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작성자둥근달|작성시간23.03.11|조회수6 목록 댓글 0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1. 믿음을 위해서 쓰여진 책, 요한복음(31)
 31절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한 것이 요한복음이 쓰여진 목적입니다. 요한복음은 믿음을 위해 주어진 책입니다. 그 믿음의 내용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결과로 영생을 얻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사도 요한으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표적을 여기에 다 기록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을 읽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필요한 표적들만을 선별하여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저 무턱대고 믿기만 하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분명한 사실과 사실에 입각한 자료들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그 사실들을 면밀히 살펴볼 것을 요구하며 그 기초 위에서 믿음을 요구합니다. 요한복음에는 실로 많은 목격자들의 진술이 있습니다. 믿음은 그런 증거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증인으로 합리적이었고 경험적 증거를 제시하는 도마가 등장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또 어떤 것이 참된 믿음이고 어떤 것이 거짓된 믿음인가에 대해서도 다양하게 설명해왔습니다. 믿음은 관계입니다. 일방적으로 영접 기도했다고 해서, 그냥 내가 믿는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은 쌍방적 관계이기에,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믿어주시는 것입니다. 단순히 사실을 믿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신뢰 어린 관계입니다. 뭘 보고서 흥분해서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인가 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참된 신뢰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었다고 했지만, 그 믿음이 가짜였다는 사실은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외치는 군중으로 순간 돌변했다는 사실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2.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믿는 자는 영생을 얻지만, 그를 믿지 않는 사람은 영원한 멸망과 지옥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떤 유명한 철학자나 정치인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믿지 않는 사람은 그저 자기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입니다(요 8:24). 세상에서 잠시 사는 동안 얼마나 행복한 가정 생활을 했는지, 얼마나 많은 업적을 남겼는지는 그들이 살게 될 영원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혹은 무시하고 세상이 전부라고 여기고 살았던 부자의 생명을 취하여 가시면서 하나님께서 그런 인생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자기를 위해서 재물을 쌓아두고, 자기를 위해서 인생을 계획하고 살아간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들이고 이들이 다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눅 12:21).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때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 있는가 아니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과 아무 관계 없는 삶을 살았는가 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교회를 다니느냐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묻지 않으십니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동사는 우리 인생에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29절 말씀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너처럼 보고 믿는 자들보다 훨씬 더’ 복되도다”라는 말씀이 아니고  여기서 주님은 믿음을 말씀하고 계실 뿐, 두 가지 믿음을 비교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믿는 자들은 복됩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저주로다 하는 것입니다. 불쾌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의 감정이 불쾌한가 아닌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사실이며,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믿는 자들이 복되다는 것입니다. 

3. 믿음에 대한 다양한 핑계들
알다시피 도마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했을 때, 경험적인 증거를 요구하면서 믿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믿음에 대한 핑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만 있으면 믿겠다고 말하는 다양한 핑계들이 있습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라고 하셨고, 도마는 만져보지는 않았지만 믿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아주 의미있게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도마가 복되지 않다고 하신 말씀은 아니지만, 보지 못하고 믿을 자들이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구분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던 사도들은 모두가 부활하신 주님을 눈으로 보았던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그렇게해서 주님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확신은 목격자로서 복음서와 신약 성경을 쓰게 했고, 그 이후의 모든 믿는 사람들은 그들의 증언을 통해서 즉 그들의 말을 통해서 믿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도마처럼 주님을 볼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그 경험을 사도들에게 국한시켜 허락하셨습니다. 부활 후 40일이 지나서 주님은 승천하셨고 이후로는 그런 방식으로는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할 때에 조차도 주님께서는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나타나셨다고 볼 수 있지만, 승천 이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방식과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들은 특별한 사람들이고 우리와는 구분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셨을 때, 주님은 이 믿음이 객관적이냐, 주관적이냐, 즉 증거를 보았느냐, 보지 못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만족하는(자족)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자기가 믿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주신 모든 것을 감사히 여기는 믿음입니다. 

A. 환상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내게 뭔가 확실한 환상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합니다. 물론 성경에는 많은 환상들이 나옵니다. 사도 요한 자신이야말로 하늘의 환상과 역사 속에서 일어나게 될 심판과 하나님의 역사를 환상 가운데서 본 사람입니다. 누군가 자기에게 이런 환상이 주어지면 믿겠다고 말한다면, 그 동기는 결코 믿음의 동기가 아니고 허영입니다. 허영과 같은 그릇된 동기에서 주어지는 어떤 환상도 그 사람의 신앙을 결코 세우지 못합니다. 도리어 믿음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허영 가운데서 믿음을 세우려는 자들은 마귀의 유혹과 거짓된 환상에 빠지기가 너무나 쉬운 법입니다. 이들은 이런 것을 강조하는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습니다. 

B. 이적
또 이적을 보기를 원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삶에서 어떤 기적을 보면 믿겠다 혹은 더 잘 믿겠다는 태도입니다. 이런 특별한 이적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부단히 베풀어주시는 일상적인 하나님의 긍휼을 드러내는 수천의 증거들을 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광야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그들처럼 매일 매일의 일상이 기적의 연속이었던 사람들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그 수많은 기적들 속에서도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았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이적이 우리의 믿음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매일 매일의 은혜의 기적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C. 체험
위의 두 가지와 매우 유사하지만, 특별한 은혜 체험을 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화끈한 체험이 있으면 자기가 잘 믿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필요하면 이런 특별한 체험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런 체험은 우리가 믿음을 걸 수 있는 핑계는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대상은 우리 자신이 경험한 엄청난 체험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자비와 모든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체험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체험은 결코 우리의 신앙과 신앙의 내용을 형성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형성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이 특별한 체험이 없다고 해서 그것이 여러분의 불신이나 현재의 상태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이 더 큰 은혜의 체험을 구하는 것이 나쁘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체험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나는 그냥 이 자리에 머물러 살겠다는 태도는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D. 성공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어떤 형태의 성공을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자기를 사랑하시는 증거로 받아들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특정한 기도 응답, 특별히 자기가 지금 바라는 일이 성공적으로 되는 것을 믿음의 증거로 삼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런 증거로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믿음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믿고 그 위에서 행동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증거는 성공이나 내가 원하는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 3:16 말씀과 모든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아들을 주시고 십자가에 그 아들을 못박아 죽이신 일입니다. 

E. 좀 더 많은 정보
또 어떤 이들은 좀 더 많은 정보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묻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 성경을 충분히 연구했는가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충분한 합리적 추론을 내릴 수 있도록 넘치고도 충분한 정보가 이 성경 안에 있습니다. 아니, 요한복음서 하나만으로도 그 믿음의 증거, 예수님에 대한 정보는 충분히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30절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표적을 다 기록할 필요도 없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4. 믿음은 복음적 순종의 최초의 그리고 가장 우선적 행위다.
존 에이절 제임스(John Angell James)는 『구원을 열망하는 자들을 위하여』라는 책에서 믿음에 대한 매우 적절한 예화를 사용합니다. 지혜롭고 선한 임금의 신하들이 정당한 이유 없이 모반을 일으켰다가 실패를 했습니다. 임금은 자비를 베풀고 용서할 의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포고문을 전국에 공포했습니다. “정해진 시간까지 왕 앞에 와서 무기를 내려놓고 자기의 과실을 자백하며 긍휼을 탄원하는 모든 자들의 목숨을 살려줄 것이며, 모든 권리를 회복시켜 주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포고문의 끝에는 “임금의 자비에 자신을 던지지 않고 여전히 무장하고 있는 모든 자들은 사형에 처하겠다”는 단서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왕의 자비와 용서를 받을 자들에게 요구되는 마음의 상태와 행위는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공포된 포고문의 내용을 믿어야지요. 이것은 또한 왕의 진심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반을 일으킨 신하들이 임금의 자비와 용서를 받고 살아날 길은 오직 믿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포고문의 내용을 받아들이고 임금의 진심을 신뢰하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경우에, 믿음은 그들이 용서받고 살아난 공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저 용서를 받은 방편일 뿐이지요. 자기 믿음의 행위를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다. 모반을 일으켰던 한 신하가 생각합니다. “나는 가기가 두렵다. 임금이 어떻게 모반을 일으킨 나를 용서하겠는가?” 그는 이런 생각으로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는 임금이 정해진 시간이 지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무장을 한 채로 발견되었고 체포되었고 결국은 사형을 당했습니다. 이 신하는 왜 임금의 자비와 용서를 받지 못하고 죽었습니까? 첫째는 모반죄를 범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불신앙의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모반죄라기 보다는 불신앙의 죄 때문인 것입니다. 그는 임금의 포고문을 믿지 않음으로써 임금의 자비와 진실성을 모독한 것입니다. 이것이 불신앙의 본질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지금 이 순간에,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는 마음의 상태라면 여러분은 이런 불신앙의 본질에서 조금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너무나 위험한 상태라는 사실을 아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의 불신앙으로써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의 마음과 선언을 모독하고 있는 셈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죄인이라는 각성을 갖고 있으며 용서받기를 원한다는 것이 아무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더 이상 같은 죄를 범하고 살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여러분의 삶 전부를 돌이켜야 합니다. 그전까지는 결코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복음적 순종의 최초의 그리고 가장 우선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믿음이 시작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도록 다녔을지라도 믿음, 구원얻는 믿음이 없다면, 여러분은 아직 아무런 시작조차 하지 않은 것입니다. 

5. 믿음의 순종을 하는 방식(마 12:13)
성경은 모든 죄인은 다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거듭나게 하시지 않는 한, 죄인은 하나님을 향해서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습니다. 믿지도 못하고 회개할 수도 없습니다. 성령님의 중생의 역사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고, 중생된 자가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최초로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묻고 싶어합니다. “나는 죽어있는데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언젠가 성령님께서 나를 중생하게 하시면 믿게 되겠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고, 자기 영혼에 대해서 말할 수 없이 나태한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버려두기에는 우리 영혼은 너무나 귀중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성경이 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거기에 한 쪽 손이 말라서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송사하기 위해서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이 옳은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시면서 그 손 마른 사람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뭐라고 하셨는지 아십니까? “네 병을 고쳤다”고 선언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2:13). 이상한 명령이 아닙니까? 손 마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고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손을 고쳐주시고 나서야 손을 내밀라고 해야 옳지 않습니까? 이때 어떤 일이 일어났지요? 그 사람이 “주여 저는 할 수 없어요. 제 이 손은 죽었어요"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의 명대로 손을 내밀었습니다. 이 말씀이 믿음에 대해서 무엇을 가르쳐줍니까? 주님이 주신 명령은 그 손 마른 사람이 믿음으로 반응하여 손을 내밀고자 할 때, 이미 고쳐주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우리는 그 순서가 단 몇 초의 차이인지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논리적인 순서상, 주님은 그 사람이 믿음으로 손을 내밀고자 할 때, 그 사람이 믿을 때, 이미 그를 고치신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가 내밀자 회복되어 성해졌다’고 합니다. 설명은 거꾸로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해하는 순서로 기록된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죄인들에게 “회개하고 믿으라”고 말씀하실 때 의미하신 것입니다. 죄인은 회개하고 믿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가 "저는 할 수 없어요. 저는 죽어 있으니까요"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도리어 약속된 은혜의 도움을 믿어야 합니다. 그 명령을 내리시는 분의 자비와 은혜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6. 미루지 말라.
아직도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존 에인절 제임스는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또 하나의 예화를 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굶주린 거지에게 자선을 약속하거나 자신을 해롭게 한 어떤 사람을 용서하겠다고 약속하는데, 그 약속을 듣는 이들이 “그 약속을 '언제' 믿어야 하나요?”라고 묻는다면 참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약속을 받은 거지가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당신을 믿을 만큼 제 궁핍에 대해 충분하게 느끼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더 진하게 시장기를 느낄 때, 그때 와서 당신의 말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어리석음이 아닙니까? 이것은 죄인들이 “우리는 죄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을 갖기 위해 기다리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여러분의 죄에 대한 각성이 얼마나 더 깊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문제는 여러분이 죄에 대해서 진실로 각성을 하고 있는가 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며, 바로 여러분의 죄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으셨으며, 여러분에게 있지 않은 의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거저 주시기 위해서 대신 율법에 온전히 순종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셨다는, 하나님에 의해서 공포된 사실을 믿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그 진실하심을 믿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요구되는 것이 없습니다. 


7. 믿음의 세 가지 요소: 지식, 동의, 신뢰
믿음은 불합리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예화 속의 임금이 공포한 포고문과 그 진심을 믿고 따르는 것을 불합리하고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믿음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지식과 동의와 신뢰입니다. 참된 믿음은 먼저 지식을 요구합니다. 믿는 내용이 없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믿는 것보다 중요하고 우선적인 것은 진리를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내용을 요한복음은 너무나 충분하게 말해주었습니다. 이 복음의 내용에 동의하는가입니다. 하나님의 진심에 동의하는가 입니다. 그리고 전적인 신뢰입니다. 이것은 결코 부분적일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전적인 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께 손을 내밀었던 사람의 믿음은 바로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있는 믿음입니다. 그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 내 병쯤이야 간단히 고치실 수 있는 메시아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손을 내밀라고 하시자, 믿음으로 신뢰함으로 내밀었습니다. 

8. 참된 믿음의 열매: 영생과 기쁨
31절에 기록된대로,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의 즉각적인 열매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믿었는데도 불구하고 정말로 기뻐하지 않고 있다면 여러분은 정말로 믿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영생을 가리킵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더불어, 그리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더불어 사는 삶입니다. 이 삶에는 기쁨이 파생됩니다(요일 1:4). 이것은 영적인 기쁨입니다. 세상이 빼앗아가지 못하는 기쁨입니다. 성 삼위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영원전부터 누리고 계셨던 기쁨입니다. 

주 예수님을 지금 믿으십시오. 그리고 영생을 얻으십시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