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예수님 승천 이후 약 열흘간의 기간에 사도들과 120명의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할 때 오순절날 성령이 임하게 된 역사를 기록한 본문입니다. 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오순절은 이스라엘의 3대 절기의 하나로서 유월절 이후 50일째 되는 날에 지켜졌던 ‘맥추절’의 다른 명칭 이 그 유래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맥추절’, ‘칠칠절’이 다 이 ‘오순절’과 동일한 날입니다. 유대교의 전통에 따르면 ‘오순절’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날이며 율법을 감사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이 땅에서 부활하신 몸을 보이시며 제자들을 다시 세우신 40일간의 생활하시고 승천하셨고 그로부터 열흘이 지난 일요일에 제자들이 기도하는 자리에 성령이 임하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기에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열흘째 되는 날 성령 세례의 약속이 성취되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이 분명히 성취된 것입니다. 주님 약속은 거룩하시고 신실하신 그분의 인격이 담기어 있습니다. 주님의 약속은 그 누구도 훼방하거나 무산시킬 수 없는 하나님 절대적인 권위로 맺어진 약속입니다. 천지가 없어질지라도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 승천 이후 찾아온 첫 오순절에는 성령님이 믿는 자에게 임하셔서 이제 이날부터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교회설립, 교회성장의 기반이 성령임재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며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하게 될 때 우리가 어떤 삶을 살게 되는 지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고 저와 여러분이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며 은혜충만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첫째로, 우리는 복음적 삶을 사는 담대함이 생깁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장 3절과 4절입니다.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늘 본문 사도행전 2장 3절 말씀은 성령께서 각 성도에게 불의 혀 같은 모습으로 임하시는 광경입니다. ‘불의 혀처럼’은 불이 맹렬하게 타오르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불은 에너지의 원천입니다. 불은 물과 함께 인간과 만물의 생명을 유지하는 필수요소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불처럼 각 성도에게 임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하늘의 생명과 힘을 성도들에게 주었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성령충만에 대해 생각하기를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병든 자가 고침을 얻고 눈먼 자가 눈이 보이고 가난한 자에게 물질이 쏟아지는 등과 특별한 역사가 ‘성령충만’이라고 말합니다. 그것도 맞습니다. 성령충만을 경험한 제자들과 역사상의 많은 위대한 능력의 목회자들이 기도하며 성령충만의 역사를 통해 그런 놀라운 일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임재하여 성령충만할 때 제일 처음 기록한 성령의 역사는 바로 방언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복음을 전하는 역사로 나타납니다.
어느 교단은 이 본문을 근거로 방언의 은사는 성령체험의 가장 기본적인 은사며 성령강림의 제일 첫 모습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방언의 은사를 받지 않으면 성령을 받지 않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견해는 성경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방언이 성령의 은사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지, 모든 사람들이 받아야 할 은사로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령의 기본은사라서 방언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던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시 방언은사가 필요했던 이유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5~8절입니다.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왜 제자들에게 방언 은사가 나타났느냐? 그것은 바로 오순절날 맥추절, 칠칠절의 절기를 맞아 세계 각 나라에서 이스라엘을 찾아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을 찾아온 유대인들은 이미 오래전 각 나라로 이주하여 그곳의 사람이 다 된 이주 4세대, 5세대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종교와 혈통 외에는 유대인이라고 보기 힘든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의 사고방식도 달랐고 언어도 통하지 않았고 상식적 개념조차 달랐습니다. 이렇게 차이가 크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종교는 유대교였기에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성령이 120명의 성도들에게 일시에 임하며 그들이 방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방언이 터지자 각기 여러 나라에서 예루살렘을 찾아온 사람들은 그 방언을 듣고 자국의 언어로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오순절날 각 나라 방언으로 그리스도를 전하기 시작한 것은 복음의 열정이 그들을 일으켜 세우고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며 성령충만의 역사가 나타나서 그리스도의 진리를 담대히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성도들에게 부어주신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방언’만 기대하고 ‘예언’만 소망하며 ‘신유’역사만 바라보며 교회 안에 머무르기를 원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에는 관심 없다면 그런 성도는 성령이 임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성령이 역사해서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는 하나님 말씀에 갈급하며 복음 전파에 적극적인 성도입니다. 예루살렘을 찾아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유대 언어인 히브리어를 모릅니다. 흩어진 유대인으로 세계 여러 곳에서 태어나 자랐던 사람들은 각각 페르시아어, 아랍어, 이집트어, 각종 아프리카 국가 언어, 그리스어, 등등 각자 태어나 자란 나라의 언어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재한 예수님 제자들은 전혀 가보지도 않은 그 나라의 언어로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첫 번째 성령은사인 방언은 자신의 어떤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부어졌다기보다는 예수를 모르는 이방지역의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부어졌습니다. 초대 교회에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들은 모두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는 성령이 임하면 내가 뭔가 특별한 능력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충만이 마치 우리를 슈퍼맨처럼 초능력자가 되게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성령 역사를 경험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은 전도에 대한 열정입니다. 성령은 전도의 영입니다.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전하기를 소망하며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나라, 민족, 열방에 복음이 전해지기를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통해 복음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성령체험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역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복된 인생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둘째로, 믿는 자가 하나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2장 9~11절입니다.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사람들은 언어를 통해 하나가 되기도 하고 언어 때문에 나눠지기도 합니다. 지방의 사투리가 너무 강하고 의미가 달라져서 같은 나라 언어인데도 불구하고 사투리 때문에 지역이 달라지고 사람들이 갈라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외국에서 이주해 오거나 관광 온 사람이 그 나라 말을 한다면 그 언어 때문에 동질성을 느끼고 하나된 느낌을 가지기도 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바벨탑 사건 때문에 세계가 흩어지고 민족이 나눠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사도행전 2장은 반대로 세계 각 나라의 언어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로 모이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구약의 바벨탑은 흩어지고 나눠지는 언어 분열의 역사라면 신약의 오순절 성령강림은 모이고 하나되는 언어통합의 역사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성령임재는 우리를 하나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에베소서 4장 1절에서 3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성령님께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신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리에 모인 사람은 모두 하나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도들이 지역이 다르고 나라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학벌이 제각각이고 재력이 천차만별이라고 할지라도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세상에서 각자 너무나 다른 기준으로 살아가지만 성령이 함께 하시는 자리에서는 이런 차이가 문제 되지 않습니다. 인간적 기준으로 분열과 갈등이 일어나겠지만 성령 안에서는 이런 기준이 사람들을 나누게 되는 분열과 갈등을 뛰어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시작된 그리스도인이 모이는 교회라면 지도자를 선출할 때에도 학벌, 재력, 출신지역, 외모 등을 보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사람인지만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한국교회가 이 시대 다시 주님의 참된 부흥을 꿈꾼다면 먼저 교회에서 인재를 뽑고 섬길 사람들을 모집할 때 우리 기준을 제대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 학벌, 재력, 출신지역, 외모가 기준이 되어 영적인 면모를 보지 않고 외형적인 기준만 따르다 보면 결국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너무나 우리 기준으로 사람들을 차별합니다. 계층을 구분하고 교회 올 만한 사람, 교회 오지 못할 사람들을 마음속에 정해놓습니다. 심지어 이 한국 땅에 있는 교회들을 보면 호남지역 사람만 모이는 교회, 영남지역 사람만 모이는 교회, 교수와 지식층만 모이는 교회, 연예인과 방송관계자만 모이는 교회, 경제기업체 관련 사람들만 모이는 교회 등으로 색깔이 분명히 나눠진 교회를 보게 됩니다. 여러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교회 성도를 이 부류, 저 부류 구분하고 나누는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실 교회가 아닙니다. 진정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어느 누구나 함께 신앙생활하는 교회입니다. 인간의 조건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주님 안에서 하나되는 교회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서울에 어느 유명한 목사님 두 분이 계십니다. 이름을 말하면 어느 누구나 잘 알만한 두 분 목사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두 분은 워낙 한국교회에 저명한 분이시라 교계 모임에서 수시로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들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가끔 나누신다고 합니다. 두 분이 은퇴하신 목사님이시니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은 꽤 오래 전 아니겠습니까? 거의 100년 전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 당시 일제강점기 초반 두 분의 할아버지는 주인과 노비의 관계였던 것입니다. 주인과 노비인데 한 교회에 출석하셨습니다. 어느 날 교회에서 장로투표를 했는데 장로가 되신 분은 노비였던 한 쪽 목사님 할아버지였습니다. 주인이었던 다른 쪽 목사님의 할아버지는 떨어졌습니다. 그 뒤로 한 동안 한 분은 교회에 가면 장로님인데 집에 오면 노비일을 하고 한 분은 교회 가면 집사님인데 집에 오면 주인으로 노비에게 일을 시켜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역사하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세상 모든 기준을 내려놓고 교회에서 하나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말이 다르고 문화가 다른 생활을 하였다고 할지라도 성령이 충만하면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가 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별, 가치관, 재력, 지식수준, 삶의 방식이 다르다고 해도 성령충만하면 하나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혹 주위의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고 그들의 말과 행동이 용서되지 않는 분이 계십니까? 그럼 여러분이 먼저 성령충만하시게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성령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이 서로 성령충만하면 문제가 생길 수가 없습니다. 한쪽이라도 성령충만하지 않을 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모두가 성령충만함으로 모두가 하나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셋째로, 인간 자체가 변하게 됩니다. 완전히 새롭게 태어납니다. 거듭나게 된다는 거죠.
사도행전 2장 12절과 13절입니다.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초대교회 성령충만의 광경을 본 사람들은 모두 놀랬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놀라며 당황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 제자들이 술 취해서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라고 주장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술 취한 것’과 ‘성령충만한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성령충만하면 기도를 할 때 알아 듣지 못하는 말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방언으로 기도하니 이스라엘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기도하니 이들이 미쳤든지 술취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 서로 껴안아 주고 함께 울고 감정에 북받쳐 통곡하며 기도하기도 합니다. 사실 맨정신으로는 하지 못할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마치 술취한 사람이 술기운에 사랑을 표현하고 하지 못했던 말들을 하는 것과 비슷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사무엘상에서 한나가 기도할 때 제사장 엘리도 한나에게 술취한 상태로 기도한다라고 착각했지 않습니까?
저는 신학대학교에 들어가기 전 일반대학을 다녔습니다. 제가 다닌 학교재단도 그렇고 그 지역의 종교적 분포도 그렇고 기독교인인 학생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대부분이 불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친구들과 같이 식사하고 차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친구들이 “어떻게 그렇게 남사스럽게 상냥한 말투로 친구들에게 닭살스러운 표현을 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을 받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들에게 “예수님이 진짜 너를 사랑해” “너는 참 좋은 친구야” “너가 예수님만 믿으면 지금도 좋은 친구인데 세상에서 가장 멋진 친구가 될텐데...”등의 표현을 하면 “술도 안 마시고 어떻게 그런 얘기를 맨정신에 하냐”라고 말을 하는 겁니다. 저는 그냥 교회에서 친구들끼리 하는 말을 일반 친구에게 했을 뿐인데 그 친구들은 “술이 안 들어가면 그런 얘기는 꺼낼 수 없다”라고 생각하더라구요. 술기운에 그런 얘기를 당당하게 하게 되는 것은 세상 불신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이 충만하면 그런 말을 할 수 있고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종종 “그래 난 취해서 그런거야.. 성령에 취한거야..”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성령이 내게 임하면 사랑이 넘치는 말과 행동을 합니다. 성령이 내게 있으면 감사와 기쁨이 넘치고 얼굴이 환해집니다. 성령이 임하면 사람이 바뀌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예수님 믿기 전, 그가 사울이었을 때 사람들을 죽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그 시간 바로 직전에도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니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찾아 죽이려고 다메섹에 가던 사울은 예수님을 만나 이제 사람을 구원하고 생명길로 인도하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체험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면 이제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충만으로 초능력의 인간으로 바뀌는 것보다 새로운 인격을 소유하고 새로운 성품을 가진 사람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성령충만하면 인격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1장 24절을 보십시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나바는 어떤 능력을 행했다는 기록보다 힘들어하는 사람을 찾아가 위로해 주고 사람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있는 외톨이들을 찾아가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 기록이 많습니다. 성경에 ‘성령충만한 사람’이라고 분명히 기록된 사람은 몇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명인 바나바 설명하면서 ‘성령이 충만한 착한 사람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충만’은 내 마음, 내 생각, 내 지식은 죽고 나에게서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지식이 드러날 때 ‘성령충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은 나를 높이려는 인간본성은 죽고 하나님만 높이는 은혜의 삶이 나타날 때 성령충만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에게서 아무리 놀라운 기적과 은사가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나를 높이면 이건 사탄마귀의 역사요, 이단이 하는 짓이고, 하나님만 높이고 하나님 사랑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 사람들을 세워주고 도와주며 온유한 맘으로 섬기고 은혜의 말과 행동이 나타난다면 그것이야말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사람들을 사랑하며 이전과는 다른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살아가시는 성령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전에는 내 이익이 우선이고 내가 대접받는 것이 먼저였다면 이제는 성령충만해서 남을 먼저 생각하고 타인을 먼저 대접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실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 인격이 변화되고 새로운 인생으로 거듭나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새로움의 역사를 경험하는 성령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있으면 저와 여러분이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회복되고 복음에 대한 열정도 일어나고 서로 하나되어 참 섬김으로 살아가며 은혜의 인생과 은혜의 공동체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찾아오실 때 예수님과 진리로 충만하여 온 세상에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성령충만한 성도가 되어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변화된 인생이 되기 위해 우리가 지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기도하는 중에 임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을 하나로 합하여 기도할 때 성령강림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장 1절을 보십시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지난 번에 우리가 살펴보았던 앞 장 말씀을 한 번 볼까요?
사도행전 1장 12~14절입니다.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하나님 역사를 경험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 인간적인 노력이라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기도하는 시간도 아까우니 그 시간만큼 더 열심히 전도하고 저 열심히 노력해서 더 많은 일을 하라고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더 의지하라고 말씀하였고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위해서는 간절히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는 저와 여러분은 간절히 더욱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를 통해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여 전도의 열매를 맺고 사람들을 품어주며 개인적인 인격의 성숙도 경험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생에 항상 성령의 내주와 성령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며 주님 오실 그 날까지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며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가족과 우리의 지인들과 세상까지 하나님의 영광으로 살아가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