런 종류의 부탁을 함으로써 하나님을 귀찮게 해드리는 일을 다시는 하지 않으려고 해요. 제가 왜 그렇게 해야 하죠? 저는 또 실망하기 싫어요."
 

 

이 젊은 그리스도인처럼 느껴본 적이 있는가?
당신이 어떤 것을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도대로 행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불행하게도,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이 물음에 대한 충분한 답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계속되더라도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것을, 이를 악물고 굳게 붙들어야 하는 때가 있다.

나는 이해하기 힘든 고난의 문제에 대하여 모든 답을 제시할 수 있다고 감히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나 자신이 고통과 슬픔의 문제로 몸부림치면서 깨달은 실제적인 지혜들을 제시할 뿐이다.

 

 

 

 

하나님은 주권적인 분이시다!
 

 

우선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은 하나님이 주권적인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그분이 모든 것들을 통제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의 예상을 뒤엎는 일이 일어나서 그분을 놀라게 하는 경우는 없다.
반면 우리는 주권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하면 놀라게 된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도 나처럼 놀라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통제권을 잃어버리신 것처럼 살아간다.
우리는 그분이 저 먼 우주 밖으로 나가시고 우주가 저절로 돌아가도록 내버려두셨다는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
아니면 우리는 그분이 ‘무슨 부탁이든 다 들어주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한번 뛰어보세요”라고 말하면 그분이 “얼마나 높이 뛸까?”라고 물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분에 대해 오해한다면, 그분께 실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자. 그분은 주권적인 분이시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통제하시며,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우리가 기도할 때 종종 그분은 논리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방법으로 개입하신다.
그러나 그분의 개입은 우리의 변덕스러운 기분이나 편의성에 따른 것이 아니고,
그분의 주권적 선택과 선하심과 은혜에 따른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개입하시는 방법을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정하신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 대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눅 7:28)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히는 가혹한 현실에 처해 있었다.

그리하여 요한은 자기의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눅 7:19)라고 묻게 했다. 이런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눅 7:22,23)라고 대답하셨다.

요한은 메시아가 행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일들을 예수님이 행하시지 않자 그분이 메시아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꼭 우리가 예상하는 그런 방식으로 일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주권자는 우리가 아니라 그분이시다.
고난과 슬픔이 찾아올 때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 중 한 가지가 있을 뿐이다.


원한을 품고 우리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아니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인생의 모든 것이 주권적인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임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원하는 것만 받는 게 신앙인가?
 

 

신앙은 단지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하나님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주시는 것이라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의심 없이 받는 것이다.

간혹 일부 신자들은 모두 건강하고 부유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고난과 시련을 면제 받는다”고 약속하지 않는다
.

오히려 성경은 그 반대의 것을 때때로 약속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것이다”(요 16:33)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도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11)라고 말했다. 

그리스도는 고난의 면제를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고난 중에도 돌보아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닮기를 원한다면,

 

그분을 닮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난을 환영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주권적인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것이 바로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 제가 아무 해도 당하지 않고 복을 누리도록 이런저런 것들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려운 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처럼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기도하는 것이 왜 어려운가? 우리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구하느라고
너무 바빠서 하나님의 선(善)을 구하지 못한다.


고난이 찾아올 때 우리는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 그것이 찾아왔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의심하며 분노와 원한에 사로잡힌다. 

 

 

 

 

고통의 순간에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언제나 신앙은 우리를 궁극적 승리로 이끈다.
그리스도인들은 근본적으로 승리자의 편에 서 있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당하시는 중에
하나님마저 그분에게서 등을 돌리셨다.


만일 당신이 그 자리에서 이것을 목격했다면, 그분이 궁극적으로 승리하실 것이라고 믿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패배처럼 보이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사탄에 대하여 승리하셨고, 우리의 구속이 성취되었다.

장차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 위에 온전히 실현될 것이며, 고통과 눈물이 영원히 끝날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타락하여 고통에 빠진 세상에서 살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우리는 주위에 널린 죄의 결과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우리가 고난을 피할 수 없지만, 적어도 혼자서 고난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소망 없이 고통당하거나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라고 말했다.

나는 감히 제안한다.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라고 묻지 말고,
“고통의 순간에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라고 묻자!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징표는 ‘고통이 없는 것’이 아니라 ‘고통 중에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다.
이것이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것이 없다면, 은혜와 진리 안에서 계속 성장할 수 없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힘을 얻어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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