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십장 구환유령검법(九圜幽靈劒法) - 01
- 무음무형무세의 검법은 사패천을 유린하고.
어두침침한 동굴 속에 네 명의 인물이 모여 있었다.
돌로 된 탁상과 돌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들은 모두 독특한 인상
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누가 보아도 한눈에 나쁜 놈 이란 걸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험하게 생긴 맹호림이 앉아 있었으며, 그의 오른쪽엔 역삼각형의
얼굴에 마른 체형, 그리고 허리에 날카로운 검 한 자루를 차고 있는
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이가 바로 남월이라 불리는 흑사교의 교
주 천사월(天死月) 유종금이였다. 원래 흑사교는 마교와 비슷한 종
교 집단인데 이들은 좀 더 광적이고, 교주가 곧 그들의 신이었다.
결국 천사월 유종금은 바로 흑사월이라고도 불리는 흑사교의 교주
이자, 그들의 신이라 할 수 있었다. 원래 그의 별명도 흑사월이라
불리었지만, 그 예명이 싫다고 천사월이라 스스로 자신의 아호를
만든 노물이었다.
맹호림의 왼쪽에 있는 노인은 서림이라 불리는 청죽림의 림주로
유령문만 아니었으면 살수 지왕이라 불릴 수 있었던 노인이었다.
사천성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청죽림은 사혼정과 함께 강호 제일을
다투던 살수 집단이었고, 무영살(無影殺) 호금명은 바로 청죽림의
림주였다.
호리호리한 큰 키에 홀쭉한 얼굴, 그리고 아주 선해 보이는 눈을
가지고 있었으며, 얼핏 보기엔 아주 어리숙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교활하기가 여우 할아버지요, 진인하기로 따지자면 이 들 네 명중
최고 수위를 지닌 살인마였다.
그는 살인을 인간이 지닌 가장 순순한 열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이었다. 그의 애병은 한 자루의 죽검으로, 이 죽검은 단단하기가
만년한철에 못지않다고 알려져 있는 옥청죽이란 천고의 보물로 만
들어져 있었다.
맹호림의 전면엔 그야 말로 화려한 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그는
금 목걸이, 금 귀걸이에 열개의 금반지를 끼고 있었으며, 몸에는
화려한 금포 대신 금포 같은 문신(네 노인은 모두 거의 알몸이었다.
안에서 무슨 옷을 구할 수 있겠는가?)을 하고 있었다.
노인의 키는 겨우 오척 단구지만, 탄탄한 몸과 얼굴을 가로지른
검상, 그리고 사자의 갈기 같은 머리카락만 보아도 저절로 위엄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 노인이 바로 동해 금명도에 존재하는 대해천의 천주 대해왕(大
海王) 육금도였다. 대해천은 일명 동천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육금도는 왕이라 불리는 것을 광적으로 좋아하다고 알려져 있었으
며, 그의 무기는 단창이었다.
이, 노 괴물들이 바로 사패천이라 하는 동천(대해천), 서림(청죽
림), 남월(흑사월), 북맹(녹림맹)의 주인들이었다.
맹호림은 한 동안 자신이 본 어떤 애송이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다른 세 노인들은 그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맹호림의 이야기를 듣고 세 노인은 잠시 동안 침묵했다. 그들의
얼굴엔 작은 희망이 떠올라 있었다.
천사월 유종금이 마른침을 삼키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이 번에 들어온 그 고기가, 아니 그 신성한 음식이 이
곳을 나가는 비밀 출구를 알거란 말이지.”
맹호림은 그 험악한 인상을 최대한 인자하게 만들면서 말했다.
“맞아, 그 애송이가 심혼연을 통과해, 과거 용 나쁜 놈의 거처로
들어가는 것을 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맹호림은 퉁방울만한 눈을 더욱 크게 뜨며 강조하였다. 제법 진진
해 보였다. 그 모습을 정면에서 지켜보던 대해왕 육금도가 말했다.
“그럼, 우리가 번갈아 가면서 그 안을 지켜야 하겠군. 하지만 만약
심혼연 안 쪽에 비밀 통로가 있다면, 우린 고생만 하는 것 아닌가?”
그는 정말 그렇게 된다면 너무도 허탈할 것이라 생각하며 조심스
럽게 말했다. 그로서도 오랜만에 희망을 가진 동료들에게 하기 미
안한 말이었다. 그러나 육금도의 말에 무영살 호금명이 강하게 고개
를 흔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로도 그렇고, 현재 천금마옥에서 수집한 정
보로도 여기를 나가는 비밀통로는 태양화령지(太陽火靈地)가 유일
하다. 단지 거길 나가는 방법을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 그러니까 지
금 들어온 애송이를 번갈아 가면서 감시만 잘 한다면 우리에게도
기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차피 심혼연은 들어가면 나오는
길도 그 곳 뿐이라고 들었다.”
세 노인의 얼굴이 다시 희망이란 것이 묻어 나왔다.
청죽림은 살수 집단인 만큼 정보 수집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비록
어리숙해 보이지만, 호금명이 얼마나 명확하고 교활하며, 뛰어난
정보 분석가인지 잘 아는 세 노 괴물들이었다.
맹호림이 흉측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슬슬 준비를 해야겠군. 한데, 관패 그 쌍놈의 새끼에겐 알려
주어야 할까? 말까?”
관패란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다른 노괴들의 안색이 시커멓게
변했다. 제일 먼저 대해왕이라 불리는 육금도가 입을 거품을 물었다.
“그 애새끼 이야기는 뭐 하러 여기서 거론하나, 그 새낀 죽던지
말던지 우리가 간섭말자. 언제부터 우리 흑도가 선후배도 없는 그런
말종을 생산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대해왕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입술을 파들거렸다.
세 노인들 역시 찔끔하며 서로 눈치를 보는 모습들이 모두 관패란
인물에게 한두 번 쯤은 무엇인가 봉변을 당한 것 같았다. 그들의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자신의 눈을 믿지 못 할 것이다.
사패천의 천주들이 누군가에게 치를 떨며 고개를 흔든다는 사실
은, 그들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천사월 유종금은 가볍게 헛기침을 한 후 말했다.
“그럼 관패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심하면서 한명씩 심혼연을 지
키기로 하지.”
세 노인은 불만이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니 몇 달, 몇 년이 지났는지도 모른다. 마치
머리카락처럼 자라는 수염을 잘라내면서 사공운은 오로지 유령신
공과 천룡무상검법에만 매달렸다.
무공을 수련하기 위해 검을 휘두르는 것인지 세상을 잊기 위해 휘
두르고 있는 것인지 그조차 모르는 사이,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틈이 나면 다시 한번 자신의 유령검법과 소천대검식을 그리고 천
룡무상검을 훑어보았다. 특히 아직 익숙하지 않은 천룡 무상검은
읽고 또 읽었다. 이미 머릿속에 외우고 또 외운 상황이지만 글 자 하
나 그림 하나까지 보고 또 보았다.
검을 휘두르고 유령신공을 연구하는 동안 잊혀질 듯 하던 용설아
의 모습은, 조금 한가해 질 듯 하면 다시 그의 눈에 어른 거렸다.
또한 잠을 자려 하면 얼굴이 없는 여아가 사공운의 꿈속에 나타나
곤 하였다. 사공운에겐 그 어느 것도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단엽이다. 지금부터 나는 단엽이다. 사공운은 죽었다.”
사공운은 흐느끼듯이 주절거리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그리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그러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검을 내 던지고
건곤유령신법에서 유령둔형보법, 칠절유령살수(七絶幽靈殺手), 삼
절유령신권(三絶幽靈神拳), 음혼유령지법(陰魂幽靈指法), 유령연환
각(幽靈連環脚)을 차래대로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단순한 수련에서
끝을 내는 것이 아니라 연구하고 또 연구를 하였다.
‘반드시 강해지겠다. 다시는 누구와 헤어지지 않겠다. 세상의 그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을 만큼 강해지겠다. 감히 나의 가족과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그 어느 누구도 괴롭히지 못하게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해지겠다.’
사공운, 아니 단엽의 결심이었다. 헤어짐의 아픔과 슬픔은 지금
까지 만으로도 충분했다.
한 여자의 지아비로, 한 아이의 아버지로 그는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다. 무공만 약한 것이 아니라 마음 또한 강하지
못했다.
사공운은 그 껍질을 벗으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단엽으로 다시
태어나리라.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사이, 그의 성격은 점차 변해가고
있었다. 처음의 부드럽고 유하던 성격은 강인하고 독하게 변해
갔으며, 안으로 숨어 들어간 외로움과 아픔은 그의 성격을 조금씩
극단적으로 변하게 하였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과 격리시킨 세상에 대한 시선도 전처럼 자
비롭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그의 무공은 새로운 경지에
들어서고 있었다.
천룡무상검법과 소천대검식은 그의 구환유령검법(九?幽靈劒法)
에 점차로 녹아들고 있었다. 또한 소천대검식도 나름대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었다. 비록 천룡무상검법을 익히지는 않았지만
머리와 가슴으로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은밀하고 날카로우면서도 음자의 검법인 구환유령검법과 정대하면
서도 날카로운 소천대검식에 비해서 천룡무상검법은 웅장하고 강
대했다. 특히 검강의 경지나 심검에 대한 논리가 완벽했다.
천룡발의(天龍發意), 천룡출현(天龍出現), 천룡무상(天龍無常)으로
이어지는 천룡무상검법의 세 초식을 연구 하면서 사공운은 자신의
유령검법에 천룡무상검을 완벽하게 녹이기는 힘들다는 사실을
알았다.
만약 구환유령검법에 천룡무상검법을 완벽하게 녹이려면 유령검의
장점을 버려야만 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유령검법이 아니라 천룡
검법이 되리라. 그때부터 사공운은 새로운 고민을 해야만 했다. 결
국 천룡무상검법의 장점 중 일부를 유령검법이나 소천대검식에 받
아 들여 두 가지 검법의 장점을 극대화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어차피 천룡무상검법은 천룡신공을 익히지 않는 한 그 한계가 있
었다. 그렇다고 남의 무공을 익히기는 싫었다.
또 다시 시간이 흘렀다. 어느 정도 검의 조화가 자유롭게 되자 사
공운은 무엇인가 새롭게 필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실전이 필요하다.’
사공운은 자신의 유령신공과 구환유령검법이 어느 정도 발전했지
만, 그것을 느끼고 새롭게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실전이라 생각하였다.
생각이 일자 행동은 지체함이 없었다.
그는 이미 낡을 대로 낡은 장포 안에 천잠 복대삼을 단단히 두르
고, 유령신검을 든 채, 심혼연 앞에 섰다. 그 곳을 나서기만 한다면,
실전용 고수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전대 십대 사마라면
더 없이 좋은 상대들이라 할 수 있었다. 비록 목숨을 건 훈련이겠지만.
진충은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가슴을 차고 올라오는 통증과 왼쪽 눈을 쑤시는 아픔으로 인해 몸
이 견디지 못하고 부르르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말라붙은 피가 얼굴에 고물처럼 엉겨 있었고, 내장은 누군가가 도
막도막 잘라 놓은 것처럼 아파왔다.
몇 번에 걸쳐 심호흡을 하고 어느 정도 통증이 가라안자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진충은, 아직 온전한 오른 눈을 끔벅거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돌을 쌓아 막은 방이었다.
넓고 넓어서 방이라기보다는 작은 광장 같았다.
진충은 일어섰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그의 몸을 지탱하기 힘든 듯
삐거덕거렸다. 마치 자신의 생명이 빠져 나간 듯 몸에 힘이 들어
가지 않았다.
진기를 끌어내려 하다가 텅 빈 단전을 느끼자, 진충은 다시 그 자
리에 주저앉았다.
내공을 잃은 무인의 심정은 누구도 이해하기 어렵다. 특히 자신의
전 생애를 무사의 길에 건 남자의 경우 그 박탈감은 차라리 죽는 것
보다 못하리라.
진충은 주저앉은 채, 한동안 넋을 잃고 있었다. 그러다 조금씩 어
깨가 움찔거린다.
손을 들어 가린 눈에서 사내의 꿈이 절망으로 흘러 떨어지고 있었
다. 얼마나 울고 있었을까? 허탈한 마음으로 하늘을 보던 진충은
문득 죽음이란 것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
을 부모님과 동생들을 생각하고는 다시 마음을 돌려야 했다.
‘죽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니구나, 그럼 난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진충은 일생에 단 한번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사공운을 떠 올
렸다. 그라면 지금 무엇을 할까? 그를 생각하던 진충은 아련하게
담황이 속삭인 말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그렇다. 나에겐 할 일이 있다. 그리고 비워진 것은 채우면 된다.’
진충은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용기라기보다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 삶의
의미를 제공했다. 우선 용설아만해도 자신이 없으면 살아나긴 불
가능했다. 그리고 그녀를 기다리며 최소 오년 이상을 이 안에서 살
바엔 새로 무공을 배우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진충은 사공운이 자신에게 유령대법으로
전해준 유령신공과 그 안의 무공들을 생각해 내었다.
‘그렇다. 어차피 봉황의 무공은 봉성의 것, 그들이 거두어 갔으니
억울할 것도 없다. 내가 사영환님을 주공으로 모셨으니, 지금부터 그
분의 무공을 배우자. 차라리 처음부터 다시 할 거면 내공을 잃은
상황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모든 상황은 생각하기 나름이고, 사물은 보기 나름이라고 했다.
진충은 상황을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것만으로 그는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갖기에 충분했으며, 한계에 이
른 상황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진충은 분명 범상한 사내는
아니었다. 단지 그의 장점은 봉성이라는 거대한 틈에 묻혀 있었을
뿐이었다.
진충에게는 의무가 있었다.
용설아가 깨어났을 때, 빙혼관을 열어야 한다는 절대의 의무가 그
것이었다. 그 것이 지금 진충의 결심에 큰 영향을 준 것도 사실이
었다. 이는 사공운에 대한 그의 충심이 변하지 않았음이었다.
진충은 흔들거리는 다리에 마지막 힘을 짜내어 담황이 이야기한
벽곡단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안에는 물도 있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희망은 있었다.
‘다시는 이렇게 맥없이 당하진 않을 것이다.’
진충은 이를 악물었다. 하나 남은 그의 눈에 새로운 각오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제십장 구환유령검법(九?幽靈劒法) - 02
- 무음무형무세의 검법은 사패천을 유린하고.
흑사월의 교주인 천사월 유금종에게 있어 신이란 저주의 대상이었
다. 유금종의 나이 오세가 되었을 때, 그의 어미는 흑교라는 종교
단체에 빠져서 맹신도가 되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가던 그였지만,
이 일로 전혀 새로운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고, 그의 집안인 사천성
유씨 집안은 그날부터 불행이란 무엇인가를 착실하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근교에서 가장 예쁘다는 그의 어미는 집안의 재산을 흑교에 마구
헌납하는 것도 모자라 흑교의 교주와 놀아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집안은 가파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결국 부정함이 들키면서 그의 어미는 집안에서 쫓겨났지만, 그녀
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곧 신의 저주가 있을 것이란 험
담을 하면서 집을 나갔다. 그런데 그녀가 사라지고 채 한달도 되지
않아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게 그의 아비와 조부모는 시체
가 되었었다.
그리고 그녀는 너무도 당당하게 다시 집안으로 돌아왔다. 바로 유
금종의 어미이자 집안의 최고 어른으로.
그 후 그녀는 유씨 집안의 전 재산을 흑교에 바치고 유금종은 교
주의 제자가 되었다.
유금종의 나이 십 오세가 되어서야 그는 자신의 스승이 아비와 조
부모를 살해했고, 자신의 어미가 그것을 사주하고 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유금종은 더욱 더 자신의 스승을 극진히
모셨다. 친자식이라도 그렇게는 못했으리라.
그렇게 되자 유금종을 경계하던 그의 스승도 점차 그에 대핸 경계
가 무디어 졌고, 그는 흑교의 중요 위치에 올라 스승의 무공을 몰래
흠쳐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나이 이십 오세가 되어 스승
의 모든 것을 물러 받은 날, 유금종은 자신의 스승과 어미를 기습
해서 생포한 후 열흘에 걸쳐 손가락과 발가락을 잘라가며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여 버렸다. 뿐만 아니라 교주의 칠십이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그 앞에서 한 명씩 전부 죽여 버림으로서 복수의 끝을 보았
다. 그는 이후 흑교를 흑사월이라 고치고 스스로 신이 되었다.
유금종은 심심했다. 벌써 이 천금마옥에 들어 온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그도 잘 모른다. 시간을 세다가 포기한지도 오래
전이었다. 그러나 진수성찬에 손만 뻗으면 마주 가효가 즐비했던
흑사월의 시절이 항상 그립고 또 그리웠다.
심혼연 앞에서 누구인지 이름도 모르는 애송이가 나오길 기다리며
망이나 보는 신세가 되고 보니 참으로 인생이 서글펐다. 언제나
자신의 의지대로 살던 사람이 타인에게 자신의 운명을 건다는 것은
쉽게 적응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유금종은 온 몸이 근질거렸다.
겨우 하체의 중요한 곳만 가린 천 조각과 허리에 달랑거리는 검이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확 짜증이 치미는 것을 참고 심혼연을 지켜
보던 유금종의 눈이 조금씩 커져 갔다.
“어....... 어!”
천천히 심혼연을 걸어 나오는 그림자는 분명히 사람이었다.
마치 허공을 밟듯이 미끄러져 나오는 것이 결코 만만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물론 유금종이 놀랄 정도는 아니었다. 형색으로 보아 맹
호림이 말한 그 애송이가 틀림없어 보였다. 하긴 그 애송이가 아니
면 천금마옥에 자신이 모르는 인간이 존재 할 리가 없었다.
유금종의 얼굴에 아주 흐뭇한 미소가 어렸다. 새로운 인간에 대한
호기심과 고기에 대한 갈증으로 그의 입에 침이 고였다. 또한 무
엇인가 심심함에 대한 갈증도 한꺼번에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유금종은 기쁜 마음을 속으로 숨기고 어기적거리며 걸어갔다. 아
주 최대한 인자하고 착하며 유약한 모습으로 가장을 한 채.
그 모습은 혹시라도 자신의 사냥감이 자신을 보고 무서움에 도망
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가득한 그런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애시 당초 필요 없는 고민이었다.
심혼연 앞에 나타난 애송이는 검을 바닥에 늘어트리고, 오히려 자
신을 기다리는 듯 하지 않은가?
‘저 놈이 미쳤거나, 아직 우리가 누구인지 모르는 모양이구나? 하
긴 저 애송이가 태어날 때 우린 이 안에 있었을 테니.’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유금종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애송이와
삼장 거리까지 좁혀 갔을 때였다.
“늙은이 검을 뽑아라! 반항도 못하고 죽으면 내가 너무 심심하잖
아!”
설마 잘못 들었겠지? 유금종은 말문이 막혔다. 하도 오랜만에 들
어보는 외지 사람의 말인데다가 그가 흑사월의 교주가 된 후 처음
들어보는 막 말이었다. 아니 후배에게 저런 말을 들으리라고는 전
혀 상상도 안 했던 유금종이고 보니 처음에는 자신이 잘못 들었겠
지 싶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의 첫 만남이라면, 우선적으로 서로 통성명을
하거나 상대가 적인지 아군인지 서로 조심스럽게 상대를 살펴보는
것이 먼저가 아닌가? 그런데 이게 무슨 무지막지한 말이란 말인가?
자신은 사천 사람이고, 애송이의 말투로 보아서는 화북 지방의 말
투였다. 그래서 혹시 자신이 잘 못 알아들은 것 아닌가? 하고 의
심도 해 보았다. 그러나 상대의 말은 잘 못 알아듣기엔 너무 명확했다.
아주 조금씩 화가 나더니 잠사 후에는 도무지 스스로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화를 폭발하려던 유금종은 다시 주춤했다.
생각해보니 상대가 자신을 알아 볼 리 없었다. 결국 모르고 한 말
이니 큰 죄는 아니다.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나면 저 애송이의
얼굴이 어떻게 망가질까? 생각해보니 그것도 재미있었다.
“이 애송이야! 넌 내가 누구인줄이나 아느냐?”
사공운의 입가에 냉소가 어렸다.
“네가 멍청이 유금종인줄 내가 어찌 알겠느냐?”
“하하핫, 그렇지 네가 날 어찌 알겠느냐? 하지만 애송이 잘 들어
라 내가 바로.......”
그러면 그렇지 하고 기고만장이던 유금종은 갑자기 하던 말을 멈
추었다. 무엇인가 이상했다.
“에 그러니까, 에에.......”
한 동안 헷갈리던 유금종은 자신이 상대에게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 순간 잠시 망연했던 그의 가슴을 차고 오르는
것은 분노였다.
“이, 찢어 죽여서 개가 먹을 애송이 새끼야! 네 놈이 감히 어른을
가지고 놀아! 이거나 쳐 먹고 뒈져라!”
고함과 함께 천사월 유금종의 몸은 삼장의 거리를 한 걸음에 단축
하면서 자신의 검으로 나타난 애송이의 입을 찍어 갔다. 혹시 잘못
찌르면 입을 놀리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알아야 될 것과
바깥세상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을지 모른다. 그래서 유금종은 사공
운, 아니 이제 단엽으로 새롭게 태어나리라 마음을 다진 그의 입
한쪽을 찍어 간 것이다. 이빨 대여섯 개를 분질러 자신에게 함부로
말한 것을 후회스럽게 만들려는 술책이었다.
발검술이란 단순히 검을 쾌속하게 뽑는 것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
니었다. 검을 얼마나 빠르게 뽑아서 얼마나 효율적으로 상대를 공
격하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또한 형(形)이 집약되고 마음(心)
이 실려야 하며, 유와 강이 함께 어울려야 하고, 기백이 있어야 제
위력을 가질 수 있다. 빠르고 약하다면 이 또한 상대에게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한다.
마음이 일면 의(意)를 쫒아 검이 형(形)을 이룬다.
발검술의 가장 근본을 이루는 요결이었으며, 가장 도달하기 어려
운 경지를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금종의 검은 이미 그 단계에
들어서고 있었으며, 지금 유금종의 발 검술은 그 모든 것을 다 충
족하고 있었다. 또한 발 검술을 받쳐주는 신법도 능히 십대 사마로
서 부끄럽지 않았다.
단 한걸음에 삼장의 거리를 좁히는 신법은 능히 축지성촌의 묘가
잘 살아 있었고, 찔러오는 검은 허리에서부터 단엽의 입까지 직선
이었다.
‘이놈, 이제 넌 죽었다.’ 라고 생각했던 유금종의 눈이 갑작스럽게
접시만 해졌다.
자신의 복부를 향해 찔러오는 사공운의 검을 본 것이다. 한데 기
척이 없다. 그리고 빠르다. 같은 발 검술인데 자신의 그것보다 분
명히 반수가 빨랐고, 저렇게 빠른 검이 어떻게 무음무영이란 말인가
? 더군다나 언제 검을 뽑아서 언제 찔러왔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의문은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우선 급한 것이 있었다. 찔러가
던 유금종의 검이 아래로 호선을 그리며 단엽의 검을 쳐 나갔고,
그의 몸은 급격하게 왼쪽으로 기울었다. 막으면서 피한다는 방어의
가장 기본적인 수칙에 따른 동작이었다.
한데 찔러오던 답엽의 유령신검은 갑자기 멈칫하였다. 아니 분명
히 허공에 멈추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러자 방어해 가던 유금종의
검은 아슬아슬하게 단엽의 검 끝을 스치고 지나갔으며, 단엽의
유령신검은 발 검술인 유령의(幽靈意)에서 구환유령검법의 제 이식
인 유령탄(幽靈?)으로 변환하였다.
마치 누군가가 튕겨낸 것처럼 급작스런 속도로 찔러오는 유령탄의
초식을 본 유금종은 다 급했다.
전 힘을 다해 뒤로 몸을 빼면서 바닥을 굴렀다. 남들은 이것을 뇌
려타곤이라고 부르지만, 유금종의 생각은 달랐다.
게으른 당나귀는 절대로 지금의 자신처럼 빠를 수 없을 테니까?
과히 전광석화처럼 몸을 피한 유금종은 젖 먹던 힘까지 전부 뽑아
서 몸을 일으키고 뒤로 돌면서 흑월쾌영검법(黑月快影劍法)의 최고
방어초식인 유금만종(遊禽滿倧)을 펼쳤다.
유금만종의 뜻이 무엇인가? 신인이 짐승들과 논다. 라는 뜻과 만
이란 가득 차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으니, 즉 신인과 짐승이 가득
앞을 가리고 논다. 라는 뜻이 된다. 물론 그 노는 동작은 시전 하는
자의 앞을 가리고 상대의 공격을 방해하는 동작이 될 것이다.
마치 춤을 추듯이 검을 휘두르던 유금종은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
다. 그리고 몇 장 밖에서 자신을 차가운 눈으로 지켜보는 애송이를
보고 그만 부끄러움과 얼굴 팔림을 동시에 느끼고 말았다.
상대는 공격할 생각도 안했는데 혼자서 오도 방정을 다 떤 셈이니
다 늙어서 이 무슨 주책인가? 그리고 얼마나 비웃고 있을까?
부끄러움은 수치를 낳고, 수치는 필수적으로 울화를 탄생시킨다.
그리고 그 울화를 풀 상대란 처음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든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정당화해야 한다. 어디든 명분이란 무척 중
요했다.
“흐흐, 애송이놈 내가 널 너무 얕본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좀 달라질 것이다. 각오 단단히 해 두 거라.”
그러니까 조금 전의 망신은 절대 자신의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
라 단지 방심했을 뿐이란다.
“제발 제대로 공격 좀 해라 늙은이.”
“이, 박쥐같은 자식아! 뒈져서 제발 식탁에나 올라가거라.”
사천성의 최고 요리 중 하나가 박쥐요리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
었다. 지금 유금종의 시선에 단엽이 어떻게 보이는지 잘 표현한
말이라고 하겠다. 반드시 사로잡아서 나가는 길을 알아내야 한다는
사실은 두 번째였다. 일단 반 죽여 놓고 나가는 길을 알아 낸 다
음 그다음은 맛있는 요리시간이다.
침을 삼킨 유금종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흑월검법의 절초들이 분노의 둑을 뚫고 마치 물보라처럼 뿜어져
나왔다. 흑도 역사상 가장 강하다는 오대 쾌검 중에 하나라고 스
스로 바득바득 우기는 흑월쾌영검법은 빛의 그림자를 만들며 단엽
의 인중과 단전 그리고 심장을 노리고 공격해 왔다. 그 기세 하
나하나가 진한 살기를 머금고 있었다.
단엽의 검이 짧게 호선을 그렸다가 앞으로 쭉 내밀어졌다. 순간
유령신검의 검첨이 일곱 개로 산개하면서 유금종의 칠개 대혈을
노리고 공격해 들어갔다. 이는 소천대검식 중에 칠점만형(七點瞞形
)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유금종도 만만치 않았다. 그의 검이 환월망망(幻月
網罔)의 초식으로 바뀌면서 마치 고기를 잡는 어망처럼 뿜어진 검
기로 촘촘한 그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순간 단엽의 공격이 그물
에 걸린 고기처럼 허망하게 유금종의 검기에 얽혀 흩어져 버렸다.
비록 자신의 공격이 실패 했지만, 단엽은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유
금종을 향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유금종의 그물을 뚫은 것은 구환유령검법의 유령섬쾌(幽靈?快)였
으며, 그를 몰아친 것은 유령삼기(幽靈三氣)요.
단엽의 공격을 막으려는 상대의 검을 마치 뱀처럼 타고 오르며 유
금종의 목을 노린 초식은 유령사(幽靈蛇)의 초식이었다. 마치 물이
흐르듯 이어지는 단엽의 연환 공격에 유금종은 오금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건, 뭐 이런 괴물 같은 놈이 다 있냐?’
유금종은 처음의 호기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상대할수록 상대가 무서워졌다. 이미 단엽의 유령검법은 천금마옥
에 들어오기 전과 비교해서 상당한 발전을 이룬 후였다.
제일식인 유령의(幽靈意)에서 제이식인 유령탄(幽靈?), 제삼식인
유령궁(幽靈弓), 제사식인 유령무혼(幽靈無魂), 그리고 제오식인
유령사(幽靈蛇), 제육식인 유령삼기(幽靈三氣), 그리고 칠식인 유
령섬쾌(幽靈?快)까지 일곱 개의 초식이 마치 하나의 바퀴처럼 돌아
가며 빈틈없이 펼쳐지자 유금종은 절대 절명의 위기로 몰려가고 있었다.
마치 유령을 상대하는 듯 상대의 공격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남을 핍박해보았지만, 자신이 생명의 위협을 느껴본지가 건 오십
년만의 일인 유금종은 이 낯설고 이질적인 감정을 감추느라 얼굴에
식은땀을 흘려야만 했다.
‘이건 귀신이다. 인간이 아니다.’
유금종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의 상황을 설
명하기 난감한 일이었다. 어떻게 채 삼십도 안 된 애송이에게 자
신이 이렇게 밀릴 수 있을 것이며, 움직여도 움직이는 것 같지 않고
검을 내쳐도 살기가 없는데, 배이면 아프다. 벌써 다섯 군데나 상
처를 입었기에 그 느낌을 절절히 잘 아는 유종금이었다.
상대가 귀신이 아니라면 저렇게 은밀한 검법이 존재 할 수 없었
다. 그도 아니면 지금 자신은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리라.
정말 유금종은 이를 악물고 전 힘을 다했다. 삼십년간 아껴 놓았
던 정력을 전부 쏟아 부었다.
자신이 아는 흑월쾌영검법을 뭐 빠지게 휘둘렀지만 돌아오는 것은
절망이었다. 상대의 검은 자신보다 언제나 반수 빨랐고, 반수가 강
했다.
“오냐, 이놈 이것도 받아봐라!”
악에 받친 유금종은 흘월쾌영검법의 최후초식인 흑월강(黑月?)을
펼쳤다. 드디어 마지막 밑천까지 전부 동원한 것이다.
사천성의 무림동도들에겐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었다.
검은 달이 뜨면 죽는다.
지금 그 검은 달이 허공에 떠 있었다. 뿐이랴, 마치 살아 있는 종
자처럼 꿈틀거리며 사공운을 향해 날아갔다. 순간 사공운의 검이
유성처럼 빠르게 흑월강을 정면으로 가르고 지나갔다.
이는 바로 유령검법의 제팔식인 유령만강(幽靈慢?)이었다.
“꽝”하는 폭음과 함께 “크억”하는 비명이 그 뒤를 이었고, 비명소
리가 가시기도 전에 동굴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뒤로 퉁겨진 유금
종이 간신히 일어서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단엽을 보았다.
코와 입으로 피가 조금씩 비추고 있었으며, 복부는 피가 엉겨 있
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손해를 본 것 같았다.
“부........ 분명, 강기가 안 보였는데, 아니 강기 같은 기세도 없었
는데.”
유금종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히 저 애송이의 검법은 그저 평
범했다.
검강을 상대하려면 반드시 검강 뿐이었다.
자신의 검강이 어설프다면 빠른 신법이나 보법으로 피할 수 있었
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흑월강은 십일성의 수준이니 그럴
리가 없었다. 그리고 상대는 분명히 정면으로 공격해왔다. 한데 분명
히 저 애송이의 검엔 검강의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느끼지
못했다, 한데 충돌하고 나자 분명 검강이었다.
단엽이 유금종을 보면서 차갑게 대답했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공격을 막을 수 없다
면 이미 죽은 목숨이지.”
유금종은 할 말이 없었다. 무형검강, 상대는 무형검강으로 자신을
공격했고, 자신을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만약 결투 중에 내가 흑월강을 펼치지 않았을 때, 슬쩍 저 검초를
펼쳤다면.’
유금종은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자신은 저 검초가
그저 평범한 초식인 줄 알고 자신 또한 일반적인 초식으로 맞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결과는.
유금종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그의 눈이 다시 붉어지고
있었다.
“유....... 유령.”
그렇다. 지금 단엽의 공격은 유령이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마치
허깨비처럼 허공을 밟고 날아오는데, 보지 않았으면 그의 기척을
절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단연코 저런 무형무음무세의 공격을 할
수 있는 것은 유령밖에 없다고 단정한 유금종이었다. 그리고 지금
펼치고 있는 검초는.......
유금종은 싸우고 싶은 생각이 달아났다.
“이....... 이보게 후배님, 우.......우리 다음에 보세나.”
보세나라는 말의 여운이 동굴 속에 맴을 돌때, 유금종의 신형은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공격하던 단엽의 신형도 그 자리에 멈추었다.
첫 대결치고는 나름대로 만족할 만한 수준이었다. 어차피 지금 죽
이면 연습 상대가 없으니 그도 안 될 말이었다.
동굴 밖으로 도망친 유금종은 창피함과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만약 지금의 사실을 동료들이 안다면 얼마나 비웃겠
는가? 절대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아니 믿지도 않을 것이다.
삼십년간 갇혀있더니 드디어 맛이 갔다고 미친놈 취급당할게 뻔했
다.
‘전부 당하고 나면 나 하나를 비웃진 못하겠지. 그래도 우리는 여
기서 삼십년간 동거 동락한 생사 지기 아닌가? 우리의 우정을 위
해서도 함께 당해야 한다.’
결국 유금종은 오늘의 일을 완전히 비밀에 붙이기로 자신과 합의
하였다.
제십장 구환유령검법(九?幽靈劒法) - 3
- 무음무형무세의 검법은 사패천을 유린하고.
진충은 자신이 있는 방을 전부 훑어 나갔다.
한쪽엔 벽곡단이 들은 단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관이 있는
뒤쪽에는 작은 샘물이 있었다.
샘이라고 하기보다는 벽의 한쪽에 작은 도랑이 파여 있었고, 벽에
서 솟아 나온 물은 그 도랑을 타고 흐르다가 돌로 만들어진 작은
샘터에 고여 들었다. 그리고 그 물은 다시 경사면을 타고 다른 한
쪽으로 흘러 그 반대편 돌 벽의 작은 굴속으로 나가게 되어 있었다.
고인 물이 아니니 썩지 않을 것이고, 수욕을 하거나 세수를 하기
에도 충분한 물이었다. 그리고 방의 가운데는 대가 있었고 그 대
위에는 옥으로 만들어진 관이 방안의 주인처럼 너무 도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 관 안에는 용설아가 생사의 고개 길에서 끊임없는 싸움을 하고
있으리라. 사방을 둘러보고 한동안 그 관 앞에 서 있는 진충은 생
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과연 자신이 무엇부터 해야 하는가와 어떻
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결정을 해야 했다. 그러나 결론은 처음
부터 나 있었고, 진충에게 가장 큰 관건은 내공을 되찾는 일이었다.
결정이 내려지자 진충은 벽곡단을 한 알 먹고 천천히 샘물을 들이
켰다. 시원한 기운이 그의 목을 타고 가슴을 적셔 주었다. 울적하고
답답한 마음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는 어느 정도 마음 정리가 되자 돌바닥에 앉아 천천히 유령신공
을 떠 올리기 시작했다.
사공운이 유령대법으로 진충의 머리 속에 기억시킨 무공은 모두
다섯 가지였다.
그것은 건곤유령신공 삼단계까지와 유령신법 전반부 그리고 유령
보법 전부와 구환유령검법의 칠식까지였고, 마지막으로 삼절유령
신권(三絶幽靈神拳)이었다.
또한 소천대검식의 십이초식은 따로 머리 속에 전부 외우고 있었
다. 특히 사공운은 진충에게 유령절기를 주입하면서 세세한 부분
까지 자세하게 설명을 곁들였기에 진충이 무공을 배우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다. 그 설명과 논리는 마치 돌에 새겨진 글씨
처럼 진충의 머리 안에 각인되어 있었다.
상황이 어려워지자 혹시 모를 만약을 위해 안배한 것이, 지금 진
충에겐 하나의 희망이 되어 주고 있었다.
찬찬히 유령절기를 떠 올린 진충은 그날부터 유령신공을 배우기
시작했다. 지금 그가 이 안에서 거의 몇 년 이상을 홀로 버틸 수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무공에 대한 열정과 사공운에 대한 충심,
그리고 자신이 없으면 용설아가 죽는 다는 그 세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살수 중에 자신을 능가하는 인간은 유령대제뿐이라고 오만했던 청
죽림의 림주 무영살(無影殺) 호금명은 정말 미치기 직전이었다.
그는 오늘 아침에 심혼이 있는 동굴 속으로 들어 올 때만 해도 하
루 종일 이 안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 하는 걱정에 머리가 터질 지
경이었다.
억지로 하루를 버티던 대해왕 육금도는 동굴 밖에서 미적거리며
호금명을 기다리다, 그가 나타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도
망가 버렸다.
평소와 다른 그의 행동에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얼마나
기다리기 지루했으면 하는 마음에 이해하기로 했다. 그들은 벌써
얼마나 많은 날들 동안 돌아가며 동굴을 지켰는지 모른다.
그들도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혹시 어딘가에 있는 다른 비밀통
로로 도망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함은 그들을 더욱 지치게 만들
었었다. 한데 갑자기 단엽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 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그가 나타나자
호금명의 마음은 들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들뜬 마음은 단 일
각이 지나기도 전에 차가워졌고, 지금은 정말이지 미치기 직전이었다.
처음 자신에게 덤비는 단엽을 보면서 정말이지 호금명은 상대가
너무 가소로워 콧물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그리고 저것은 뭐란
말인가? 마치 아이가 휘두르듯이 위력 없어 보이는 검법하고는. 한
데 자신의 근처에 가까워질수록 상대의 검 끝에서 밀려오는 기세
를 느낄 수 있었고, 그 기세가 얼마나 날카로운지 느낀 그는 지체
없이 우아한 동작으로 바닥을 굴러야 했다. 그 후 정신이 번쩍 들었
지만 그 뿐이었다.
삼십여합을 겨루면서 단 한번도 제대로 된 공격을 못해 보았다.
거의 일방적으로 몰린 결투였다. 삼십년 동안 안에 갇혀 있으면서
사패천의 무공은 나름대로 진전을 이루었다. 처음 천금마옥에
들어와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기저기 뒤지고 다녔지만, 그들을
한 단계 더 상승시킬 만한 무공도 찾을 수 없었거니와 그런대로
반듯한 무공이 있었다 해도, 자신이 지닌 무공과 맞지 않았다. 또
한 어설프게 강한 무공은 지금부터 새로 하느니 차라리 지니고 있
는 무공을 더욱 갈고 닦는 것이 백번 나았기에 그들은 새로 무공
을 익히는 것은 포기했다.
새로운 무공을 포기한 후 한 동안은 밖으로 나가는 방법을 연구하
느라 시간을 보냈다. 결국 자신들의 힘으로는 불가항력임을 알고,
현실에 절망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린 그들은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
할 수 있었다.
그들이 그 동안 많은 힘을 들인 것은 무공이 아니라 다른 것이었
다. 어차피 나이가 들은 만큼 그들은 자신들의 한계를 잘 알고 있
었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면 더 이상의 큰 진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는 사실을 그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들은 자신들이 이 곳을 나갔을 때, 자신들의 무공을 대신할 만한
무기들을 만들기 시작했고, 천금마옥의 삼십년은 그 가공할 무기
들을 만드는데 전부 허비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 그 끝을 보아
가는 중이었다.
그런 상황이라 그들의 무공은 어느 정도 진전은 있었지만, 대폭적
인 무공의 상승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후회스럽고 억울한
일이었지만 이미 늦은 후회였다.
호금명은 과거를 후회하며 정말 전 힘을 뽑아 죽어라고 대항하였
다. 그러나 역부족이란 말을 실감하기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단엽의 공격에 호되게 당하고서야 상대
의 검법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몰라도
그는 알아야 하는 검법이었다.
“유....... 유령검법.”
자신의 사존이 바로 그 유령검법에 처참하게 패하고, 강호 제일
살수 자리를 유령대제에게 넘겨주어야 했었기에 그는 누구보다도
유령검법의 특징을 잘 알고 있었다.
상황과 장소가 그렇다 보니 조금 늦게 알은 감이 있었다.
상대가 유령의 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호금명은 의욕을 상실
했다. 오죽 했으면 그의 사존이 죽기 전에 남긴 유언이 ‘유령을 만
나면 무조건 피하라!’였다.
‘이런 빌어먹을 나도 정말 멍청하구나 이제야 유령검을 알아보다
니.’
상대가 누구인지 알자 이미 싸울 마음은 다 달아난 다음인지라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잠깐. 물어볼 말이 있다.”
호금명이 진지한 얼굴로 고함을 치며 결투를 중단 하였다. 유령신
검으로 유령무혼의 초식을 펼치려던 단엽의 신형이 멈추며 그의
시선이 호금명을 향했다.
호금명은 마른 침을 삼키고 신중하게 물었다.
“너는 혹시 유령문의 제자가 아니냐?”
답엽의 입가가 가볍게 오그라들었다.
“이제 서야 알아보다니, 청죽림의 림주 답지 않군.”
호금명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그랬군, 그렇다면 말일세.”
단엽이 호금명을 보았다. 대체 뭔 말을 하려고 하는가? 빨리 끝내
라는 투였다.
“이제 그만 하세.”
그 말을 끝내고 호금명은 죽어라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도망가는 호금명의 등을 보면서 단엽은 그만 실소하고
말았다. 설마 이런 상황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밖으로 죽어라고 도망친 호금명은 억울했고, 망신스러웠다. 일단
밖으로 나온 호금명은 빠르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안도의 숨을 쉰 호금명은 빠르게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
가 사라지고 얼마 후 그 자리엔 호금명을 뺀 사패천이 나란히 나타났다.
그들은 호금명이 사라진 쪽을 보면서 무엇인가 어색한 표정을 지
었다.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지자 천사월(天死月) 유종금이 작은 헛
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결국, 저 살수쟁이도 별 수 없었군. 이젠 회의를 할 때가 아닌가
싶은데.”
그의 말에 나머지 두 사람은 잡아먹을 듯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
았다. 바로 얼마 전에 자신들이 당한 것을 생각하며(사실은 거의
죽었다 살아났다.) 그들은 치를 떨었다.
‘흉악한 놈.’
‘물귀신 같은 새끼.’
맹호림과 육금도는 이를 바드득 갈았지만 할말이 없었다. 결국 그
들도 유좀금과 똑 같은 방법으로 친구를 사지에 몰아넣었었으니 뭐
할 말이 없는 셈이었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당한 것은 억울하고 분했다.
두 노괴는 유종금의 험하고 갸날퍼 보이는 외모를 보면서 그의 흉
악한 잔머리에 치를 떨었다. 특히 거의 기어서 도망쳐온 맹호림의
경우는 거의 폭발 직전이었다.
무려 열 두 곳이나 검상을 입고 기어 나온 맹호림을 보고 나타난
유종금이 말했었다.
“그 새끼, 무지 강하지?”
“너........ 넌, 저 새끼 강한 것 알고 있었냐?”
맹호림의 물음에 유종금은 몹시 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의 표
정으로 보자면 자신이 늦게 왔다는 억울함과 당장이라도 뛰어 들
어가 그 애송이를 단검에 때려죽일 듯한 자세였다.
“혹시나 해서 도와주려고 뛰어 왔는데, 내가 조금 늦었지? 지금
당장 달려가서 그냥 콱, 나이 많은 내가 참는다 참어.”
그 말을 들은 맹호림은 정말이지 조금의 힘만 남아 있었으면 그의
불알을 꽉 깨물어 뜯어 버리고 싶었었다. 그러나 어쩌랴! 그는 정
말이지 단엽에게 너무도 호되게 당해서 도망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끝까지 오기로 버틴 덕분이었고, 마지막까지(사실 마지막엔
죽어라고 도망했지만) 최선을 다한 무사의 정신 때문이기도 했지만
, 그 자부심은 유종금으로 인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 후에 생각해 보니 혼자 당한 것이 너무 억울해, 그 다음날엔
자가도 유종금에게 동참하고 말았었다.
대해왕(大海王) 육금도는 유종금을 노려보다가 맹호림을 보았다.
‘너도 똑 같은 새끼다.’
울화가 치민 육금도였지만 자신도 같은 놈이란 생각은 안했다. 지
는 정말이지 호금명에게 말해주고 함께 하려고 했었다.
어제 손톱이 빠지고 이가 두개 부러지지만 않았어도 정말 그러고
싶었다.
눈치 하나는 가장 빠른 육금도였기에 단엽과의 결투에서 제일 빠
르게 도망친 인물이 그였다. 당연히 부상도 가장 경미했다. 단지
그의 엄살은 능히 신선의 경지라고 다른 사패천들이 인정한바 있었다.
그런 그가 지금 두 사람을 싸잡아 욕하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 잘 어울리는 친구들이었고, 너무도 당연한 흑도의 얼
굴들이었다.
단엽의 검은 춤을 추고 있었다.
느릿해지는가 하더니 갑자기 빨라지고, 빨라지는가 하더니 느릿해
진다.
전 내공을 끌어 모아 펼치는 검무였지만, 내치고 끊고 멈추고 당
기는 동작이 부드럽고 무리가 없었으며, 치고 휘두르고 찌르고 베는
동작이 극히 자연스러워 내기의 운용과 검의 형이 하나로 일치함
을 알 수 있었다.
마음이 일어 의가 기를 부르기도 전에 검은 기를 모아 형을 이루
고 있으니, 이는 심검의 근본이요. 검강이 풀리고 모아지며 하나의
틀을 이루는 듯하지만 자유로우니 그의 검은 이미 형의 단계를
넘어선지 오래였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그의 움직임은 점차 기세를 잃어갔다. 검에
서 뿜어지던 검강의 날카로움도 사라지더니, 급기야는 검의 흐름에
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도 없었고, 공기를 베
어가는 잔여 진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동안 천룡무상검법과 구환유령검법, 그리고 소천대검식을 읽고
수련하면서 느꼈던 부분들이, 사패천과 겨루면서 하나의 형상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세상을 잊고 자신을 잊었다. 검의 길에 뜻을 세
우니, 기가 그 길을 쫓고, 새로운 도리가 다시 단엽을 인도하고 있
었다. 검과 마음과 몸이 하나를 이루고, 그 안에 내기가 다시 하나
로 합해지니 그 검리를 둘로 나누어 이를 쌍절유령사검(雙絶幽靈
死劍)이라 부르기로 했다.
검을 던져 이를 기로 움직이니, 이가 곧 이기 어검술이요,
손으로 기를 조절하여 검을 움직이면 이가 곧 수어검이요,
눈으로 움직이면 목어검 이고, 마음으로 움직이면 심어
검이라, 이 것을 곧 이기 어검술이라 하였다.
어검술은 절대 무적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검을 든 사람
들이 가장 이루고 싶어 하는 꿈의 경지 중 하나였다.
단엽은 이 어검술의 경지를 유령검에 도입하여 귀영단혼사
(鬼影斷魂死)라 하였다. 이것이 유령사검의 첫 번째 초식이
었다. 그리고 검강을 가장 가늘고 날카롭게, 그리고 가장
은밀하게 뽑아내 상대의 영혼까지 죽일 수 있다는 두 번째
초식은 유령영혼사(幽靈影魂死)라 하였다.
천룡무상검을 구환유령검에 합치면서 그 검법 자체도 큰 발전을
이루었지만, 무엇보다도 새롭게 탄생한 이 두초의 검법은 사공운이
아는 세 가지 검법이 하나로 합해진 정화중의 정화였다.
이론적으로 완성을 하고 생명을 걸고 결투를 해가며 보완한 이 검
초들은 지금까지 있었던 여타의 검법들과는 그 괴를 달리 했다.
우선 귀영단혼사는 기존의 이기 어검술보다 위력에서는 떨어질지
모르지만 검의 자유로움과 은밀함, 그리고 날카로움에선 오히려
앞선다고 할 수 있었다. 죽 이기 어검술과 함께 펼치는 검강의 원리
중 강함을 포기하고 은밀함과 자유로움에 치중하였다. 그래서 귀
영단혼사는 여타 어검술에 비해서 내공 소모가 적은 것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그리고 쌍절유령사검의 정화라 할 수 있는 유령영혼사는 말 그대
로 죽음의 검법이었다. 가장 완벽한 심검의 도리를 지니고 있으면
서도 은밀했고, 빨랐다. 또한 이 검초를 펼칠 때 뿜어지는 실같은
검강은 결코 천룡무상검법의 최후 초식인 천룡무상의 검강에 크게
뒤지지 않았다.
굳이 비교하자면 위력에서는 천룡무상이, 빠르기와 날카로움에서
는 유령단혼사가 위라 할 수 있었다. 여기에 유령신공 최고의 절
기라 할 수 있는 유령신법이 곁들여지면 천룡무상검법과 겨루어 절
대 밀리지 않을 것이라 자부했다.
초식에 대한 이론은 완성했고, 구결과 도해가 완성되었으니 이젠
숙련하는 일만 남은 셈이었다. 단엽의 검은 점점 은밀해졌고, 그의
신법은 갈수록 기척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의 유령신공도 진일
보하였다는 증거였다.
네 명의 인물들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친구 아닌 친구로 삼
십년간 함께 살면서 가장 험악한 분위기였지만, 마지막으로 수난을
당한 호금명을 빼고 나머지는 모두 딴청을 하고 있었다.
특히 유종금은 계속 머리를 긁적거리고 있었는데, 자신이 생각해
도 좀 미안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뻔뻔하기로 유명한 유종금은 곧
태연한 얼굴로 세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미 한바탕 설전이
오고 갔지만 그의 철면 신공은 여전히 건재하고 있었다.
어차피 서로 깨진 이야기는 하기가 참 뭐 한 짓거리인지라 모두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었다.
“험, 험, 일단 그 예의라곤 내가 싼 똥자루만도 못한 애송이 놈을
어떻게든 사로잡아야 할 상황이고, 세분 친구는 어떻게 생각 하
시요.”
안하던 존대까지 쓰는 거 보니까, 그리도 좀 미안하긴 한 모양이
었다.
‘죽일 놈, 니 똥이나 쳐 먹고 입이나 닥치면 욕이나 안하겠다.’
‘저, 우라질 철면피 새끼는 죽어도 혼자는 안 죽을 새끼다.’
‘모진 놈.’
맹호림과 육금도. 호금명은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겉으로 내색하
지는 않았다. 잠시 분을 삭인 호금명이 울컥하는 성질을 억눌러
참으면서 말했다. 그는 단엽의 검에 베인 등과 허벅지가 시큰거리
는 것을 느끼면서 불현듯 그 애송이가 두려워졌기에 일단 사심은
접기로 했다.
“흠, 결코 우리가 약해서가 아니라 귀찮으니까 협공해 버리자.”
그 말에 반대를 하고 나선 것은 맹호림이었다. 그의 입가에는 음
흉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우리가 나설 필요 없다.”
세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이 기회에 그 위아래도 모르는 망종 새끼를, 이번에 들어온 그
애송이와 붙여 놓자.”
맹호림의 말에 세 노인의 입이 묘하게 오므려졌다. 그들이 생각해
도 기가 막한 방법이었다. 이거야 말로 독으로 독을 제거 한다는
이치에 합당했고(이독치독), 좀더 고상하게 말한다면, 악(?)으로 악
을 제거하는 기발한 방법이라 하겠다.(이악치악)
호금명이 눈을 빛내며 맹호림에게 물었다.
“근데 그 무지막지한 관패놈을 어떻게 움직이지.”
“간단하다. 어떤 애송이가 나타났는데, 싸가지가 호박이라 자신이
관패 그 자식보다 더 강하다고 큰 소리 탕탕 치더라고 한마디 하면
된다.”
세 사람은 그 말에 환호했다.
누구보다도 관패의 성격을 잘 아는 그들은 그 한마디로 나타난 그
애송이가 살아남지 못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뭐 둘 중에 누가 죽더라도 그들은 손해가 없었다.
싸움이 끝이 난 후 누가 살아남든, 싸움에 지친 틈을 타 협공으로
죽이면 간단한 일이었다.
다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어느 정도 자신이 생각한 두 가지 초식이 몸에 익숙해지자 단엽은
다시 심혼연을 나섰다. 모두 한번씩 패했으니 이번에는 무더기로
덤빌 것이라 생각하고 마음을 단단히 다진 그였다. 한데 심혼연을
나선 단엽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의외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
던 사람은 단 한명이었고, 자신이 아는 네 명중의 그 어느 누구도
아니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거미와 지네를 통째로 씹어 삼키고 있던 거한의
남자가 먼지를 툭툭 털며 일어섰다. 그가 일어서자 공간을 일시에
찢을 듯한 패기가 그의 몸에서 구름처럼 일어나 단엽을 덮치고
있었다.
무려 육척사촌(백구십이센치 정도)에 이르는 키, 우람한 근육과 탄
탄해 보이는 몸에는 칡넝쿨 같은 힘줄이 철갑처럼 돋아나 있었다.
그는 가죽으로 만든 짧은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그의 하복부는
당장이라도 터져 나갈 것 같았다.
단엽은 그가 입고 있는 가죽 바지가 인피로 만들었다는 것을 느꼈
다. 그리고 거한의 양 손에는 두 자루의 도끼가 한 자루씩 나누어
들려 있었는데, 그 하나의 길이가 삼척오촌이요, 날의 폭은 십이촌
정도이고, 날의 최대 넓이는 이십사촌 정도 될 것 같았다.
자루까지 통으로 강철을 두드려 만든 도끼로, 그 무게가 한 자루
당 무려 팔십이근이라 들었었다. 지금 저 거한의 정체가 단엽이
짐작하는 인물이 맞는다면 말이다.
동경을 보는 듯한 대머리에 빳빳한 구레나룻, 그리고 험한 얼굴을
더욱 험하게 만들어준 범의 수염은 그를 한마디로 야차나 수라같이
보이게 만들었다.
덩치의 사내는 어슬렁거리며 단엽에게 다가왔다. 그의 몸엔 단순
하고 무식한 살기로 꽉 차 있었다. 그는 단엽의 일장 거리까지 다
가와서 물었다.
“이름은.”
“단엽.”
“난, 관패다.”
“천살마부(天殺魔斧)”
“맞다.”
“나에게 볼일이 있는가?”
“물론.”
“왜지?”
“이유는 죽고 나서 들어라!”
그 말이 끝이었다. 이미 관패가 던진 도끼 한 자루가 무서운 속도
로 허공을 왜곡한 채 미끄러져 날아왔다. 그 무지막지한 위력에
동굴 내부가 진저리를 치며 요동을 친다. 단엽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 이것은 생각보다 더욱 막강하고 무식한 위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