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점검65: 설봉과 암두의 말후구
설봉스님이 암자에 머무를 때에 두 스님이 예배(禮拜: 예를 갖추고 절을 하다)하기 위해 찾아왔다.
설봉스님은 (그들이) 오는 것을 보고는 암자의 문을 손으로 밀고 방신출(放身出: 몸을 내밀다)하며 말했다.
“무엇인가?”
그 스님들 또한 말했다.
“무엇입니까?”
설봉스님은 머리를 숙이고 암자로 돌아갔다.
그 스님들이 나중에 암두(巖頭)스님에게 이르자,
암두스님이 물었다.
“어디에서 오는가?”
“영남(嶺南)에서 옵니다.”
“설봉스님에게 갔었는가?”
“갔었습니다.”
“무슨 말이 있던가?”
그 스님들이 앞의 이야기를 꺼내자,
암두스님은 말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던가?”
“설봉스님은 아무 말이 없이 고개를 숙이고 암자로 돌아갔습니다.”
“아(噫: 탄식하다), 내가 당초에 그에게 말후구(末後句)를 말해주지 않는 것이 후회스럽구나!”
“그에게 말해주었더라면, 천하 사람들이 설봉 늙은이를 어찌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스님들이 하안거(夏安居) 끝에 이르러 다시 앞의 이야기를 꺼내며 청익(請益: 가르침을 청하다)하였다.
“왜 진작 묻지 않았는가?”
“감히 쉽지가 않았습니다.”
“설봉스님이 비록 나와 함께 같은 가지에서 나왔어도 나와 함께 같은 가지에서 죽지는 않는다.”
“말후구를 알고자 한다면 다만 이것일 뿐이다.”
雪峰住菴時。有兩僧來。師以手拓菴門。放身出曰。是甚麼。僧亦曰。是甚麼。師低頭歸菴。僧辭去。師問。甚麼處去。曰湖南。師曰。我有箇同行住巖頭。附汝一書去。書曰。某書上師兄。某一自鼇山成道後。迄至于今飽不飢。同參某書上。僧到巖頭。頭問。甚處來。曰雪峰來。有書達和尚。頭接了乃問。別有何言句。僧遂舉前話。頭曰。他道甚麼。曰他無語低頭歸菴。頭曰。噫我當初悔不向伊道末後句。若向伊道。天下人不奈雪老何。僧至夏末請益前話。頭曰。何不早問。曰未敢容易。頭曰。雪峰雖與我同條生。不與我同條死。要識末後句。祇這是。
화두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심장하다고 하겠다. 설령 화두의 뜻을 모르더라도 그저 참구하는 것만으로도 아집과 아만을 덜어내고 번뇌를 벗겨내는 작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크면 부처가 작고 내가 작으며 저절로 부처가 커지는 법이다. 내가 크다면 어찌 부처를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오직 내가 없을 때만이 제대로 부처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옛 사람의 뜻을 살피는 것은 곧 저 옛 사람의 깨달음에 계합을 얻고자 함이다. 만약 계합을 얻는다면 그것은 마치 과부가 홀아비의 심경을 헤아리는 것과 같다고 하리라. 어찌 우주법계가 손바닥을 벗어나리오.
무엇을 말후구라고 하는가? 말후구(末後句)란 곧 확철대오하고 나서 마침내 토해내는 한 마디를 일컫는다. 말후구란 곧 최후의 외침과도 같은 것이다. 어째서 최후인가? 여러 가지의 깨달음 가운데 가장 마지막의 깨달음이 되기 때문이다. 깨닫고 나서 한 마디를 토하기에 곧 최후의 외침이라고 한 것이다. 옛 사람은 말하기를, ‘말후의 일구에 비로소 우관에 이른다. 요진(要津: 긴요한 나루터)을 잠그고 끊어서 범부와 성인이 통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요진이란 곧 예컨대 하나의 섬이 사방으로 높은 파도에 절벽이어서 접근조차 어려운데 오직 하나의 나루터만이 배를 댈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따라서 만약 요진을 끊어버리면 누구도 그 섬에 다가가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누구란 곧 범부와 성인을 가리킨다. 대승의 관점에서 범부는 곧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의 단계를 밟은 범부보살수행자이고 성인이란 곧 십지보살을 가리킨다.
어째서 범부와 성인이 다가가지 못하는가? 말과 설명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화두는 「덕산탁발화」의 화두와 비슷하지만 같다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참으로 자세히 살펴야 하는 것이다.
설봉스님이 고개를 숙이고 암자로 돌아간 모습은 흡사 스승 덕산선사가 고개를 떨구고 방장실로 돌아간 것과 같다.
그렇다면 저 고개를 떨구고 방장실로 돌아간 것에는 어떤 뜻이 있을까?
이것은 흡사 ‘금륜성주(金輪聖主)가 환중(寰中) 가운데에서 홀로 자리 잡고 있는 것과 같아서 사방팔표(四方八表)에 순종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한 것과 같다고 하겠다.
당시 설봉스님은 사형 암두스님과 함께 오산진을 지나다가 눈길에 막혀 객점에 머물렀는데, 어느 날 암두의 말 아래에서 도를 깨달았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곳 민 땅에 암자를 짓고 머물게 된 것이다.
그가 암자에서 나와 사립문을 열고 ‘무엇인가?’라고 외치는 소리는 천둥소리와 같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그 소리가 그처럼 들리지 않는다면 어찌 설봉스님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인가? 그가 제대로 볼 수 없었기에 암두스님을 찾아뵈었지만 여전히 여름 내내 문고리를 잡지 못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 이렇게 노래해보겠다.
한가로운 암자에 스님이 찾아오니
사립문을 열고 모습을 나타냈다.
흡사 귀신의 눈동자 같기도 하고
구멍 없는 피리소리와도 같다.
마침내 이 스님들 역시 ‘무엇입니까?’라고 하였는데, 이에 설봉스님이 고개를 숙이고 암자로 돌아갔다.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해보겠다.
일찍이 도적을 잡았기에
지금에 이르러 스스로 도적을 지었다.
검은 거북이 꼬리를 끄는 것을
천리 밖 고향사람이 먼저 알았다.
마침내 암두스님은 말하였다.
“설봉스님이 비록 나와 함께 같은 가지에서 나왔어도 나와 함께 같은 가지에서 죽지는 않는다. 말후구를 알고자 한다면 다만 이것일 뿐이다.”
雪峰雖與我同條生。不與我同條死。要識末後句。祇這是。
이 한 구절은 마치 금강을 부수는 막야검과도 같다고 하겠다. 오직 막야검을 손에 쥘 수 있을 때만이 금강의 울타리를 부술 수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나와 함께 같은 가지에서 생겼다(與我同條生)’는 것이 무슨 뜻인가?
‘나와 함께 같은 가지에서 죽지는 않는다(不與我同條死).’라고 한 뜻은 무엇인가? 무엇이 ‘같은 가지(同條)’인가? 먼저 이것을 밝힐 수 있어야 비로소 암두의 말후구에 한 걸음 다가가게 될 것이다.
한 스님은 도리어 나산선사에게 물었다.
“같이 나왔지만 같이 죽지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마치 소에게 뿔이 없는 것과 같다.”
“같이 나오고 같이 죽을 때는 어떻습니까?”
“마치 호랑이가 뿔을 얹는 것과 같다.”
其僧卻來問羅山云, 同生不同死時如何. 山云, 如牛無角. 僧云, 同生亦同死時如何. 山云, 如虎戴角.
이것이 바로 말후구인 것이다. 얼핏 보면 ‘동생동사(同生同死)’라는 구절과 ‘같은 가지에서 죽지 않는다’는 구절이 서로 다른 듯하지만, 정확히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째서 같을까?
한편 여기에 다시 의문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저 설봉스님은 암두스님보다 한 수가 모자란다는 것인가? 「덕산탁발화」에서 암두스님은 ‘저 늙은이가 말후구를 모르는구나!’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과연 저 암두스님은 덕산스님보다 지혜가 더 낫다는 것인가? 반드시 이 문제는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 옛 사람은 노래하였다.
말후구를 그대를 위해 설한다면
밝음과 어둠이 쌍쌍인 시절이다.
같은 가지에서 나왔음은 서로 알지만
같은 가지에서 죽지 않음은 도리어 특별하다.
도리어 특별함으로
황두(黃頭)와 벽안(碧眼)을 모름지기 감별하고
남북동서(南北東西)에서 귀거래하여
깊은 밤 같이 일천 바위(봉우리)의 눈을 바라본다. (설두 현)
末後句為君說。明暗雙雙底時節。
同條生也共相知。不同條死還殊絕。
還殊絕。黃頭碧眼須甄別。
南北東西歸去來。夜深同看千巖雪。(雪竇顯)。
한밤에 석녀가 어둠에서 (베틀의) 북을 (양손에 교대로) 던지며
구름 가운데에서 오색의 비단을 짠다.
큰 거리에서 펼쳐도 사람이 알지 못하니
도리어 둘둘 말아 구름베개로 삼는다. (충묵 개)
夜深石女暗拋梭。織就雲中五色錦。
攤向街頭人不知。卻教收卷和雲枕。(沖默開)
끝으로 한 구절 적는다.
호랑이 수염을 뽑을 수 있어야 비로소 호랑이를 알고
두 거울이 서로 마주함에 이름을 붙이기 어렵다.
말후의 한 구절이여
참외는 달고 여주는 쓰다.
고림선원 취산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