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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뜻

작성자둥근달|작성시간23.12.21|조회수16 목록 댓글 0

하느님의 뜻


예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의 가까이 있음은 그 자체가 활동하는 힘으로 보인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하느님의 뜻에 무조건 순종하게 하는 힘과 도전의 장이 된다. 언제 하느님의 나라가 올지 그 시간을 계산하는 노력을 예수는 용납하지 않으면서도 그 나라의 도래를 기대하도록 요구했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종말론과 윤리학의 관련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그의 계명들은 어디에서도 예언자적 말씀의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예수가 그것들을 하늘의 상급이나 마지막 심판 때의 저주와 연결시킬 때조차도 종말론적 근거를 가지지 않는다(마태 24:24~, 루가 19:11~). 하느님의 뜻은 언제 어디에서나 그 자체로서 정당하다.

이런 이유로 예수의 요구들을 '중간 윤리', 즉 하느님 나라의 신속한 도래와 시대의 변화를 동반하는 우주적 파국 가운데 놓여 있는 세계 상황에서 예외적인 율법들로 규정짓는 것은 옳지 않다. 예수는 그의 윤리적 요구에 대한 논증을 소멸하는 질서로부터 끌어내지 않고, 오히려 현존하는 세계, 〈구약성서〉의 계명들, 창조,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 경험들로부터 끌어내고 있다(십계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가까이 있음에 대한 확신은 예수가 하느님의 뜻을 해석하는 공개된 혹은 숨겨진 근거가 되며, 〈구약성서〉의 율법에 대한 그의 태도를 말해준다.

〈구약성서〉의 율법 전통의 특성에 상응하여 그는 단일한 말씀과 개인적 명령에 연관된 해석에서 하느님의 뜻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는 이것들을 체계적인 '도덕적 가르침'으로 발전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매우 다른 종류의 계명들을 구체적인 예로, 즉 동료에 대한 행동(살인과 분노, 간음과 이혼, 맹세들, 보복,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에 관하여), 의식적 계명(안식일·기도·금식·모독에 관하여), 다른 예식 의무를 설명했다.

예수는 항상 이 계명들의 근원으로 나아갔고, 율법의 문자적인 의미에 만족하지 않고, 하느님의 진정한 뜻을 율법 안에서 밝혔다. 예수가 율법을 존중했지만, 율법은 더이상 하느님의 뜻을 아는 유일한 근원이 아니며, 하느님과 백성의 관계를 중재하는 절대적인 권위도 아니었다.

그래서 예수는 더이상 거룩한 문자와 전통에 위장되지 않는 하느님의 실재와 또한 유사하게 위장되지 않은 사람의 실재 사이에 대면하게 한다.

사람들은 더이상 경건한 일로 하느님 앞에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는 생각과 바리사이파와 같이(루가 18:11~) 그것들을 계속 쌓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자신들을 더이상 속일 수 없다. 하느님이 인간으로부터 원하는 것은 무조건적이며 분열되지 않은 인간 자체이다. 이러한 사상에 대한 고전적 구절은 산상수훈(마태 5:21~48)과는 정반대이다.

하느님의 요구는 단순한 법률적 행동에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의 주요사상은 '이것뿐 아니라 저것도……'이다. 제정된 율법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분노, 음탕한 눈, 법적 이혼, 보복, 원수를 배제하는 사랑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다.

이러한 극단적 요구들은 역설적으로 과도한 요구들이 결코 아니고 오히려 해방을 의미한다. 첫째로, 이러한 요구들은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정식화된다. 여기에는 일상생활에서 백성들의 자연적이고 왜곡되지 않은 실천이 포함된다. 둘째로, 그 요구들은 모든 인간의 행위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기술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는 하느님 아버지가 그의 자녀들에게 행했고 행하고 있고 행할 것과, 무제한적인 하느님의 가능성에 대해 거듭 지적한다. 믿음(마르 9:23~)·기도(마태 6:1~, 루가 11:1~)·염려(마태 6:25~)에 대한 예수의 말씀들은 이에 대한 예들이다. 백성들에게 스스로 결단하기를 요청하는 곳에서 예수는 하느님이 인간을 위해 벌써 결정했다는 사실을 논증한다. 그가 요구하는 무제한적인 용서의 동기는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죄인에게 보여준(마태 18:23~)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에 있다.

예수는 그의 요구들이 수행 가능한지에 대해 추상적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한다. 한편 예수는 '상급'에 대한 사상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급이 물질적인 상은 아니고(이런 종류의 이미지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과의 관계의 완성이다(마태 25:14~).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지불을 주장하고 청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 예수에게는 전혀 없다(루가 17:10).

가까이 있는 하느님은 더이상 인간을 전통적 범주로 등급을 매기거나 분류하지 않고, 긴급하고 중요한 도래로 이끈다.

예수가 얼마나 인간에 대해 관심을 가졌는가는 그의 사랑의 계명에서 보여지는데, 그는 그것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모욕받으면서도 실천했다. 그가 제자들에게 요구한 '더 좋은 의'는 사랑이다(마태 5:20). 예수는 〈구약성서〉의 2가지 계명,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받아들였는데(레위 19:18, 신명 5), 이것은 유대교에서도 모든 율법의 요약이다. 그러나 예수의 설교의 특징은 일관되게 모든 다른 율법(안식일 계명)을 가장 중요한 기준(마르 2:27, 3:4)에 종속시켰다는 것, 이웃사랑을 원수사랑에로 확장하여 고양시켰다는 것(루가 6:27~), 계명을 추상적인 관념이나 일반적인 인류애가 아닌 항상 사건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에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근대 도덕철학의 개인윤리와 사회윤리의 구분은 예수의 가르침에서는 단지 제한적으로 적용된다.

확실히 예수는 세계와 민족의 새질서를 계획하지 않았고, 부의 공평한 분배를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주인과 노예, 고용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별에 대항해 싸우지도 않았고, 정의의 실행을 위해 어떤 지침도 주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팔레스타인 유대 시골 상황, 즉 마땅히 되어야 할 세상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었다. 그의 말씀·비유·교훈은 얼마나 그가 일상생활을 날카롭게 평가했으며 , 얼마나 명백하게 그것을 사실적이며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주어진 세계에서 하느님 본래의 뜻과 그의 밝아오는 나라에 적합하게 행동할 것을 요청한다(마태 6:24, 루가 16:9~). 그러나 예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재산을 완전히 포기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법적으로 규정된 시설을 사용해서도 안 되었고, 세상의 관습적 행동양식을 따라서도 안 되었다. 그러므로 세상은 산상수훈에 의해 다스려질 수는 없다는 주장은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보복에 대한 예수의 말씀과 사랑의 계명은 있는 그대로 법적으로 실행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누군가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이나 다른 사람과 함께 그의 재산을 나누어야 되는 사람을 안내하는 데만 도움을 줄 수 있을 뿐이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로지 다른 사람의 권리에 대해서만 결정해야 하며 일반적 사회질서를 위해 악을 억제해야만 한다. 그러나 산상수훈의 실천 불가능성은 예수의 가르침이 사회비평에 강한 추진력을 가진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예수는 사랑의 계명에 따라 율법을 설명하고 그것을 구체적 상황에 적용하면서 표면적으로 정당한 기준을 속빈 관습이라고 폭로한다. 이런 이유로 그는 개인뿐만 아니라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특권집단의 자기중심성에 대항하고, 차별대우를 받는 자(이방인·사마리아인·세리·창녀)와 함께한다.

그의 계명의 정당성과 긴급성이 묵시적 근거를 요구하지는 않지만, 예수는 백성들에게 근접한 하느님 나라에 상응하는 삶을 살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그것들의 선포는 예수 자신의 선교와 밀접하다(루가 11:32~). 그가 그의 선교 사실을 그리스도론적 칭호들로써 표현했는지, 했다면 어떤 방식으로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예수는 그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보내졌다는 것을 알았다(마태 9:36, 15:24). 전체적으로 그의 사목은 자신의 백성에게 한정되었다. 몇몇의 중요한 단어와 장면만이 하느님의 새로운 종말론적 백성 안에 비유대인을 포함시키려 한다(마태 8:11~). 그러나 예수는 이방인을 위한 선교를 조직하지 않았고(마태 10:5~), 보편적인 '교회'도 조직하지 않았다.

베드로가 고백한(마태 16:17~) 것은 후기 교회의 산물이며, 그 상황과 교리를 반영한다. 그러나 분명히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운동을 일으켰고, 그의 추종자들 모두는 아니지만 그의 방랑과 사목을 함께할 제자집단을 만들었다. 후기 전승은 소수의 제자집단만을 사도들과 동일시했다(Ⅰ 고린 15:5~). 12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한다.

만약 예수가 이 제자들을 스스로 임명했다면, 그는 그것으로 전(全)이스라엘에 그의 종말론적 주장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마태오의 복음서〉(19:28)·〈루가의 복음서〉(22:30)에 의하면(그것은 후기까지 형성되지는 않았던 것 같음),

 

출처 ; 다음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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