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休)
고병옥
무작정 나섰다. 처음 찾아온 지리산 둘레길. 아직 싸늘한 바람이 가시기 전 화엄사에서 서쪽으로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밭둑을 걷는다. 울퉁불퉁한 돌 틈 사이를 골라 천천히 산길을 오른다. 잡목을 베어낸 큰나무 사이를 지난다. 윤기 나는 초록빛은 흔적도 없다. 밟으면 바스러질 것만 같은 삭정이가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군데군데 모여있다. 늙고 쇠한 육신을 삭정이 같다더니 정말 힘없고 볼품없다. 내 몸 어디에서도 젊은 날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으니 저 삭정이 나를 보는 듯하다.
골짜기 작은 도랑을 건너고 가축분뇨 냄새나는 축사 옆길도 걷는다. 봉분들이 크기 맞추기라도 하듯 고만고만한 공동묘지 옆길을 걷다 길가 나뭇가지에 매단 붉은 리본을 보았다. 안전하게 길 안내를 도와줄 누군가의 손길이다. 바닥에는 가고 오는 방향을 혼동하지 말라는 것일까. 각각 붉은색과 검은색 화살표로 표시해 놓았다. 손대지 마시오. 들어가지 마시오. 경고문도 있다. 인생길에도 이처럼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는 부모님과 책이나, 선인들과 지인이 있건만 지나치고 마는 일이 다반사이다. 저 잘났다고 세상을 덤벙대다 유수 같은 세월 탓만 한다. 그래서 후회라는 단어도 생겨나지 않았을까. 나 또한 되돌릴 수만 있다면 듣고 보고 읽고 생각하며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은데 돌아갈 수가 없다. 때늦은 후회다.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마른 고사리가 바스락거리며 바람에 흔들린다. 사라지는 날까지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의도를 나는 모른다. 그러나 차가운 허공을 향해 몸부림치고 있는 모습은 어쩜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일주일, 한 달, 일 년과 같이 인간이 만들어 놓은 마디가 자연에는 없다. 햇빛과 바람과 이슬로 살아간다. 밤과 낮의 순환에 꽃도 피고 열매 맺으며 생명의 몸피를 키운다. 지금은 겨울의 끝자락. 아직 산과 들이 동면 속에 있다. 얼마를 걸었을까. 비탈진 언덕에서 바라다본 지리산의 작은 마을. 깔끔한 차림새에 온기가 돈다. 마을로 들어서는 어귀에 ‘솔숲에 숨어 우는 바람 소리’. 다듬어지지 않은 송판에 검은 글씨로 써서 고갯길 양쪽 소나무를 기둥 삼아 가로 걸쳐 놓았다. 무슨 행사라도 있는 것인가. 고개를 넘으니 가까이 집 한 채가 먼저 나의 마음을 잡는다. 본체와 헛간이 있어 평범한 집이건만 정원을 꾸며놓은 솜씨가 남다르다. 돌과 나무와 오래된 작은 항아리가 있고 대나무에 고무호스도 있다. 시골집이라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갖가지 소품들이 자리를 잡아 이야기를 꾸며 간다. 동화책 한 페이지를 펼쳐 놓은 듯하다. 인형 닮은 부부가 나타나 반갑게 인사를 할 것만 같다. 인공폭포의 물이 얼어 마치 얼음으로 된 커튼을 드리운 듯하다. 산속 바람에 녹은 얼음물은 마당의 작은 호수로 흘러든다. 나뭇가지나 대나무를 요리조리 아슬아슬하게 연결하거나 동여맨 솜씨에 정성이 느껴진다. 오고 가는 사람은커녕 주인마저 보이지 않는 산골 외딴집. 해와 달과 별, 구름과 바람이 내려와 머물다 가라며 이리 정성을 들인 것인가.
사립문 밖에는 손잡이 달린 작은 거울이 기둥에 고무줄로 묶여있다. 사람들이 들여다보기에 높이나 위치가 알맞다.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일행은 서로 얼굴을 들이밀고 웃는다. 못난이 자매들이다. 웃고 있는 거울 속의 나를 보고 또 웃는다. 바람도 그냥 지나가지 못하고 다가와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흔들어본다. 손에 물 묻혀 헝클어진 머리칼도 잠재우고 얼굴의 근육도 실룩샐룩 풀어본다. 우리는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매무새를 다듬고 어깨를 펴 본다. 고즈넉한 풍경에 심취되어 잠시 나를 잊고 있었다.
골목길 따라 도랑이 생겼는지 도랑의 모양대로 골목길이 생겼는지 알 수는 없으나 도랑과 골목길이 구불구불 나란히 가고 있다. 손 꼭 잡고 도란도란 길을 걷는 친구 사이 같다. 솔숲에서 흘러내린 도랑물이 머물다 돌아나가는 곳에 사람이 들어앉기에는 작은 원두막이 하나 있다. 몇 개의 작은 나무토막으로 만든 인형이 바람에 다리를 흔들며 앉아 있다. 어깨에 괭이를 걸쳐 메고 일하러 가다가 휴식 먼저 챙기는 젊은이의 익살이 보인다. 휘파람이라도 불 것만 같다. 누구 한 사람 나와보는 이 없는 산속 마을. 마을도 고단할 때 있겠지. 지금은 쉬고 있나 보다.
지리산이라는 거대한 뫼의 한 자락, 인적도 뜸한 산골 마을을 지나가다 바라본 풍경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한눈파는 짬도 없이 달릴 수는 없다. 길은 걷기도 하고 발길을 멈추게도 한다. 우리 인생길도 그렇다. 그것이 휴(休)다. 하루의 절반이 밤인 것은 육신을 편히 쉬라는 자연의 이치가 아닐까. 쉬는 것은 산소와 같은 것. 지친 몸에 활력이 생기고 새로운 도전을 꿈꾸게 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 작정하지 않아도 나에게 다가온 오늘의 시간은 그래서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