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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강 출품작

흙의 온기

작성자고병옥|작성시간17.09.18|조회수29 목록 댓글 0


흙의 온기

 

고병옥

 

   무채색 일색인 거실에 호접난 화분이 손님처럼 다소곳이 자리를 잡았다. 오랜만에 마주한 유백색 꽃잎과 자줏빛 꽃심에 두 눈이 화들짝 커진다. 유선형으로 휘어진 줄기에 일정한 간격으로 붙어 있는 꽃송이. 두 줄기의 꽃대가 장원급제한 사람의 머리에 얹혀 있는 어사화를 연상케 한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에서 며칠 전 문병 차 다녀간 그녀의 성품이 엿보인다.

   한 달이 훨씬 지났을까. 먼저 핀 꽃송이부터 색깔이 변해갔다. 그렇게 꽃송이는 차례차례 힘을 빼고 자세를 낮추더니 잡고 있던 생명의 손을 놓아 바닥으로 떨어졌다. 흥망성쇠를 비켜갈 수 없는 것이 만물의 이치이지만 막상 그 과정을 보고 있으려니 처연하다. 꽃 떨어져 말라가는 대를 자르고 보니 그때서야 진초록 잎 넉 장이 보인다. 잎에는 눈 닫고 꽃만 보아 왔던 것인가. 풍성하지는 않지만 초록색 잎이 물에 씻어 놓은 듯 윤기가 흐르고 도톰한 양감에 귀태가 흐른다. 뒤늦게 보게 되어 미안했다. 공기 중에 드러나 있는 하얀 뿌리가 건강해 보인다. 이대로 잘만 키우면 그 예쁜 호접난 꽃을 내년에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난 옆에 또 하나 무언가가 있다. 저택 옆에 초라하게 서 있는 오두막 같은 느낌이다. 난이 허전해 보일까 봐 곁들여놓은 것일까. 난도 아닌 것이 난이 사는 이끼 속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다. 오래 된 벽지 색깔의 푸석한 잎 몇 장이 가느다란 줄기에 붙어 있다. 살아날 수 있을까. 몸통을 옴싹 쥐고 살며시 잡아당겨 보았다. 대여섯 개가 한 덩이로 힘없이 뽑힌다. 땟국에 절은 수염뿌리가 비 오는 날 빨랫줄에 후줄근히 걸쳐 있는 옷가지처럼 늘어져있다. 호접 난 곁에 심어놓은 꽃나무도 아닌 것 같은 식물. 들이나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년초가 아닐까. 이끼에서 자라는 난하고는 그 뿌리부터 확연히 달랐다. 모양이나 풍채가 별로 볼품이 없다. 호감이 가지 않는다. 이름을 모르니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하찮은 식물이라 할지라도 존재한다는 것은 그들만의 세상이 있을 것이다. 마침 비어있는 백자화분에 흙을 넣고 따로 옮겨 심었다.

   여름 지나고 가을이다. 풀과 나무들이 단풍이 들거나 낙엽 되어 갈 때 백자 화분에서는 잎들이 날이 가면서 점점 커지고 초록빛깔로 변하여 생기가 돌았다. 겨울이 다 지나갈 때 쯤 잎 개수도 늘고 건강해졌다. 타원형인 듯 넓적한 잎 가장자리로 하얀 테를 둘렀으니 난도 아닌 것이 난이라면 자생난 중에서도 사랑 받는 복륜처럼 기품 있어 보인다. 뻗어가는 기상이 산비탈의 칡넝쿨을 닮았다. 잎자루나 줄기가 붉은 색을 띄고 있으니 생명에 대한 정열을 간직한 식물이 아닐까. 곁가지를 냄 없이 한 줄기로 자라니 일편단심의 사랑을 간직하고 있을까. 잎 또한 드문드문 달려 있는 모습이 욕심 부리지 않고 유유자적하는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몇 년이나 지나났을까. 넝쿨이 양팔 길이보다 더 자랐다. 줄기로 화분을 감아 똬리처럼 틀어주었다. 초록 잎 사이로 보이는 백자 화분이 운치를 더한다. 나는 그의 이름을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사계절 투정 없이 잘 자란다는 것이다. 물이 부족하다며 시들해 있는 다른 식물들하고는 달리 쉽게 시들지 않는다. 춥다고 실내로 들어온 식물들 보란 듯이 찬바람 냉기 도는 베란다에서 씩씩하게 잘도 견뎌낸다. 지난겨울도 투정 한 번 없이 보냈다.

   지인이 방문한 날이다. 꽃을 좋아하는 그녀답게 화분이 있는 베란다로 가더니 호야도 있네.” 한다. 그것은 별을 닮은 꽃이 신부의 부케 모양으로 작은 다발을 이루며 핀다는 호야였다. 고독한 사랑,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졌으며 꽃이 피면 행운이 온다고 한다. 난분에서 떼어내어 흙으로 옮겨 주었을 뿐인데 씩씩하게 자란 것이다. 내가 처음 보았을 때와는 사뭇 다른 튼튼하고 굵은 줄기와 두툼한 진초록 잎으로 호야의 본 모습을 찾았다.

   아직은 호야가 꽃을 피울 만큼 자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흙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한 언젠가는 별을 닮은 꽃송이를 마디마디 피워낼 것이다. 행운을 별처럼 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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