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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서)예레미야

예레미야 24:1-10

작성자오직은혜|작성시간26.06.09|조회수21 목록 댓글 0

예레미야 24:1-10
찬송 290장,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우리 무의식 속에는 한 가지 공식이 있습니다. 보통 삶이 잘 풀리고 평안하면 하나님께 복받았다 여기고, 예기지 못한 고난이나 실패를 겪게 되면 하나님께 징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공식은 신앙의 깊이와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 혹은 성경공부를 통해 지식적으로 이 공식이 언제나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그러나, 막상 내 앞에 닥친 현실이 술술 잘 풀리면 저와 교우님은 그 상황을 ‘복받았다’고 여깁니다. 반대로,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아픔이 내 삶에 찾아오면 그때부터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오늘 저와 교우님이 함께 읽은 본문은 그동안 우리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던 공식에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은 독특한 위치에 있습니다. 예레미야 이전의 이야기와 이후의 이야기를 전환하는 역할을 합니다. 신학적으로 예레미야는 크게 두 줄기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본문 이전의 이야기는 ‘누가 진짜 하나님의 백성인가?(1-25장)’에 대한 질문이 담긴 내용으로서 유다를 향한 탄식과 하나님의 혹독한 심판 경고가 주를 이룹니다. 특히, 이 내용의 말미인 21-23장은 유다의 마지막 왕들의 타락과 실패를 집중적으로 다루어 절망적인 상황을 극대화합니다. 그러나 본문 24장을 기점으로 예레미야 이후의 이야기는(26-45장) 회복과 소망을 다루게 됩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유다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거대한 산을 넘어, 소망의 언덕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습니다.

인간의 공식 밖에 계신 분(1-3)

(1)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유다 고관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긴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성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를 내게 보이셨는데

본문 이전의 참담한 이야기를 염두에 둔다면, 오늘 본문에 나온 이야기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뿐만 아니라, 그 예언의 말씀을 들은 백성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앞선 22장에서 예언되었던 고니야로 불리던 여고냐 왕의 폐위와 포로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역사에서 시작합니다. 당시 유다 백성은 혼비백산했습니다. 자신들을 향해 부정적인 예언을 쏟아내던 예레미야의 말이 현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왕뿐만 아니라, 왕의 휘하에 있는 귀족들이 모두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인간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공식을 꺼내 들어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포로로 끌려간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셨고, 그들에 비해 안전한 상황으로 삶이 풀린 자신들은 하나님께 복받았다고 말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환상을 보이셨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평범한 환상 같아 보였습니다. 환상은 그저 두 광주리에 무화과 열매가 담긴 모습이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아 차이를 찾아본다면, 두 광주리 안에 담긴 무화과 열매의 상태였습니다.

(2-3)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고 한 광주리에는 나빠서 먹을 수 없는 극히 나쁜 무화과가 있더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무화과이온데 그 좋은 무화과는 극히 좋고 그 나쁜 것은 아주 나빠서 먹을 수 없게 나쁘나이다 하니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네가 무엇을 보느냐”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하나님께 받는 복과 심판에 대한 인간의 공식을 뒤집으십니다. 아마도 예레미야에게도 이 공식이 있었을 겁니다. 당시 유다 백성의 한 무리는 느부갓네살 왕에게 포로로 잡혀겼고, 한 무리는 포로로 끌려가지 않았던 상황을 겪은 뒤 보았던 환상이기 때문에, 선지자의 눈에도 한 광주리 담긴 ‘극히 좋은 무화과’는 하나님의 성전이 자리 잡고 있던 예루살렘에 남은 유다 백성을 의미하고, 다른 한 광주리에 담긴 ‘극히 나쁜 무화과’는 처참하게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여고냐 왕과 유다 귀족들처럼 보였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것과 전혀 달랐습니다. 이러한 틀에 박힌 인간의 공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는 이야기의 전개 속에서 저와 교우님은 한 가지 복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공식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은 어김없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명료한 말씀(4)

(4)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하나님의 말씀에 여러 가지 기능이 있지만, 그중 하나는, 말씀은 명료함을 준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저와 교우님에게 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것의 명료함으로 우리 안에 있었던 공식화된 틀, 편협함, 혼란과 같은 일들을 말끔히 종식 시킵니다. 그의 말씀은 어느 상황 속에서든 어김없이 임하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명료하게 변화시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를 빗대어 이러한 그림을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두 제자는 엠마오라는 마을로 걸음을 옮기며 근래에 일어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걱정은 그리스도가 죽으셨고, 그의 시체마저 사라졌다는 근심 섞인 이야기였습니다. 그들에겐 그리스도에 대한 공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군사적인 메시아로서 로마의 압제 가운데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여겼지만 그가 십자가에서 처형 당한지 사흘이나 지나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가까이 이르러(눅24:15)” 임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두 제자에게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을 자세히 이르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이후에 그들의 눈은 비로소 밝아지고, 말씀으로 인해 마음이 뜨거워짐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명료함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담대히 전했습니다.

저와 교우님에게는 우리를 명료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해가 불완점함을 겸손히 인정해야 합니다. 혹여 저와 교우님이 예레미야처럼 뚜렷한 환상을 본다 할지라도, 우리는 지극히 유한한 존재이고 죄로 인하여 우리의 이해가 왜곡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신앙적인 데이터로 정성스레 쌓아 올린 공식이 안전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와 교우님에게는 명료한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보여주며, 그의 말씀을 온전히 들리게 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온전히 받을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두 광주리에 담긴 무화과 환상을 본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명료하게 설명하십니다.

"좋은 무화과"가 되기 위해서(5-7)

(5-7)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라 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여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포로’라는 단어 자체가 인간의 공식에는 패배적이며 실패의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들과 모르는 자들, 그 누구라도 이 단어에서 먼저 절망을 발견하지 소망을 품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명료합니다. 인간의 눈에 포로로 끌려간 것과 같지만,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예루살렘에서 옮겨, 바벨론 땅으로 이르게 했다고 말입니다. 즉, 인생이 잘못 풀려 고통을 받게 된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으십니다. 포로 된 자들을 하나님은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저와 교우님의 눈에는 이 상황이 조금은 납득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상황을 어렵게 돌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시 유다 백성의 상태를 감안해 본다면, 유다 백성의 한 무리를 포로로 끌려가게 해 그들을 잘 돌보아,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은 필요한 조치였습니다. 당시 유다 백성은 우상 숭배를 자행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는 혼합주의적인 상태였습니다. 이는 조상 때부터 섬기던 여호와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은 맡기지만, 현세에서 누리는 경제적 풍요만큼은 이방 신을 따르며 실용적인 이득을 취하는, 일종의 편리하고 이기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강대국을 의지했습니다. 당시 신흥 패권국인 바벨론과 전통적인 강호였던 애굽이 유다를 사이에 두고서 거대하게 충돌하던 시기였습니다. 바벨론이 유다를 위협해 올 때, 유다 백성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라는 예레미야의 말보다 애굽이 가지고 있던 기병과 전차 부대를 의지하는 편이 현실적인 구원처럼 보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더욱 의지했습니다. 그런 모습이 영적인 착각마저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보이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하나님이 절대 예루살렘을 망하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맹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혼합주의적인 영적인 상태를 단절하지 않고, 하나님을 등진 채 실용적인 안전을 도모하는 삶은 회개하지 않은 채 안전하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로 유다 백성의 한 무리를 보내시기를 결정하셨습니다. 저와 교우님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그가 포로로 보내시는 목적은 인간의 파멸이 아닙니다. 포로 생활이라는 거친 환경을 사용하여 인간 안에 있던 교만과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마음을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본문 7절에 하나님께서는 포로 된 자들의 마음에 한 가지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인 줄 아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때로 저와 교우님의 삶에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는 고난을 통해 우리의 환경을 이전과 달리 가혹하게 만들어 저와 교우님을 벌하시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으십니다. 그는 우리의 마음을 고치시길 원하십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저와 교우님에게 포로 된 상황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께서 5절에서 ‘포로 된 자들을 좋은 무화과같이 잘 돌볼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잘 돌본다’라는 원어적인 의미는 ‘가치 있다고 인정한다’라는 말입니다. 좋은 무화과는 애초에 거친 환경에 놓여집니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서는 절대 최상의 단맛과 풍미를 낼 수 없습니다. 무화과는 타들어 가는 지중해의 강렬한 태양빛을 이겨내야 합니다. 대개 석회암과 거친 흙으로 가득한 유대 광야에서는 물이 풍족하지 않기에 무화과는 수분을 찾아 땅속을 쪼개며 내려가 지하수를 마셔야 합니다. 겨울철에는 적당한 추위를 견뎌야만 열매의 에너지가 축적됩니다.

‘나쁜 무화과’는 이 고난을 겪지 못한 열매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이러한 고난으로 보내어 최상의 열매가 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치 있게 바라보시고 인정하시는 분이십니다. 무엇이 하나님 앞에 가치 있는다고 인정받는 삶이겠습니까? 영적인 혼합주의와 강대국의 안위 속에서 온실의 화초처럼 남은 자로 사는 삶은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본문 8절에서 10절에 나온 ‘나쁜 무화과’처럼 하나님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삶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것이 설령 인간의 공식에서는 가치 있다 여겨지고 만국 공통적으로 인정된 지혜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저와 교우님이 그동안 나만의 공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보려 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명료한 말씀 앞에 신을 벗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혼란을 종식시킬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관점으로 혼합된 우리 사상을 하나님께로 명료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됨을 알게 할 것입니다. 비록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이 광야와 같고 뜨거운 태양 아래 놓인 것 같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런 저와 교우님을 가장 좋고 가치 있는 ‘좋은 무화과’로 영글게 하시는 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 은혜로, 세상의 어려움 중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가치 있게 인정될 것입니다. 그 진리에 우리의 믿음과 영원한 소망을 두는 저와 교우님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생각보다 크신 하나님을 우리 삶 속에서 인정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믿음이 부족하여, 우리를 좋은 열매로 맺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불안함을 느꼈고, 때론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믿음을 더하여 주시고, 언제나 찾아와 말씀하시고 소망과 회복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바라보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우리는 삶이 잘 풀리면 복을 받았고, 어려움을 겪으면 징계 받았다고 쉽게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공식을 뛰어넘어 일하십니다(1-10). 나는 최근 어떤 상황을 내 기준으로만 해석하며 하나님의 뜻을 단정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2.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분명히 보여준 환상을 말씀으로 바로잡으시고, 포로로 끌려간 자들을 오히려 “좋은 무화과”라고 부르셨습니다(4-7). 비록 내 눈에 분명한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내 생각과 판단을 점검하고 있습니까?
3. 하나님께서 포로 생활을 허락하신 목적은 백성을 파멸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회복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7). 지금 내 삶의 고난이나 불편함 가운데 하나님께서 회복시키고자 하시는 부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4. 좋은 무화과는 거친 환경 속에서 더욱 가치 있는 열매로 익어가듯,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백성을 선하게 빚어 가십니다(5-7). 현재 환경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을 불행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성숙하게 만드시는 과정으로 바라보고 계십니까?

(작성: 김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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