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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라는 군중심리가 우리를 망하게 한다

작성자뭉게구름|작성시간22.11.11|조회수52 목록 댓글 1

의류를 주산업으로 하는 회사와 디자이너들은 그들의 사업이 번창하고 지속하기 위해서는

만들어내는 옷들이 잘 팔려야 하기에 해마다 다양한 모양의 옷들을 유행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시각적인 호기심과 시대의 패션에 뒤떨어지면 불안해지는 심리적 특성과

현대인들의 모방심리를 한껏 이용하여 끊임없이 패션문화를 주도해 갑니다.

 

이러한 현대의 문화생활에 익숙한 이들은 주위의 많은 사람을 따라 서로 정보를 나누고

같은 유행에 편승함으로 문화생활에서 동질성을 회복하므로 거기서 안위함을 얻습니다.

 

이것은 나 혼자만 주위 사람들과 다르면 안 된다는 현대인들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보여주는 것으로써

항상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주위에 많아야 비로소 거기서 어떤 안도감을 얻는다는

현대인의 심적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왜 많은 학생이 배가 전복되기 전에 탈출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는데

안타깝게 죽어갔을까라고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물론 선내 방송을 믿고 불안해하면서 기다린 것이 주원인이겠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많은 동료가 서로 마주 보며 기다리기에 설마 이렇게 많은 친구가 같이 있는데 무슨 일이야 있겠느냐는

안위하는 마음을 공유하고 서로 쳐다보면서 위로함을 갖게 되며 안심함으로써

탈출의 기회를 놓친 것도 그들을 사지로 몰고 간 한 가지 이유가 된다고 봅니다.

 

만약 그 배에 학생 한 사람만 탔다고 가정한다면 이러한 서로 안위하는 마음이 없기에

급박한 위기감을 느껴 분명 미리 탈출하여 생명을 구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서로 의지하여 그 속에서 안도감을 얻으려는 군중심리는 어떤 상황에서는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소를 도살장으로 끌고 들어가면 본능적으로 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버틴다고 합니다.

그러나 앞선 소가 들어가고 뒤의 소가 따라오면 순순히 들어가게 됩니다.

그것은 주위의 소들이 같은 길을 가고 있는 것에 서로 의지하므로 같이 어울려 행동한다는 느낌이

각자에게 본능적으로 다가오는 불안감을 어느 정도 해소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전에 해외 소식란에 수만 마리의 쥐들이 바다로 돌진하여 자살했다라는 보도를 가끔 본 적이 있는데

정확한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앞의 쥐를 따라가다가 뒤따라오는 쥐들에게 떠밀려

바다에 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아마 주위의 많은 동료 쥐들이 바다로 돌진하니

바다를 보고 빠져 죽을 줄 알면서도 서로 간에 믿고 의지하며 동지라는 힘이 더 우선이 되어

다 같이 무서움을 잊어버리고 따라가는 것이 일부 원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 나치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에서 600만 명의 유대인들을 대학살했습니다.

그 당시 남녀노소 많은 유대인이 수용소로 가는 기차 속에서 잡담하며 편안히 가는 동영상을

지금도 볼 수 있는데 어떻게 이들이 그 무서운 나치들에게 잡혀가면서도 편안할 수가 있는지 의아했습니다.

 

분명 수용소에 가서는 무서운 고초와 죽음이 기다린다는 것을 어느 정도 예상을 했을 텐데,

그중에는 모든 것을 이미 자포자기한 사람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장차 닥칠 고난을 예견하고

젊은 사람들은 달리는 기차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뛰어내려 탈출할 기회도 얼마든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서 담담하고 편안함을 보인 것은 그들만의 신앙심에 의지한 것과

또 나치들의 감언이설에 속은 것도 그 이유가 되겠지만, 그보다는 설마 이 수많은 멀쩡한 사람들을

나치가 죽이기야 하겠어? 라는 암묵적으로 서로 의지하고 거기서 위안을 얻으므로

보호 의식을 갖게 되는 집단적인 군중심리가 나치에 대한 경계심을 무너뜨리고

반발심과 탈출의 기회를 놓치게 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노아시대 때는 노아가 120년 동안 방주만 만든 것이 아니라 성경에는 자세히 기록은 안 되었다 하더라도

노아는 하나님께서는 물로써 세상을 심판하신다고 틈만 나면 세상 사람들에게 외치고 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물로 심판했을 때는 노아 식구 여덟 명 외에는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고 멸망했습니다.

 

그 당시 인구수는 대략 10~60억 명이라고 성경 역사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러면 이들 수많은 사람이 지금과 똑같이 세상에서 물건을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생활을 하면서 왜 노아의 외치는 소리는 외면했을까요.

 

물론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며 또 세상을 살아가는 일들이 너무 바빠 거기에 얽매였기에

노아의 외침을 건성으로 듣는 등등 여러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멸망한 여러 이유 중에 중요한 한 가지는 집단적 군중심리가

서로 간에 작용한 것도 적지 않다고 봐야 합니다.

 

노아가 저렇게 외치는 것도 믿을 수 없지만 설마 하나님께서 이 수많은 사람을 물로 심판하시지는 않겠지

라고 생각하며 우리 모든 가족과 친척과 이웃들이 이렇게 건강히 살아가며 서로 보살펴주고 멀쩡히 살아있는데

설마 이 많은 사람에게 무슨 일이야 일어나겠어? 라는 생각을 하며 노아의 외침에 대항하여

서로 간에 의지하며 용기를 얻고 안심하며 세상일에 몰두했다는 것입니다.

 

아마 각 마을에 한 명씩만 살며 노아의 이러한 외침을 들었다면 군중 속에서 편안함으로 인해 묻혀가는

외침의 소리로만 듣지는 않기에 얼마든지 많은 사람이 찔림을 받고 회개함으로써

노아의 방주에 들어감으로 홍수에서 살아남았을 것입니다.

 

북한은 지금까지 무수한 도발을 일삼아 왔으며 각종 화기로 침공을 운운하며 일촉즉발의 기세로

남한을 불바다로 만들 것을 엄포하기도 하며 늘 긴장 상태로 남북 간을 몰아가며

적화통일의 야욕을 꿈꾸고 있습니다.

 

한국에 관심이 있는 외국에서는 곧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준 전시상태의 비상시국의 긴장감을 느끼며

우리 대한민국을 바라본다고 하는데 정작 당사자인 우리 남한의 국민은 연평도와 같은 국지전이 일어나도

모두가 너무나 태평 자약합니다.

 

도무지 대다수 국민의 전쟁에 대한 불안감과 경계심이 별로 없으니 국민성이 너무 대범해서 그런 건지

북한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오히려 모두들 차분히 일상생활에 충실하니 좋은 현상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전쟁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확고한 자신감이 서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전쟁은 상호 간에 피차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이기에 모든 국민이 담대한 마음으로

적의 불시적인 침공에 대비하여 방어할 수 있는 준비가 항상 되어 있어야 합니다.

북한의 이러한 침공 위협에 대하여 경각심이라든가 뚜렷한 관심이 없다는 것은 틈만 나면 그

들이 일으키는 사건에 대해서 국민이 늘 겪는 일이라 감각이 무디어져서 타성에 빠진 것도 있을 것이며

미국과 같은 우방국이 적의 침공을 사전에 막아준다는 의지하는 믿음도 작용했을 것이며

혹은 국민성이 대범하다든가 등등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중에서 한 가지는 이렇게 남한에는 수천만의 사람들이 있어서 서로 믿고 의지를 하며 모두가

든든히 살아있는데 설마 전쟁이야 나겠느냐는 서로 안위하는 군중심리가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어서

크게 걱정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회가 동요되지 않고 모두가 일상에 충실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가졌다는 면에서는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적과 마주 보고 있는 상태에서 언제 저들이 불시에 침공할지 모른다는 마음의 자세를 갖고 깨어 있어서

튼튼한 국방력과 함께 항시 준비된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는 많은 문제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서로를 의지하고 거기서 마음에 안정을 찾고 안위함을 가지려고 하는 것은 교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은 목사님을 중심으로 교회의 방침과 흐름과 구심점을 따라가고 그것을 지키려 하며

일반적으로 순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특히 구원에 관계되는 것들이라면 더욱 맹목적으로 나타납니다.

 

오랫동안 믿고 교회에 몸담아온 대다수의 교인은 믿음과 구원에 대한 생각과 개념과 지식과

그에 대한 논리가 그 교회의 교리라는 틀 안에서는 확고하게 굳어져 있으며 거기에 속한 교인들은

모두가 이러한 믿음을 진리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령 그 교리가 잘못되었으며 구원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오래되고

굳어진 믿음의 틀을 다시금 바꾸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즉 그들 스스로가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다는 의심을 마음 한편으로는 느낀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습관적으로 믿어온 것이 진리라고 확신해 왔기에,

이러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성도들 서로 간에 한마음을 품어 의지하고 안심을 얻고 위로를 받으며

그동안의 잘못된 믿음에 대해서는 많은 동료가 그것이 진리라는 생각으로 서로 몰아가며

그 안에서 안주함으로써 결국은 다수가 구원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지금 교회의 현실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구원이란 우리 영혼의 영원한 생사가 결정되기에 너무나 중요하며,

구원은 올바른 믿음에서 시작되기에 교회 내에서 믿음의 방향이 다수에 의해 잘못된 방향으로 같이 흘러간다면

거기에 묻혀서 그러한 믿음의 생활을 할 것인가 혹시라도 하나님 뜻에 부합되지 않는 믿음을

내가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를 의심해보며 잘 분별하여 바른 선택을 한다는 것은

우리 영혼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기에 너무 중요합니다.

 

이렇게 믿음과 구원만큼은 우리 각자 영혼의 미래와 직결되는 것인 만큼 다수의 선택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영분별을 잘하여 신중하게 결정하는 것이 나의 미래를 보장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 모두가 현명한 선택을 잘하여 올바른 믿음생활을 함으로써 언젠가 모두 영원한 천국에서 만나므로

서로 기뻐하며 영생 복락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오늘도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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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둥근달 | 작성시간 22.11.14 소중한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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