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총 개요
제 1 절 북한군 남침 이후 상황 요약
6.25전쟁은 북한이 1950.6.25일 적화통일을 위하여 기습적으로 불법 남침한 전쟁이며, 유엔군과 공산군 측이 1953.7.27일 휴전에 합의하여 3년 1개월 2일간, 1 129일간 한반도에서 전개 되었던 전쟁이다.
이 전쟁은 한반도의 분단을 더욱 고착화시키는 아픔을 남긴 채 종전이 아닌 정전 또는 휴전의 형태로 멈추어져 있다.
6.25전쟁은 전쟁기간에, 국군과 유엔군이 인원손실은 77만 6천여 명이나 되었고, 북한군과 중공군의 인명피해도 2백만여 명에 달했다. 뿐만 아니라 전투원이 아닌 민간인 피해도 남한 100만여 명, 북한 150만여 명 등 250만만여 명에 달했다. 그당시의 남북한 인구가 2,500만명을 고려시 10%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이전쟁은 세계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동북아 지역의 한반도에서 시작된 전쟁에 세계 6대주의 25개국이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동서 양대 진영의 중심축을 구성한 초강대국들이 이 전쟁에 모두 연관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6.25전쟁은 1950년대의 세계사에서 동.서 냉전의 무대에 제물로 바쳐진 희생양과도 같은 것이었으며, 미.소를 중심으로 하는 냉전체계의 구축과 군비경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또한 핵의 위협 속에서 양 진영의 재래식 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된다.
6.25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가 첨예한 대립속에서 세계공산화 책략의 일환으로 스탈린과 모택동의 지원을 받는 김일성이 일으킨 전쟁으로 국제전이면서 내전이었다. 동시에 6,25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이었지만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북한의 무력남침을 저지함으로써 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질서를 수호한 전쟁이었고, 자유진영의 입장에서는 대한민국과 유엔참전국들이 함께 공산주의의 팽창확산을 저지한 자유수호전쟁이며 자유민주진영이 승리한 전쟁이었다.
제 1 절 북한군 남침 이후 상황요약
1. 북한군의 기습남침과 국군의 서울 피탈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소련과 중공의 도움을 받아 38도선 전역에서 기습남침을 시작했다. 200여 대의 T-34전차를 앞세우고 압도족인 전투력으로 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였다.
다음날인 6월 26일 오후 13시경에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를 함락시키고, 6월 28일 01시경에 미아리고개를 넘어서면서 국군은 수도 서울을 불과 3일 만에 북한군에게 내어 주고 말았다. 미아리 방어선 후방에 북한군 전차가 출몰했다는 보고에 채병덕 총참모장이 한강교 폭파를 명령하여 국군 공병부대가 28일 02시 30분에 한강교를 폭파하였다. 이 때문에 한강 북쪽에 남아 있던 150만 서울 시민을 북한군 치하에 방치(?)하였을 뿐 아니라 미쳐 철수하지 못한 수 많은 국구늬 철수로를 차단함으로써 국구늬 전투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러나 국군 제6사단이 춘천지역에서 북한군 제2군단의 남진을 저지함으로써 그들이 수원에서 포위 소멸하려던 전략적 기도를 좌절시켰다. 또한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서울에서 지체하고 있는 사이에 국군은 삼삼오오 한강을 도하하여 철수해 옴으로써, 병력을 재편성하여 한강방어선을 구축하는 한편, 6월 28일부터 7월 3일 까지 북한군의 한강도하를 저지하여 미군을 주축으로한 유엔군의 한반도 파병을 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게 크게 기여한다.
2. 유엔군의 참전과 지연전
유엔이 승인한 대한민국이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위기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접한 미국정부의 조치는 신속했다. 트루먼 대통령과 미국 정부는 지체없이 참전을 결정했다. 6월 26일 미국의 요청으로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열리고, 북한군을 침략자로 규정하면서 38도선 이북으로 철수를 요구한다. 이어서 28일 유엔의 권고를 무시하고 계속 진출하는 북한군에 대해 군사적인 제재를 결정했다. 이를 위해 7월 7일 유엔은 역사상 최초로 유엔군을 창설하였다. 초대 유엔군 사령관에는 미국의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임명되었다. 당시에 우린 유엔 회원국이 아니여서 맥아더 원수는 국군을 지휘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원수에게 서한을 보내 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했다.
그 사이 일본 동경에 위치해 있던 미국 극동군사령부는 남진을 계속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24사단을 파병한다. 그러나 전투준비가 부족했던 미 제24사단은 오산-평택-천안전투에서 잇달아 패하면서 국군과 유엔군은 금강-소백산맥선으로 후퇴한다. 하지만 미 제24사단은 압도적인 북한군의 전투력과 측방기동 및 후방차단 전술에 밀려 7월 20일 경에 금강선마저 무너지고 대전마저 피탈당하였다. 대전 전투에서는 미 제24사단장인 딘소장마저 실종되는 어려운 국면에 처하였다.
북한군의 계속적인 공격기세에 급변하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미 제8군사령부는 7월 24일 일본에서 대구로 지휘소를 이전시키고, 이어서 미 제25사단, 미제1기병사단, 제29독립연대 등을 한반도에 전개시켰으나 소백산맥선 마저 무너진다.
이에 유엔군은 공간을 내어주면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지연전을 펼치면서 재정비와 전투력 복원에 전력하면서 마침내 7월 말에는 방어에 유리한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한다.
3. 낙동강방어선 전투
낙동강방어선은 마산-남지-왜관-낙정리-영덕으로 이어지는 방어선과, 동해, 남해로 둘러싸인 직사각형 모양의지역을 포괄하고 있었다. 유엔군은 대구 북서쪽 왜관으로부터 남쪽으로 낙동강을 따라 창녕-마산 진동리에 이르기까지 112KM 구간을 담당하고, 왜관에서 북동쪽으로 낙정리-구미동-청송--영덕을 연하는 138KM 구간을 국군이 담당했다.
하지만 게속하여 유엔군이 담당하는 마산 왜관 일대와 국군이 담당하는 다부동 기계 포항 일대에서 운명을 건 쌍방 간의 전투가 8월 한달 계속 되었다.
치열한 공방전은 9월이 되면서 양측의 전투력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유엔군은 참전국이 늘어나면서 병력이 증강하고 미국의 강력한 지원아래 전투력이 급상승한 반면에 북한군은 보급거리 신장과 미군이 제공권을 장악하여 끊임없는 후방차단과 해상보급도 재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유엔 해군과 국군 해군이 해상보급도 차단하였다. 특히 북한군 T-34전차를 파괴할 3.5" 로켓포가 대전전부터 지급되면서 북한군 전차는 개전초 200대에서 겨우 100여 대가 남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북한군은 남한에서 강제로 징집하여 학도의용군을 전쟁터로 끌여 들였고, 각 지역마다 보급대를 편성하여 미군의 폭격을 피해 야간시간에 후방에서 낙동강 전선으로 탄약과 식량을 조달하는 방법으로, 특히 유엔군이 담당한 대구북쪽의 왜관.다부동 일대와 구군이 담당하고 있던 영천일대의 상황은 일촉즉발의 위기가 닥쳐오곤 했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은 워커는 한 때 방어선을 마산-밀양-울산을 연하는 선으로 철수하는 방안과 지휘부를 일본으로 한국정부는 제주도나 일본지역으로 옮기는 방안까지 검토하게 된다.
4. 인천상륙작전과 38도선 회복
북한군은 1950.8월부터 9월 중순까지 국군과 유엔군을 낙동강 이남지역으로 몰아붙이며 최후의 공세를 계속했다. 그러나 전반적인 전황은 반대로 국군과 유엔군이 유리한 국면으로 돌아섰다. 이유는 북한군은 유엔 공군의 끝임없는 후방지역 보급시설 파괴로 병력의 증원이나 보급물자를 적시적으로 전선으로 보내는데 한계에 봉착했다. 결국 모든 것이 야간을 이용한 보급대를 편성하여 운반하는 것이 유일한 수단이 되고 있었다.
반면에 국군과 유엔군은 미 본토로부터 막대한 장비 및 물자들과 자유우방국가들의 파병 병력이 속속 도착하면서 전투력의 우위를 점해갔다.
이러는 사이에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원수는 전세를 결정적으로 역전시킬 반격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1950.9월 15일 인찬상륙작전이 진행되었다.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여 상륙지역으로는 어렵다는 여러 평가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확신을 가지고 밀어붙여 결국 대승을 거두게 된다. 전투역사상 유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승이었다.
이에 따라 낙동강 전선에 투입딘 북한군 13개 사단은 주력의 후방이 차단되어 국군 과 유엔군의 낙동강 전선에서의 반격작전에 전열이 붕괴되어 버렸다. 이어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국군과 유엔군은 9월말 38도선 까지 진출하여 불과 15일만에 전섡을 전쟁이전 상태로 회복시켰다. 그러나 한국 국민의 여망과 한국 정부의 남과 북이 합쳐진 통일정부를 열망하는 불길이 타올라 결국 유엔군은 한중, 한소 국경지대로의 진격을 명하게 된다.
5. 38선 돌파와 북진
1950년 10월 1일, 동해안 양양지역에서 국군 제3사단과 수도사단이 최초로 38선을 돌파한 후 북진을 시작했다. 이어서 10월 9일 서부지역에서도 유앤군이 38선을 돌파했다.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작전은 10월 19일 평양을 탈환(국6,국1,국7사가 거의 동시에 평양입성)하게 된다. 이어서 국군은 10월 26일에는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압록강의 초산에 입성하여 그 유명한 수통에 압록강 물을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게 된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동부전선에서도 미 제10군단 소속 미 제7사단이 헤산진에 들어가고, 미 제1해병사단이 장진호 일대로 진출했다. 국군도 수도사단이 동해안을 따라 청진 일원까지 진출하고 내륙으로 진출하는 제3사단이 헤산진을 미군으로부터 인수받고, 합수-백암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추수감사절 공세가 시작되는 1950년 10월 25일 이후 중공군이 갑작스레 한번도 북쪽에 나타나 인해전술로 밀어 붙혀지면서 제1차 제2차 공세로 국군과 유엔군은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며 다시 38선 으로 축차적인 철수를 하게 된다.
6. 중공군 참전과 유엔군의 철수
이미 중공군은 김일성의 요청으로 1950년 10월 19일을 전후하여 신의주와 만포진 일대로 압록강을 넘어 조선땅에 들어왔다. 그들은 철저히 위장하여 유엔 공군의 항공 정찰에 식별되지 않고, 서부전선에는 제13병단이 동부전선 장진호 일원에는 제9병단이 은밀기동으로 산악지대로 들어와 미 제1군단과 국군 제2군단의 진출을, 그 동쪽은 북한군 제4군단과 5군단이 후퇴하는 병력을 추수려 제한된 병력과 장비로 국군의 진출을 기다렸다.
[유엔군의 10월 25일 추수감사절 공세와 중공군의 제1차 공격]
결국 서부전선의 온정과 운산지역에서 국군 제1사단. 국군 제6사단. 미 제1기병사단이 그 우측 희천에서는 국군 제8사단이 중공군의 제 1차공세로 유엔군과 국군의 추수감사절 공세는 난관에 부딪치며 포위되어 절대적인 피해를 입고 철수를 단행한다.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와 중공군의 제2차 공격]
또한 증원하기 위해 청천강상으로 진출한 미 제2사단과 터키여단, 국군 제7사단이 군우리 일대에서 대량 피해를, 덕원 일대에서 국군 제8사단이 대량 피해를 입고 12월 4일은 평양선으로, 12월 중순에는 38도선 북방까지, 12월 말에는 임진강-연천-춘천- 북방-양양을 연하는 38도선 부근으로 철수하여 방어선을 형성한다.
한편 동부전선에서는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이 중공군에게 퇴로를 차단당하게 되는 국면에서 장진호와 청진 북방에서 흥남으로 철수를 개시하여, 12월 14일부터 12월 24일 간에 부산과 묵호 등지로 해상철수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청천강을 넘어온 중공군은 평양을 탈환하고 제13병단은 12월 하순 개성-철원 북방까지 진출하였다. 그리고 중공군 제9병단은 장진호-함흥 축선에서 미 제1해병사단과 유례없는 혈전을 벌였으나, 무려 50%가 넘는 전상자가 발생하고 혹독한 추위로 인한 동상환자와 보급이 제대로 되지않아 굶주림으로 전투력을 상실하여 무려 3개월간 재정비를 해야만 했다. 그들이 다시 전선에 모습을 보인 것은 '51년도 3월말 부터다.
그 대신 북한군 제3군단과 5군단이 국군 제1군단을 추격하면서, 제1군단이 해상철수를 완료한 이후에는 국군과 유엔군이 진격간 남한지여과 북한의 산악지역으로 숨어들은 제2전선부대인 제2군단이 동부전선으로 남하하여 38도선 북방에 전개하게 된다.
1950년 12월 하순 38도선 북방에 전개를 완료한 중공군과 북한군은 12월 31일 기해 그들의 제3차공세인 신정공세를 감행히여 38도선을 돌파하게 되며 국군과 유엔군은 '51. 1.4일 다시 서울을 그들에게 내어주고 평택-원주-삼척 즉 37도선까지 축차철수한 당므 전열을 가담듬어 재반격작전에 돌입하게 된다.
제 2절 양측의 전쟁지도 및 작전개황
1.양측의 상황 및 작전 개황
1950년 12월 31일 공산군은 주공을 철원-의정부-서울 축선으로 지향하고, 화천-춘천-원주 축선을 조공으로 지향하여 38도선을 돌파하는 제3차 공세를 개시하였다. 공산군은 이러한 공세에 앞서 남한에서 활동중인 제2전선부대들을 규합하여 유엔군과 국군의 후방을 교란함으로써 전후방을 동시에 대비함으로써 전투력을 분산하게 유도하였다.
['51.1.4후퇴와 중공군 재3차공세]
결국 유엔군과 국군은 38도선을 포기하고 철수를 감행하여 겨룩 두 번째로 수도 서울을 적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바로 '51.1.4후퇴다. 유엔군은 '51.1.7에는 수원-여주-강릉을 연하는 선까지 후퇴하게 되며, '51.1.6~1.12일간에는 원주 좌측방 원주-충주간 도로 좌우측 산악지대에서는 미 제2사단(프랑스 대대 ,네덜란드 대대 배속)이 군우리에서 패한 쓰라린 피해를 북한군 제5군단(적12사단은 낙동강 전투까지 참여한 최정예부대도 있었음)에게 그대로 되갚는 승리(작전 기간 중 1일 평균 1,000명살상됨)를 하고 반면에 중공군은 더이상 남하하지 못하고 그 동안의 병력과 장비의 손실을 보충하기 위한 부대보충을 위한 정비에 들어갔다.
[위력수색작전-썬더볼트작전-라운드업작전-킬러작전-리퍼작전]
이와같이 중공군의 공격역량이 한계점에 다다른 것을 간파한 국군 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배치와 장차의 기도 등을 탐색하기 위하여 제한된 위력수색작전(1.15~1.22)을 미 제1군단 지역은 1개 연대전투단이 수원까지 진출하였다. 제9군단 지역은 1개 대대전투단이 실시하여 중공군이 수원-여주 이남 지역에는 소규모 부대만이 배치되었음을 파악한다.
이어서 유엔군은 파괴적인 위력수색을 위해 썬더볼트 작전이라 칭하고 '51.1.25일을 기해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이 미군 1개 사단과 필요시 국군 1개 연대를 추가로 투입하여 한강선까지 수색작전을 펼치도록 한다. 미 제1기병사단이 1월 22일 수원-여주선까지 진출했다. 일제히 반격작전으로 돌입한 유엔군의 작전주안은 지역확보 보다는 공산군 부대의 격멸에 두고 축차적이며 협조된 작전을 전개하였다.
[라운드업 작전과 중공군 제4차 공세(2월 공세)]
이렇게 하여 식별된 중공군을 홍천에서 포위섬멸하기 위해 라운드업 작전(51.2.5~10)을 계획하여 유앤군과 국군이 한강 남안-횡성 선에 이르렀을 때에 공산군은 다시 중공군 제4차 공세(2.11~18)로 횡성, 지평리,원주일대에서 격전을 벌여, 횡성에서는 국군 제8사단과 5사단. 3사단이 막대한 피해를 입고 원주 후방으로 밀리게 된다. 지평리에서는 미 제2사단 23연대와 프랑스 군대가 중공군 제39군 예하 3개 사단의 공격을 받았으나 제대로된 진지에서 적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고 사수하게 된다.
[중동부 지역의 킬러작전(2.21~3.4)]
미 제8군사령관은 공산군의 2월공세가 불과 수일 만에 격퇴되고 유엔군이 다시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자, 적에게 새로운 공격을 개시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않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제천 북쪽 부근에 돌파구를 형성한 적을 포위 섬멸하기 위하여 미 제9군단은 원주-횡성-홍천 도로를 따라, 미 제10군단은 제천-영월-평창- 도로를 따라 공격하도록 하는 하여 2월 21일 공격이 시작된다. 이 작전으로 미 제9군단이 이상 기온으로 인한 고온현상으로 얼어붙은 땅이 녹아 내리고, 산사태가 발생하는 등의 악조건 속(제9군단장 무어 중장 헬기 사고로 북한강 탁류에서 전사)에서 횡성을 미 제1해병사단이 3월 4일 점령한다.
미 제10군단은 강림-안흥-봉화산 진출위해 2월 21일 우전방에 미 제7사단이 주공으로 영월-평창 도로를 다라 공격하고, 좌전방 국군 제3사단이 조공으로, 원주-횡성 축선으로 공격하는 미 제9군단 미 제1해병1사단의 우측방을 엄호하였다.적의 저항과 지형적 여건으로 교착상태에 빠진다. 제3사단의 우전방 미 제2사단이 원주-방림리 도로 전방의 고지를 공격하다 돈좌되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히 5일밤 북한군이 진지를 버리고 철수하여 공격제대들은 공격을 재개하여 7일 원주-방림도로의 감제고지를 점령목표선인 아리조나선으로 진출한다. 이후 사단은 국군 제3군단으로 복귀하게 되어 방어진지를 미 제2사단 제23연대에 인계하고 마차리-정선 일대로 철수하였다.
국군 제3군단은 태백산맥 서쪽 산악지대를 공격하게 되는데 오대산을 중심으로 동쪽은 수도사단이, 서쪽은 국군 제7사단이 공격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제9사단은 예비로 송계리에 집결하고 있었다.
2월 25일, 군단은 좌전방 미 제10군 공격을 엄호하기 위하여 좌전방 제7사단으로 평창-창동리 도로를 따라 공격하고, 우전방 수도사단은 제26연대가 횡계리에서 사단의 후방을 엄호하도록 하고, 제1연대를 강릉에 배치하여 방어진지를 강화하게 하였다. 수도사단은 좌인접의 미 제7사단의 진출을 위해 횡계리에 대기중인 제1기갑연대를 속사리로 진출시켰다.
그러나 5일간이나 계속된 폭설로 인하여 대관령-횡계리-구산리 간의 도로가 차단됨으로서 지연되고, 3월 1일에 이르러서야 공격이 진행되었다.
결국 '51.2.21~3.6일까지 진행된 킬러작전은 미 제9, 미 제10군은 횡성-평창의 목표선까지 도달하였으나 목표선인 아리조나선 이남의 적을 구축한다는 당초 목표는 완전하게 달성하지 못했다.
[중부지역 절단작전, 리퍼작전(3.7-3.24)]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2월공세를 분쇄하고, 격멸작전으로 벌여 1951년 3월 초에는 한강남안-횡성-강릉을 잇는 선까지 진출하여 일직선으로 연결된 방어선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수도 서울이적의 수중에 있는 시점에서 서울 재수복작전을 위해 작전지역 중앙에 대돌파구를 만들어 적을 동서로 분리시킨 후에 서울을 양익 포위하여 탈환하는 작전을 수립하게 된다. 따라서 이번 작전을 전선 절단과 분리라는 작전 목적을 고려하여 전선 절단작전이라 명명하였다.
미 제8군사령관은 이 작전에 전 군단이 참여하되, 중부의 미 제9군단이 주축을 이루어 서울 동쪽의 덕소-가평-춘천북방-한계를 연하는 목표선(아이다호선)까지 진출하여 적을 양단함은 물론 적의 병력과 물자 비축장소를 판단되는 춘천과 홍천을 점령함으로서 동측으로부터 수도권 지역에 대한 압력을 가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여전하게 중공군의 공격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부대간의 협조체계가 대단히 중요하게 됨으로써 제8군사령관은 주공집단에 통제 목적을 두고 3개의 통제선을 선정하였다.
첫 번째 통제선은 알바니선으로 미 제1,미 제9, 미 제10군단 전방의 8~20km 북쪽의 양수리-양덕원리-노천리-태기산-속사리를 연하여 설정한다. 이 선을 통하여 미 제9군단이 홍천을 통제하게 하였다
두 번째 통제선은 버팔로선으로 미 제1, 미 제9군단에만 설정된 선으로 미금리-진벌리-홍천 북쪽-한계리를 연하여 설정되었다.
이 선을 통하여 미 제25사단이 버팔로선까지 진격하여 서울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중공군에 대한 포위망을 확대하는 임무가 부여되고, 제9군단은 홍천이 주 목표였다.
세 번째 통제선인 카이로선은 미 제9군단에 국한하여 설정되었다. 가평-춘천 남쪽-한계 북쪽을 연하는 선으로 제9군단은 춘천을 목표로 계속 공격할 계획이었다. 춘천은 차후공격묙표인 아이다호선의 최종 목표지점이었다.
네 번째 통제선은 아이다호선으로 제9군단 지역에 설정된 선으로 가평-춘천북방-한계북방-주문진에 이르는 선이다.
한편 미 제10군단의 우인접 국군 제3군단은 산악지역인 운두령-황병산을 공격하고, 이미 주문진에서 연곡천을 따라 설정된 최종 목표인 아이다호 선으로 진출한 국군 제1군단은 점령주인 방어진지를 강화하도록 하였다.
1951.3월 7일 개시된 리퍼작전은 주 목표인 미 제9군단이 목동리-춘천북쪽-내평리-한계를 연하는 아이다호선을 진격하여 홍천과 춘천을 탈환하는 것이었다. 미 제9군단은 4개 사단으로 병진공격하여, 좌전바에 미 제24사단(국군 제6-19연대 배속)이 용문산으로, 중앙의 미 제1기병사단이(배속:영 27여단)과 국군 제6사단이 29번도로 서쪽의 홍천강 남쪽 산악지대로, 우전방 미 제1해병사다이 홍천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그리고 대구에서 훈련 중인 제187공수연대가 의명 제9군단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우여곡절끝에 미 제9군단은 3월 21일 미 제1기병사단의 특수임무부대가 춘천시내로 진입하였다가 적의 역습을 우려하여 카이로 선으로 후퇴하고, 22일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가 저항없이 춘천시내에 진입하였다.
한편 군단의 우익인 미 제1해병사단은 18일 동부전선의 여량리에서 사단으로 배속 전환된 국군 제1해병연대가 사단의 가장 험준한 지역을 공격하여 24일 홍천 북방 가리산을 확보한다.
[켄사스선, 일명 휴전선. 38선)]
국군과 유엔군은 3월 15일을 기해 1.4후퇴 이후 70일 만에다시 서울을 탈환하였으며 이 여세로 전진을 게속하여 3월 말에는 38도선을 또 다시 회복하였다. 이때, 유엔군은 38도선 방어에 유리한 지역으로서 일명 캔사스선이라 불리는 임진강-영평천-화천저수지-남애리를 연하는 요지를 점령하였고, 캔사스선을 발판으로 중부지역에서는 외이오밍선으로 불리는철원-금화로 다시 진격을 계속하였다.
[중공군 제5차공세(춘계공세), '51.4월공세(1차). 5월 공세(2차)]
이때, 중공군은 다섯 번째 공세가 되는 춘게공세를 개시하였다. 이 공세는 중공군이 6.25전쟁에 참전한 이래 가장 최대규모의 병력이 동원된 마지막 공세이기도 하다. 당시 중공군의 가용병력은 3개 병단 11개 군단 35개 사단 규모였다. 중공군은 이 병력과 북한군을 총동원하여 4월(4.22-30)과 5월(5.16-22) 두 차례에 걸쳐 인해전술로 총공세를 취하였다.
4월에는 서부전선(개성-화천)에, 5월에는 동부전선(양구-인제)에 집중하였다.
한편 국군과 유엔군도 역시 가용전력을 총동원하여 중공군의 공세에 대응하였으며, 그 결과 공산군은 유엔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큰손실을 입고 구파발-홍천-하진부리-강릉을 연하는 선에서 공격을 저지당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공산군의 대규모 공세를 저지하는데 성공하자, 바로 반격작잔을로 돌입하여 5월 말에는 세 번째로 38선을 회보하고, 6월 15일에는 문산-연천-철원-화천-간성에 이르는 주요 지역을 점령한 다음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한다(캔사스선). 이 당시에 유엔군이 공격을 중단하고 방어선을구축한 배경에는 미국의 정치적인 고려상황이 작용했기 대문이다. 미국은 원래 전쟁전의 상태로 휴전을 모색하려 하였다.
반면에 중공군이 방어로 전환하게된 배경은 춘계공세에서 치명적인 인명손실로 급격히 전력이 약화되었기 대문이다. 이때부터 전선은 고착화 되어, 전투는 국지전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휴전 협상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고 심리적읹주도권을 쟁탈하기 위한 소모전만 반복된다.
2. 중공군의 의도 및 작전수행
1950년 12월 말을 기준으로 분석할 때 제2차 공세에 투입되었던 중궁군 제9병단은 장진호 전투에서 입은 치명적인 인원손실로 함흥부근에서 재편성 중에 있었으며, 38선 부근까지 진출한 제13병단도 2차에 걸친 동계공세에서 많은 손실을 입고 탄약을 비롯한 보급 부족에 직면해 있었다. 도한 북한군 역시 아직 재편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중공군은 제3차 공세를 위한 작전계획을 수립하는 단계에서, 38선 돌파를 놓고 내부적으로 중국 정치지도부와 격론을 벌였다. 제3차 공세를 완료한 싯점에서는 38선 이남으로 진출 강행을 놓고 북한지도부 및 소련 군사고문단과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중공군 사령관이며 조중 연합군 시령관인 팽덕회는 1950년 12월 8일 모택동에게 38선을 넘지 말고 충분한 준비를 한 후에 다음 해인 1951년 봄에 공세를 재개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이 당시에 모택동은 그동안 제1,2차 공세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면서 한반도에서 미군을 영구히 축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이번 기회에 대거 유엔군을 섬멸하여 주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데 매우 좋은 기회라고 주장하면서 작전 목표를 확대하여 38선을 돌파하여 서울을점령하도록 결심하였다.
이 무렵 북한의 김일성도 유엔군이 38도선 방어선을 강화 하기전에 전선 동부의 산악지형을 이용하여 방어가 약한 전투지경선 부근으로 침투한 후 후방에 가역한 제2전선을 깊숙이 형성하고, 중서부전선의 중공군이 주저항선을 돌파하면 이들과 연결작전을 실시하녀 포위망을 구축한 후 섬멸하라고 강조하였다.
제3차 공세가 종료된 직후 팽덕회는 1951년 1월 8일까지 유엔군을 37도선 부근의 평택-안성-제천-삼척선 까지 축출하였다고 보고, 유엔군이 중공군을 깊숙하게 끌여들인 후에 어딘가에 상륙작전을 기도할 것이라 판단하고 더 이상의 진출을 중지시킨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엔군이 반격적전(썬더볼트 작전-라운드업 작전-리퍼작전)을 전개하지 곧이어 제4차 공세를 개시하였다. 공산군은 서부전선에는 일부 부대로 유엔군의 전진을 견제하고, 일부는 한강 남안에 교두보를 화보하는 한편, 주력을 동부전선에 집결시켜 유엔군을 종심깊이 유인한 다음 공세로 전환한다는 전략적 기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공세를 실시한 공산군은 동부전선에서 진행된 유엔군의 근접항공 엄호하 축차적인 지연작전과 지평리에서 미 제2사단의고립방어 전투에서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는다, 다만 횡성 삼마치 일대에서 국군 제8.5.3사단을 무력화시키는 성공을 거두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숫적 우세를 이용한 작전목표의 달성이 저지되었고, 심리적인 타격으로 사기가 저하되어 공격개시 1주일 만에 공세작전을 종료하고 북으로 철수한다.
유엔군의 38선 북쪽으로 반격작전을 펼치는 동안 중공군은 제4차 공세의 참패로 실추된 위신을 만회하고자 대규모 공세작전을 계획한다. 중공군의 춘계공세다. 중공군은 4월에 춘계 1차 공세를 통하여 서부전선의 문산축선과 중서부 전선의 사창리에서 부분적인 유엔군과 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오히려 아군의 압도적인 화력전투에 큰 인명피해를 입고 공세를 중단한다.
그러다 공산군은 4월 말경 중동부 전선에 국군의 돌출부가 식별되자 4월공세시 당한 참패를 설욕하고자 대규모 타격을 가하기 위해 현리 일대의 국군 4개사단을 향해 제9병단을 주공으로 좌익(양구-인제)으로 상남리-속사리, 한계-풍암리로 우회시키고, 북한군 제2,제5군단을우익으로 현리 동쪽과 속사리 방향으로 기동시킴으로써 다중의 양익 포위망을 형성하기로 하였다.
공산군은 이 춘계공세(51.4.5 2차례)에서, 6.25전쟁에 중공군이 참전한 전역에서 가장 최대 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중동부전선의 속사리-하진부리선까지 돌파구를 화장하는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유엔군의 우세한 화력에 압도당하여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한 채 심대한 인적 손실을 입고 다시 38선 이북으로 물러난 이후 다시는 내려오지 않았다.
3. 국군과 유엔군의 의도 및 작전수행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제1.2차 공세로 전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자 전쟁지도 방향을 재정립하는 것이 필요했다. 1950년 말 공산군의 제3차 공격으로 인해 38도선까지 밀리게 됨으로써 이제 철군이냐 확전이냐하는 전략적 선택을 해야만 했고, 아울러 한국정부의 제주도 이전 계획을 수립하는등 향후 대응전략 마련에 부심하였다. 이때 미국은 중공의 참전에 대한 대응전략의 하나로 핵무기 사용 문제를 적극적으로 검토하였고, 이는 즉각적인 국제적 반향을 일으켰으며, 특히 영국의 수상이 워싱턴 방문으로 연결되었다. 미.영 영수회담 결과 유엔군의 작전 빙침은 대체로 전전 상태인 38도선을 기준으로 전쟁을 종결짓는 것으로 방향을 잡아갔다.이러한 방향은 한국정부의 정책과는 다른 것이었다.
당시 유엔에서 활동 중인 임병직 외무장관은 휴전무드가 조성되는 것을 간파하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유엔 참전국들의 분위기를 보고헸고, 이 대통령은 장 대사에게 이 묹제와 관련된 대미 교섭을 수차례 지시했다.
한편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에서 철수하지만,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미 합참에 "중공군의 신정공세로 아군이 잠시 어려운 상황에 처하긴 하였으나 미군은 아직 중공군을 대적할 수 있는 충분한 전력을 확보 하고 있다"고 방어에 대한 자신감을 피력하였다. 이에 따라 공산군이 제3차 공세를 멈추고 추격을 중단하자 유엔군은 1951년 1월 하순부터 접적을 유지한 가운데 적정을 파악하기 위하여 방어선 전방으로 정찰대를 파견하여 울프하운드 작전을 전개하였고, 곧이어 라운드업 작전을 전개하여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에 대응하여 공산군이 제4차공세, 일명 구정공세('51.2월)를 감행했으나 지평리전투에서 심대한 피해를 입고 철수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1년 3월 15일에 "한국문제를 정치와 군사 두 노선으로 구분하여 단계적으로 해결하되, 정치적으로는 통일국가를 이룩하고 군사적으로는 침략을 격퇴하고 평화를 회복해야 한다"는 방침을 정하였다. 이대 유엔군의 우선적 괸심은 공산군의 공세준비가 명백해 지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양호한 방어진지를 구축할 수 있는 중요지형을 점령하는 것에 있었다.이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은 임진강 남쪽 제방을 연하여 동쪽으로 뻗어 화천저수지로 연결한 후 동해안의 양양으로 이어지는 캔사스선을 진출 목표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38도선으로 진출하는 부대가 이 선으로 진격하는 요철작전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국군과 유엔군은 계속하여 다음 목표를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이 철의 삼각지대를 통제하는데 두고 이를 달상하기 의하여 전곡-철원-김화-화천저수지를 잇는 와이오밍선을 설정, 철원-김화를 연하는 지역까지 공격하는 불굴작전을 펼친다.
한편 유엔에서는 유엔군의 반격작전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자 그동안 거론되었던 철군 문제 논의를 일단락하고 다시 휴전에 관한 전쟁지도 전략을 다닥도로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영국을 비롯한 대다수 유엔 회원국들은 군사력으로 38도선을 넘기 전에 평화적인 협상을 통해 한반도 묹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강력히 지지하였다. 이 무렵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제5차 공세로 인해 방어진지 일부가 돌파되어 30~65KM를 물러나는 위기에 봉착했으나 강력한 화력과 기동력으로 공산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반격작전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이때 특히 국군이 용문산과 대관령에서 , 그리고 미군이 벙커고지와 운두령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쟁취하였다. 공산군의 5차 공세를 격퇴한 후 지도부는차후 작전 방침을 더욱 활발하게 논의 하였으며, 그 결과 5월 17일에 최종 전쟁 전략을 확정하였다. 이때 채택된 전략의 핵심 내용은 작전의 목표를 군사와 정치 둘로 구분하여 한반도 통일문제는 군사적 수단과는 별도로 정치적 수단에 의거 계속 추구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과 전략에 따라 6.25전쟁은 개전 1년 만에 전선이 교착되었고, 교착된 전선에서의 열전과 협상테이블에서의 설전이 교차하는 새로운 양상의 전쟁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제 2 장 유엔군과 공산군의 전쟁지도
제 1절 국내외 정세
1. 국제 정세의 추이
가. 유엔 참전국의 동향
1950년 말에 접어들면서 미국은 당시 6.25전쟁 참전 중인 14개국 외에 다른 류렌회원국들의 참전을 확대시킬 필요성을 절감하고 적극적인 노력을 경주하였다. 1951년 2월 23일 미 국무장관 애치슨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로부터 각각 1개 대대 규모씩 증원하기 위해 접촉 중이며, 캐나다에는 최초 제의했던 여단급 규모의 파병인원을 요구할 것임을 국방부에 통보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나 터키에도 자발적인 파견을 장려할 것이며, 이미 파병을 제의한 우루과이, 에디오피아, 쿠바와도 군사기술적인 지원문제를 협의하고 있다고 하였다.
반면 캐나다 정부는 2월21일 지원부대를 갖춘 2개 대대를 추가로 파병할 것이라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리고 노르웨이 정부도 3월 9일 유엔사무총장에게 야전병원의 파견 의사를 통보하였고, 이들은 5월 25일까지는 파병준비를 완료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같은 상ㅎ황에서 미 국방부는 3월 31일 국무부에 유엔회원국의 더 많은 참여가 팔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이는 미군으로 하여근ㅁ 휴식을 취하고재정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할 뿐만아니라 다른 전략적 지역에 부대를 재배치할 수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샆징적인 지원보다 실질적인 지원을 강조하였다.
이에 대항여 미 국무부는 미 합동참모부가 타이완 등 특별히 참전을 배제한 국가를 제외한 모든 구가에 대하여 참전 가능성을 검토하였지만 더이상 가능ㅇ성이 없다고 국방부에 통보하였다.
이때 영국은 서유럽의 안보를 우선시 하여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유엔 회원국들이 추가적인 지원을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오스트레일리아는 4월 28일 총선 이후에야 논의가 가능하였으며, 뉴질랜드는 파벼에 앞서 다른 영 연방국가들과 협의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터키는 미국의 충분한 안보공약을 , 그리스는 추가적인 제정원조를 한다면 파병 가능성이 있었다.
한편 1950년 12월에 들ㅇ어서면서 유엔 회원국들 중 많은 서방국가들이 미국의 전쟁수행 정책에 회의를 갖거나비판ㅇ하는 경우가 빈번해지고 있었다. 이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소련 댚표가 복귀하여 거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서방국가들은 미국이 가장 어려운 시기와 조건에서 서유렵 국가들의 극동의 전쟁에 개입시키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하였다. 이들의 입장은 6.25전쟁을 중국지역 등으로 확대하지 않고 한반도로 국지화하면서 현제 진행 중인 미국의 군사작전을 충실히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영국은 6.25전쟁에서 서방국가들이 중국과의 전쟁에 휩싸여 군사력을 분산시키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소련을 유리하게 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심지어 영국의 여론은 전쟁을 평화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중국을 유엔에 가입시켜야 한다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이에 영국의 수상 애틀리는 한국이 전략적 가치가 없기 때문에 극동에 과도한 노력을 기울이는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고, 가능한 중국 정부와 접촉해 중국의 위기감을 해소시켜 줄 방안을 강구하기도 했다.그는 미국 정부가 영국의 입장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는다고 비판했으며. 유엔군이 만주지역에 대해 군사 활동을 하는 것에 적극적으로 반대한다고 강조 했다.
이 무렵 유엔에서는 중국정부와의 물밑 협상을 추진하고 있었다. 유엔이 중국과 협상을 진행시킬 수 있었던 것은 유엔 폴란드 대표의 의한 것이었다. 폴란드 대표는 유엔에서 압록강 이남 지역 60KM 깊이의 완충지대를 복한이 통치하고 미 제7함대가 타이완 해협에서 철수하여 장제스에 대한 군사지원을 종료한다면, 중국이 한국으로부터의 군대철수를 논의할 것이다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서방국가들은 중국과 전쟁을 피하느냐, 아니면 서유럽 안보를 보장받기 위해 한반도에서 미국의 정책을 지지해야 하느냐의 정책적 판단의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었다. 영국의 외상 베빈도 한국문제에 깊이 개입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소련 등 공산주의자들에게 더욱 유리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거듭 경고 하였다.
나. 유엔의 평화제의와 공산측의 반응
1) 유엔의 휴전 논의
유엔에서는 중공군 참전무렵부터 전쟁이 확대되지 않도록 몇몇 회원국 대표들이 노력하고 있었다. 그 후 1950년 12월 5일 인도를 중심으로 아시아-아랍위원회 13개국이 중국과 북한 당국에 38도선을 넘지 않도록 요청했고, 38도선에서의 휴전에 관한 쌍방의 의사를 타진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과 영국은 동의했으나 중국과 북한은 직접적인 반응이 없었다.
당시 작전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공산군은 유엔의 제안 이상으로 큰 정치적 목적 달성을 기대하고 있었다. 외상 주을래를 통하여 중국은 한국으로부터의 모든 외국군 철수, 타이완 해협과 타이완 지역으로부터 미군 철수, 한국 문제의 한국민족에 의한 해결, 중국 대표의 유엔 참가와 타이완 정부의 유엔 탈퇴, 일본과의 평화협정 체결 준비를 위한 4대 강국 외무장관 회의 소집 등이었다.
이에 앞서 주을래는 1950년 12월 7일 주중 대사 로신을 통해 중국의 조건을 소련에 문의 하였으며 , 당일 소련의 스탈린으로부터 답신을 받았다. 즉 스탈린은 "우리는 한국에서 군사행동 중지에 관하여 귀하가 제시한 조건들에 완전히 동의합니다. 우리는 이 조건들이 완저히 충족되지 않는 한 군사행동은 중지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는 미국의 첩자국이라 할 수 있는 세 국가의 대표들에게 지나치게 솔직하거나 우려의 계획을 미리 보여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중략)
이와같이 유엔의 의사 타진에 관한 중국의 반응은 실질적으로 전쟁지도를 주도하고 있는 소련에 의해 포장되어 나타났다. 어쨌든 그 조건은 실제 유엔군측이 수용할 수 없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었다. 중국의 전략목표는 1950년 12월 4일 팽덕회에게 보낸 모택동의 견해와 의견서에 나타난 바와 같이 , 유엔군의 축출에 있었고, 휴전도 이 목표 달성을 전제로 하고 있었기 대문에 38도선에서 휴전을 모색하려는 유엔의 제안 내용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모택동은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적군은 정전을 요구할 것이다. 이때 미 제국주의는 조선에서의 철수를 반드시 인정해야 하는데, 우선은 38선 이남까지 철수해야만 우리는 정전회담에 응할 수 있다. 가장 좋은 것은 우리가 평양으 수중에 넣을 뿐만 아니라 서울도 수복하는 것이며 , 중요한 것은 적을 섬멸하는 것이다. 먼저 남조선군을 섬멸시켜야 미 제국주의 철수를 촉진시키는 데에 더욱 큰 힘이 될 것이다"라고 하여 내부적으로 유엔 측의 제안을 수용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2) 유엔 3인위원회의 휴전안 제의
공산군 측이 유엔의 휴전안을 거부하였으나, 유엔 내 아시아-아랍위원회는 유엔에서 공산군 측을 이해 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 하였다. '50.12. 12일 다시 정식으로 휴전에 중점을 둔 결의안을 총회에 제출하였다. 그것은 한국의 휴전을 추진할 3인위원회(이란.캐나다.인도)와 평화회의 개최 등2개의 결의안이었다. 다음날 총회에서 3인위원회 설치안이 채택되었지만 , 그것으로서 유엔은 "선휴전, 후교섭"이라는 원칙을 확인하였다.
한편 미국은 3인위원회가 결의안을 총회에 성정한 동년 12월 11일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열어 내부적으로 휴전을 고려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휴전조건을 논의하였다. "그것은 유엔군에게 군사적 불이익을 부과하지 않고 정치적 양보를 내포하지 않아야 하며, 휴전에 관한 세부사항은 유엔군의 안전을학보하기 위하여 휴전을 수락하기 전에 협상해야 한다"는 원칙하에 구체화 되었다.
이때 미국의 입장과 조건은 38선을 휴전의 조건으로 하고 휴전을 위해서는 다른 문제가 전제 되어서는 안 되도록 "선휴전, 후교섭"이라는 원칙을 유엔의 정전안엥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미 합참도 처음으로 휴전에 관한 군사적 조건을 정식으로 검토하여 동년 12월 13일 [NSC 95]로 회람하엿다. 국무부가 이를 간략히 정리하여 동월 15일 유엔 3인위원회의 요청에 부응하는 형태로 휴전조건을 발표하였다. 여기에는 전 한반도에서 정전, 38선 부근을 남방경계선으로 한 20마일 폭의 비무장지대 설치, 부대 병력의 보강과 교대 및 장비 물자의 보충 금지, 전 한반도에 접근 가능한 유엔감시위원회의 설치, 일대일 원칙으로 포로교환 등을 포함하였다.
유엔총회의 결의에 따라 활동에 들어간 유엔 3인위원회(이란.인도.캐나다)는 휴전조건에 관한 미국의 조건을 받아내고, 이어 중국의 협조를 요청하였다. 즉 한국 전역에서의 군사행동 중지, 38도선에 약 20마일 비무장지대 설치, 모든 부대는 비무장지대 후방으로 철수, 유엔이 휴전조건 이행을 감시, 모든 병력 및 부대의 교대 증원을 즉시 중지, 포로를 1:1로 교환, 군대의 안전보장, 피난회의 이동, 비무장지대의 통제 등 제반규정 작성 등이었다.
3) 공산 측의 유엔제의 거부
1950년 12월 21일 중국은 자국의 참여 없이 취해진 모든 결의는 불법이라는 이유로 3인위원회의 제의도 거절하였다. 중국 내부자료에 의하면 당시 중국의 반응은 매우 복잡하엿다 한다. 조.중 연합군사령관 팽덕회는 계석 38선 이남으로 진격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고, 한반도에서 미군이 물러나리라는 북한 측의 판단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주을래에게 전보를 보내 3인위원회의 정전협정 대안을 거절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군사적 측면에서 진격을 중지하고 군대를 휴식시키자는 현지 지휘관의 주장은 지지하지만 최종적으로 정치적 판단에 따라 38선 이남으로 진격하도록 명령하였다.
유엔의 휴전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중공군과 북한군이 1950년 12월 31일 38선을 넘어 공격하자, 유엔 3인위원회는 이 싯점에 휴전과 관련된 어떠한 논의나 건의는 무용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 의견을 유엔총회에 보고하였다.
유엔 3인위원회는 중공군의 신정공세가 끝난 후 1951년 1월 11일 북경의 요구사항 중 일부를 충족시킬 수 있는 새로운 평화계획안을 작성하여 5단계를 거쳐 극동의 평화를 수립하도록 다시 제안하였다. 5단계 평화안의 핵심은 다음과 같았다.
가. 한국전쟁의 즉각 휴전
나. 평화를 축진하기 위한 후속조치 모색
다.한국으로부터 군사력의 철수와 더불어 한국국민이 자신들의 정부에 관한 희망을 표현할 수 있도록 적절한 장치 마련
라. 한국의 통일 및 그곳의 평화와 안전보장의 유지를 위한 잠정협정 체결
마. 극동문제, 타이완의 지위, 중국의 유엔대표권을 포함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미국,영구.소련.중국 대표를 포함한 적절한 기구의 설치 등이었다.
이 제안은 미국도 받아들이기 여려운 문제였지만 결국 미국은 받아들였고, 소련은 반대하는 가운데 유엔총회를 통과하여 중국에 통보되었다.
현지 지휘관인 팽덕회는 유엔의 제의를 이용할 수 있는 기회로 평가한 반면에 모택동은 승기를 잡은 상태에서 흥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으며, 미군이 반격을 개시하지 28일부로 공격을 명령하였다. 자신감에 차있던 모택동은 군사적으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나아가 그것은 소련의 기대에 충족되는것으로 판단하였다.
젅장의 주도권을 확보한 중국은 1월 17일 정치적 협상이 없는 휴전을 수락할 수 없다고 천명하고 협상의 댓가로 중국의 유엔가입, 타이완으로부터 미군의 철수 등 종전의입장을되풀이 하는 대안을 제출하였다.
중국의 거부는 이미 소련이 1월 11일 유엔에서 3인위원회의 건의안을 반대했으므로 다른 여지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모택동의 본심은 신정공세가 끝난 후 한반도 전체를 점령한다는 작전목표를 유지하였다.
소련의 스탈린은 미군의 전력소모를 목표로 하고 있었으므로 중국에 무기를 지원하고 모택동과 팽덕회를 독려하여 현재 제기된 유엔의 5단계 평화안을 중국이 거부하도록 하는데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에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은 중국이 유엔안을 완전히 거부했다고 선언하고 중국에 대하여 압력을 행사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진행시켰다. 미국은 중국에 대해 침략자 결의안 채택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 이때 제시된 침략자 결의안 내용은 1) 유엔이 단결하여 중국의 침략 사실을 인정, 2) 중국의 군사적 능력을 제한하기 위한 경제적인 규제 3) 유엔과 미국이 평화적인 해결의사를 가지고 있는 것 등으로 정리하였다. 1951. 1월 20일 유엔 미국 대표 오스틴은 유엔 총회에 침략자 결의안을 정식으로 상정했다.
그러자 서방의 영국등이 침략자 결의안의 집단작 조치가 맥아더 장군에게 새로운 전쟁확대 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를 나타냈다. 국무부는 결의안에 대해 국방부와 토의한 후 1월29일 일부 수정하여 2월 1일 총회에서 채택되었으며 이때 영국과 캐나다는 찬성했으나 인도는 반대하였다.
이제 미국은 중국이 유엔의 결의를 거부한 이상 침략자 결의의 채택으로 보다 외교면에서 중국에 대하여 압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어 교섭에 있어 유리한 입장을 확보했다.
미국은 중국이 휴전안에 반대하고 계속적인 공세를 취함으로써 한국에서 유엔군을 축출하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으며또 유엔에 대한 도전을 멈출 의사가 전혀 없다고 판단하고, 유엔 회원국들에게 중국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는 주장을 펼 수 있게 되었다.
2. 국내 정세의 추이
가. 정치. 경제적 동향
중공군의 개입과 2차에 걸친 공세로 전세는 뒤바뀌고 말았다. 정부는 중공군이 계속하여, 제3차 공세로 1.4후퇴로 서울에서 다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부산으로 수도를 옮겨 경남도청에 청사를 전시 중앙청으로 정하고 비상대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어 국가비상시에 대처하기 위하여 국민총력체제를 확인하는 한편 긴급 병력동원을 위한 여러가지 조치들을 강구한다.
정부는 이에 앞서 1950년 12월말 전국의각 국민들에게 시민증과 도민증을 발급하여 배부하여 적 오열(간첩)의 침투를 봉쇄하는데 진력하였고, 또 사전에 급박한 전황을 알림으로서 1,4후퇴시 주짐들을 안저하게 대피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그러나 1.4후퇴시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내려온 많은 피난민이 발생하여 당시 큰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정부는 당시 피난민을 대구.부산 등 도시에만 집중함으로서 주택난과 식량난을 야기하게 되자 제주도와 거제도 등 지방으로 분ㅅ한시키는데 주력하였고, 각지의 집단수용소에 수용하여 식량과 의류 등의 구호물자를 공급하기도 했다.
1951년 봄 치안상태가 어느정도 회복되자 국민 생활안정을 위해 4월까지 단계적으로 비상계엄을 해제하늕 조치가 이루어졌다. 1951년 3월 20일 국무원 공포령에 따라 4월 4일부터 지역별로 비상계엄이 해제되기 시작한다.
기간 중 경제상황은 해방 이후 가장 악화되어 심각한 국면에 보착하였다. 특히 인플레 현상은 국민생활을 크게 위협하는 수준이었다. 인플레의 원인은 생산위축과 정부의 심대한 재정지출에 있었다.이때 전비조달을 위한 재정적자는 부득이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시간이 갈수록 악화되어 51년도 6월말에 이르면 부산의 도매물가 지수는 개전당싱데 비해 30배까지 폭등하였으며 부산에서 백미 1두 시세가 13만 5천을 상회하였다.이에 반해 군인과 경찰의 봉급은 하사관과 순경의 겨우 겨우 2만원 남짓하여 1주일분의 잡비에도 미달하였다.
전국의식량은 수요의 80%가 외국미곡에 의존하는 실정이었으며, 절도범이 증가하고, 새로운 100원권 화페의 발생으로 화페교환이 4차에 걸쳐 실시되었는데 총 2,293억원이 발생되었는데 위폐가 1억6천만원이나 되어 유통질서의 혼란도 일어났다.
한편 이런와중에도 국회는 계속하여 부산에서 개원 중이었다. 51년도 4월 3일부터 4월 26일까지는 국정감사를 실시하여 당시에 국민의 불신을 고조시킨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사건을 적발하여 국회조사단의 현지 조사결과로 5월 14일 본회의에서 관련자를 엄중 처벌할 것을 결의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급기야 조병옥 내무, 김병로 법무, 신성모 국방 장관의 사표를 수리하게 된다.
이러다 보니 국회와 일반여론은 각료 자링에 역량과 신마을 겸비한 인물이 임명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당시의 여건상 그 기대치를 충족하기란 어려운 일이엇다. 따라서 국회와 정부간의 마찰이 첨예화 되엇으며 5월 9일에는 이시영 부통령이 갑자기 국정의 혼란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여 5월 15일 투표를 실시한 결과 야당 지도자인 김성수가 당선된다.'
이상과 같은 대립에서 정부를 지지하는 측과 야당을 지지하는 측의 대립은 더욱 촉진되자 이대통령은 대통ㄹㅇ 직선제와 양원제를 제의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상정하였으나 국회는 이 두가지를 부결시킴으로서 정쟁은 그칠 날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 미국정부의 휴전안이, 대한민국 주권 하에 완전한 자유통일을 지향하는 국민적 정서에 부힙되어 전국 방방곡곡에서 정전반대를 위한 국민궐기대회가 개최하게 된다. 이에 이승만 대통려은 미국과 유엔의 휴전정책에 대해 불만을 표명하고 한국정부의 반대입장을 분명히 천명하였다. 이로서 향후 휴전정책과 휴전 반대 입장은 유엔군사령부 및 미국정부와 한국정부와의
심각한 갈등으로 치달을 수 있는 위기를 예고한 것이었다.
나. 국민방위군 사건
1) 국민방위군 창설과 사건 발생
국민방위군 사건은 1950년 12월 17일 제2국민병을 소집한 날로부터 1951년 3월 31일 국민방위군 교육대를 실질적으로 해산하는 약 3개월, 105일 동안 국민방위군 장정들이 남쪽으로 이동, 수용, 훈련하는 과정에서 다수가 사망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국민방위군사령부와 예하 교육ㄷ대의 부실운영 및 방위군 간부들의 에산횡령과 군숲춤 부정처분 등으로 방위군 장병들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거나 질환을 갖게 되었고, 국회와 군 수사기관의 조사를 걸쳐 관련자 5명이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공개총살형에 처해진 사건이었다.
국민방위군 편성은 1950년 12월 말 전력증강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중공군 제2차 공세 직후인 동년 12월 중순 국민들의결의에도 불구하고 평양을 철수한 유엔군의 후퇴가 계속되자, 정부는 국가비상시에대처하기 위한 국민총력태세를 확립하는 한편, 중공군과 맞서 싸우려면 많은 병력이 필요한 것으로 판단하고, 소요병력을 조속히 동원할 목적으로 국민방위군을설치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동년 12월 21일 아래와 같이 같은 요지의 국민ㅁ방위군설치법을 제정하고 국민방위군을 편성하게 되었다.
가. 국민으로서 만 17세 이상 만 40세 미만의 남자는 지원에 의하여 국민바위군에 편입할 수 있다.
나. 국민방위군은 지역단위로 편성함을 원칙으로하되, 국방장관이 정하는 기관은 기관별로 편성할 수 있다
다. 전시 또는 사변에 즈음하여 군작전상 필요시에 병역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집단적으로 국민방위군을 소집할 수 았다.(부분 생략)
이에 따라 각 도시별로 소집된 제2국민병 장정들은 국민방위군 설치법에 따라 경상도와 제주도 지역에 설치된 52개 교육대로 분산 이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도시 지역에서 교육대가 있는 경상도로 이동하는 과정에 장정들은 소로나 산길을 통해 이동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1951년 극심한 추위와 장기간 행군에 따른 피로의 누적, 그리고 식량 부족으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더구나 각 교육대로 이송된 후에도 교육대의 수용시설의 미비 및 의료 약품 부족 등으로 많은 추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여기에 교육대 부실운영과 공금 횡령 등 방위군 간부들의 인제에 의한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하였다. 즉 교육대 장정들의 사상 발생은 주로 기아, 동상, 질병 등으로 야기 되었다. 이는 준비 부족과 부실 경영, 그리고 간부들의 예산 횡령과 전ㅇ용, 군수품 부정처분 등으로 인하여 식사와 의약품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2) 사건 처리 결과
1차 군법결과 김윤근 사령관에 대해 기소 각하, 윤익헌 부사령관은 징역 3년 6개월, 그리고 나머지 4명은 1년6개월등을 받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국민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자 결국 국방부 장관이 경질되고, 이시영 부통령도 사표를 제출하게 되었다. 결국 51년 6월 10일 재수사를 통한 7월 8일 결심 공판으로, 핵심간부인 김윤근. 윤익헌.박기환.강석환.박창원 등 5명이 사형이 기타는 무죄가 선고되었다. 결국 8월 13일 5명에 대한 사형이 대구 교외에서 총살형으로 처해졌다.
다. 거창사건
1) 사건의 발생
거창사거은 1951년 2월 8일~12일 공비토벌을 위해 출동한 육군 제11사단 제9연대 제3대대가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 주민 수백명이 공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주민들을 집단 처형한 사건이었다.
신원면 일대는 1950년 12월 초순부터 공비들이 출몰하여 경찰지서를 습격하고 경찰관을 살해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신원면 일대는 대부분 지역이 치안확보가 안되어 있는 상태였다. 당시 9개 동리 가운데 6개가 공비 주요 출몰지역이었고, 경찰이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경남 계엄사령ㅂ주에서는 이들 공비를 소탕하기 위하여 국군 제11사단 공비들을 토벌하도록 명령했다. 사단장은 예하 제9연대장(연대장 대리 오익경 중령)에게 1개 대대를 차출하여 거창 공비토벌작전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이에 제9연대 제3대대(한동섟 소령)는 51년 2월 5일 06시 거창군신원면 청연동에서부터 이동을 개시하였다. 대대가 2월 6일 이동을 개시하여 함양군 화촌리와 산청군 함양리에 각각 도착하였다.
그러자 산속에 은거하던 공비들이 다시 신원면으로 내려와 신원면지서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이 사건으로 경찰과 청년방위대원 10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을 입는 손실을 입었다.
제3대대는 신원면으로 복귀하여 6개 부락에서 공비와 내통 또는 도움을 준 인원을 선별하는 과정에 1,000여 명의 주민 중에서 군경 및 공무원 가족을 제외한 500여 명을 공비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총살하였다는 것이다.
2) 사건의 결과
거창사건의 결과로 국민의 반감이 고조되자, 이 사건의 관련자 전원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여 실형에 처하였으며 국방,내무,법무 등 3부 장관을 인책 해임시켰다.
제 2 절 공산군의 전쟁지도
1. 내부의 전략적 갈등
유엔군은 중공군의 2차 공세에 밀려 위기에 처하자 비밀리에 대한민국 정부의 이전 게획과 유엔군의 철수게획까지 수립하면서 중ㄱㅇ군의기도와 전선 상황의 추이에 초미의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 무렵 중공군은 유엔군의 판단과는 달리, 전력의 한계를 보이고 있었고 유엔군의 후퇴ㅐ를 철수의 징후로 보지 않고 자신들을 유인항여 격멸하기 위한전략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신정공세 당시에 장진호 지역으로 진입한 제9병단 예하의 12개 사단이 미 제1해병사단과의 동계전투에서 입은 치명적인 인원손실과 동상 등으로 전투력이 무력화 되어 함흥지역에서 무려 3개월 동안 재편성을 해야했다.
그리하여 신정공세시 중공군은 38선 돌파여부를 놓고 내부적으로 중국 정치지도부와 격론을 벌였으며, 북함 및 소련 군사고문단과도 갈등을 겪었다.
당시 중공군 지휘관인 팽덕회는 '50.12.8일 모택동과 중국 군사위원회에 동부전선 제9병단의 참상(미 제1해병사단의 화력전투로 엄청난 인원손실과 추위로 동상환자 발생 등 어려운 여건으로 전투력 발휘 제한)과 유엔군의 전투력 복원에 따라 현재와 같은 여건에서 계속 공격은 무리다라고 역설한다.
그러나 모택동은 미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할 절호의 기회라 역설하며 계속 공격을 요구하게 되고, 여기에 북한군의 김일성과 소련이 맞장구를 놓아 결국 신정공세는 개시되어 부분적인 성과는 내었으나 결과적으로 바로 유엔군의 위력수색과 라운드업 작전으로 이어져 다시 38선으로 밀리게 되면서 어려운 여건에 빠지게 된다.
2. 승리확대 전략
모택동은 현지 지휘관인 팽덕회의 건의에도 불구하고, 소련과 북한측의 입장을 고려하여 재차 38도선을 돌파하여 유엔군을 대량 살상할 것을 강조하게 된다.
이 명령에 의거 팽덕회는 "겨울동안 휴정한다'는 당초의 게획을 바꾸어 3차 공세를 결행하게 된다. 그러나 팽덕회는 38도선을 돌파하되 정황을 파악하여 주둔을 결정하며, 38도선 이북으로 후퇴할 필요가 있으면 철수하고, 적을 추격항여 남진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모택동도 '50.12.21일 이러한 팽덕회의 주장을 받아들여 "이 전역이 끝난 후 지원군 주력은 휴식과 정비에 유리한 지역까지 철수하여 한두 달 휴정해야 한다"고 하여 장거리 추격이나 전면 공격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만약 유엔군이 서울과 37도선 이북구역을 사수하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이 전선에서 물러나 대구, 부산 등 협소한 지역으로 철수할 경우 문제가 된다며 이에 대한 대비를 지시한다.
이에 따라 팽덕회는 실제 신정공세로 '51.1.8일까지 37도선 부근의 평택-안성-제천-삼척선까지 유엔군과 국군을 축출한다. 그러나 유엔군의병력을 대량으로 살상하지 못했고, 유엔군이 계획적으로 철수를 실시항여 중곤군을 깊숙히 유인하여 측방과 후방에서 상륙작전을 실시하려는 기도를 품고 있다고 판단하여 더 이상의 진격을 중단하게 된다.
이에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수원-홍천 선에서 공세를 중단하고 부대정비를 할 것이다라고 알렸다. 당시 중공군 입장에서는 게속 공격시 혹시나 6.25전쟁 초기단계처럼 낙동강선으로 밀려 낼려간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같은 반격을로 보급거리가 신장된 공산군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실수가 반복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중공군 신정공세는 미국을 압박하는 등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실제 중공군의 성공이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미군의 의도된 철수작전의 결과란 사실을 팽덕회는 잘 분석하고 있었다.그러므로 팽덕회는 서울을 잠령한 후 전과에 대한 지나친 선전을 하지 않도록 통제하였고, 소련장비의 투입 시기에 대해 재삼 확인하고 전역에 괴ㅏㄴ한 중앙군사위원회와 협의 하였다.
제 3 절 유엔군과 한국 정부의 전쟁지도
1. 유엔군의 전쟁지도
가. 유엔군의 신전략
1) 새로운 전략의 모색
유엔군은 1950년 말 공산군에 의해 38도선까지 밀리게 됨으로서 이제 "철군이냐, 확전이냐"라는 새로운 전략을 수립해야 했고, 아울러 한국정부의 제주도 이전 게획을 수립하는 등 전쟁의 대기로에 봉착하게 된다.
중공군의 신정공세로 중공군의 참전이 확인되자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발전하여 북한군의 격멸과 북한군 응징을 목표로 전쟁을 지도해 온 유엔군 측에게 세로운 상황에 대한 지도노선의 수립이 요구되었다. 이에 따라 유엔군은 '50.12월 부터 미 합동참모본부와 유엔군사령부를 중심으로 전쟁을 중공으로까지 확대하자는 주장, 38도선에서 휴전하자는 주장, 그리고 불가피한 선택으로 한반동에서 철수 주장에 이르기까지 미국과 유엔군 측은 다양한 지도지침을 두고 논의를 전개하였다.
이러한 논의에서 미국과 유엔군 측은 중공이 "두 번째 적이며, 첫 번째 적은 소련"이므로 미국이 중공과의 전재엥 깊게 말려들어 군사력의 주력을 투입해 전면전을 전개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였다. 도한 유엔이 한국을 결코 포기해서도 안 되고 일본의 방의를 위해 주한미군의 병려과 부대를 재앙에 다다르지 않도록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 새로운 전략수립의 초점이 되었다. 특히 미국 지도부는 중국의 침략에 대한 대응 바안도 반드시 유엔의 집단안전보장 조치를 통해 강구되어애 한다며 서방 유엔회원국의 결속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강조 하였다. 따라서 확전이냐 철수보다는 유엔 주도하에 38도선에서 휴전을 이루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안으로 고려 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유엔대표단은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한국의 통일은 이 전쟁에서 이기는 것에 의할 뿐이다. 중국의 개입은 북한의 침략과 마찬가지로 유엔에 대한 도전이다. 유엔의 참전은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서다. 이런 정신으로ㅓ 중국도 격퇴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그 문턱에서 휴전은 한민족의 소망에 상치되는 것임을 역설하였다.
이 무렵 미국은 중국의 참전에 대한 새로운 대응전략의 하나로 핵무기 사용을 적극적으로 검토하였다. 미국은 지상군 투입한 시기부터 핵무기 운용계획을 검토해 왔으며, 중공군의 공세로 유엔군이 위기에 처하자 이의 사용 가능성이 갑자기 높아지게 되었다.
이때 미 국방부는 유엔군잉 재앙에 직면하게 되면 대통령에게 핵무기 사용을 건의하고 언제 승인될지라도 이를 신속하게 운용할 능력을화보한다는 방침을 정하였다. 극비리에 추진되어 온 이 핵무기 운용게획은 유엔군의 철수방침이 정해진 이튼날인 1950.11월 30일에 트루먼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직접 핵무기 사용가능성을 언급함으로써 현안으로 부상되었다.
이는 즉각적인 국제적 반향을 일으켜, 특히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안보이익의 관점에서 극동에서 전재잉 확대되는 것을 바람직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영국 수상 애틀리의 워싱턴 방문을 몰고 오기까지 하였다.
12월 4일부터 8일까지 개최된 애틀리 스상과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회담에서 새로운 전쟁지도 전략에 대해 짅지한 논의가 있엇다. 당시 영국 수상 애틀리는 사전에 프랑스 플레빈 수상과도 협의를 가긴바 있어 서유럽의 대표 격이었다.
우선 양측은 극도의 긴박한 상황에 대해 ' 휴전을 추구할 때가 왔다는 데에는 합의하였으나, 적대행위 종식의 댓가로서 미국의 조건없는 휴전을, 영국은 타이완 문제의 양보와 중국의 유엔 가입을 주장하다가 영국은 전자를 제외하고 후자인 유엔가입은 계속 주장하였다.
핵무기 사용에 대해서는 미국이 공식적으로 발표나 약속을 기피하였기 때문에 영구과 협의 없이는 사용ㅇ을 고려하지 않기로 구두 약속하는 선에서 조정하였다. 철군문제는 유엔군의자발적인 철수는 고려할 수 없다는 데에는 합의하였다.
따라서 논의된 사항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쟁을 전쟁 이전의 경계선-38선을 토대로 종결짓겠다는 합의였다.
미국은 유엔에서 휴전논의가 한창인 1950년 12월 11일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열어 휴전을 고려하기로 방침을 정하오 휴젅조건을 논의하였다. 그것은 "유엔군에게 군사적 불이익을 부과하지 않고 정치적 양보를 내포하지 않아야 하며 휴전에 관한 세부사항은 유엔군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하여 휴전을 수락하기 전에 협상해야 한다'는 원칙하에 구체화되었다.
이에 한국정부도 휴전에 관한 분위기를 감지하여 주미 장면 대사를 네 차레나 미 국무성과 백악관을 방문하여 "한국 국민은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울 것임을 천명한다"
장면 대사는 트루먼 대통령을 면접하고 "100만 명의 청년이 훈련을 받으며 무기 지급을 기다리고 있다"고 미국의 지원을 간곡히 요망하였다. 여기에 압록강 이남에 완충지대를 설치하는 것도 적극 반대한다는의사를 강력히 천명하였다.
2) 확전과 철군 논쟁
1950년 12월 초순, 미.영 영수회담에 이어 6.25전쟁을 유엔의 후원 하에 휴전으로 해결하기로 전쟁지도 방침을 정하고 휴전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하자 확전 논쟁이 잠시 주춤하였다. 그러나 공산군 측의 반대로 휴전위원회의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중공군의 공세가 계속되자 확전조치에 관한 전략 논쟁이 다시 일게 되었다.
우선 미 합동참모부는 이와 관련항녀 12월 22일 중요한 결정을 하였다, 즉 6.25전쟁에 미군과 유엔군의 투입을 가져온 유엔의 최초 결의는 이제 시효가 지났으며 수정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을 정리하고, 중공군이 전력증강에 뒤이어 강력한 공격을 가해 그들의 의도가 유엔군은 한국에서 몰아내려는 것임이 명백해 진다면 정부 수준에서 가능한 빨리 유엔군의 철수 결저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모았다. 이러한 이유는 중공의 침략에대해 유엔이 추가적인 전력을 한국전쟁에 투입하고 그들로 하여금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하여 침략의도를 포기하게 응징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안으로 판단 하였지만 당시 국제정세와 유엔의 분위기로 보아 유엔군의 실질적인 증강이나 미군의 추가 투입이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미군은 한반도가 그들로서 주요전쟁을 할 장소가 아니라는 일관된 정책기조 하에 중고의 참전으로 전면전의 위협이 증가하는상황에서 세계 전력상 중공과의 싸움에 나머지 지상군을 투입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현 작전부대의 보존을 위해 유엔군의 강제 축출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들은 이와같은 강압에 의한 철군정책 결정을 내리고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12월 29잃에 유엔군사령관에게 통보하였다.
맥아더장군에게 지시된 전문 내용을 요약하면 중공군의 침략을 유엔군이 방어하여 부대의 안전을 기한다면 축차진지상에서 방어하도록 한다. 그러나 사태가 긴박하여 유엔군의 철수를 강요하거나, 일본에 대한 위협을 고려하게 된다면 유엔군의 질서정연한 철수에 대비한 대책을 미리 마련해 놓아야 한다는 점과, 만약 금강-소백산맥으로 지어지는 전선 이남으로 철수를 강요당하고 중공군이 유엔군을 한국에서 밀어내려는 명백한 가능성을 보이며 방어선으로 대부대를 집중시킨다면 이 조건하에서 일본으로 철수를 시작하도록 명령이 필요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맥아더는 12월 29일 회신에서 이와는 달리 방어를 위한 강력한 보복조치를 요구하였다. 그는 중공군의 전 군사자원이 유엔군과의 전투에 투입되어 만주와 한반도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다른지역은 취약하나 기존정책은 이 기회의 이용을 금지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정부가 중공 당국에 의해 전쟁상태가 강요되었음을 인정하기로 결정할 경우에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방책을 제시하였다.
가. 중국의 해안 봉쇄
나. 중공 공업의 전쟁수행 능력을 해.공군의 폭격으로 파괴
다. 자유중국 부대로 유엔군 증원
라. 자유중국군에게 중국본토에 대한 견제공격의 허용
맥아더는 이 조치를 통하여 유엔군 측은 상대적으로 적은 군사력의 투입으로써 중국의 침략전쟁 수행능력에 심대한 손상을 가하고 크게 무력화시킬 구 있으며, 아시아가 그들에게 먹히지 않도록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 유엔군에 대한 압력이 완화될 것이므로 때 전쟁을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해.공군으로 중국에 대한 작전을 계속 펴면서 근해 도서에 재배치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하였다.
맥아더의 이러한 주장은 중공군이 개입이전에는 주요전쟁을 도발할 이유가 될 수 있다고 거부되었었다. 그러나 지금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한 이상 더 악화시킬 것이 없다는 것이 맥아더의 주장이었다. 나아가 맥아더는 소련의 참여여부는 "투기"의 문제이며, 오직 상대적 전력과 능력에 기초하여 그들 스스로 결심할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하였으며, 그들이 일본에 대한 관심이 집중하고 있음에 유의하여 4개의 주 방위사단을 극동에 사용할 수있도록 추가로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개잊할 것이라고고 생각 해 본 적은 없다고 덧붙였다.
특히 그는 전략 배치의 우선순위에 대해 유럽의 안보요구를 이해하고 그 지역의 지원에 동의하나, 다른 모든 지역의 패배 후에는 유럽의 패배도 반드시 초래 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모든 지역의 현 위기에 대한 부대 운용이 국가전략 기본개념을 해치지 않는다면 극동에 대한 우선적 지원을 강조하였다.
이와같은 잔쟁지도 노산의 길등은 1월 15일 콜린스. 셔먼의 두 합동참모가 도쿄와 서울을 방문하여 정책을 조율한 결과, 맥아더 장군이 요청한 보복조치에 관하여 신중을 요한다는 전제하에, 해안봉쇄는 전선이 안정되거나 찰군을 완료했을 때의 상황에 따라 시행하며, 중국 본토의 폭격은 중국이 한반도 외부로부터 유엔군을 공격할 경우에 승인할 수 있다고 했다. 자유중국군의 유엔군 편성은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한편다른 지역에서 그의 운용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어 채택이 곤란하다고 유보적 입장을 취하였다. 다맍ㄴ 자유중국군의 작전제한 제거안만 수용되어 대공산권 작전을 효과적으로 실시할 수 있도록 군수지원을 제공하기로 하였다.
그 밖의 추가적 병력 증원에 대해서는 한국의 바어선이 안정될 경우 2개의 주방위사단을 일본의 안전보장을 위하여 일본으로 전개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 그 목적은 한국으로부터 철수하는 부대로 달성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특히 트루먼은 중국본토에 대한 직접적 군사조치의 요구에 대해 미군의 군사력이 건설될 때까지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하며, 한국전쟁에 도움이 된다하더라도 일본이나 서유럽이 대규모 적대행위에 말려든다면 결코 이롭지 못하다고 경고하였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유엔군이 직면한 엄중한 상황을 직시하고 맥아더 장군으로 하여금 적에게 최대의 피해를 가하면서 축차적 진지에서 방어하되, 인력과 물자의 심대한 손실을 피하기 위하여 불가피 할 경우 일본으로 철수하라는 지침을 하달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군사적으로 한반도에서 계속적인 저항이 불가능할지라도 철수 후 제주도와 같은 근해 도서에서 저항을 계속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상의 내용에서 결코 한국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강한 의지가 포함되어 있으나 동시에 확전은 억제해야 한다는 의지도 내포되었다. 이러한 전쟁지도 정신에 따라 당시 미국 정부는 최악의 경우 망명정부를 유지하여 저항을 계속하도록 한국을 지원할 것을 정책목표의 하나로 설정하였다.
3) 한국정부의 제주도 이전 계획
미국정부가 1951.1.12일 중공군의 참전과 관련하여 결정한 유엔군의 전쟁지도지침에는, 강압에 의한 철수 시 유엔군은 일단일본으로 철수하되, 한국정부와 군겨을 제주도로 이전시켜 저항을 게속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중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중대한 사안은 도쿄와 워싱턴에서 다루어지고 있었다. 다만 우리에게는 계획의 입안 초기에 군사 상황에 따라 최악의 경우 불가피하게 미군이 떠날 경우 어떻게ㅐ 할 것인가 정도로 의사 타진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당시 1950년 12월 6일, 맥아더 장군이 어쩌면 유엔군이 한국에서 떠날지도 모른다는 전황보고를 해왔다는 보도에 접한 장면 대사가 미 국무부에 들어가 "유엔군이 중공군을 격퇴하지 못하고 한국에서 철수하는 경우에 한국국민은 죽어버릴 것이 아니냐"라고 하자 국무부(러스크)에서는 "미국은 한국전쟁을 포기하거나 군사적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경우가 아닌 한 철군할 생각이 전혀없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뜻을 전달하였다.
"미국은 군사적으로 강요당하지 않는 한 한국에서 군대를 철수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다시 강조한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 미국이 한반도를 떠나야 할 경우 , 물론 그런 일이 없겠지만 , 한국 망명정부 수립 가능성에 대한 검토를 대사가 원한다면 그것에 대한 의견을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장면 대사는 그에 대해 국군과 유엔군이 전면철수가 있을 경우 제주도와 오키나와 가 가능할 것이며 그 때 공무원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적과 향후 유용하게 활용될 군대가지 포함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물론 이 의사타진은 본국으로 전달되었다.
당시 미국이 극비리에 추진한 이 계획에는 행정부 관리와 그가족 3만 6,000명, 한국 육군 26만명, 경찰 6만명, 공무원 및 군인 및 경찰가족 40만 명, 기타 요원을 포함하여 100만 명으로 판단하여 수송계획까지 발전시켰다.
정부 위치는 제주도를 적격지로 결정하였으나 이곳에는 이미 25만명에 달하는 피난민과 포로가 수용되어 있어추가 수용이 불가능하므로 먼저 수용된 포로들 근해도서로 이송하기로 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한국인을 일본으로 이동시키지는 않기로 하였다.
이와 같이 1.4후퇴는 한 민족의 운명이 걸려 있는 기로였으며 실제 그 운명을 결정할 계획이 추진되고 있었다. 유엔군 측 지도부는 철군계획을 최고비밀로 유지하고 미군과 유엔군의 철군계획과 한국 정부와 군경의 도서 이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들은 철군을 고려하고 있다는 전략이 적에게 누설되어서는 안 된다는 기본적인 생각보다도 이 결정이 알려질 경우 아군부대, 특히 한국군에게 미칠 영향을 보다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산군 측은 추가적인 증원 없이는 유엔군을 밀어붙일 여력도 없었으며 일단 38도선 이남, 서울까지 진출하여 정치. 군사. 심리적 이점으 확보하고 춘계 공세를 준비하겠다는 전략이었다. 당시로서는 유엔군의 철수를 제2의 인차ㅓㄴ상륙작전같은 상륙작전으로 자신들을 포위하기 위한 유인전략으로 판ㄷ나하고 종심깊은 진출을 기도하지 않았다. 게다가 신정ㄱ오세에서 막대한 전사자가 발생함으로써 실제 더 이사의 전진이 불가능하였다.
결과적으로 철군 시행 50km를 남겨둔 37도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이 적을 저지하고 또한 적이 공세를 멈춤으로서 철군과 정부의 이전계획은 시행되지 않았지만 당시 피아의 상황판다는 분명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나. 미국의 현상유지정책 채택
미국 내부의 전쟁지도 노선의 갈등은 적의 신정공세 기간 중에 속개된 합동참모회의와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현안과 관련하여 유엔군 측ㄱ이 취할 군사적 방책과 정치적 지도지침을 확정함으로서 일단락되었다.
당시 미 정책 당국의 결정은 미국의 목적이 아시아 근해의 방위서ㅏㄴ을 유잊하고 타이완을 방어하며, 실행가능한 한 남한을 지원함과 더불어 대소 전면전을 회피하는데 있다고 밝히고, 구체적인 조치로서 한국전선의 안정 또는 일본으로의 철수, 극동주둔 미 지상군의 병력 제한, 일본의 방위력 강화 준비 및 한국으로부터의 증강, 대중국 경제봉쇄 및 해안 봉쇄 준비, 중국 해안과 만주의 공중 정찰, 타이완에 대한 원조 증대, 타이완군 작전제한 철폐 및 게릴라 지원, 한반도 외 지역에서의 중국 도발 시 대중국 폭격, 기타 아시아 지역에 대한 군사원조 강화 등을 들고 있다.
결국 트루먼 미 대통령의 대 중국군사 작전에 대한 의문점은 실제 전황을 확인하고 돌아온 양군 참모총장이 전황의 호전과 함께 철군 위기가 종식되었음을 보고함으로서 일단락되었다.
다. 유엔군의 신전략과 전선 상황
1) 38도선 확보전략
유엔군은 1951년 1월 하순 빈격을 재개하여 국군과 유엔군은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공격작전을 펼치자 지난 12월에 심각하였던 철군문제는 일단락 되고, 지난해 10월 38돗선을 돌파하기 직전처럼 다시 38도선에 관한 전쟁지도전략 연구를 다닥도로 실시하였다.
그 결과 미 행정부와 합참은 3월 15일에 "한국문제를 장치와 군사 두 노선으로 구분하여 단계적으로 해결하되, 정치적으로는 통일독리국가를 이룩하고 군사적으로는 침략을 격퇴하고 평화를 회복해야 한다"고 합의한다. 그 주요내요은 다음과 같다
"유엔군은 적에 대하여 계속 ㅊ최대의 손실을 가해야 하고, 38도선 남쪽 영토의 통제를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방위력도 증강되어야 한다. 유엔 지상군은 전술 상황에 의하여 요구될 수 있는 38도선 북쪽의ㅣ16~32km가지 공세적 방어작전을 실시토록 허용되어야 한다. 아군이 군사작전으로 38도선에 도착하면 미국은 1950년 12월에 유엔 휴전위원회에 통보한 그 선에 따라 휴전을 추구행야 한다. 만일 적이 잠정 협정의 수락을 거부한다면 유엔군은 적에게 게속 손실을 가행야 한다. 유엔군은 적의 균형을 파괴하고 적의 공격 준비를 분쇄시키기 위하여 38도선 북으로 제한된 기습을 가할 수 있으나 전면적인ㄴ 진격을 하여 북한 영토확보를 시도해서는 안된다"
결국 군사적으로 전쟁 이전의 상태를 ㅎ회복한 후 휴전에 의거 전쟁을 해결하며 통일국가 수립은 그 후 정치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 합참은 3월 20일, 극동사령관에게 대통령이 유엔군사령부는 기꺼이 휴전을 고려하고 있다고 유엔군을 파병한 국가의 동의를 얻어 밢표할 준비를 하고 있으며 유엔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격하면 안 된다는일반적인 견해를 전달하였다.
그러나 맥아더는 전쟁의 해결에 대해 외교적 수단보다 군사적인 방법을 선호, 3월 24일 미 행정부에 아무런 통고도 없이 "중공군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없다"고 지적하는등 중공군의 군사력을 경시하고 또한 교전이 지속될 경우 중공을 공격할 수 있다는 등위협적인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다른 국가들이 트루먼의 계획된 성명의 진실성에 의문시 하는 국제적 혼란이 초래될 것을 우려한 미 행정부는 공개적인 선언을 유보하게 되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의 태도가 단순한 정책에 대한 불만의 수준을 넘어 미국과 유엔 정책에 대한 고의적이고 사전에 계획된 도전이라 생각하게 된다.
이 무렵 전선에서는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을 넘을 단계에 있었으나, 유엔군사령관과 미 제8군사령관은 곧 기동전이 종료되고 전선이 교착될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때 미 제8군은 개성지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임진가을 도하하여 철수 중인 북한군 제1군단ㅇ늘 공격하며 예성강으로 진출할 계획이엇다. 그러나 이미 적이 에성강을 건너 북쪽으로 철수하였고, 공격제대가 동측방에 배치된 중공군으로부터포위될 우려가 있어 그 대이ㅏ으로 중부전선의 평강-철언-기화를 겅격하기로 하였다. 이때 기자들이 좀 극적인 표현을 하고자 철의 삼각지대로 이름 붙인 이 지역은 원산과 서울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데다 철도와 도로망이 발달된 교통의 요지였다.
이때 선정한 방어선이 임진강 남쪽 제방을 연하여 동쪽으로 뻗어 화천저수지로 연결된 후 동행란의 양양으로 이어지는 선으로서, 이를 캔사스선으로 명명 하엿다. 이 선은 서부에서는 38도선 북쪽으로 5~15km,동부에서는 대체로 10마일 정도 북쪽에 있는 중요지형지물을 연결하여 선정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선은 38도선을 전술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지혀으로서3월 15일의신전략방침에 부합되는 결정이었다 지난 전선 절단작전시38도선으로 진출한 부대가 이 선으로 진격하는 작저을 요철작전이라 명명하였다.
그 후 군은 다음단게로 미 제1,제9군단이 철의 삼각지대를 위협할 수 있도록 유타선과 와이오밍선을 설정하고, 철원-김하까지 공격할 곟획이었다. 그리고 만일 공격 중에 적의 강력한 공격을 받으면 양개 군단을 캔사스선으로 철수하도록 하고 불굴작전이라 명명하였다. 이때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에게 아군이 이선으로 진출하면 그 북쪽의 작전은 대대급 규모 이하의 전투정찰로 제한하도록 지시하였다.
2) 맥아더 원수의 해임과 전선 상황
중부전선의 국군과 유엔군이 캔사스선으로 진출하자 미 제8군사령관은 지상 및 항공정찰, 그리고 포로 심문을 통하여 공산군의 공세징후가 전 전선에 걸쳐 현저하게 증가되고 있음을 긴파하엿다. 제8군사령관은 공산군이 병력과 장비와 보급물자가 집중되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철의 삼각지대를 점령하여 중부전선에서 캔사스선에 대한 방어종심을 강화하고, 공산군의 공세준비를 사전에 차단하여 하였다.
이에 전곡 -철원- 김화- 화천을 잇는 와이오임선을 확보하기 위한 선제 공격을 결심하였다. 이 목표선에 도달하기 위한 1단계 목표선인 유타선은 캔사스선 11마일 전방 임진강-금학산-광덕산-백운산으로 연결되며 활처럼 굽어져 있었다. 이 작전에는 미 제1군단의 미 제3, 미 제25, 미 제24사단이 공격하며 제9군간의 좌전방 명 제27여단도 단거리 진격을 계획하였다.
이 계획에 의거 공격제대들은 4월 11일 불굴작전을 개시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날 트루먼 대통려은 맥아더 원수를 유엔군사령관에서 해임하고,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를 그 후임에 임명한다. 그리고 8군사령관에는 밴플리트 장군을 4월 14일부로 임명하였다.
맥아더 장군은 북한의 남침 2주재인 1950년 7월 8일에 유엔군사령관에 임명되어 1951년 4월 11일 해임될 때까지 북한군과 중공군의 침략을 차레로 응징, 격퇴하고 전쟁전의 경계선을 회복하는데 공헌한 훌륭한 지휘관이엇다. 그는 낙동강선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인찬상륙작전을 감행하여 그들의 주력을 섬멸하였음벼, 그 여세로 적을 한중 국경선으로 몰아붙여 한민족으로 하여금 자유민주통일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에 대한 상황판단 착오와 그들의 인해전술에 국군과 유엔군이 37도선까지 후퇴하는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다시 이를 격퇴하는데 성공하였다. 맥아더 장군은 이 과정에서 전쟁 지도상 워싱턴과 여러 차례 갈등을 빚게 되었고, 결국 이로 인해 사령관직을 떠나야 했다.
제1단계 불굴작전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리지웨이 장군은 14일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군단장 회의를 소집하여 적의 공격으로 아군이 캔사스선 남쪽으로 철수 시 적용할 우발계획을 토의하였다. 이 계획에는 3개의 통제선이 설정된다. 이 선은 중공군의 신정공세때 국군이 점령하였던 B선(문산-화천-양양, C선(서울 남쪽-홍천-원포리), 서울교도부선과 흡사하였다. 첫 번재 선인 델타선은 춘천을 중심으로 동서해안에 이르는 선이며, 두 번째 선은 네바다선으로 서울 남쪽의 한강변을 따라 북동쪽으로 뻗어 양양에 이르는 선이었다. 그리고 서울 방어를 위한 골든선은 서울 서북쪽 10KM의 행주에서 네바다선상의 양평을 반원형으로 연결한 선이었다. 그리고 이 회의에 모인 지휘관들은 가까운 장래에는 적이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이날 신임 미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가 도착하여 정식으로 사령관직을 인수하였다. 밴플리트 장군은 제2차세계대전이 절정에 달했던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연대장으로 참전하여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이후 9개월 동안 사단장을 거쳐 일약 군단장으로 발탁된 유능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1948년 중장 승진과 더불어 그리스의 미 합동군사고문단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이때 그리스 정부를 도와 공산주의자들의 지원을 받는 반정부 활동을 잠재우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리지웨이는 밴플리트에게 지휘권을 인계하면서 유타선 이북으로 군대를 진출시킬 경우 사전에 통보하고, 또 와이오밍선 이북으로 대부대를 이동시킬 경우에는 사전에 승인을 받도록 지시하였다.
이때 전선에서 제1단계 불굴작전을 개시한 공격제대들은 철의 삼각지 부근으로 접근할수록 적의 저항이 점점 강화되었고, 또한 폭우로 인하여 도로 상태가 불량하여 진출이 매우 느렸다. 이런 상황에서 '51.4월 20일을 전후하여 미제3사단이 연천을 , 미제25사단이 금학산을, 미 제24사단이 문혜리를, 그리고 영연방 제27여단이 사창리로 진출하여 유타선을 점령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이 유타선과 캔사스선에 위치하거나 그 부근에 도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의 공격이개시될 조짐이 없자 밴플리트 장군은 4월 21일 와이오임선를 목표로 불굴 작전 제2단계를 개시토록 하였다.
이에 좌전방 미 제1군단의 미 제24사단과 제25사단이 철원-김화를,우전방 미 제9군단의 국군 제6사단과 미 제1해병사단이 김화-화천을 목표로 각각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미 제1군단의 우전방 광덕산으로 진출한 미 제24사단은 우인접의 국군 제6사단과 연결을 유지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접적을 회피하였지만, 좌전방 보개산에서 철원을 공격한 미 제25사단(터키여단 배속) 은 적의 포격으로 오전 중에 공격이 돈좌되었다.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은 22일 공격을 재개하였으나 상황은 어제와 같이 미 제9군단은 2~3마일 전진하였으나 미 제1군단의 2개 사단은 적의 저항으로 전진이 불가능하였다.
이때 적의 저항은 한층 강화되고, 공세징후가 현저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적이 전방지역 중앙으로 집결하고 있고, 임진강변에는 적이 도하준비를 위한 정찰활동이 증가하였다. 그리고 전방에서 생포된 포로의 진술로 중공군이 야간에 대귭모 공세를 개시할 것이라는 진술을 받아냈다.
국군과 유엔군의 염려대로 중공군은 해가 저물자 제일 먼저 국군 제6사단의 사창리 지역으로 춘계공세를 개시하였다. 이로써 유엔군의 불굴작전을 중단되고, 수세로 전환되었다.
3) 종전정책으로 전환
전쟁이 개시된 이후 춘계공세가지 상방은 낙동겅에서 압록강까지 미ㅏㄹ리고 미는 격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어느 일방의 결정적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것과 감내하기 어려운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이 수반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미굮으로서는 자유진영으로부터 전쟁의 조기 종결 압력을 받게 되었음은 물론 무한정한 인적자원을 동원할 수있는 중국과 이들에게 물자를지원하는 소련을 상대로 한 젅재에서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다. 반면 중국도 5차에 걸친 최대 80개 사단(북한군 포함)을 한반도에 투입해서 공세작전을 펼쳐 보았지만 막강한 화력과 기동력을 가진 유엔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한다는 당초의 목표 달성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벼역보충과 물자 지운에도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인식과 경험으로 쌍방은 전쟁수행 1년 만에 전전이 전쟁전의 현상으로회귀하여 38도섡 부근에서 교착되자 군사적 수단대신 정치적 수단으로 해결 바안을 모색하는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1951년 초, 중공군의 신정공세로 인한 1.4후퇴의 위기상황을 극복하고 1월 말 평택-삼척선에서 재반격작전으로 전환하였다. '51.3월 15일 서울을 재탈환하고 3월 말에는 38도선으로 진춣람으로서 전쟁전의 상태를 회복하였다. 그리고 4월 초 전술적으로 방어하기 유리한 지형을 연결하는 이른바 캔사스선까지 점령하였으며, 그 후 중부전선의 방얼력을 강화할 목적 하에 철의 삼각지 저변을 연결하는 와이오밍선으로 진격을 계속하였다.
이 무렵 미 행정부 내에서는 대한 정책을 수정하여 "적절한 휴전 장치하에 전쟁을 종결하고 전쟁 전의 상태로 복귀한다"는 골자로 한 새 정책을 모색 중이었다. 이에 따라 미 제8군의 임무는 적에게 충분한 피해를 가하여 적들로 하여금 미국의 이러한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유도하는 것으로 제한되었다.
그러나 한국정부의 통일정책은 변함이 없었고, 통일을 염원하며 휴전을 반대하는 국민들의 소리가 점차 높아 갔다. 결국 1951. 4월 3일에는 장면 국무총리가 국토 분단을 초래하는 어떠한 결정도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한국은 한국인 스스로가 모르는 가운데 국토가 남과 북으로 분할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전쟁이 불가피하였던 것이니 통일을 저해하는 어떠한 일도 다시 있어서는 안된다. 한국인은 합법적으로 수립된 자주 국가의 시민으로서 우리의 조국을 분할하는 여하한 결정도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수행 정책 결정을 두고 한.미간의 갈등이 표출되는 가운데 미국은 4월 11일 그간 행정부와 잦은 불화를 초래하고 휴전협상 제안에 마찰을 빚은 맥아더 원수를 해임하고 그 후임으로 리지웨이 장군을 임명하였다.
리지웨이 장군의 부임으로 미국은 정책목표를 일사분란하게 추진 하게 된다. 이때 극동 해.공군사령과에게 하달된 별도의 지시에서도 똑같이 전쟁 제한의 중요서을 강조하면서 " 미 제8군의 군사작전을 직접지원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소련영토로부터 20마일 이내, 북위 32 북쪽의 중ㄱ오영토로부터 3마일 이내로 접근해서는 안된다. 특히 극동사령관의 사전 승인없이는 한.중 또는 한.소 국경선을 넘어서는 안 되며, 나진이나 압록강상의 수력발전 시설에 대하여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결국 적의 춘계공세를 격퇴한 유엔군은 미 국무부와 국방부가 긴밀히 협조를 하여 트루먼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5월15일에 확정한 대한정책의 핵심은 목표를 둘로 구분하는 것이다. 최종 목표로서 한반도에 통일. 독립민주국가의 수립문제는 군사적 수단과 별도로 정치적 수단에의해 계속 추구한다. 당면 목표로서 전쟁의 종결은 유엔기구를 통하여 추구하되 적절한 휴전협정으로 적대행위를 종격하며, 이러한 당면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침략자에 대하여 응징을 가한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정책에 기초하여 1951년 6월 1일 리지웨이 장군에게 유엔군사령관으로써 임무를 아래와 같이 재규정하여 하달하였다.
이 임무를 추구함에 있어 유엔군사령관은 한국의영토와 그 인접 해역 내에서 필요하다거나 유리하다고 생각되는 해.공군작작전을 수행할 권한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만주.소련. 압록강사의 발전시설에 대한 작전의 실시가지는 포함하지 않았다. 글러나 한중 굮경선 부근의 작전 제한은 종전의 15마일에서 12마일까지 접근을 허용함으로서 다소 완화되었으며, 지상군의 작전한계는 대체로 화천저수지를 지나는 38도선 북쪽 10KM의 일반적인 선으로 기술하였다.
당시 육군 총참모장인 정일권 장군은 유엔군의 작전제한 정책을 결정하는 중대한 사안에 전쟁 당사자인 우리정부와 사전 협의가 없었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고 회고 하였다. 특히 이 결정이 있은 직후인 1951년 6월 8일에 미 국방장관 마샬이 도쿄를 경유 대구의 미 제8군사령관을 방문하고 우리정부와 아무런 협조도 없이 귀국하였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지금 우리가 미국과 유엔의 지원으로 싸우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주권을 업신여기거나 배신하는 것은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며, 국방장관은 국회와 구긴 여론을 환기시켜 우리의 전쟁수행 결의를 국내외에 반영토록 하고 육군차모총장은 장병들의 북진 의지를 보여줄 수있는 독자적인 작전을 준비하라고 했다.
2. 한국 정부의 전시조치
가. 정부와 국회의 전시조치
1950년 12월 31일 중공군 제3차 공세가 개시되자 국군과 유엔군이 철숳하게 되었다. 정부와 국회는 '51.1.3일 수도 서울을 포기하고 재차 부산으로 이동하여 정부는 경남도청 청사를 임시 중앙청으로 정하고 집무를 개시하고, 국회는 부산극장을 임시의사당으로 삼아 의회활동을 개시하였다.
정부가 피난민 철수계획을 수립한 것은 유엔군이 평양을 포기했을 무렵부터였다. 12월 중순경 정부는 동빙고, 마포에 부교를 설치하여 부녀자와 노약장들이 먼저 피난하도록 포고문을 게시하였도, 이어 12월 24일 서울 시민 소개령을 발표하였다.
또한 많은 서울 시민들이 열차를 이용하여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1950년 12월 말까지 대체로 약 40%의 서울 시민이 피난을 떠났으며 마지막으로 1951년 1월 3일까지 30만명의 시민들이 한강을 넘었다.
그 후 3월 14일 국군과 유엔군이 수도 서울을 재차 탈환하였으나 정부는 곧바로 환도하지 않고 그대로 부산에 머무르면서 장기전태세에 들어가 총력체제를 확립하기 시작한다.
식량난을 해소하기 위해 51년 5월 6일 정부미 20만석을 방출하고 동시에 정부보유 달러를 민간 무역업장에게 불하아혀 외국산 양곡을 수입하도록 하고, 공무원에 대한 무상양곡 배급을 실시하였다.
도한 정부는 급증하는 범죄의 단속과 부상군경 및 그 유가족에 대한 처우. 주택문제. 유행성 질병문제 등에 집중적인 관심과 대책 수립에 치중하며 1951년 7월 2일 유엔에 대하여 전재 복국비 계상에 의거 70억 달러를 요청하는 등 게획서를 발송한다.
기간 중 치안문제는 국군 제8사단이 전선으로 복귀함으로서 경찰만으로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해야만 했다. 이 시기에 전국에서 발호하고 있는 공비 수는 약 8천여 명으로 공비들이 후방경비의 소흘한 기회를 삼아 산간벽지를 무대로 갖은 만해을 자행하여 민심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국회는 부산극장을 의사당으로 하여 정상적인 활동을개시하였으며 당시에 사회적으로 큰 불만을 가졌던 부역자의 처벌을 신중히 하기 위하여 반드시 중앙과 지방에 "부역행위 특별 심사위원회"를 설치하여 부역용의자는 반드시 이 위원회의 심사를 거쳐서 처벌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입법정신을 무시하고 옥석을 제대로 가리지 않고 과도한 권력남용이 자행되어 민심을 동요시킨 사례도 자주 발생하였다.
나. 정부의 총력전 테세 구축
1) 정부의 총력전 노력
가) 총력전 의지 표명
1.4후퇴의 위기를 넘기면서 37도선에서 간신히 전선의 안정을 기하였으나 이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29일 평양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환영대회에 참가할 무렵까지만 해도 조국통일이 목전에 찾아 온 듯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새로운 전쟁양상으로 변하면서 공산군의 침력전쟁으로부터 국가를 수호하기 위하여 먼저 신성모 국방장관의 담화문으로 총력전으로 맞설 결의를 천명한다ㅣ.
이어서 이 대통령의 전쟁이 우리의 자유 독립을 위한 최후 결전단계임을 선언하고 국민총력전으로 이를 극복하겠다는 중대 성명을 발표하였다.
대통령의 결전의지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정부는 전쟁초기에 이어 두 번재로 남한 전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으며, 12월 12일에는 서울운동장에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통일대업을 완수하기 위한 국민결의 대회가 열렸으며 100만 애국청년에게 무기를 달라고 선언하였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서울이 피탈되는 상황에서 '51.1.5일 부산에서 백만 명의 무장을 요청하는 부산시밈 궐기대회가 열렸다.
나) 한국군의 전력증강 시도
중공군의 개입으로, 나라를 지키고 영토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나서야만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청년단 50만 며을 무장시키기로 결심하고 미국에 장비 제공을 요구하였다.
당시에 주미 대사였던 장면 박사가 국무총리에 임명되어 이임 인사차 백악관ㄴ을 방믄하여 직접 트루먼 대통령에게 대한청년단 50만명을 무장시켜 줄 것을 제의하였다.
무기지원의 필요서을 검토한 미 국방부와 합참은 7만 5,000에서 10만명을 특수부대로 조직하여 병참선을 경계시키고, 적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에서는 게릴라로 운용하도록 제안히였다.
그러나 맥아더는 기존 부대의 임무수행 상태가 너무나도 좋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부대의 창설은 잇점이 없다고 반대하고, 대한청년단은 기존 부대의 보충요원으로 운용하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하였다.
2) 외교활동의 강화
정부는 국민방위군의 편성, 대한청년단의 무장 시도 등 총력전태세 구축을 위한 노력과 더불어 유엔 무대로 외교활동도 강화하였다. 이대 정부는 중공의 불법 침략을 알리고, 또 세계ㅠㅕㅇㄹ화를 회복하기 위해 보다 강력한 지원을 얻는데 중점을 두엇다.
3) 후방 지원의 확대
모병에 있어서 지역 병사구사령부의 폐지와 제2국민병 점검 및 소집, 국민방위군의 구성과 해체, 노무사단의 창설, 각 군 제병학교 재창설 도는 개요, 신상필벌제도 , 전쟁포로 및 민간인 억류자 관리를 위한 거제도 포로수용소 설치, 정부의 민간인 억류자 석방 노력이 이어진다.
군수면에서도 보급체계, 정비체계 등을 수립하였고, 각 기술병과 지원부대들이 발전하게 되어 국내 군수산업도 생산능력을 갖추어 갔다.
민사지원 면에서는 이재민과 피난민을 위한 정부의 노력과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우방 국가들과 유엔의 적극적인 지원활동이 이루어졌다.
| 중공군 제3차 공세와 1.4후퇴 제 1절 개 요 1. 전선 상황 요약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제2차 공세에 밀려 평양과 흥남일대에서 철수하여 1950. 12월 20일, 임진강하구-연천-춘천 북방-양양을 잇는 38도 선상에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그러나 방어정면이 광대해 1개 사단이 30km가 넘는 광정면을 담당함으로서 부대 배치의 공백지대가 많아 중공군과 북한군의 침투를 용이하게 하였다. 이 무렵 중공군은 38도선으로 남하하여 서울을 목표로 개성-문산-서울과, 철원-의정부-서울의 2개 축선 상에 전투력을 집중 투입하였으며, 이들의 일부가 원주를 점령함으로서 중앙선 축선을 따라 남진할 수 있는 발판을 확보하였다. 이와 별도로 철의 삼각지대에 제2전선을 형성했던 북한군 제2군단이 인제-현리-평창 축선을 따라 침투하고 있었다. 이 때 중국 정부는 청천강과 장진호에서 유엔군을 격파한 승리에 도취되어 마치 세계에서 본인들이 최강의 군대가 된 것처럼 인도 등 중립국들이 제안한 결의안(전쟁이전 단계로 회복)들을 무시하고 굴복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정황속에서 중공군이 1951년 1월 1일 새벽에 전 전선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소위 중공군의 제3차 공세(신정 공세)는 6개월 전의 북한군의 남침과 유사하에 중공군 제13병단이 주공으로 철원-의정부-서울 축선 상에서 , 중동부 전선에서는 북한군이 돌파구를 확대하여 안동부근까지 침투하고 있었다. 이에 유엔군은 '51. 1. 3일 중공군이 수도권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자, 서울을 포기하고 1. 4일 서울 남쪽 60km 지점의 평택- 삼척을 잇는 선, 37도선으로 철수를 하여 1월 7일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정부는 1월 3일 부산으로 내려갔다. 중공군은 1월 8일에는 수원-여주-강릉선까지 진출하자, 그동안의 전력의 손실로 더 이상 진출을 못하고 수세로 전환하였다. 당시의 긴박한 상황에서 유엔군이 설정한 병력 배치선은 다음과 같다 12월 31일선 : 강화- 문산 북방-전곡-영평-춘천 북방-인제-홍천-평창북방-양양 C방어선 : 인천-서울 북방-의정부-양평-이천-홍천-주문진 '51. 1. 6일 : 한강선-양평-횡성-평창-강릉선 '51. 1. 7일 : 평택-안성-원주-단양-정선-삼척 D방어선 : 평택-안성-원주-횡성-평창-양양 (수정된 D 방어선 : 횡성-정선-삼척) 제 2절 중공군의 신정공세와 유엔군의 방어 1. 개 요 1950년 12월 하순, 38도선 북방에 전개를 완료한 공산군은 12월 31일 주공을 철원-의정부-서울 축선으로 지향시키고, 화천-춘천-원주 축선에 조공을 지향시켜 38도선을 돌파하기 위한 공격을 개시 하였다. 이로인해 국군과 유엔군은 1. 4일 서울을 포기하고 1. 7일에는 37도선인 평택-삼척선으로 철수하여 신 방어선을 형성하였으며 공산군은 1. 8일 수원-여주-강릉선까지 진출하였다. 하지만 더이상 진격이 없이 수세로 전환하여 그들의 한계를 보였다. 다라서 유엔군은 바로 37도선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재반격의 준비를 하였다. 2. 상황평가 및 의도 가. 공산군측 상황평가 및 의도 (1) 상 황 제3차 공세시 공산군의 공격 방향은 중공군 제13병단이 주공으로 개성-서울축선과 의정부-서울 축선에서, 북한군이 조공으로 화천 동쪽 지역을 담당하여 부대를 전개하였다. 중공군은 제3차 공세를 위해 식량보급과 수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식량은 현지조달로 하기로 하고 북한정부나 혹은 북한 각 개인으로부터 빌린 식량은 모두 차용증을 발급하고 추후 중국 정부가 모두 상환해 주도록 했다. (2) 작전목표와 기도 중공군은 2차에 걸친 공세작전으로 입은 병력손실을 보충하기 위하여 중공에서 고참병 8만 4천명을 차출하여 전선부대에 보충하고, 보급을 개선하기 위하여 경의선(정주-맹중리)-만포선(회천-개천)의 일부 철도도 긴급 복구하였다. 작전계획은 "제38군, 제39군, 제40군을 집중하여 한국군 제6사단, 제1사단을 소멸한다. 제42군과 제66군 주력은 춘천 서북지역의 국군 제2사단과 국군 제5사단 1개 연대를 소멸하고, 제66군은 1개 사단으로 하여금 화천에서 남진하여 춘천 이북과 동북의 한국군 제2사단 주력과 제7사단을 향해 양공한다. 먼저 한강, 임진강에 배치된 한국군을 해결하고 38선을 장악하여 미.영의 38선을 이용한 정전음모가 물거품이 되도록 하게 한다. 제50군은 고랑포로 근접하여 집결한다. 북한군 제1군단은 개성으로 집결하고 제2, 5군단의 양구, 인제에서의 남진은 변함없다" 여기서 북한군 제5군단은 양구, 인제로 진출하여 한국군 제1, 2군단의 전투지경선을 따라 공격하여 홍천으로 진출한다. 퇴로가 차단된 국군을 전방부대와 협조하여 포위 공격한다. 북한군 제2군단 공세가 시작 되기 전에 은밀하게 38도선에 침투한 후 홍천 동남방으로 진출하여 전선부대와 연결 작전을 준비한다. 북한군 제3군단은 원산을, 제4군단은 서해안을 각각 방어한다. 그리고 중공군 제9병단은 51ㄴ면 3월까 함흥지역에서 계속 정비와 휴식을 취한다. "낙동강 전선 성주에서 무기력하던 북한군 제10사단?" 북한군의 작전 방침은 제2전선 부대의 주력 북한군 제10사단 및 길원팔 유격부대 병력을 전선 동부에서 아군 종심으로 깊숙히 침투시켜 춘천-원주-대구의 중앙도로에 연한 주요 지점을 선취하여 중동부 전선 주력의 남하에 호응하도록 한다는 것이였다. 이런 방침에 따라 중동부 전선의 주력 부대들 작전개시에 선행해 12월 하순부터 제2전선(12월 말에 제2군단으로 개편)의 길원팔 유격부대와 제10사단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곧 양구 서쪽의 제8사단 지역에서는 북한군 제10사단의 일 부병력이 산악을 타고 침투하기 시작했고, 동쪽 국군 제9사단 우측의 태백산맥과 그 좌일선의 산악지대에는 길원팔 유격부대가 침투하기 시작했다. 이들 북한군 제2전선 부대는 12월 30일 양덕원리(홍천 서남 10km)에 진출하고 주력은 영월 및 단양-안동부근까지 침투하였다. 나. 유엔군측 상황평가 및 의도 (1) 상 황 38도선으로 철수한 미 제1군단은 김포반도에 터키여단을, 개성-문산 도로를 가로지르는 임진강 하류에 미 제25사단을, 고랑포-적성 일대에 국군 제1사단(12. 14일을 기해 제11연대를 고랑포, 제12연대를 법원리, 제15연대를 신산리에 배치)을 배치하여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여 제29여단을 군단 예비로 고양 신둔리에 집결시켰다. 한편 신계에서 철수한 미 제9군단은 국군 제6사단(제7연대를 한탄강 남쪽에, 제19연대를 백의리, 제2연대는 예비로 동두천)을 연천-의정부 축선상의 전곡일대, 미 제24사단을 김화-의정부 축선의 영평일대, 영 제27여단을 예비로 덕정부근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영등포에 집결한 미 제2사단은 충주로 이동시켰다. 중부전선의 국군 제3군단은 '50. 12. 10일 공비토벌작전을 완료한 국군 제9사단과 제11사단을 육본으로 원복조치 하였다. 그리고 군단은 양평으로 이동해 국군 제2사, 5사, 8사를 배속받아 군단창설이후 최초로 전선에 투입된다 . 국군 제2사단은 가평으로 이동해 제17연대를 철원에, 제32연대를 의정부 부근에, 그리고 배속된 제5사단 35연대를 구하리에 배치하여 연대별로 패잔병을 소탕하도록 하였다. 제5사단은 춘천으로 이동해 제27연대를 청평 호명산 일대, 제36연대를 가평 일대, 배속된 제2사단 제31연대를 홍천에 배치해 주저항선을 구축하기로 한다. 그러나 군단의 우전방 제8사단이 진출이 늦어지면서 구하리일대에서 많은 피해를 입고 연천으로 철수한 후 원주로 이동하여 재정비한 후에 화천저수지 남쪽 전선에 투입되었다. 한편 육본은12월 15일, 제3사단의 방어종심을 보강하고 유사시 증원 부대로 사용하기 위해 홍천에서 정비 중인 제7사단을 춘천으로 이동시켜 육본 예비로 하였다. 동부전선을 담당한 국군 제2군단은 연천을 경유 12월 14일 원주에 도착하였다. 군단은 제7사단을 육본 직할로, 제8사단을 제3군단에 배속전환하고 동부전선에서 광정면을 방어하고 있는 제9사단을 배속받고, 함흥에서 구룡포로 철수한 제3사단을 배속 받았다. 그러나 군단이 방어선을 구축하기도 전에 동부전선의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 흥남에서 철수하는 제1군단이 묵호에 상륙하여 동해안지역을 담당하게 된다, 따라서 제9사단이 다시 제1군단에 배속 전환되어 홍천으로 진출한 제3사단 만을 가지고 인제 남쪽의 부평리-관대리 간을 방어하였다. 제3사단의 좌인접은 국군 제3군단 예하 제8사단이고, 우인접은 국군 제1군단 예하 9사단이었다. 이에 따라 동부의 제1군단은 묵호로 상륙하여, 제2군단으로부터 제9사단이 방어 중이던 관대리-현리-서림-양양 선을 인수하였다. 그래서 좌전방 제9사단이 관대리 - 서림 선을, 우전방 수도사단이 서림- 양양 선에 배치되고 군단 후방에는 3개 경비대대를 영월, 정선, 하진부리에 각각 배치하였다. 이와같이 각 군단이 재편성 및 주저항선 방어진지를 구축하는 동안 적 제69여단은 양양 북쪽에서 재편성 완료하였고, 북한군 제2군단 예하의 패잔병들이 인제부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특히 2,000명의 패잔병이 오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어 국군 수도사단은 제1연대는 진지를 강화하고 제26연대와 기갑연대를 오대산 서쪽지역에 투입하여 수색정찰을 명령였다. (2) 작전목표와 기도 한. 중 국경에서 철수한 국군과 유엔군은 '50. 12. 20일 38선상에 미 제1군단(국1.미25.터키)이 고랑포리-문산 간에, 미 제9군단(국6,미24,영27)이 의정부 정면에, 국군 제3군단(국2.5.8사)이 춘천 정면에, 국군 제2군단(제3. 7사)원대리-관대리 간에, 국군 제1군단(수도사. 9사)이 양양-서림-현리-원대리 간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제일선 부대들의 철수 시에 차기 행동을 준비하기 위하여 국군 제7사단과 미 제2사단은 원주부근에, 대구에는 미 제10군단 사령부와 미 제7사단이, 미 제1해병사단은 마산에서 재편 중에 있었다. 서부전선의 미 제9군단 후방 의정부에는 미 제1기병사단이, 그리고 미 제10군단 후방인 평택에는 미 제3사단이 위치해 있었다. 당시에 유엔군은 적이 주공목표를 서울에 두고, 국군 제1사단의 고랑포 정면과 미 제9군단의 의정부 북방으로 공격하면서, 조공은 춘천북방에서 돌파에 의한 포위를 기도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따라서 적의 주공이 예상되는 고랑포 일대의 국군 제1사단은 미 제1군단의 우익으로써 제12연대를 사단 우일선으로 도감포-마포리-가월리 일대에, 제11연대를 좌일선으로 가월리-주월리-두지리-자장리-자하리-장파리 일대에, 그리고 제15연대는 예비로 적성-마지리 남쪽에 각각 배치하였다. (3) 작전계획 12월 26일, 미 제8군사령관에 부임한 리지웨이 중장은 유엔군은 추가적인 증원이 없이는 38선상에서 재반격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보고 적의 전력을 소모시킴으로서 공세로 전환한다는 계획을 검토하였다. 따라서 "공세적 방어작전을 반복함으로서 공수의 전환을 도모한다"는 전략 방침을 확고히 하고, 이를 위해 단계별 방어선을 구체화하였다. 제1통제선 : 38도선 진지로 임진강 남안에 연하여 양양에 이르는 선 제2통제선 : 수원-양평-홍천-주문진을 연하는 선 제3통제선 : 37도선 진지로 평택-안성-원주-삼척 선 제4통제선 : 금강선으로 금강 남안과 소백산맥을 연하는 선 제5통제선 : 소백산맥 선으로 , 낙동강 방어선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선 제6통제선 : 1950년의 낙동강 방어선 이 방어계획은 미 제8군이 낙동강방어선까지 몇 개 선으로 구성되는 방어진지를 준비하여 한 선에서 적에게 최대으 타격을 가하고 다음 선으로 이동하는 기동방어 계획이었다. (4) 전투 편성 중공군의 제3차 공세 경과('50.12.31-'51.1.8) 평강 토산 철원 김화 장풍 국1사 국6사 미24사 화천 양구 속초 '50.12.31 포천 국2 국5 국8 인제 양양 '50.12.31 미25사 춘천 국3사 수도사 터 가평 국7 국9 C선 D선 강화 의정부 홍천 강릉 미3사 C 서울 C 영29 C선 C 미1기병 횡성 D 수원 187공전 원주 오산 국2 수정된 D선 국8 국7 D선 D 국5 정선 국수도 삼척 평택 안성 미24 국9 1월 7일 미3 국1 영27 1월7일 D선 영29 국6 미7 영월 제천 태백산 충주 미9연, 미17연 천안 32연 국2 국3사 터어키 청주 31연 조치원 안동 적10사 미1기병, 미25사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은 '50. 12. 13일까지 1주일에 걸쳐 38도선 이남으로 철수를 완료하고,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은 12월 24일 흥남에서 최종적인 해상철수를 실시하여 부산지역에 집결하였다. 한반도 250km를 횡단하고 종심 60km인 전선에 두 개의 기본 방어선을 편성하여 제1방어선인 A선은 서쪽의 임진강 하구에서-문산-38도선을 따라 양양에 연결하는 선, 제2방어선인 B선은 서쪽 고양에서 의정부-가평-자은리-동해안 동덕리까지 연결선, 또 방어종심을 확대하기 위해 영등포에서 한강 남안을 따라 양평--횡성-강릉으로 이어지는 C선, 수원에서 이천-원주-평창--삼척을 연하는 D선, 37도선을 따라 평택-충주-삼척을 연하는 E선으로 편성하였다. 이에따라 미 제1군단은 좌측의 터키여단이 서울 서쪽 염하수로 하구-김포지역을, 중앙의 미 제25사단이 서울 북방의 임진강 하류 제방을, 그리고 우측의 국군 제1사단이 임진강진지-33번 도로를 각각 방어하고 군단예비인 영연방 제29여단이 서울 근교 1번국도를 따라 집결하였다. 미 제9군단은 좌측의 국군 제6사단이 주월리-양문리를, 우측의 미 제24사단이 의정부-포천의 3번국도의 방어를, 그리고 군단 예비인 영연방 제27여단은 33번도로와 교차로 부근을, 미 제1기병사단도 서울-춘천 도로의 방어를 담당하였다. 동부전선의 좌측방인 국군 제3군단은 좌측 제2사단이 양문리-탑두울, 중앙의 제5사단이 탑두울-배후령, 그리고 우측의 제8사단이 경운산-추전리 방어를 담당하였다. 또한 전선 중앙의 국군 제2군단은 제3사단이 추전리-갑둔리 지역 방어를, 우측의 국군 제1군단은 좌측의 제9사단이 갑둔리-도채동, 우측의 수도사단이 도채동-동해안 지역 방어를 담당하였다. 미 제8군의 예비는 미 제3사단과 제7사단, 그리고 미제1해병사단으로 미 제7사단과 미 제1해병사단은 부대정비 중에 있었고 미 제3사단은 아직 해상에 머물고 있었다. 미 제2사단은 네덜란드와 프랑스 대대의 증원을 받고 충주에, 서쪽의 미제187공정연대전투단은 타일랜드 대대를 배속받아 수원에 집결하고 있었다. 이들 부대를 제외하고 국군 제11사단과 12월 중순 한국에 도착하여 8주간의 훈련을 실시하고 있던 캐나다 경보병대대가 있었고, 뉴질랜드 제16야전대대와 미 제2공수특전중대와 제4공수특전중대가 12월 31일 도착 예정이었다. 3. 전투 경과 가. 서부지역 전투 (1) 임진강 지역 전투('50. 12. 31~'51. 1. 3) 임진강지역 전투는 국군 제1사단이 '50. 12. 31일 부터 '51. 1. 3일까지 제3차 공세를 개시한 중공군 제39군에 맞서 임진강 일대에서 도하저지작전을 수행하고 고양 봉일천을 거쳐 한강 남족 영등포 일대로 축차적으로 철수하면서 적을 지연한 전투다. 사단은 평양 이남으로 철수하면서 사리원에서 남천으로, 위천리와 구하리 일대에서 지연진지를 점령ㅎ면서 패잔병을 소탕하고 아군부대드르이 철수를 엄호하면서 미 제1군단의 철수가 완료되자 고랑포,법원리, 신산리 일대에 진지를 점령하였다. 중공군의 주공이 서울 방면의 고랑포 일대 국군 제1사단 지역이 될 것으로 판단하여 제1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좌전방 제11연대를 비장리 일대에, 우전방 제12연대를 도감포 좌측 일대에, 제15연대를 예비로 적성의 마지리 일대에 배치하였다. 이때 중공군 제39군은 12월 30일 까지 국군 제1사단 방어지역에 제115.116.117 사단을 배치하고 영하 25도의 혹한 속에서도 볏짚 등으로 화포나 박격포 등을 위장하며 공격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12월 31일 17시에 중공군은 38도선 전전선에서 제3차 공세를 개시하였다. 중공군이 인명을 돌보지않고 강습도하와 돌파로 우회와 포위의 양면전수를 전개하여 적중 고립을 피하고 차선책으로 사전 게획된 철수를 단행하게 되었다. 임진강 지역 전투('51.12.31~'51.1.3) 백학 중115사 중116사 중117사 자작리 마전리 고랑포 임진강 어유지리 마포리 도감포 주월리 가월리 율포리 12연대 장좌리 비장리(자장리) 적성 11연대 마지리 설마리 15연대 감악산 장파리 파평산 사기막 금곡리 구암리 -------------------------------------------------------------------------------------------------------------------------------------- 연풍리 법원리 노고산 11연대 15연대 가납리(백석읍 위 : 양주) 신산리(광탄) 중공군 제1사단 우측의 제12연대 방향에 2개 연대를 집중하여 인해전술로 피리불고 징과 꽹과리, 북과 나팔로 다시한번 운산의 아픔을 연상케하는 침투식 기동으로 부대간격이 돌파되고 포위되면서 철수를 강요하였다. 사단 좌측의 제11연대 지역은 '50. 12. 31일 당일 오후 18시 30분 경, 우측 제12연대 1대대를 돌파한 적이 공격을 해왔고 주월리 남쪽으로 적이 침투하였다. 사단 예비인 제15연대는 적정 남쪽 고지군에 병력을 배치하고 있었는데 날이 어두워지면서 제12연대 병력과 중공군이 뒤섞여 연대 방어진지 정면으로 접근하여 182고지(현재 180m)가 피탈되었다. 전반적으로 사단의 주저항선이 무너지고 축차진지에도 중공군이 부대별 간격을 이용하여 침투해 들어오고, 이에 제1사단은 연대단위로 예비 대대를 투입하여 역습을 하면서 제11연대와 제15연대는 법원리 와 노고산을 연하는 선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제12연대는 측방이 노출되어 거의 건재를 유지하지 못한 채로 가납리로 내려서고 있었다. '51. 1. 1일 , 중공군은 05시에 동두천 남서쪽 비상리, 선암리에 진출한다. 제12연대는 지난밤 분산되었던 제1대대가 경신리 비석거리 부근에서 재집결하여 연곡리 일대를 경계하고, 제2, 3대대는 동두천 서남쪽에서 다시 포위되어 가납리 서쪽으로 이동했다. 제15연대는 제3대대가 감악산 서록(사기막, 설마치고개 위로 추정)의 도로 양측고지에 우측의 제12연대 일부병력과 배치되었으나 아군의 낙오병에 뒤섞인 채 밀려드는 적의 압력으로 축차진지상으로 계속 철수하게 되었다. 제11연대는 금곡리-법원리 도로를 중심으로 제1, 3대대를 배치하고 제2대대는 금병산부근에 배치하였으며 이대 사단사령부는 신산리에서 서울 녹번동으로 이동하였다. 중공군 제3차 공세 3일째인 1월 2일, 제1사단은 군단명령에 따라 사령부를 안양으로 옮긴 가운데 전방의 각 연대를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게 되는데 먼저 와해되어 철수한 우측의 제12연대는 과천으로 옮기고 동작동-흑석동-한강철교선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제15연대는 제1대대가 덕도리-오산리선에서 고양리에 집결, 철수 후에는 노량진 일대 점령, 제2대대는 은곡리-비암리 전진바위 일대에서 연대의 철수를 엄호하고 고양리에 집결, 철수후에 영등포일대를 점령, 제3대대는 가업리(백석읍)로 이동, 의정부 본도를 확보하고, 철수시 의정부-송추-일영리를 경유 고양리에 집결, 철수 후에 여의도 진지 점령토록 하였다. 그러나 이미 제3대대는 전날 명령이전에 주력과 대대장이 서로 분산하여 이탈하는 혼란을 맞기도 했다. 제1대대와 대전차대대도 돌파되었고, 제2대대는 법원리에서 적 1개대대와 교전을 했으나 좌측 제11연대 1, 3대대 간격으로 침투한 적에게 배후를 기습당해 진지가 무너지고 말았다. 제2대대는 대육리 일대에서 집결하여 진지를 고수하고 있다 철수하여 결국 모든 부대들이 차량으로 한강 도하교를 넘어 영등포에 이동하였다. 제11연대는 계속 법원리를 방어하던 중, 미군의 차량지원을 받아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였다. 이 사이에 제12연대가 우일선을, 제15연대가 좌일선에서 동작동-노량진-영등포 일대의 한강선을 방어하였다. 사단은 제2훈련소로부터 632명의 병력을 인수하여 제12연대에 400명, 대전차공격대대에 232명을 보충하였다. '51. 1. 4일 사단은 서울 철수를 완료 하였고, 사령부를 안양에서 수원으로 , 이어서 37도선 점령지시로 안성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방어진지를 구축하게 된다. 국군 제1사단은 이번 임진강 부근 전투에서 제11연대와 제15연대는 적 사살 1,151명, 살상 150명의 전과를 올렸고 아군전사는 63명, 부상 153명, 실종 490명의 손실을 입었으며 대부분이 우측 연대인 제12연대와 대전차 대대 소속이었다. 이때 교두보선을 학보하고 있던 미 제25사단과 영 제29여단이 국군 제1사단의 철수를 엄호 하였다. 이후 국군 제1사단은 '51. 1. 6일 천안 입장으로 이동하였고, 광주 판교를 거쳐 철수한 제12연대는 예비대로 안성 일대에, 제15연대는 전방부대로서 안성천 남안의 진지를 강화하고, 제11연대는 과천에서 안성 서쪽으로 철수하여 경부국도 연변을 경계하였다. 이때 사단의 우측에는 미 제9군단이 장호원-죽산 북쪽 선을 담당하여 국군 제6사단이 우인접 부대로 방어진지를 구축 중에 있었고, 좌측에는 미 제3사단이 평택 일대에 진지를 점령했다. 이 무렵 적은 아군과의 접촉이 끊어졌다. 이러는 동안 국군 제1사단은 부대정비를 실시하고 1월 7일 육군 보충대로부터 약 1천여 명의 신병을 인수하여 제12연대에 250명, 제15연대에 450명, 사단 대전차 대대에 293명을 각각 보충하였다. (2) 동두천 지역 전투('50. 12. 31~ '51. 1. 3) 동두천 지역 전투는 동두천-의정부 북쪽 38도선 일대에서 방어편성을 하고 있던 국군 제6사단이 '50. 12. 31~'51. 1. 3일까지 중공군 제38군을로부터 제3차 공세를 받아 소요산과 마차산 일대로 철수하면서 적을 지연시킨 방어전투이다. 국군 제6사단은 미 제9군단의 좌일선 부대로서 제9군단장 무어 소장은 국군 제6사단으로 동두천 북쪽 10~20km의 38도선 일대를 방어하라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국군 제6사단(사단장 장도영 준장)는 동두천 일대로 철수한 후 38선 부근에 주저항선을 편성하엿다. 사단은 전곡-동두천 도로 좌측의 고능리 부근에 제7연대를, 우측의 추동리에 제19연대를 배치하였다. 그리고 제2연대는 방어종심을 유지하기 위하여 마차산과 쇼요산일대의 예비진지에 배치하였다. 포병대대는 봉암리에 공병대대는 덕정에 배치하였다. 사단의 우익에는 미 제24사단이 포천 북쪽을 담당하고 좌익에는 국군 제1사단이 적성 일대를 점령하게 되었다. 동두천 지역 전투('51.2.31~'51.1.3) 만유촌 중38군 통현리 중112사 중113사 중114사 전곡 고소성리(백의리) 마포리 고릉리 초성리 대전리 추동리 주원리 영송리 양문리 제7-2대대 제7-1대대 제19-1대대 제19-2대대 어유지리 하봉암리 제6-7연대 제6-2연대 상봉암리 소요산 금동리 제6-19연대 걸산리 안홍리 동두천 국사봉 국군 제6사단은 1950년 12월 중순부터 보름동안 방어진지를 강화하였으며 거의 완전한 3개 연대를 갖추었다. 드디어 중공군이 '50. 12. 31일 공격을 감행하였으며 비무장의 양민을 앞세워 지뢰지대를 통과하도록 하는 야만적인 공격을 감행하였으며, 이어 주력부대가 인해전술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주로 야습과 우회를 혼용하고 교란전을 배합하여 공격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최초 공격은 최후방어사격으로 주저항선에서 저지하였으나, 12. 31일 18시 40분경 사단의 좌인접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가 돌파되어 적의 일부가 사단의 후방인 안홍리(동두천 서북방) 부근으로, 우인접 미 제24사단이 돌파되어 적이 동두천을 기습 공격함으로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중공군 제3차 공세 이틀차인 '51. 1. 1일 새벽에 중공군이 사단 후방지역으로 침투하면서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어 사단 지휘소를 덕정으로부터 서울 창동으로 이동 개설하고, 사단 주력은 예비인 제2연대 엄호하에 예비진지로 철수하도록 하였다. "한겨울, 복숭아 밭에 핀 하얀 꽃" 제19연대장은 회암리와 송우리일대의 예비진지를 점령하라는 명령에 따라 동두천으로 철수하는과정에 바로 미 제24사단 지역으로 돌파한 중공군에 기습을 당해 분산되어 덕정으로 철수를 개시하였다. 제7연대장은 용암리와 매정리의 예비진지로 철수하려 했으나 이미 적이 침투하여 계속하여 덕정을 경유하여 의정부, 창동으로 집결하게 되었다. 제1대대가 걸산리에서, 제2대대는 상봉암리에서 안홍리쪽으로 침투하는 적을 견제하다 적과 교전 후에 연대는 덕정을 거쳐 계속되는 적의 압력에 21시경 창동으로 철수하였다. 제2연대는 인접사단을 돌파한 적이 동두천을 공격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방어진지를 점령하였다. 중공군 제3차 공세 3일차인 1월 2일, 국군 제6사단은 주력 대부분이 창동에 집결하여 수도권 방어를 위한 준비중, 미 제8군의 의정부지역 방어를 영 제27여단에 부여하여 한강 방어선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에따라 국군 제6사단은 1월 2일에 연대별로 철수를 하여 제2연대는 창동에서 차량으로 한강 남안의 신장리로, 제7연대는 창동에서 경기 광주로, 제19연대는 경기 광주 수진리로 이동하였고 사단은 지휘소를 용인 동림리(모현면)에 개설하였다. 이 전투에서 제6사단은 적 사살 594명(추정), 포로 22명이었으며 사단은 전사 50명이였다고 기록된다. 사단은 제2연대가 금량장리를 거쳐 안성 동북쪽 일죽면에, 제7연대는 광주에서 양지리를 거쳐 백암리일대에, 제19연대는 만등리에서 죽산을 거쳐 진천 북쪽의 대풍리로 철수하였다. (3) 서울 철수 작전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제3차 공세를 받고 불과 며칠 사이에 38도선에 물러나 서을을 철수하는 위기를 맞았다. 새로 부임한 리지웨이 미 제8군 사령관은 "우리는 한반도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는 이승만 대통과의 약속은 거짓이 되어갔다. 그런데 여기서 서울 철수를 하게되는 결정적 사건이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한강 상에 설치된 교량을 통제하는 공병부대에서 올린 보고서였다. 보고서에 민간인들이 교량이 아닌 한강을 도보로 횡단하는 모습을 보고, 한강이 완전히 결빙되어 한강을 통한 적의 공격시 포위될 위험에 있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동부전선의 불안이었다. 1월 3일까지도 C방어선인 양평-홍천-원포리를 잇는 선을 점령하지 못하게 되자 미 제8군 사령부 작전참모가 리지웨이 장군에게 현 상황에서는 D선(평택-안성-장호원-원주-원포리)도 점령하기 어렵다고 보고한 것이다. 이 무렵 중공군 제66군은 제42군의 지원을 받아 가평을 점령하였다. 3일 8시에는 중공군의 긴 종대가 서울-춘천 도로를 따라 가평 남서쪽으로 이동 중이었다. 그 선두는 퇴계원 일대를 방어중인 미 제1기병사단의 15마일 전방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공군이 기병사단을 우회하여 서쪽으로 공격한다면 1번국도가 차단될 수 있는 가능성도 농후하였다. '51. 1. 3일, 중공군은 유엔군의 서울 철수를 간파하고 전과확대를 위해 3일, 계속 공격을 명령하였다. 1번 국도를 따라 진출하는 중공군 제50군이 3일 03시경 미 제25사단을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이어서 아침 무렵에는 333번 도로(철원-연천-의정부)를 따라 중공군 제39군의 일부가 영 제29여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미 제1군단장과 제9군단장은 상호 협조하에 교두보선에서 철수를 계획하고, 미 제1군단이 서을 남쪽에 2개의 교량을 이용하고, 미 제9군단은 동쪽의 1개 교량을 이용하도록 하였다 당시에 한강에는 미 공병대가 가설한 다리가 중장비가 기동이 가능한 다리가 남쪽에 1개, 동쪽에 1개 그리고 사람이 걸어서 넘는 도보교는 5개가 가설되어 있었다. 고양 덕양 일영-선유동의 아픔: "영 제29여단의 엄청난 인명피해, 300여명 손실, 전차 10대 파괴됨" 1. 3일, 미 제1군단은 미 제25사단 제27연대의 엄호하에 사단 주력이 철수를 완료하자 이어서 18시 40분경 영 제29여단이 이동을 개시하였다. 그런데 이동중인 자정 무렵 중공군 제39군의 주력 부대가 영 제29여단의 후미를 기습 공격하였다. 엄호임무를 수행중인 제27연대를 제외하고 모든 부대가 한강이남으로 철수하여 증원 부대가 없었다. 이 과정에서 영 29여단은 200명에서 300명에 이르는 인명피해와 탱크 10대의 손실이 발생하면서 4일 03시 30분경 한강이남으로 철수가 완료 되었다. " 원래 영국군 참전비는 설마리가 아니고 이곳에 있던 것이 설마리로 옮겼다고 한다." 한편 미 제9군단의 철수는 적의 방해가 없이 마치 훈련을 하듯 진행되었다. 강북의 모든 부대들이 철수를 완료한 4일 02시부터 공병에 의한 교량해체 작업이 진행되었으나 강추위로 부품들이 얼어붙어 어려움이 많았으며 결국 07시 30분경 교량 폭파 명령이 내려갔다. 교량이 폭파된 후 1시간 가량 지나서 중공군이 서울에 입성하였고 서울 시청 건물에 인공기가 걸렸다. 인천항도 5일까지 폭파하여 적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한강을넘어 수원역 일대에 모인 약 10만의 피난민이 열차의 운행에 차질을 가져옴으로서 유엔군은 이에 대한 통제대책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철수작전이 일단락된 미 제1군단은 평택 남쪽의 1번국도 좌측 서해안 지역에 영 제29여단(태국 대대 배속), 우측 구릉지역에 미 제3사단, 17번 도로 우측 안성 일대에 국군 제1사단을 배치하여 주저항선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방어종심을 유지하기 의해 미 제25사단과 터키여단을 천안에 군단 예비로 확보하였다. 미 제9군단도 국군 제6사단을 좌인접 국군 제1사단과 연결하여 죽산리일대에, 영 제27여단을 법천리 일대에, 미 제24사단을 장호원 일대에 배치하여 주저헝선을 형성하고, 미 제1기병사단은 군단 예비로 충주에, 제5기병연대는 단양일대에 활동중인 적 유격대의 공격에 대비하여 충주-문경간 도로를 점령토록 하였다. "고랑포에서 생긴 중공군 소령과 방마담의 러브스토리" 한편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는 국군과 유엔군이 의도적으로 평택-안성-제천-삼척선으로 물러나 중공군을 유인하기 위한 철수작전이라고 판단하고 8일 추격작전을 중지시켰다. 나. 중동부 지역 전투 (1) 춘천 지역 전투('50. 12. 30~'51. 1. 1) 춘천 지역 전투는 국군 제3군단이 제2사단을 명지산 북쪽의 고지군에, 제5사단을 화천-춘천 도로변의 지촌리에, 제8사단(제7연대 3연대 증강)을 화천저수지 남쪽의 내평리 일대에, 그리고 제3사단을 인제 남쪽 소양강변의 청구리에 배치하여 주저항선을 편성하였다. '50. 12. 31일 자정을 넘기면서 제2사단과 제5사단 지역에 중공군의 집중공격이 가해졌다. 제2사단의 좌전방 만세교리 동쪽에 배치된 제17연대와 우전방 화악산 일대에 배치된 제32연대는 적의 초기 공격에 주저항선이 돌파되어 철수를 개시하려 했으나 좌우 인접 사단과의 전투지경선으로 침투한 적이 퇴로를 차단하여 분산 철수하게 되었다. 바로 예비인 제31연대를 투입하여 진출 중인 적을 차단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사단이 지휘통제 마비 되었다. 제5사단은 좌전방 제36연대는 북한강 동쪽 지암리 일대에서, 중앙의 제35연대는 송암리에서, 우전방 제27연대는 고성리 일대엣서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35. 27연대는 경미한 피해를 입으며 춘천으로 집결하고 있었으나 우전방 제36연대는 좌익 제2사단 제32연대 지역으로 침투한 중공군이 완전히 퇴로를 차단하고 있어 분산하여 북배산을 경유 북한강을 넘고 용문을 거쳐 양평에 철수하였다. 제8사단은 내평리를 방어하고 있다 접적이 경미하여 주저항선을 유지하였으나 좌우 인접 사단이 철수하면서 적중에 고립될 위기에 직면하여 사단도 홍천으로 철수하였다. 춘천 지역 전투('50.12.30~1.1) 중66군 북2군단 중118사 화천 양구 북2사 중116사 중117사 내평리 북12사 북10사 국8사 인제 국7사 국3/국9사 국5사 상수내리 미24사 /국2 지촌리 청구리 국2사 명지산 관대리 국3사 어론리 춘천 국3/국2 국2/국1 가리산 자은리 가평 (2) 인제-현리부근 전투 중서부 전선의 국군 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신정공세를 받고 있을 무렵, 중동부 전선의 국군 제2군단(배속 : 제3사)과 제1군단(배속 :제9사. 수도사)의 상황은 판이하게 달랐다. 양 군단은 오히려 정면공격보다 신정공세 이전에 후방으로 침투하여 퇴로를 차단한 북한군 제2군단과 제5군단의 일부 부대와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국군 제3사단은 흥남에서 부산으로 철수한 직후 제2군단에 배속되어 12월 15일, 원주로 진출한 다음 인제지역 38선 상에 배치되어 적을 포착 격멸하라는 명에 따라 인제로 북상하였다. 이와 함께 제26연대는 수도사단으로 수도사단의 제18연대는 제3사단으로 예속이 전환되었다.(당시 철수시 같은 제대에 있던 관계로 함께 이동중 고려) 이 무렵 동해안 주문진에서 서쪽 소양강 일대 38선을 연하는 북쪽에 중공군 제9병단 예하 66군과 북한군 제2군단(제2전선 부대)부대들이 공격준비를 하고 있었다. 북한군 제2군단은 아군의 총반격작전 시기 북한군 패잔병들을 모아 편성한 혼성 유격부대로서 아군이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부진할 무렵 낭림산맥과 태백산맥 및 철원-금화-평강 일대를 거점으로 하면서 아군의 후방을 교란하였다. 국군 제3사단이 38선 남단에 배치하였을 때 전면에는 북한군 제2사단이 진지를 강화하고 있었고 병력은 약 2,700명 수준으로 신병 등 혼성 부대였다. 국군 제3사단이 1950년 12월 20일 경 춘천부근 방어를 위해 홍천에 집결을 완료하였다. 이때 20일, 제2군단 예하였던 제9사단과 제1.2.3경비대대가 제1군단으로 배속 변경되고 대신 제3사단과 제7사단이 제2군단에 배속되었다. 제7사단은 이미 춘천부근에서 진지를 점령하고 있었고, 제3사단은 제7사단 우측에서 인제 남쪽의 38도선을 중심으로 중동부전선에 진지를 점령하게 되었으며 제2군단은 제3사단의 1개 연대를 홍천에 집결시켜 군단 후방을 경계하도록 하였다. 제3사단은 관대리 일대에 주저항선을 구축하고 있었고, 바로 정면에 북한군 제2사단이 증강되고 있었으며 창봉리에 적이 출현하였다. 또한 사단의 우인접 제9사단의 현리지역을 돌파한 적 1개 연대가 제3사단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 횡성 북쪽에 출현하고 창봉리로 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3사단장 최석 준장은 전방에 2개 연대로 방어토록 하고 예비인 제23연대로 , 사단을 증원하기 위해 북진 중인 미 제2사단 제23연대와 협동으로 삼마치 일대에서 '50. 12. 31일 적을 격퇴하고 연결함으로서 사단의 퇴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날 제3사단은 육본으로부터 제2군단에서 배속 해제와 동시에 군 예비가 되어 평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아군전사 1명, 부상 2명의 전투손실 과연 맞는 것일까?, 반대로 적은 오대산 등지에서 261명 사살, 포로 26명" 한편 현리 남쪽의 상남리 부근을 방어 중인 제9사단은 1월 1일 오덕준 준장의 후임으로 사단장에 부임한 김종갑 준장의 지휘하에 수일전에 피탈당한 현리지역을 재탈환하기 위하여 상남리-1091고지-광주동-방태곡-용포를 목표로 공격을 재개하였다. 그런데 좌인접 제3사단 지역을 돌파한 적 1개 연대규모가 오마치 고개 서쪽의 금부리 전방으로부터 기습공격을 가해와 2일 18:00시까지 혈전을 펼쳤으나 일몰로 방대곡으로 철수하게 되고 이 과정에 제29연대 제3대대가 적중에 고립되어 분산 철수하게 되었다. 1월 3일, 제9사단은 13시경 제1군단에서 제3군단으로 전속되고 차기 방어선을 점령하기 위해 철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이미 적이 사단 후방을 차단하고 있어, 금부리 1091고지와 광주동에서 상남리 일대로 철수한 제29, 29연대는 퇴로가 차단되고 사단과의 연력도 두절되어 각 연대별로 도보로 사단 사령부가 있는 속사리로 철수를 단행하여 진내로 침투한 북한군 제10사단 일부와 교전을 하며 4일 창촌을 경유 속사리에 집결하였다. 그러나 다시 오대산으로 침투한 적 2천여 명이 사단 후방을 차단하려 하고, 좌인접 제3사단도 적 12사단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어 제3군단장 이형근 준장은 제3사단과 제9사단을 황우선(영월-삼척)으로 철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동해안을 방어 중인 수도사단은 도채동-서림-양양선에 주저항선을 구축하고 있었으나 적은 정면공격보다는 오대산과 설악산으로 연결되는 산악지지형을 발판으로 사단의 후방으로 진출하여 후방을 교란하는 작전을 기도하였다. 이대 제26연대는 12월 30일 제9사단 제30연대와 협동작전으로, 사단 후방지역인 대사리에 진출하여 이 일대에 진출한 적 약 1,000명을 포착하여 제3대대가 하진부리가지 진출했으나 구축에는 실패했다. 이런 상황에 '51. 1~2일 어간에 욱두동고지와 영월 동북 고지 일대에 북한군 제2전선부대들이 침투하자, 군단장은 즉시 경비대대를 투입하여 적을 두일리 방향으로 격퇴하였고, 바로 수도사단 제26연대 제3대대가 두일리의 적을 격퇴하였다. 한편 격전장을 시찰하던 리지웨이 제8군 사령관은 항공정찰을 통하여 철원 방면에 적의 대부대들이 내려오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 제2, 5사단 등이 안전 포위 될 위험에 처하는 등 현 전선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판단하에 '51. 1. 1일 정오에 미 제1, 9군단은 서울 교두보선으로 철수하고, 국군 3개 군단을 C방어선(한강-양평-홍천-원포리)으로 철수 명령을 내렸다. 다. 중동부전선의 위기 중공군은 신정공세에, 주공을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에 지역으로 지향하였고, 조공은 중부전선의 국군 제3군단을 공격하엿다. 아군이 중서부전선에 관심을 집중하는 사이에 또 하나의 조공부대인 인민군 제2군단과 제5군단이 태백산맥의 준령을 이용하여 중동부 전선으로 소리없이 침투하고 있었다. 중서부전선 부대들이 중공구네 밀려 서울과 한강 북쪽에서 철수하여 D방어선을 점령할 무렵, 신정공세를 마믈라도 하려는 듯 이번에는 인민군을 동원하여 중동부전선에서 혈전이 평쳐지게 되었다. (1) 북한군 기도 북한 군 제2군단은 아군의 반격작전에 괴멸의 위기까지 몰렸으나 중공구늬 참전으로 2개월의 시간을 벌어 재편성을 완료한 후 신편인 제5군단과 함께 중동부 전선에 배치 되었다. 이 두군단은 중공군의 신정공세를 지원하기 위해 12월 하순 태백산맥의 준령과 아군의 부대간격을 이용하여 제2사단과 제12사단을 아군의 주저항선 후방으로 침투시켰다. 이로 인하여 국군 제3군단 예하 사단들이 퇴로가 차단되어 주저항선에서 물러나게 되고, 인제로부터 홍천에 이르는 돌파구를 허용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 원주를 방어주인 미 제2사단이 생포한 포로진술을 통하여 춘천-홍천-횡성을 연하는 29번 도로를 연하여 서측은 방호산이 지휘하는 북한군 제5군단(제6.7.12.27.28.43사)이 동측에는 최현이 지휘하는 제2군단(제2.9.10.31사)이 산악을 타고 남쪽으로 기동하여 원주, 제천, 단양, 그리고 대구를 공격한다는 진술을 확보하였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이 '51. 1. 6일 밤 횡성에서 남하한 북한군 제6사단과 제27사단이 다음날 여명을 기해 원주북방에서 전투태세를 완료하였고 대기하였다. 이에 앞서 홍천-횡성으로 진출한 북한군 제2사단이 원주 북서쪽을 방어중인 국군 제8사단 10연대의 전방으로 이동하고 북한군 제10사단도 원주 동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 무렵, 설악산에는 길원팔이 지휘하는 유격대 2,000명의 공비들이 후방진출을 노리고 있었다. (2) 아군 상황 중공군의 신정공세를 받아 중동부전선에서 물러난 국군은 제1군단의 수도사단만이 2일 계획된 C방어선(양평-홍천-원포리)을 점령하였고, 제3군단 예하의 제2. 5. 8사단의 전황은 불투명 하였다.' 군단의 좌전방 제2사단은 제5사단 좌측방을 뚫고 들어온 중공군 예하 66군 부대들에 가평 북방에서 고립되었고, 중앙의 제5사단과 우측의 제8사단은 통신마저 두절되어 상황 파악도 어려웠다. 한편 군단 예비인 제7사단은 원주 북방에 집결중에 있었고, 국군 제3사단은 24번 도로를 따라 홍천으로 이동 중에 있었으며 평창에 집결할 예정이었다. 적의 신정공세에 산악지대의 넓은 광정면을 담당한 중부전선의 제2. 5. 8사단의 춘천 정면이 돌파되고, 적의 유격대가 도처에서 아군의 보급로와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는 부대정비에 주력하던 미 제10군단을 조기에 투입 결정하고 인제-홍천 일대의 돌파구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1월 3일부로 주력부대인 미 제2사, 미 제7사단을 투입하여, 국군 제3군단으로부터 배속받은 제2. 5. 8사단 등 5개 사단으로 춘천-홍천 도로를 중앙에 두고 C방어선 상의 48km에 달하는 방어선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가평, 춘천 일대의 작전지역을 미 제10군단에 인계한 국군 제3군단은 제7사단과 국군 제1군단으로부터 배속받은 제9사단으로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 사이의 험준한 태백산맥 지역을 맡아 적의 돌파구 첨단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제9사단은 전투로 고전하고 있고 제7사단도 서쪽으로 이동해야 하므로 상황을 낙관할 수 없었다. 다른 군단에 비히여 북한군과의 접전이 경미한 제1군단도 제사단을 제3군단에 배속전환하고, 대신 제2군단에서 제3사단을 배속받아 태백산맥 동쪽에서 동해안까지 전선을 방어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3사단이 홍천에서 남쪽으로 우회기동하여 군단에 복귀하는 데는 많은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어 동해안의 수도사단과 원주 북쪽의 미 제2사단 사이에는 배치 공간이 생겨 매우 불안한 상황 이었다. 이 무렵 육본은 5일 밤, 국군 제1, 3군단에 원주-삼척간의 수정된 D선으로 철수를 명하였다. 이에따라 6일 원주를 지나 충주-제천-영월-삼척 선으로 철수 남하 함으로서 원주 일대에서 국군의 철수를 엄호하던 미 제2사단의 동측방이 노출되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 이 무렵 철수 중인 국군 부대들은 너무 자주 수정되어 내려오는 명령 때문에 부대지휘의 혼란과 불필요한 이동으로 체력소모도 많았다. (3) 원주 쟁탈전 미 제10군단장은 38도선에서 철수한 국군 제5사단을 남한강 동쪽에, 중앙에 국군 제8사단을, 원주에는 미 제2사단(제9연대 결)을 배치하여 원주 방어에 중점을 두었다. 이때 미 제7사단의 주력과 미 제2사단의 일부는 제천으로 이동하고 있었고, 국군 제2사단은 군단 예비로 충주 남쪽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미 제2사단장은 원주 외곾을 따라 서쪽과 남쪽에 제23연대를, 제38연대를 북쪽과 북동쪽에 배치하여 주저항선을 편성하였다. 북한군 제5군단은 주력부대의 공격에 앞서 7일 05:30분 400명 가량을 민간인으로 위장시켜 29번도로를 따라 내려오는 피난민 대열에 잠입시켰다. 이들이 미 제2사단의 후방까지 내려와 부대를 공격하므로서 침투공격을 알게 되었다. 이 공격과 동시에 북한군 제12사단이 사단의 좌인접으로 문막 북동쪽 국군 제8사단 제10연대를 공격하여 이 지역을 돌파하고, 남동쪽으로 진출함으로서 미 제2사단의 방어진지가 돌파되어 버렸다. 원주 지역 전투('51.1.6~1.12) 묵계리 북연대? 북5군단 우항리 안홍리 누산 섬강 미2-23연 북12사 미2-8연 원주 미2-38연 치악산 외남송 단구리 국8-10연 문막 ▲ 247 ▲ 599 남대봉 명봉산 미천 (토지문학관) 국8-10연 미2-38연 덕가산700 백운산1066 가리파 이렇게 미 제2사단은 사단의 방어선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원주-목계동 도로로 철수하여 7일 밤에 제23연대는 원주 남쪽 7km 위치에, 제38연대는 그 보다 더 남쪽인 미천 부근에 배치하였다.그러나 너무 남쪽으로 철수하여 경포사거리 원주가 벗어나 있었으므로 미 제10군단장은 8일 새벽까지 4개 대대를 시가지 바로 남쪽에 배치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미 제2사단은 8일 새벽 근접항공기의 지원 아래 외남송 일대 247고지를 제23-2대대가 점령하였으며 마침 취침중인 적을 발견하여 200명을 사살하였으나 다시 적 연대규모의 역습으로철수하여 미촌 서쪽에 배치하여 국군 제8사단의 철수를 엄호하게 된다. 이에 미 제10군단자은 다시 247고지를 확보토록 명하여 제23연대는 2개 대대를 투입하여 9일 10:00시부터 공격하기 시작하여 적의 강력한 저항으로 탈환에 실패하였다. "청천강변 군우리의 패배를 설욕하다" '51. 1. 10일에도 수차례 혈전이 진행되어 이날 하루 전투에서 미군은 적 2,000여 명을 사살하였으며 연대도 다수의 피해를 입어 11일 오후에 프랑스 대대와 네덜란드 대대의 일부를 증원 받았다. 그리고 다시 공격하여 적 1,100명을 사살하고 247고지를 수중에 넣었다. 이후 북한군 제5군단은 전부대를 원주로 투입하여 미군과 최후의 일전을 기도하였으나 많은 인명손실과 탄ㅇ냑마저 바닥나 17일 제27사단을 전방에 투입하여 접적을 유지하면서 주력은 횡성부근으로 철수하여 미군의 승리로 일단락 되었다. 이로서 원주에서 중동부전선에서 국군 철수부대를 엄호하고 동시에 적의 돌파구확장을 저지하고 아군의 반격작전을 위한 요충지를 고수하였다. 특히 미제2사단이 지난 11월 말 청천강 중류 군우리전투에서의 오명을 씻는 영광된 결전이었다. 미 제2사단은 '51. 1. 12일 원주를 탈환한 후 14일, 미 제8군사령부의 명에 따라 제천일대에 배치된 미 제7사단과의 연결을 위해 영월-모산리(제천북쪽)-죽관리(목계 동북)-담암리(장호원 동북) 선으로 철수 하였다. (4) 단양-영월 돌파구차단 중동부전선의 험준한 산악지형을 방어한 국군 제1군단과 제3군단은 신정공세 첫날부터 전방과 후방에서 협공을 받아 방어진지 유지가 어려웠다. 1월 1일에는 C방어선(홍천-원포리선)으로 철수한데 이어 5일에는 D방어선(원주-원포리)으로 철수하였다. 이때 현리부근의 제9사단은 4일 창촌을 경유, 속사리로 이동 중이고 홍천의 제3사단은 홍천-횡성을 경유 4일에는 평창에 집결해 있었다. 또 홍천-춘천으로 북상했던 제7사단은 춘천 동북쪽에서 홍천-횡성-원주를 경유, 목계-창동 선으로 철수 중이었다. 그러나 미 제8군사령관은 전방 사단들이 원주-원포리선을 점령도 하기 전에 다시 64km남쪽의 원주-정선-삼척선으로 조정하였다. 이유는 국군의 공격준비 시간학확보와 원주 동쪽의 방어력을 보강하는 차원이었다. 이에따라 제3군단의 제3사단은 7일 홍천에서 영월로, 제7사단은 신림리에서 영월로 이동 중 적과 조우하여 격전을 치르고 있었거, 제9사단은 장평에서 적과 접촉을 유지하며 정선으로 철수 중에 있고, 제1군단의 수도사단은 주문진에서 삼척으로 이동 중에 있었다. 이러다 보니 사실상 원주축선에 미 제2사단이 북하군 제5군단의 정면 공격에 맞서 있고 국군 제1, 3군단은 새로운 방어선을 점령하려 이동중에 있어서 원주 - 동해안 간에는 적의 진출을 저지할 부대가 없어 공백지역이 발생하였다. 이렇게 되자 북한군 제2군단은 이러한 아군의 취약점을 파고들어 원주-제천-단양 도로의 동쪽 산악지대를 따라 남하하였다. 이들의 선두부대인 제2, 제9사단은 아군의 새로운 방어선인 원주-삼척선보다 훨씬 남쪽인 영월부근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이때 길원팔부대를 통합지휘하게된 북한군 제2군단은 군단주력으로 정면을 공격하고 제2전선부대를 국군 제9사단의 우측방인 오대산-대관령-태기산-보현산 일대에 침투시켜 후방교란을 획책하려 하는 것으로 판단 되었다. 이로써 미 제8군사령관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고 영월일대에 대돌파구가 생겼다. 따라서 미 제8군사령관은 미 제10군단장에게 적이 영월 남쪽으로 한발짝도 넘지 못하도록 적을 저지하도록 명령하여 미 제10군단장은 원주를 공격하는 북한군 제5군단보다 영월로 진출하는 적 제2군단의 영월 남쪽 진출 저지에 작전의 우선권을 두었다. 이에 국군도 제3군단장 이형근 소장을 해임하고 육본 참모차장인 유재흥 소장을 다시 군단장으로 임명하였다. 유재흥 소장은 당시에 관하여 본인이 임무를 받고 부임해 보니 제9사단은 정선에, 제7사단은 영월 남동쪽에, 제3사단은 춘양에 집결하고 있었고 , 북한군 제2군단은 길원팔 부대와 함께 영월-춘양을 경유 영주-안동으로 바져 나갈 기세였다고 한다. (5) 정부의 총력전 태세 구축 (가) 국민방위군 편성 국민들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평양을 철수한 유엔군의 후퇴가 계속되자 정부는 중공군과 맞서 싸우기위한 목적으로 국민방위군을 설치하기로 결정한다. 1950년 12월 21일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제정하고 만 17세 이상 40세 미만의 남자를 대상으로 집단적으로 소집하게 된다. 육본은 김윤근 준장을 사령관으로 약 50만명을 소집하게 되며 교육연대가 전국 51개소에 설치되어 주로 후방지역에 위치하게 되는데 방위군 사령부는 대구에, 지역 방위군은 주로 대구 . 부산 등지에 집결하였다. 그러나 이동간 방위군사령부 고급 간부들이 방위군의 이동과 수용에 사용되어야 할 국고금, 양곡, 피복, 의료품 등을 착복하고 영하의 기온속에 이동 도주에 와병 또는 탈주자, 심지어 아사, 동사, 병사가지 생기는 등 대사건이 발생하여 그 창설 목적에 부합되지 못하고 '51. 4월에 국민방위군 사건을 끝으로 해산되고 말았다, (나) 대한청년단 무장시도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청년단 50만명을 무장시키기로결심하고 미국에 장비제공을 용청하였다. 사실 당시에 유엔군은 추가 병력획득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기존부대의 임무수행 상태가 너무나도 좋지않기 때문에 새로운 부대의 창설에는 이점이 없다고 반대하였다. 그리고 그는 대한청년단은 기존부대의 보충요원으로 운용하는 것이 최선책이라하여 반대하였다. (다) 정부의 이전 검토 미국정부가 1951년 1월 12일 중공군의 참전과 관련하여 결정한 유엔군의 전쟁지도 지침에는, 강압에 의한 철수시 유엔군은 일단 일본으로 철수하되, 한국정부와 군경은 제주도로 이전시켜 저항을 계속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망명정부 위치는 제주도로 결정하였으나 이곳에 이미 피난민과 포로 25만 명이 수용되어 있어 식수가 부족하고 추가 수용이 불간응한 상태로 먼저 포로들을 인근 근해도서로 이송하기로 하였다. 4. 참전용사 증언 및 유해발굴 위한 탐사 / 탐문결과 가. 참전용사 증언 "한겨울 복숭아 밭에 핀 꽃" 김용철 참전용사(제6-19연대) : 우리가 다시 38선을 넘어 남으로 후퇴하였다. 이건 후퇴라기 보다는 도망가는 것이다. 우리는 처음에 춘천북방에서 있었기에 이곳의 지형은 잘 알지 못했다. 우린 너무 희천에서 온정에서 당하여 피리소리만 들어도 몸이 오그라 들고 눈동자만 커져 싸울 생각보다는 또 포위되었그나 하는 생각이 앞섰다. 그러니 지휘도 필요없다. 먼저 도망가는게 사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인데 1.4후퇴 때도 그랬다. 한탄강인지 임진강인지 강 이남에 잠깐 진지를 점령하고 신정이라고 그래도 주변 마을에서 뭘 위문이라고 가져오기도 해서 먹고 긴장감이 다소 누구려졌는데 역시 그놈들이 뒤에서 나타났다. 우리가 동두천을 지나는데 길 옆에 복숭아 과수원이 있었는데 무슨 하얀 뭉치들이 수없이 널려 있다. 마치 눈밭에 눈사람같기도 하고 무슨 하얀 복숭아가 떨엊져 있는 것 같았다. 주변 주민들 이야기를 들으니 야밤에 2연대인데 들어와서 진을 치다가 중공군에 걸려들어 다 죽었다고 한다. 또 누구는 중공군이 떼로 밀려왔다가 죽었다고도 한다. 바로 옆에는 동쪽으로 소요산이고 서쪽에는 마차산이 있었다. 그런데 이미 적이 이 모든 곳을 사전 점령하여 있었고 우리 좌측에 1사단이 있었는데 그쪽으로 뚫여서 우리 뒤로 올가매버렸다. 우린 뿔뿔이 흩어져 각자 덕정으로 의정부로 내려가야 했다. 얼마나 누가 죽었느지는 모른다. 지역주민 이규숙(81세외 1명, '12) : 1.4후퇴 당시에 동두천 사과나무밭에 우리 6사단이 하얗게 죽었다. 하얀 사과가 떨어진 것처럼 너무 많이 죽었다. 나는 여자의 몸인데 당시 비행기 폭격으로 오른팔이 절단되었다. 현재 연찬 상리 공병대 뒤에 유해가 너무 많이 썩어가고 있어 걷기도 힘들었다. 내 아버지가 동두천 창말 지역에서 20구씩 나눠 국군 제6사단 군인을 2002여구 가매장 했다. "기다려도 오지않는 중대장 한철민" 유격대원 박기학 : 일사후퇴시 평양에서 국군을 따라 남하하여(육사 8기생인 한철민 대위가 통제) 가평 북방 어딘지 도착했는데 미군 비행기가 오폭을 하여 다 죽었다. 겨우 몇명인지 살아남아 현리지역에서 제9사단 제30연대에 인계되어 특공대로 활약했다. 현리일대에서 많은 피해를 입고 방태산을 넘어 평창 미탄으로갔는데 갈골이라는 곳에서 북한군의 매복기습으로 거의 전사했다. 온다던 중대장은 오지않았다. "돈 가마니 14개, 그리고 포로되어 갔다가 '53. 8월에 귀한" "유곡리 공동묘지 근처에 수많은 포로들이 죽어서 몇구씩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진기병 참전용사(제2-31연대, '12년도 12월 증언) : 1. 4후퇴 당시에 좌측에 17연대가 먼저 빠져버려 가평 북방에 2개 연대가 완전 포위 되었다. 포위되어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공격하여 매봉을 올라갔다. 아군 폭격기가 오폭하여 피해가 엄청 났다. 비행기 포격을 피해 교통호안으로 뛰어들었는데 그 속에 인민군 부상자들이 즐비하게 있었다. 돈다발이 14가마니나 있어 군속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다. 누가 먼저 총을 쏘느냐의 절대절명의 순간에 내가 먼저 갈겼다. 호안에 있는 적군 머리에 총알이 들어가고 골이 터져 전투복 야상의에 범벅이 되어 벗어 던지고 남쪽으로 튀었다. 능선을 따라 내려오는데 누군가 부시력거려 살펴보니 연대장인데 인접 32연대장이다. 몇명하고 동행하고 있었다. 왜 여기까지 올라와 있는지는 모르겠고 함게 일행이 되어 남으로 계속 내려가 가평시내인지 청평시내인지 모르겠는데 병력이 계속하여 후퇴하고 있다. 31연대를 찾을려고 했으나 없다. 그런데 갑작스레 걸을 수가 없게 되었다. 발에 동상이 걸려 아예 주저앉아 일어나질 못했다. 눈만 뜨고 있는 바보상자가 되어버렸다. 증공군이 계속 뒤에서 쫒아오고 아군은 남으로 후퇴하고, 나는 남겨지고 중공군 위생차가 있었는데 그 차에 실려졌다. 나말고도 이미 꽈 차있다. 여자군인이지 간호원이지 몰핀 주사를 놓았다. 그리고 몇일있다 도착한 곳이 유곡리한 곳인데 포로들이 엄청 있는 것이였다. 미군도 있고 높은 계급도 있는데 북쪽으로 오성산이 보였다. "포로수용소 근방에 죽은 군인의 가매장가 많다" 유곡리에서 포로생활을 하다 평강으로 갔다 다시 평양 옆으로 갔다 다시 강계로 갔다 압록강변까지 갔다. 낮에는 모두 산속에 숨어서 지냈다. 미군 폭격기가 수시로 상공에 나타나 폭격을 하기때문이다. 유곡리에서도 무슨 병인지 부상인지 엄청 죽어나가는데 바로 옆에 마을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그곳에 한곳에 몇구씩 다 묻었다. 가보면 알 수 있다. 미군도 산 밑에 묻는 것 보았다. 북한지역 포로수용소가 있는 곳은 수시로 옮겨다녔는데 대부분 광산촌 입구가 많았다. 죽으면 돌돌 말아서 입구촌 산허리춤에 묻는데장소가 거의 동일하다. 찾는다면 바로 포로 수용소가 있던 곳의주변을 탐문하면 수없이 찾는다. 나는 100명도 함께하고 500명도 함께하고 했는데 무슨 병인지 돌림병에 한곳에 100여 명 이상은 죽어서 실려나갔다. 최초는 '50년 10월 말에 매봉에 올라갔다. 그때는 우리 부대가 철원에도 있었다. 나는 첩보요원으로 철원까지도 들어가 민간인을 만나 동향을 파악해서 돌아왔다. 11월에 철원지역에 가니 중공군이 왔다고 해서 보고하니 증거품을 가져오라하여 다시 사방거리로 들어갔는데 그때가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날 밤이었다. 마침 어느 집에 들어가니 돼지가 있어서 돈다발 주고 한마리와 찹쌀을 구해 갔고와서 회식도 했다. "1. 4후퇴시 현리, 그리고 어느 산속에 눈속에 빠져 다 죽었다." "구례경찰서 유치장에 양민들을 가둬놓고 기름을 뿌리고 떠나간 북한군" "현리에서 살아(북한 여군장교도움), 백마고지도 저격능선도 전투에 참여했다" 김진수 참전용사(9사 28-2대대) : 나는 마산 진동리에서 미 제24사 카츄사로 참전했다. 흑인을 따라 다니는데 어디선가 자다보니 흑인이 혼자 도망가 버렸다. 무슨 고개일대 였다. 도망쳐서 죽기살기로 진동쪽으로 갔는데 학교 연병장에 미군이 있어 들어가니 흑인이 그곳에서 씩 웃고 있다. 북진 작전간 미군을 따라 구례. 곡성으로 오는데 경찰서 유치장에 북한군이 사람들을 포개서 쌓아놓고 기름 붓고 살아있는데 불지르고 퇴각했다. 불은 타오르고 그 곳에 간 미군들이 너무한 모습에 비명을 지르며 튀어나오고, 경찰서 뒤에는 구덩이를 파고 사람을 생매장하고 퇴각했다. 대전에서 제9사단으로 재편성하여 들어갔는데 이건 보급이 말이아니였다. 그래서 하사관학교에 지원하여 교육받던 중에 원주로 해서 현리로 들어갔는데 어디에서 잠들었는데 따발총 소리가 요란하여 눈을 떠보니 북한군에 부대가 포위되었다고 한다. 나는 이제 영낙없이 죽었구나 하고 머뭇거리는데 앞을 보니 북한군 여자 장교가 서있다. 그런데 다른 곳을 바라본다. 아무말도 없지만 나는 도망가라는 표시로 알고 도망쳤다. 산으로 산으로 도망치는데 눈이 얼마나 오느지 동료들이 눈속에 많이 죽었다. 나는 현리에서 '51. 1월초에 포위되어 살아났다. 51년 말에 철원 독립고지 281고지에서 중화기반장을 했다. 그 당시는 못 도망가게 뒤에는 독전대가 있었다. '52년도 10월에 백마고지 전투시에 낮에는 우리 밤에는 중공군이다 아군도 많이 상했지만 중공군은 떼로 죽었다. 그냥 놔두면 썩어 벌레가 득실거리고 냄새가 고약해서 옆에 있는 교통호나 포탄이 떨어진 장소애 밀어놓고 몇삽 덮어버린다. 전투를 하다 뛰다보면 물컹거리는 곳에 발이 빠지는데 사람 송장구덩이다. 백마고지, 저격능선은 어디고 파면 나온다. 나는 동생과 함께 저격능선 전투시 있었는데 휴전 당일 몇분 남겨놓고 전사했다. 그 당시에 거기 무슨 강이 있는데 중공군이 넘어와 함께 먹을 것을 나누어 먹으며 놀기도 했었다.(?) "내가 건의하여 서해안 일대 자생 유격대에 무기와 보급품을 지급했다." 이영철 미 극동군사령부 제2정보사 교동파견대 교육대장(월간조선인터뷰) : 6.25전쟁 당시에 개성에 살았으며 26의 나이로 '50. 10월에 미국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처(KLO)에 입대해 '54년 부대해체까지 강화 불음도에서 근무했다. 서울과 평양에서 첩보교육을 받고 11명이 미군과 함께 평양으로 북진해 갔다. 이 중에 8명은 함경북도에서 전사했다. 중공군이 개입하여 함께 휴전선 이남으로 철수하여 '50. 12. 12일 정보수집을 위해 적지인 황해도 황주에 낙하산으로 침투했다. 항주지역 북한군과 중공군의 위치, 보급로, 부대 이동상황 등을 보고하는 것이다. 그런데 적지에 떨어진 후 1시간 정도 지났는데 총을 들고 군인이 나타났다. 적이 아니고 먼저 들어온 KLO였다. 12월 27일 평산으로 이동한 후 상부에 적상황을 보고하려는데 무전기가 고장이다. 이때 이 대원의 통제는 미 해군 클라크 대위였다. 이러 상황에서 '51. 1. 5일 범선을 타고 서해로 탈출하여 대구에 있던 미 8군사령부에 가서 정보장교인 클라크 대위를 만났으며 그들은 이 대원이 전사한 것으로 알고 있다가 무척이나 반가워하고 놀란 모습이었다. 여기서 이영철 대원은 북한지역에 자생 유격대가 있으며 이들에게 무기와 전투물자를 지급해야 한다고 건의한 것이 받아들여져 도서지역에서 활동중이던 자생유격대에도 무기와 보급품이 지급되기 시작했다. "연백군 남산에 적부대 격멸 및 강화에 들어온 북한군 격퇴에 기여" 이 대원은 '51. 1. 15일 현역 군인 황해룡 하사와 연백 호동면 남당리 벌판에 낙하하여 지역주민을 포섭하여 중공군와 북한군의 위치를 알아내어 부대규모를 보고하였다. 비행기 4대가 투입돼 적을 괴멸시켰다. 1월 26일에는 강화도에 북한군 2,600명이 있다는 사실을 보고하여 미군 공군과 바다에서 함포가 사격을 시작하였으며 사격하던 배에서 연락이 와서 가보니 유격대원드리 요구했던 탄약과 수류탄, 그리고 미군화기들이 지원되었다. 참전용사 최창성(제3-18연대) : 나는 '49년도 처음에는 제6사단 제8연대에 들어갔다가 제18연대로 갔다. 1.4후퇴시 홍천북방 어론리지역 전투시 치열한 교전이 있었고 이때 아군전서자가 많았으나 현지매장하거나 방치후 후퇴하였다. 〔 이때 당시의 전사개요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압록강-두만강변에서 철수를 개시한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확보를 위해 동부전선을 담당하게 된 국군 제2군단은 청천강에서 철수할 무렵 제6사단을 미 제9군단에 배속전환하고, 12월 8일 화천 동북방의 진지를 점령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 북한군 제2, 5군단 패잔병들이 평강-금화-화천도로를 차단하고 있어 부득이 연천응 경유하여 철수하게 되었다. 한편 군단이 철수하는 동안 동부전선에는 대구에서 공비토벌작전을 실시한 제9사단이 12월 8일 긴급히 원주, 강릉으로 이동하여 춘천 북방 내평리에서 동해안의 인구리까지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고려 서둘렀으나 12월 14일 원주에 도착하였다. 군단은 재정비할 겨를도 없이 육본 명령에 청천강 교두보와 시변리에서 고군분투한 제7사단을 육본직할로, 제8사단을 제3군단(2. 5. 8사 배속)으로 배속전환하고 대신 동부전선의 광정면을 방어중인 제9사단과, 함흥에 구룡포로 해상 철수한 제3사단을 배속 받았다. 그러나 군단이 방어선을 구축도 하기전에 명령이 수정되어 흥남에서 묵호로 철수한 제1군단이 동해안지역을 담당하게 되어 제9사단이 다시 제1군단에 배속되어 군단은 홍천으로 진출한 제3사단만으로 인제 남쪽의 부평리-관대리 간을 방어하게 되었다. 이에 제3사단장 최석 준장은 제18연대로 제8사단 제16연대가 방어하던 홍천고개와 하수내리-상수내리지역을, 제22연대는 제9사단 제28연대가 방어하던 음양리-수리봉지역을 인수하여 방어하고 예비로 제23연대는 홍천에 배치하였다. 이로써 사단으 좌전방은 제8사단, 우전방은 제9사단으로 연결되어 주저항선을 형성하게 되었다. '50. 12. 23일경 모든 부대들이 38선 방어선을 점령하고 진지강화에 주력할 무렵 신정공세를 계획한 중공군은 주력부대의 공격에 앞서 국군 사단들이 배치된 지역의 퇴로를 사전 차단할 목적으로 인민군 제2군단과 제5군단이 국군 제1군단과 제2군단의 전투지경선으로 침투하여 춘천과 홍천을 차단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북한군의 선제공격이 시작되었다. ●북한군의 홍천부근 돌파기도 화천-양구-인제 선으로 진출한 북한군 제2군단은, 국군 제2군단예하 제8사단 정면의 오항리, 제3사단 정면의 관대리, 그리고 제9사단 정면의 인제 일대에 각각 1개 연대 규모를 배치하고, 이들 중 일부가 제3사단을 양익포위할 목적으로 좌인접 제8사단가 우인접 제9사단의 전투지경선 부근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12월 23일, 제8사단의 저항선을 돌파한 적의 일부가 홍천고개부근으로 진출하여 자은리를 위협하였다. 이에 제3-18-1대대는 이곳으로 진출한 제8-10연대와 협동작전으로 714고지의 적을 소양강 북쪽으로 격퇴시켰다. 그러나 제3사단의 좌인접 소양강변으로 진출한 제8-10연대가 적의 역습으로 자은리로 철수하고, 또 제18연대도 지역도 적의 공격을 받기 시작하면서 제10연대를 배속받아 소양강 남쪽 내평리 일대의 주저항선을 회복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적 1개 연대규모가 야간에 홍천고개로 진출하여 퇴로 차단을 극복하기 위해 에비인 제23-1대대가 제18연대를 증원하였다. 하지만 적은 소부대규모로 계속 침투시켜 우인접 제9사단의 제28연대 지역을 돌파한 적이 제3사단의 우측방을 위협함에 따라 제3사단장은 각 연대들에게 홍천고개-장남리-부봉을 연하는 선으로 철수를 지시하며, 이 과정에서 상수내리에 배치되었던 제18-3대대가 철수과정에 어론리에서 다수의 피해를입었다. 12월 27일, 군단의 주저항선 회복명령에 따라 제3사단은 좌측에 제18연대는 제8사단의 증원부대로 군단에서 투입한 제7사단 제8연대와 병진공격하여 소양강 남쪽의 정자동 일대를, 우측의 제22연대는 어론리 북쪽의 하다물리를 확보토록 하였다. 12월 27일 새벽에 공격을 개시했으나 좌측의 제7-8연대의 가리산 북쪽으로의 진출이 지연되는 가운데 북한군 2개 연대 규모가 제18연대 정면의 천촌일대에 집결했다 미군의 항공폭격에 큰피해를 입고 분산되었다. 12월 29일, 결국 제18연대는 적을 소양강 북쪽으로 격퇴하고 정자동 일대를 점령하고, 제7-8연대도 소양강을 통제할 수 있는 물노리 부근에 진지를 제8-10연대에 인계하고 양덕원리로 철수하였다. 그리고 제3사단은 매봉-정자동-어론리를 연하는 주저항선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이후 이 지역은 북한군 제10사단이 북한군 제2사단을 지원하기 위하여 상수내리 부근으로 진출하고, 또 제3사단의 후방인 창봉리에 2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 패잔병이 활동하고 있어 양구-인제 남쪽의 소양강변은 언제 적이 공격을 재개할지 불안한 상황이었다. ●춘천 지역 전투('50. 12. 30~'51. 1. 1) 춘천 지역 전투는 국군 제3군단이 제2사단을 명지산 북쪽의 고지군에, 제5사단을 화천-춘천 도로변의 지촌리에, 제8사단(제7연대 3연대 증강)을 화천저수지 남쪽의 내평리 일대에, 그리고 제2군단의 제3사단을 인제 남쪽 소양강변의 청구리에 배치하여 주저항선을 편성하였다. ●인제-현리부근 전투 이에 따라 제3사단은 인제-홍천 도로를 방어하기 위하여 소양강변 관대리에 주저항선을 형성하였다, 이때 북한군 1개 연대규모가 우인접 제1군단의 제9사단 제28연대지역을 침투하여 후방교란 및 보급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횡성북방 창봉리에 출현함으로서 제3사단장 최석 준장은 전방 연대는 자은리-홍천-원주 진출을기도하는 북한군 제2사단을 저지하도록 하고, 사단 에비로 퐁천에 있는 제23연대로 하여금 사단을 증원해 주기 위해 올라오고 있는 미 제2사단 제23연대와 협동으로 31일 한미 양국 군대는 남북에서 포위공격으로 이들을 삼마치일대에서 격퇴하고 퇴로를 확보하였다. 중공군의 신정공세를 받아 중동부 전선에서물러난 국군 부대중에 제1군단 예하 수도사단만이 '51. 1. 2일 계획된 C선(양평-홍천-원포리)를 점령하고 있었고 제3군단의 제2. 5. 8사단은 완전히 붕괴되어 지휘통제가 무너지고, 군단 에비인 제7사단은 워누북쪽 20마일 지점에 집결 중에 있었고 제3사단은 홍천으로 이동중이며 홍천 일대의 돌파구 차단을 위해 평창에 집결할 계획이었다. 이에따라 미 제8군사령관은 춘천 북방 국군 제3군단의 3개 사단(2. 5. 8사)을 미 제10군단에 배속하여 통제토록 하고, 국군 제3군단은 국군 제7사단과 국군 제1군단에서 배속받는 제9사단으로 미 제10군단과 구군 제1군단 사이의 험준한 태백산맥 지역을 맡아 돌파구 첨단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 시강에 제9사단은 북한군과 격전을 치르고 있었고 제7사단은 홍천에서 서쪽으로 이동중에 있어 상황을 낙관할 수 없었다. 이후에 상황이 바로 원주지역에서 미 제2사단의 원주지역 전투가 대승을 거두며 원주를 지탱하게 되고 이어 단양-영월 돌파구 차단 작전이 벌어지게 된다. 이렇게 각 사단들이 수시로 변하는 배속명령의 변경 속에 제1군단도 제9사단을 제3군단에 전환하고, 대신 제2군단의 제3사단을 받아 태백산맥 동쪽에서 동해안까지 전선을 방어하게 되었다.그러나 제3사단이 홍천에서 남쪽으로 우회하여 군단 책임지역으로 들어오기가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고 이로 인하여 동해안의 수도사단과 원주 북쪽의 미 제2사단 사이에 공백이 발생하게 되었고 계속되는 북한군 제2. 9. 31사단이 횡성지역에 육박하기에 앞서 육본은 5일 밤에 국군 제1, 3군단에 원주-삼척선의 수정된 D선으로 철수하도록 함으로서 국군이 6일 충주-제천-영월-삼척선으로 철수 남하하게 되어 국군을 엄호하게 된 미 제2사단의 동측방이 노출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상의 전사 내용에서 1.4후퇴 당시에 어론리에서 피해가 많이 발생했다는 최창성 참전용사님의 증언은 1.4후퇴라고 보기보다는 바로 북한군의 선제공격이 있었던 '50. 12월 말경의 전투로 이해되며 물론 평창으로 이동해 가는 과정에도 얼마든지 어론리 일대에서 피해는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더구나 이 지역일대의 지역주민들의 제보는 대부분 중공군 4월 공세와 5월공세에 관련된 내용으로 국군 제5사단이나 제7사단을 목격했다는 이야기는 많다. 하지만 제3사단을 보았다는 이야기는 못보았다. 그동안 자은리나 홍천고개, 그리고 어론리 지역에서의 발굴된 유해는 많다. 홍천고개~매봉구간애서 5구, 홍천고개-가리산구간에서 '13년도 13구 등 20여구, 자은리 지역에서 '09년 11구 등이 발굴 되었다. 참전용사 박무호(제8-21-2-1중대) : 나는 '50. 9월 9일 입대하여 제8사단 제21연대에 가서 북진작전간 참여했다. 북한지역에서는 어떻게 전투했는지도 모르겠고 중공군이 피리불고 꽹과리 치면 너나나나 다 도망쳐서 살기 바빴다. 대부분 포로가 되ㅇ=거나 행불이 되었는데 운이 좋아서 살아서 후퇴하다 또 시변리인지 구하리인지 모르겠는데 사단장은 도망가버리고(사다 사려부와 일부 병력을 차량화 하여 철수하고 연대가 연천 북방으로 철수하다 북한군에 포위되어 많은 피해 발생, 이 일로 사단장 징계받음) 많이 다쳤다. 어떻게 해서 춘성 북방으로 들어왔는데 먼저 들어온 제5사단이 있고 우리 우측에는 제7사단 병력도 일부 있었다고 들었다. "'51. 1. 1일 신성공세에서 중대원이 20~30명만 살았다." 우리 앞에는 큰강이 있었는데 나중에 들으니 소양강이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지 신정이라하는데 우리 뒤에서 난리가 났다. 중공군인지 북한군이지 침투하여 우리 대대를 기습했다. 우리는 다시 영원북방에서의 악몽이 되살아나 무조건 뛰었다. 그래서 얼마를 오니 홍천인데 병력을 수습하기에 다시 복귀하게 되었는데 우리가 그전날 신병 100여 명을 받았었는데 나중에 보니 20~30명 밖에는 없었다. 그러니 어디서 죽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소양강과 홍천 어간이라는 것외에는. 나는 '51.2월에 횡성에서 포로가 되어 '1. 9월 9일날 아군지역으로 탈출하여 원대복귀하였다. 포로들을 그놈들은 교화시켜서 많은 인원을 다시 전투현장에 내려보냈다. "가평 멱골의 한숨 : 사창리 이정술 할머니(1.4후퇴시 18세)의 제보" 나는 가평 멱골에 살다 전쟁이 났다. 처음 전쟁때는 전쟁도 모르고 북한군이 앞마당에 와 있었다. 그놈들은 처음에는 상당히 신사였다. 동네 빨갱이들이 온갖 못된 짓을 다했다. 그러다 얼마안되어 국군이 들어와 동네는 뒤집어졌다. 부역자들을 잡아다 이번에는 무슨 청방대인지 하는 것들이 설치고 다니며 기분나쁘면 잡혀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동란이 되어 싸리재를 넘는데 군인이 베낭을 메고 여기저기 죽어있다. 국군은 남쪽으로 있고 북한군은 북쪽으로 있었다. 중공군이 쏼라쏼라 하며 산에서 내려오고 거기에 북한군이 붙어있었다. 쓸데없이 산속에 있지말고 집에 가 있어라 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후에 북한군이 몇명 들어왔는데 국군 포로를 끌고 와서는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집어낳고 총을 갈기고 묻어버리더라. 중공군이 우리집에 함께 있었다. 그런데 내가 다 큰 여자인데 같이 방에서 자면서 건드리지 않는다. 그런데 전쟁통에 참전용사한테 시집을 갔다. 그런데 남편이 부상을 당하여 부산 36육군병원에서 명예전역했다. 그런데 상이등급이나 어떤 혜택도 없었다. 이유는 남편이 죽은 전우도 있는데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죄인이라고 했다. 그런데 나이먹어 후휴증이 나타나 몸속에 파편이 수십개가 있었는데 황당한 것은 그 병원에 입원했던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니 나는 뭐인가. 그러다 남편은 하늘나라에 갔다. 참전용사로서 살아서는 그 알량한 한 20만원 받았는데 죽고나니 아무것도 없다. 지금 현충원 한번 기려해도 차비도 없다. 어떻게 해야하나. 좀 방법을 알려달라. "일병 고, 양손호님의 기막힌 따님의 만남" 나는 '07년 8월에 가평 백둔리의 애재비고개-귀목고개-명지산을 혼자서 탐사에 나섰다. 이미 이 내용은 몇번 언급이 되었으리라. 얼마나 덥고 담이 비처럼 쏟아지는지 휴대했던 물이 끝이나다보니 머리가 아파왔다. "개인호를 따라가다 실신상태에 이르다" 김밥 한줄기 올랐던 산인데 내가 큰 실수를 한 것이다. 다른 열량을 보충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미 산에 올랐으니 도중에 포기도 못한다. 올라섰더니 개인호가 수없이 있어서 따라가다보니 점심시간도 지났다. 가평지구는 '51년 중공군 4월 공세시 사창리에서 포위된 국군 제6사단이 밀리면서 사단이 와해된 곳으로 통상 알고 있지만 실제는 1.4후퇴시 국군 제2사단과 국군 제5사단이 또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장소다. "경찰이 통제하여 다 묻었다는 유해는 흔적도 없다" 그러니 당연히 호가 수없이 있다. 이른 아침에 오르는데 애재비고개-죽터사이에 벌목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나이드신 분들이 있어 이야기를 해보니 이 구간에도 군인이 발로 차일정도로 죽어있었는데 모두 경찰이 통제하여 몇군데에 묻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 흔적조차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몇번에 걸쳐 산불이 났고 산사태도 발생하여 이제는 찾기 힘들다 한다. "애재비고개-연인산, 애재비고개-괴목고개, 애재비고개-명지산 구간에는 모두 개인호가 있다" 뛰다시피 하며 탐사를 하였는데 하산시간이 오후 2시가 넘었다. 5시에 출발하여 양짓말에서 6시부터 올라서서 연인산구간은 중간에 뒤돌아 나와 귀목고개로 올랐다. 산판을 하는 분들 이야기가 귀목고개가 귀신고개라 하여 옛날에는 여기로 넘어서 일동으로 가평 현리로 갔는데 임꺽정같은 산두목들이 숨어있어 인명피해도 있었다고 했다. "귀목고개의 의미를 아십니까?" "정말 부처님 귀보다 더 큰 귀가 참나무에 붙어있다" 귀목고개에서 명지산을 오르는데 등골이 오싹하다. 혼자서 탐사를 한두번 한것도 아니지만 중간에 귀신이야기가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그런데 명지산에 오르는데 정말 귀목고개, 귀목봉의 의미를 알아냈다. 이곳 명지산 귀목고개 일대에 있는 참나무드르이 수명이 꽤나 오래 되었다. 그런데 묘하게 여러 그루의 나무에 정말 사람 귀하고 똑같이 생긴 모습이 달려있다. 처음엔 사람이 죽어서 원한이 쌓여 귀가 나무에 붙어있는 느낌이다. 정말 오싹했다. 이런 나무들이 여러그루 있다. "점심 식사 있으세요?" 난 너무 배가 고팠다. 새벽에 올라서 김밥 1줄로 해결했으니 산악탐사에 무리였다. 원래는 귀목고개만 갔다오려 했는데 개인호가 연속적으로 있으니 미쳐서 한번 보았다하면 안가면 안된다. 무조건 가야한다. 이것이 운명이었다. 오후 3시가 되어 양짓말에 내려왔다. 배가 등에 붙어있다. 그래서 산판일을 하는 사람들 점심을 하는 집에 들어갔다. "사장님 점심 먹을 수 있나요?" "아이고 어쩌나 너무 늦었어요. 다 잔밥처리하고 아무것도 없는데" "라면이라도 몇개 끓여 줄 수 없나요. 나와 운전병이 먹을 수 있게" "아니 계급도 높은 분이 이 시간까지 뭐하시느라 점심시간도 넘기고, 옷은 소금이 찌들어 하얗게 되었네요" "저기 명지산에 6.25전쟁 때에 전사한 군인 유해를 찾을려고 갔다 왓습니다." "아니 벌써 50년도 넘었는데 그게 있겠어요?" 이런 대화를 주고 받으며 아주머니는 라면을 끓이는 중이였다. 운전병은 차에서 기다리며 우발상황에 대비해 전화소통이 가능한 곳에서 대기한다. 정말 고마운 군인이다. 드디어 라면이 끓여지고 밥상이 차려졌다. 아무것도 없더니 찬밥도 한그릇 나왔다. 너무 배가 고픈 우리는 정신없이 먹는데 정신이 없었다. "경찰이 왔다, 간첩 잡으러?" 한참 먹고 있는데 누가 와서 바라보고 있다. 경찰이다. 어떻게 왔느냐고 물으니 방범순찰하다 잠깐 들렸다고 한다. 알고보니 이 아주머니가 살며시 간첩출현 신고를 한 것이다. 대단한 아주머니 연기다. 경찰이 달려와 밖에 주차된 국방부 차량을 보고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한다. 이런 경우는 많이 경험해 보았다. 가족과 주말에 전투지역 동네에 경로당을 찾았다가도 신고되어 경찰이 출동하기도 했다. "아주머니 훌륭하십니다. 신고정신이 좋습니다. 이런 산악지역은 그런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기 사십니까?" "죄송합니다. 높은 분이 꼴이 영 아니라서 그렇게 힘들게 다니는지는 몰랐어요. 편하게 있고 시키는 일만 하는지 알았어요" "죄송하긴요. 절대 그렇지않습니다. 어디 사셍ㅅ?" "아참 나는 여기가 고향이 아니고 도대리 백자동입니다. 여기서 한 10분 걸리는데 전쟁때도 거기 살았어요. 할아버지와" "밤에 할아버지가 나가는데 나도 따라가서 봤어요. 시체를 바로 길옆에 묻었어요" 지역주민 허정순(76세. '07) 제보 : 바로 라면을 끓여주고 경찰서에 간첩신고를 한 아주머니가 엄청난 제보를 했다. 본인은 전쟁이 나고 한번도 고향을 더난 적이 없다고 한다. 부모님들은 피난을 떠났지만 본인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남아 있었고 어려서 누가 건드리지도 안했다. "엄청 추운 겨울날인데 동네에 군인들이 있었는데 갑짜기 모두 사라졌어요. 여기저기서 총알이 날아다니고 포탄이 떨어져 난리가 나서 방공호에 꼼짝안고 있었어요. 그러다 밤이 되면 나가서 집에 갔다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새해가 왔다는데 눈이 하얗게 쌓였는데 밤새 폭탄이 터지고 난리가 났어요. 그 밤이 지나고 살며시 밖에 나가보니 눈위에 시체들이 즐비하게 널려있어요. 할아버지가 나가지 말라고 해서 방공호에 가만히 있었어요. "나타난 중공군과 북한군" 바로 중공군이 방공호로 나타나 모두 나오라해서 나갔는데 앞에는 북한군인지 한국말을 잘하는 군인이 있어, 그 사람이 하라는 대로 앉으라고 하면 앉고 일어서라 하면 서고 시키는재로 했어요. 그러면 죽이지않는다고 했지요. 얼마가 지났는데 눈이 갑작스레 다 녹아버리고 집 주변에 시체가 정말 많이 있었는데 낮에는 움직이지 못해요. 중공군이 못움직이게 했어요. 그런 어느날부터 동네에 치안대인지 내무서원인지 하는 사람들이 밤에 사라믈 데리고 어딜 가요. 나는 무섭지않아서 할아버지 지게를 잡고 따라 갔어요 "동네 어르신들이 지게와 들것으로 시체를 모아서 묻는다" 지금은 그 사람들이 모두 북한군을 따라서 다 북으로 가버렸지만 당시에는 그들 끄나풀역활하는 몇몇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설쳐대고 다니며 시체를 다 모아서 엄청나게 큰 구덩이에 집어넣도록 하였다. 나는할아버지 지게다리를 잡고 따라 다녔다. 다른 어른들이 귀신온다고 해도 무섭지않았다. 동네에 몇군데 있는데 시집오고나서 그후로 많이 변했다. 그래도 한곳은 바로 길옆에 큰 잣나무인지 있는데 그 일대에 묻었는데 변하가 없다. "그렇습니까, 그럼 제 차로 한번 같이 가서 알려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지요. 어차피 저녁 밥은 안하니 괜찮아요" 우린 사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백자동으로 달렸다. 탐사할 필요도 없이 바로 길 옆이고 탐지기를 대보니 요란하게 발신음이 들린다. 그리고 몇군데 더 돌아다녔고 동네 남자어른도 만났다. "할아버지 혹시 저기 잣나무 크게 자란 곳에 전쟁대에 죽은 사람 묻었다는데 모르세요?" "그거 동네사람들 다 알아요. 이제와서 파봐야 뭐하겠어요?" "어르신, 지난번 경로당에서 간담화할 때에 계셨잖아요. 왜 발굴을 하는지 설명했었는데" "갔었지요. 그런데 그게 참 그래요.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닌데 지금와서 조사하는 것이 조금 부담이 되어요" 할아버지는 혹시나 이것이 그때 부역에 참가한 사람들을 붙잡아 벌주는 것처럼 오해하고 계시었다. 아니라 하더라도 이 질곡의 역사는 민초들에게 그런 오해를 갖도록 해 왔던 것이 또한 부인하지 못할 현실이었다. "철모가 나오고, 전투화가 나오고... 36명의 유해가 발굴되다." 11월이 되어 그동안 몇번의 추가적인 조사과정을 거쳐 기동발굴을 시작했다. 준화팀장이 팀원을 데리고 발굴을 통제했다. 바로 깊옆이라 오가는 차들이 멈춰서서 궁금해서 다가오고 결국은 눈물을 펑펑 쏟고 가는 사람도 있다. 기가 막혔다. 과거 가평에서 사창리로 들어가는 유일한 75번 길이다. 묘하게 길을 넓히는 과정에 이곳은 전혀 피해가 없이 살아 남아서 60년 세월을 기다렸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유해들이 훼손되었을까 하는 마음에 무심코 지나친 지난 세월이 서러워진다. 13만 4천명의 찾지못한 호국용사님에게 드릴 말씀이 없다. "5개월된 딸을 놓고 전쟁터로 간 양손호 일병" 2009년에 우린 대구역에서 유해감식을 위한 대구지역 지역주민 간담회를 했고, 동대구역에서 유가족 DNA 샘풀채취행사를 했다. 그때에 한 아주머니께서 다가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가 참전용사라며 혹시 모르니 감식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하늘이 보우하사 바로 가평 백자동에서 발굴된 유해 36구중 한분과 일치하는 결과가 니왔다. 발굴당시에는 철모를 쓰고 군화를 신고있어 국군인줄은 알았는데 제2사단이지, 5사단인지, 제6사단인지 알수가 없었는데 역으로 이렇게 해서 용사님의 이름이 밝혀지고 제2사단 제32연대라는 것도 확인이 되었다. 그 아주머니는 통곡을 했다. 멀지도 않은 대한민국 땅에 있었는데 이렇게 60년 세월을 지날 수 있는냐며... . 홍천 내면 방동리 지역주민 권오륜 노인회장 등 다수 : 1.4후퇴시 9사단 공병 1개 소대가 죽었다.(밭을 개간하여 훼손?) 전쟁이 나기전에도 '50년 3월에 북한군이 매봉까지 들어와 전투를 했다. 동란당시(1.4후퇴)에 이곳으로 9사단 공병소대가 왔다. 홍천 샘물 들어가는 길 개울가에 집이 한채 있었는데 그곳에 있다가 북한군에 모두 죽었다. 1개 소대가 다 죽었다. 북한군이 들어왔는데 하얗게 눈이 내린 저 개울가 옆에는 9사단 장교도 죽어서 묻었다. 지금 파면 나올 것이다.(발굴 완료) 더 끔찍한 것은 지금 방동 초등학교 안에 우물이 있었는데 그 곳에 일대에서 죽은 국군 시체를 단가에 들어가 집어넣었다. 북한군이 통제하여 지역주민이 부역으로 가서 그렇게 했다고 들었다. 지금은 그 우물을 메워버리고 옆에 다시 파서 수돗물처럼 해 놓았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안고 있다. 남양주 별내 용암리 지역주민 이내훈외 다수 제보 : "간나새끼 죽여버려라" 우리는 동네 뒤산에 중공군이 버리고간 미숫가루 등을 주어다 먹었다. 산속 호마다 중공군이 한구씩 죽어있었다. 별내 초등학교 6학년때 담임 선생이 골수 공산당이었다. 6.25전쟁 이전부토 우리가 소풍가면 무슨 전쟁놀이를 시킨다던지 노래도 음악책에 없는 이상한 노래를 가르쳤다. 그러다 전쟁이 나니까 피난도 안가고 남아서 본인이 교장이라고 으시대고 다녔다. 그러다 국군이 다시 올라온다니가 어디에 숨었는지 보이질 않았다. 이미 국군과 경찰에 신고가 되어 찾으려고 하는데 그 어머니가 있어 지금 나오면 교장시켜 준다고 하니 나왔다. 그리고 그는 수락산 계곡에서 총살 되었다. 1.4후퇴시는 군인들이 내려오는데 6.25전쟁때도 그랬지만 알지도 못했다. 갑작스레 동네 일대에 군인이 몰려들어 오는데 유엔군도 있었다. 한강을 걸어서 넘는데 따라가서 구경도 했다. 그런데 동네 뒷산인 수리봉에 광복당도 있고, 호부대, 추부대, 제17연대, 경찰 등이 숨어있는데 중공군이 가만히 있었다. "호주머니에 쌀을 넣고 가면서 끌려가는 위치를 알리던 용사님" 이 유격대들은 숨어있다 중공군이나 북한군 내무서원 등이 찾아가면 기습사격으로 사살해 버렸다. 동네에서 몰래 쌀도 갔다주었다. 어느날은 북한군이 국군 포로들을 끌고 북을로 가는데 발에 동상이 걸려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더라. 그래서 동네에서 잠깐 머무는 사이에 북한군 동조자들이 집집을 뒤져 벼를 찾아내서는 방앗간에서 도정을 했다. 그걸 집에 잠깐 놓아두는데 한주먹을 쥐어서 호주머니에 넣고 다시 끌려가면서 호주머니 구멍으로 한알씩 떨어트렸다. 하얀 눈위에 보이질 않는데 길을 건너는 곳에서 뒤따르던 북한군이 낌새를 알아채렸다. 그리고 그 용사는 죽어갔다. "간나새끼 죽여버려라" 전쟁이 참 무섭다. 아무나 죽이고 싶으면 죽여도 벌도 안받는 시대엿다. 고양 덕양 일영-선유동의 아픔: "영 제29여단의 엄청난 인명피해, 300여명 손실, 전차 10대 파괴됨" 위의 내용은 전사책에 기록된 사살이다. 그러면 과연 그러했는지 나는 일영역과 선유동에 몇번에 걸쳐 현장 탐사와 탐문을 통해 관련사실을 찾아갔다. 이곳 일영역 북쪽에는 탄약대대가 있고 지금도 녹슬은 철길은 그대로 있고 일영터널도 그대로 있다. 바로 터널 위릐 고지에 올라서면 개인호들이 다수 발견된다. 그러나 그 당시에 영국군 제29여단은 산에 올라 지역방어를 한 것이 아니고 기동방어로 전차위주 작전을 전개하여 미 제1군단 철수를 엄호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탱크가 탱크를 이고 있더라" 실제 선유동에서 만난 지역주민은 그 당시의 중공군과 영국군의 전투를 목격했으며 주변 논밭에 숙영을 하던 영국군이 새벽에 중공군의 기습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는 과정에 전차병들이 전차를 운전하여 탈출하는 과정에 선유천과 석현천 강둑에 걸려 뒤집어 지기도 하고 강과 논 사이에 전차가 엎어져 있는데 다시 그 위로 올라타 마치 탱크가 탱크를 이고 가는 모양새로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아침에 중공군이 영국군 수백명을 줄세워 끌고 가는 모습도 직접 보았고, 나중에 다시 수복 되면서 영국군 유해발굴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물론 영국군이 와서 한 것이 아니고 우리 경찰이 통제해서 지역 주민들이 나서서 선유동과 지금의 탄약대대 야산을 뒤져 유해를 찾아내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에 영국군 화장터도 있었고 추모비도 이곳에 있었는데 나중에 설마리로 추모비가 이전되었다 한다. "고랑포에서 생긴 중공군 소령과 방마담의 러브스토리" 이미 앞에서 언급한 내용이지만 싯점은 지금이다. 바로 가수 진미령의 실제 아버지인 예비역 대령 김동석(동작동에 안장)님이 미 제8군의 정보원으로 활동하던 때였다.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말과 일본말, 러시아어에 능통한 육사 8기인 김대령은 당시 대위의 신분이었다. 바로 대전지구 전투시 귀순한 북한군 제105전차 사단 대대장 출신인 김웅을 교화하는데 일등공신이다. 그 후로 주로 정보요원으로 할동하며 서해안 지구 구군 제1사단 5816부대장을 맡기도 했다. "맥아더 장군이 지명한 "This Man"의 실제 주인공이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청천강변에서 철수하게된 맥아더 사령부는 아마도 중공군이 38도선을 넘어 남쪽으로 공격해 올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였다. 그래서 38도선에 정보요원을 운용하여 그들의 동향을 파악하는데 노력했고 여기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인원이 김동석 대위였다. 그는 전쟁초기부터 제1사단 소대장이었기에 이곳 지리를 잘 알고 있었고 특히 고랑포에 유명한 술집도 잘 았았다.고랑포가 당시에는 면사무소도 있고 방앗간도 있고 38선 상에서는 가장 번화한 곳이였다 한다. 김동석 대장은 휘하의 첩보원들을 이용하여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술집의 마담을 상대로 중요한 정보를 얻게 된다. 12월 중순경에 이미 중공군 첩보부대들이 이곳에 침투해 들어왔고 이 술집의 마담에 중공군 팀장인 소령이 빠져버렸던 것이다. 정보를 수집했으며 돌아가야 하는데 가질 않고 수시로 들러 회포를 풀고 갔다. 이걸 이용한 것이다. 결국 얻어낸 정보는 중공군이 서울을 향해 곧 진격한다는 사실이고 이게 맥아더사령부에 보고되고 그럴 수 있다는 판단아래 38선 상의 모든 국군과 유엔군을 한강선 이남으로 철수하게 하고 그 공간지대에 강력한 화력을 계획하여 중공군을 괴멸시킨다는 계획이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나중에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의 환담자리에 김동석님이 배석한 적이 있고 이승만 대통령의 갑작스런 한강이남으로의 철수계획에 대한 질문을 받고 맥아더가 답변하는 과정에 "이 사람"이 정보를 제공했다고 한다. 정말 이 고랑포의 중공군 정부팀장 소령급은 거의 2주 이상을 매일 이 주막에 들러 방마담과 로멘스를 갔고 헤어지다 결국 아군 김동석 팀의 올가마에 붙잡혀 미군에게 인계되어 중공군의 신정공세 일부를 말하게 된 것이다. "청천강변 군우리의 패배를 설욕하다" 원주지역 전투는 춘천북방이 무너지면서 국군의 철수로를 엄호하기 위하여 미 제8군은 충주지역에서 재편성 중이던 미 제2사단을 충주-원주선을 따라 진출시켰다. 당시에 국군 제2군단은 청천강에서 철수하여 춘천-가평 선에서 방어이무를 하던 국군 제2. 5. 8사단이 중공군의 신정공세기간에 후방이 차단되어 위기에 처하게 되자 바로 미 제2사단을 투입하게 되었다. 당시에 미 제10군단장은 38도선을 철수한 국군 제5사단을 남한강 동쪽에, 중앙에 국군 제8사단, 원주에는 미 제2사단(제9연대 결)을 배치하여 원주 방어에 중점을 두었다. 이대 미 제7사단의 주력과 미 제2사단의 일부는 제천으로 이동 중에 있었다. 그리고 분산 철수한 국군 제2사단은 충주 남쪽에 집결하고 있었다. 북한군 제5군단은 7일 05:00시에 400명 가량을 피난민으로 가장시켜 29번 도로를 따라 사단 후방지역으로 침투시켰다. 이 공격과 동시에 사단 좌측방의 국군 제8사단 10연대지역에도 침투하여 돌파됨으로서 미 제2사단은 방어진지가 돌출되어 버렸다. 따라서 미 제2사단은 원-목계동 도로로 7km나 철수하였다가 군단의 강력한 지시로 다시 외남송 일대의 247고지군으로 진출하게 되는 과정에 '51. 1. 10일에도 수차례 혈전이 진행되어 이날 하루 전투에서 미군은 적 2,000여 명을 사살하였으며 연대도 다수의 피해를 입어 11일 오후에 프랑스 대대와 네덜란드 대대의 일부를 증원 받았다. 그리고 다시 공격하여 적 1,100명을 사살하고 247고지를 수중에 넣었다 북한군 제5군단은 주력을 이곳에 집중 투입하였다가 엄청난 피해를 입고 17일 제27사단을 전방에 내세워 접적을 유지하게 하면서 주력은 힝성부근으로 철수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미 제2사단은 '50년 11월말 크리스마스 공세기간 군우리에서 중공군에 포위되어 당했던 오명을 씻게 되고 적의 돌파를 저지하게 되었다. "덕가산에 나타난 용사 아니면 귀신!?" 우리는 이곳 일대에서 발굴작전을 거의 한달간 해봤다. 북한군이 약 3,000명 죽었다면 미군이나 국군 일부라도 있지않을까 하는 바램이었다. 그 주변을 다 올라가 보았고 실제 지역주민과 덕가산도 올랐다. 작은 양아치고개, 큰 양차고개, 백운산, 십자봉등 다 올라가 혹시라고 미군을 따라온 카츄사나 경찰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지금 토지문학관이 있는 미천 지역이 미 제2사단의 연대들이 점령한 곳이라 지역주민들이 많이 미군을 목격했다는 제보도 했다. 우리와 함께 덕가산에 오른 지역주민은 본인이 덕가산에도 총을 지제 바작에 가득 주워서 파출소에 갔다 주기도 했다고 했다. 하지만 올라가 보니 개인호는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않았다. 그런데 묘하게 한 개인호를 사진에 찍었는데 사진을 인화하여 보니 부상당한 학도병 모습으로 교복에 총을 짚고 있고, 한 분은 부상으로 다리가 없는데 북한군 별표 모장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정말 괴이한 사진이었다. 이 사진은 내가 증평에서 연대장 시절에 찾아온 참전용사 한 분이 가져가시고 돌려받지는 못했다. "3,000명이 죽은 전투 현장에 북한군 시신포함, 시신이 한구도 없다" 북한군이 얼마나 죽었는지 미군이 북한군을 불도저로 길 좌우측으로 밀어버렸다고 하는데 우린 아군은 고사하고 북한군도 못찾았다. 과연 적군의 시체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 후에 경찰들이 통제해서 보이는 시체는 다 파묻고 불로 태웠다고 하는데 그 실체가 그래도 남아 있어야 하는데 없다. 남원주에서 충주방향으로 들어서자마자 바로 외남송이고 247고지 주변인데 유해가 없다. 모두 미군의 네이팜탄에 타버린 것인지 아니면 어느 한 골짜기에 집단으로 매몰되었는지, 그렇게 많은 북한군이 다 자연재해로 유실되었다고 보기에는 너무 이해하기가 곤란하다. 참전용사 황창규 증언(제5-27-2대대. '16) : 나는 전쟁 기간중에 대대본부 위생병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1. 4후퇴 당시에 우리 부대는 춘천 북방에 있었다. 우리는 전투도 제대로 못해보고 중공군에 포위되어 북한강을 건너 그저 후퇴만 했다. 우리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처음으로 보았다. "춘천에서 우리 중대에 비행기 오폭으로 다 죽고 1개 소대만 살았다." 그때는 춘천댐도 없었고 강이 있었는데 우리는 강을 건너가지는안했다. 바로 춘천북방 고탄리 무명고지에 중대병력이 올라갔는데 미군 폭격기가 잘못 하며 오폭하는 바람에 다 죽고 1개 소대 정도만 살아 남았다. 하지만 이미 중공군에 포위되어 있는 바람에 전사자를 처리 못하고 그냥 방치하고 왔다. "'12년도에 58구 발굴" 우리는 그런데 이미 '12년도 붓다리 고개 정상 좌측 무명고지에서 58구의 유해를 찾아냈다. 당시 고탄리 마을 주민이 살아계셔서 현장에 함께 가서 증언을 해 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유해가 아군인지 북한군인지 또는 주공군인지 알지 못하고 무명용사로 처리했었다. 실제 발굴 위치도 고지 정상부근에 큰 분화구같은 것이 있었는데 사실 고탄리와 이 붓다리고개와는 다소 차잉가 있지만 참전용사 증언과 지역 주민의 제보가 상당부분 일치하면서 우리 제5사단이 비행기 오폭으로 전사했다고 잠정 결론을 내렸다. 발굴된 유해의 형태가 대부분 본쇄된 모습으로 포탄에 의해 형성된 탄흔이 다소 있었다. 참전용사 이병만(제7-3-1대대. '16) : 우리는 덕천에서 중공군 3개 사단에 포위 되어 후퇴하였다. 그러다 홍천 북방 소양강근처에 갔다 다시 영월로 철수하여 갔다. 영월 어딘지는 모르겠는데 야간에 육박전이 벌어졌는데 누군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손으로 어깨를 만져보고 금속 장식(계급장)이 있으면 아군으로 대검을 안찌르고, 없으면 북한군으로 찔러 죽여야 했다. "하루살이 소위" 전투에서는 소대장들이 앞장을 서고 진격해야 움직이게 되는 경우가 많아 소대장이 밥이다. 현지 임관자들은 그래도 잘 사는데 바로 교육을 받도 오는 소위들은 하루살이 목숨이다. 우리가 영월에서 망경대산이라는 곳을 공격하는데 피해가 많이 났지만 그보다도 평창에서 진부로 오는 도중에 더 죽었다. "포탄이 터져 아군 50여 명이 죽었다." 지역주민 김수경의 제보(74세, '16) : 내가 6살 되던 해에 이목리라는 곳에 살았는데 아군 7사단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아군진지에 포탄이 떨어져 약 50여명이 죽었다. 옛날에는 상동읍이라 했는데 지금은 중동면 이목리다. 우리는 바로 녹전리 운교산부터 망경대산일대, 이목리 뒷산인 예미산(989m) 일대, 석항리 등도 탐사 및 탐문을 했지만 이목리나 석항리에서는 유해발굴을 못했다. 단지 녹전리 고장골에서 1구, 김삿갓면 옥동리에서 1구(신원이 확인됨. 고, 김영철 하사)가 발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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