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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은사.능력 전이.기름부음

작성자뭉게구름|작성시간22.11.23|조회수92 목록 댓글 0

고전 12:8~10의 아홉 가지 은사 중에는 믿음의 은사가 있습니다.

이 은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 믿음이 아니며

하늘로부터 특별하게 부어지는 은사의 일종입니다.

 

이 은사는 사역자나 능력의 종이 어떤 기적이나 능력이나 치유 또는 신비한 것을 행하려 할 때

하늘로부터 초자연적으로 믿음이 부어지면서 사역자 자신이 행하려 하는 일들이

본인 의지와 관계없이 확신이 오고 이루어진다는 것이 자신의 영으로 동의가 되며 깨달아질 때

이러한 믿음의 은사가 발동된 것이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소에도 사역자 본인에게 이러한 은사가 있겠지만, 특히 능력을 행하려 할 때마다

성령의 권능으로 하늘로부터 그때마다 부어지는 특징이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믿음의 은사는 특별히 사역자들이 상대방에게 은사나 능력을 전이(임파테이션)해주려고 할 때는

필수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사역자가 능력이 강하게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믿음의 은사가 없거나

그때마다 발동이 되지 않는다면 은사의 전이가 잘 일어나지 않으며

또 사역은 하되 이러한 능력 전이에 별로 무관심하거나 그것의 중요성을 간과한다면

마찬가지로 능력 전이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기도원 등에서는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치유 기도를 받고 병이 낫고

악한 영에 의해 묶여있던 영육 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회복되는데 보통 현대 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는 환자가 마지막 희망을 품고 찾아오는 곳이 기도원이기도 합니다.

 

기도원에서 일어나는 온갖 능력과 기적과 치유는 기도원 원장이나 사역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권능이 그때마다 임함으로써 가능하게 됩니다.

이러한 기적들이 여기저기서 많이 일어난다는 것은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 적지 않게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도원은 그 기도원을 이끌어가는 당대의 원장에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 이유는 그러한 능력을 이어받을 만한 하나님의 사람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엘리야 선지자를 이을만한 엘리사와 같은 후계자가 이 시대는 이어져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기도원은 하나님이 직접 선택하시고 능력을 부어주셔서 쓰임을 받다가

그 당대에 끝을 맺는 것이 우리 한국 기독교의 현실입니다.

 

구약의 엘리사는 엘리야의 능력을 간절히 사모했기에 어디를 가든지 끝까지 좇아다니면서

엘리야의 갑절의 능력을 사모했고 기어이 그것을 이어받았습니다.

지금 시대도 이러한 일들이 능력의 종들을 통하여 계속 이어져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에게 부여된 은사와 능력을 자기 뒤를 이을만한 후임자에게

힘껏 전이를 시켜주어야만 합니다.

 

은사와 능력은 자기 것이 아닌 성령님이 그 주체가 되어 그때마다 주시는 것이며

다만 능력의 종으로서 그 통로가 되어 그것으로 세상에서 빛을 발하며

수많은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는 도구와 그릇이 되어야 하는데,

모두가 처음에는 겸손으로 시작하였다가 은연중에 자기가 능력의 주체가 되어

성령님보다 앞서게 되므로 세상 영광이 들어오면서 스스로 교만 죄에 빠져버리는 일들이

현실에서는 자주 일어납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중한 죄를 범하게 됨으로써 끝까지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중도에 탈락하는 비참함에 이르게 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우리나라 기도원이나 영성을 추구하는 교회들의 문제점은 지금까지 자신만이

그러한 능력을 행하며 주도권을 쥐고자 하였으며 어떠한 후계자도 허용치 않고

자신만의 성을 쌓고 명성을 드높이는 그런 사고방식에 모두가 젖어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이 원치 않는 길을 가고 있는 곳들이 대부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6~70년대 그렇게 부흥하던 기도원들이 지금은 거의 문을 닫거나 쇠퇴해져 가고 있으며

그나마 대표적인 기도원들도 그 뜨거웠던 불길이 지금은 사그라져

이제 겨우 그 명맥만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 근본 이유는 그들이 능력 전이를 하여서 후계자를 일찌감치 세우고 영적 훈련으로

영력이 강화되며 영권이 부어지는 데 심혈을 기울여야 함에도 자기만의 사역에 집착함으로써

그러한 기회와 시기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본인이 교회와 기도원을 이끌어간다고 생각하기에 자기만의 능력을 주장하여

타인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고자 하는 마음이 저변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며

또 능력 전이로 후계자를 양성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것이

모든 기도원의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었나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영성을 추구하는 교회와 기도원에서 기적과 이적과 치유는 많이 나타나지만,

어느 곳 하나 능력 전이(임파테이션)를 하여 사역자들을 배출하는 곳은 정말 드물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단순히 나에게 닥친 영적 혹은 육적인 문제만을 해결하기 위해 기도원을 찾을 것인지

아니면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은사와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기 위해

기도원과 영적인 교회를 찾을 것인지에 따라 우리의 믿음생활과 방향은 확연히 달라집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생존하려면 물과 공기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공기 중에서 산소가 없다면

불과 5분도 버티질 못합니다인간은 이 땅에서 육신으로 살아가지만 그 본질은 영(영혼)입니다.

우리의 영도 호흡을 하고 영적 양식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영의 호흡은 기도 중에서도 특히 방언 기도이며 영의 양식을 공급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수적으로 해야 합니다. 이렇게 방언 기도를 매일같이 하므로 우리의 영이 굶주리지 않고

살아날 수 있는데 그 주된 역할이 기름부음입니다.

 

기름부음이란 좁은 의미로는 성령을 의미하며 넓은 의미로 해석한다면 성령이 하시는 모든 과정과

결과에 미치는 상태와 진행 등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즉 기름부음은 성령의 나타남. 능력. 회복. 새롭게 함. 흘러감. 변화. 강건케 함. 물리침 등등을 함에서

성령의 능력이 흘러가고 부어지는 과정과 진행 등이 총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태를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믿음생활에서 이러한 기름부음을 빼버리면 그야말로 영혼이 없는 육신과 같으며

결국 그 믿음은 이름뿐인 죽은 믿음과 같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믿음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시작이 되는데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리의 혼이 아닌 영으로 연결되어야 하며 그 통로와 수단이

바로 기름부음을 통해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이렇게 될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달음과

동시에 무한한 영적 능력과 양식을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름부음이 없다면 오직 지식에 기초한 혼적인 신앙생활을 하기에

결국 종교적인 신자의 형태에 머물게 됩니다하나님은 영이시므로 반드시 우리의 영으로

교감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혼(정신)으로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영적인 주파수와 우리의 혼적인 주파수는 전혀 다른 별개이며 이것은 쉽게 말해

우리가 동물들과 대화를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우리의 영이 살아나고 지속적인 성장을 하려면 기름부음은 끊어지지 않고 매일같이 부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깊은 세계 속으로 계속하여 달려간다면 이러한 기름부음은 일상 속에서도 계속하여

우리에게 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름부음을 마음이나 몸으로 늘 느끼며 사는 것이 진정한 믿음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성령의 기름부음이 우리를 통하여 만나는 상대방에게도 전해집니다.

 

이것은 비단 직접적 대면뿐만 아니라 전화나 방송이나 인터넷을 통해서도 무조건 전해지게 되어있습니다.

영적 세계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무한하며 과학과 이론과 논리의 한계를 벗어나며

그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세계입니다. 그것은 비단 천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물질세계의 이면에도 불가시적으로 엄연히 존재하는 세계이며

따라서 우리 속에서도 그 세계가 임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과는 반대로 세상 영으로 충만해진 사람에게는 그 속에 있는 악한 영을 통하여

어두움이나 온갖 나쁜 것들(죽이고 누르고 억압하고 파괴하는 힘과 악한 기질 등등)

상대방에게 부어지는데 영적인 사람은 이것을 민감하게 바로 감지합니다.

 

특히 사단에게 어느 정도 사로잡힌 자에게는 이러한 악한 기운이 더 강하게 본인도 모르게 흘러나와

상대방에게 해를 가하고 고통을 주고 상처를 입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보거나 말을 하거나 생각만 해도 그 속에 있는 세상 영이

바로 우리에게 침투하고 공격을 할 수가 있습니다.

 

기름부음이란 영의 흐름을 말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전달되고 영향을 미칩니다.

능력 전이(임파테이션)도 기름부음이 없다면 절대 불가능합니다.

 

안수기도를 받을 때는 상대방을 통해 치유와 능력의 기름부음도 들어오지만 동시에

그 속의 어두움들도 같이 따라 들어올 수 있으므로 사역자가 아무리 성령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때마다 기도로 성령충만하여 영적 상태가 깨끗하지 않다면 그 사람으로부터

안수기도를 받지 않는 것이 좋으며 안수기도를 해주는 것도 스스로 자제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부흥회 등을 할 때 외부 강사들이 와서 안수기도해줄 때도

무조건 기도를 받는 것보다 영분별을 먼저 해서 결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믿음생활을 하며 지식으로 하나님 말씀을 알아가는 것도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므로 이러한 지식만의 설교나 말씀의 전달은

우리의 혼(정신)과 마음을 감동케 하고 성경의 말씀이 지식적으로는 풍성해질지 모르나

우리 영의 변화와 성장에는 직접적인 도움은 되지 못합니다.

 

우리 영이 풍성한 은혜로 채워지고 열리고 성장하려면 당연히 기름부음이 있는

영적인 말씀이라야 가능합니다하나님의 말씀이 심령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는 뜻은

그 말씀이 전해질 때 성령의 기름부음이 직접 듣는 자의 영 속에 깊숙이 부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성령님이 그 듣는 자에게 능력을 부어주시기도 하고 회개와 변화도 일으켜

새롭게 태어나게도 하며 육적인 자아를 완전히 깨뜨리시는 등등의 여러가지 역할을 하므로

그 사람에게는 믿음이 총체적으로 새롭게 자라며 살아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죽어가던 내 영이 다시금 소생하려면 굶주리지 않고 영적인 양식을 매일같이 공급받아야 하며

반드시 기름부음이 흐르는 곳에서 영적인 목사님의 심령을 깨우치는 레마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를 잘 선택한다는 것은 내 영혼의 영원한 미래가 결정되기에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진정으로 성령충만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를 하나님과 영으로 실제로 만나게 해주는

영적인 참목자를 만나야 하며 그러한 교회와 기도원을 의지를 갖고 찾는 자만이

하나님께서 그 길을 열어주십니다.

 

우리가 그동안 열심히 믿음생활을 하고 있지만 지식적인 말씀만 강조하고

영적인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며 기름부음이 운행하지 않는 일반 종교적인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이라면 거기는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많은 교인의 영혼의 미래도

보장해줄 수가 없기에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열정이 있기에 전도와 선교에도 힘을 쏟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능력을 받기 전에는 전도하지 말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능력전도를 하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이며 우리는 전도에 쓰임 받는 도구와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즉 말씀을 전할 때 불신자들의 심령을 찌르고 변화를 시키는 것은 성령님이시므로

이제는 성령이 중심이 되어 우리들의 전도를 이끌어나가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전도 방법입니다.

이것은 불신자들의 마음 깊숙이 양심과 영혼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성령의 기름부음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명령대로 능력을 받아 말씀을 전할 때 성령의 기름부음이 우리를 통하여 흘러들어가

그 사람의 심령과 폐부를 찔러 쪼갤 때 그들이 돌이킬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식만으로 전도한다면 불신자들의 머리와 혼에 영향을 주고

그 마음과 영에는 영향을 주기가 어렵기에 영혼구원을 하기란 너무나 어렵게 됩니다.

 

지금 시대 많은 기독교인이 기름부음의 의미도 모르고 하나님의 임재와 직접적 만져주심도

못 느껴봤기에 이러한 기름부음에 대해서는 생소감을 갖게 되어 거부하며 무관심하게 됩니다.

 

우리는 종교적 관점에서 지식적 말씀에 의존하여 이성과 머리와 논리적 판단과 교리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함으로써 지금까지 믿음 생활을 해왔습니다.

또 믿음을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하는데 목사님들도 이러한 테두리 안에서

성도들을 가르치며 신앙생활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질적인 하나님의 영역 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장악하지도 못하였고 그 빛을 받지도 못했으며

그 권능과 사랑이 우리를 지배하지도 못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이 서로 연결되지 못했음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예배를 드리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영광도 빛도 사랑도 거기에는

부어지지 않습니다. 즉 기름부음은 전혀 역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메마르고 삭막한 가운데 우리의 지식과 열심에 의존하여 감정을 자극하고 분위기를 압도하여

선동과 미혹으로 가짜 성령충만을 만들어냅니다.

누가 이러한 예배 형태를 좋아할까요. 거기에는 미혹하고 세상의 것으로 가득 부어주는

악한 마귀들이 모두 장악하고 우리를 끌어갑니다.

 

그렇지만 영분별이 없으니 모두가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고 있습니다. 미혹하는 마귀가

교회를 휘어잡고 조종하고 있는데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모두가 착각하고 있습니다.

 

기름부음은 우리의 영분별에 필수적으로 중요합니다. 내 머리와 지식과 지혜로

영분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이 내 속에서 깨우쳐주셔야

나와 내 교회의 영적 상태도 깨달아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의 구원과 기름부음은 바늘과 실의 관계와 같이 뗄 수 없는 필수적인 것이며

그 기름부음으로 우리는 구원의 길을 꾸준히 지속해서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직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지 못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도 대부분의 교회는 이러한 기름부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구약시대의 선지자나 왕들에게만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것으로 이해하고 지금 시대는 없다고 외치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기름부음과 지금 시대의 기름부음은 전혀 그 의미가 다릅니다.

그때는 하나님께서 대언자로서의 선지자나 왕으로서 쓰시려고 선택하여 권한을 부여하는 의미로

부어주시는 것을 말함이며 지금은 성령을 통하여 만인이 그것을 지속해서 받아

하나님 안에 계속하여 머물러 있게 하려고 필수적으로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기름부음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무시하며 철저히 배격하는 상태로

한국교회가 나아간다면 즉 이러한 영적으로 무지하고 잠든 상태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절대 우리 한국교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현실이 앞으로도 계속 지속한다면 아마 하나님의 촛대가

새롭게 부흥되는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등지로 옮겨질지도 모르며

우리는 유럽의 흐무러져가는 교회의 모습을 답습하고 따라갈지도 모릅니다.

 

한국교회가 다시 한 번 새롭게 회개의 운동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받아들인다면

6~70년대의 부흥과 같은 열정적인 교회와 신자들로 우리나라는 다시 태어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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