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점검69: 남전의 마니주
종남산(終南山) 운제(雲際) 사조(師祖)스님이 남전선사를 참례하여 물었다.
“‘마니주(摩尼珠)를 사람이 알지 못하다가 여래장(如來藏) 안에서 몸소 얻었다’라고 하는데, 무엇이 여래장입니까?”
남전이 말했다.
“왕노사(남전)와 그대가 왕래하는 곳이 여래장이다.”
“왕래하지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또한 여래장이다.”
“무엇이 마니주입니까?”
남전이 운제사조를 불렀다.
운제사조가 네! 하고 대답하였다.
남전이 말했다.
“그대는 내 말을 알지 못한다.”
운제사조는 여기에서 신입(信入: 참으로 들어가다)하였다.
終南山雲際師祖禪師(嗣南泉)初參南泉。問云。摩尼珠人不識。如來藏裏親收得。如何是藏。泉云。王老師與汝往來者是藏。師云。直得不往來時如何。泉云亦是藏。師又問。如何是珠泉召師祖。師應諾。泉云。你不會我語。師信入。
화두를 살피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인생에서 가장 큰 숙제이며 책임인 것이다. 평생을 살펴 그저 절반쯤이라도 이른다면 그래도 조금은 볼만하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어찌 저 옛 사람을 분명하게 보리오.
『종용록』·「제93」에서는 저 운제(雲際) 사조(師祖)스님이 곧 노조(魯祖) 보운(寶雲)스님이라고 나온다. 그는 일찍이 마조선사를 뵙고서 법을 받았다. 법을 받았다는 것은 곧 마조선사의 가르침을 따라서 수행하는 법을 배우고 이에 근거하여 참구를 해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 남전스님과는 사형사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알려진 생몰연대가 없기에 누가 사형인지는 알 수 없다.
저 사조스님은 종남산(終南山)에 머물렀는데, 평소 학인스님이 찾아보면 곧 벽을 보고 돌아앉았다. 이렇듯 독특하게 제접하는 방식 때문에 그를 ‘노조면벽(魯祖面壁)’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소문을 들은 남전스님은 말하기를, “나는 평소 사승(師僧)에게 말하기를, ‘부처가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는 때를 회취(會取)했어도 오히려 하나의 절반을 얻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그가 이렇게 나귀해를 보내는구나.”라고 하였다.
南泉聞曰。我尋常向師僧道。向佛未出世時會取。尚不得一箇半箇。他恁麼驢年去。
화두를 살피는 데는 반드시 앞뒤를 먼저 잘 살피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무턱대고 화두 한 구절만을 붙들고 매달리는 것은 급하게 바늘을 허리에 묶어서 쓰는 일과 같은 것이다.
얼핏 보면 이 본분의 일화는 ‘노조면벽’ 이전처럼 보이는데, 『종용록』에서는 오히려 나중에 실고 있다. 비록 시간적인 순서는 그렇다고 해도 공부단계를 살피는 입장에서 보면 나중에 싣는 것이 적절할 듯도 하다. 참구해보기를 바란다.
저 남전선사는 이전에 어떤 공부를 지었을까? 여기에 대해 조금 살펴보도록 하자.
당나라 숙종 때(757년)에 10세의 나이로 출가하여 사미가 되었다. 30세에 숭산(嵩山) 회선사(會善寺) 호(暠) 율사(律師)에게서 비구가 갖추어야 할 구족계를 받았다. 처음에는 법상종(法相宗)의 가르침과 율종(律宗)의 율장(律藏)을 살폈으며, 『화엄경』, 『능가경』, 삼론종(三論宗)의『삼론(三論)』즉 용수보살의「중론(中論)」, 「12문론(十二門論)」, 「백론(百論)」에 심취하였다. 아울러 네 곳에서 배움을 가졌고, 나중에는 마조대사를 참례하고서 깨달음을 얻고 유희삼매에 노닐며 마조대사의 제자 가운데 물외(物外)를 초월한 빼어난 제자가 되었다. 남전선사에게서 법을 받는 분이 바로 조주선사이다.
자 이제 본분을 보자.
“‘마니주(摩尼珠)를 사람이 알지 못하다가 여래장(如來藏) 안에서 몸소 얻었다’라고 하는데, 무엇이 여래장입니까?”
부처님께서는 경전에서 마니주에 대해 자주 언급하셨다.
『아함경』에서는, ‘보배구슬을 이름하며 이 신령한 구슬을 얻으면 일체 구하는 바를 원하는 대로 얻는다.’라고 하였다.
마니주(摩尼珠: mani)는 곧 보배구슬을 의미하며 곧 구슬(珠),보배(寶),이구(離垢),여의(如意)의 뜻을 모두 담고 있는 것이다. 이구(離垢)란 ‘티끌을 떠나다, 없애다’는 뜻이고 여의(如意)란 ‘뜻과 같다, 뜻대로 이루다, 성취하다’는 의미이다. 열반경에서는 ‘마니의 구슬을 탁한 물에 던지면 물이 맑아진다’라고 하였다.
또한 보적삼매(寶積三昧)를 비유하기도 하는데, ‘마치 마니보배주가 일체를 환히 비추듯이, 이 삼매에 드는 자는 능히 모든 법의 본제(本際)를 본다, 때문에 보적삼매라고 이름한다.’라고 하였다.
『보적삼매문수사리보살문법신경(寶積三昧文殊師利菩薩問法身經)』에서는 “어째서 보적이라고 이름합니까?” 이에 부처님께서는 말하셨다. “비유하면 마치 마니주가 본래 스스로 깨끗함을 좋아하니, 또한 물을 씻어내고, 평지에 두면 굴러서 또한 밝음으로 사무쳐서 보지 못하는 자가 없다. (중략) (이 보적)삼매에 머무는 가운데에는 모든 법의 본제를 보지 않음이 없다. 여기에 머무름으로 인(印)을 얻는다.”
모든 법의 본제(本際)란 곧 모든 법이 근본에서 비로소 일어나는 지점을 일컫는다고 하겠다. 여기에 제(際)란 곧 ‘가, 주변’을 뜻한다. 예컨대 샘물에 비추면 곧 샘의 물과 그 주변이 만나는 지점이 곧 제(際)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인(印)이란 곧 불인(佛印)이 되겠다. 인(印)이란 마치 서류에 도장을 한 번 찍으면 다시 번복되지 않음과 같다고 하겠다. 이는 곧 참으로 깨닫는다면 다시 번복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어찌 모든 부처님들께서 깨달은 제법실상의 도리가 다시 번복될 수 있을 것인가?
무엇을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하는가? 말하기를, ‘진여가 번뇌 가운데 있음을 여래장이라고 하고, 진여가 번뇌를 나옴을 법신이라고 한다(真如在煩惱中, 謂之如來藏, 真如出煩惱, 謂之法身)’라고 하였다.
이 화두를 살피려면 먼저 저 여래장에 대해서 깊이 살피고 살펴야 할 것이다. 만약 여래장을 깊이 살피지 않고서 마니주 운운한다면 결코 남전선사의 뜻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기에 옛 사람은 말하기를, ‘새색시와 같이 선을 참구하는 자는 결코 알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남전이 말했다.
“왕노사(남전)와 그대가 왕래하는 곳이 여래장이다.”
“왕래하지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또한 여래장이다.”
“무엇이 마니주입니까?”
남전이 운제사조를 불렀다.
운제사조가 네! 하고 대답하였다.
남전이 말했다.
“그대는 내 말을 알지 못했다.”
운제사조는 여기에서 신입(信入)하였다.
‘신입(信入)’이란 곧 참으로 저 옛 사람의 말을 믿는 마음을 내었다는 의미가 되겠다. 무엇을 깨달았기에 다시는 의심하지 않게 되었을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어찌 남전을 보았다고 하리오.
여기에 대해 옛 사람은 노래하였다.
왕래가 여래장이라면 구슬은 어디에 있는가?
단언컨대 바야흐로 밖에서 구해서는 안 된다.
망상(罔象)이 얻음은 오히려 특지(特地)이니
회광반조(回光返照)해서는 곧 기꺼이 그만둔다. (해인 신)
往來是藏珠何在。省去方知不外求。
罔象得之猶特地。回光返照便甘休。(海印信)。
‘왕래가 여래장이라면’이라고 한 것은 왕래하고 왕래하지 않음이 모두 여래장 안의 일이라는 것이다. ‘구슬이 어디에 있는가’라고 한 것은 저 스님이 귀하게 여기는 구슬을 부수고서 참으로 옛 사람에 부합하는 구슬을 가져와보라는 것이다. 무엇이 밖이고 무엇이 안인가? 잘 살펴야 할 것이다.
‘망상(罔象)을 얻음은 오히려 특지(特地)이니’라고 했는데, 무슨 뜻인가? 앞에서 이미 ‘모든 법의 본제를 보지 않음이 없다’라고 했었다.
여기서 ‘망상(罔象)’이란 곧 중국(中國)시조의 삼황(三皇) 즉 요·순·황제에서 황제의 총명한 신하였던 망상을 가리킨다. 한번은 황제가 적수(赤水: 貴州省의 강)에서 노닐다가 구슬(珠)을 빠뜨렸는데, 이루가 비록 천리 밖에서도 모기를 구분할 수 있었어도 적수에 빠진 구슬을 찾아내지는 못하였는데, 망상(罔象)이 마침내 구슬을 찾아낸 것이 비유한 것이다.
무엇이 특지(特地)이고 무엇이 회광반조(回光返照)인가? 그저 글자로만 보면 ‘광채를 돌려서 비춘다’는 의미이다.
여기에 대해 옛 사람은 참으로 친절하게 또한 노래하였다.
거두기는 쉬워도 보기는 어렵고
보기는 쉬워도 쓰기란 어렵다.
보고 쓰는 것에는 두 가지가 없으니
여유롭게 한 개 귀거적(歸去笛)을 잡고서
깊은 밤 (피리를) 불며 멱라만(汨羅灣: 멱라의 물굽이)을 지난다. (둔암 연)
收者易見者難。見者易用則難。見得用得二無兩般。
閒把一枝歸去笛。夜深吹過汨羅灣。(遯菴演)。
무슨 말인가? 여기서 귀거적(歸去笛)이란 곧 무공적(無孔笛)이다. 이는 곧 구멍 없는 피리를 말한다. 구멍이 없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저 멱라만(汨羅灣: 멱라의 물굽이)이란 중국 호남(湖南)성을 흐르는 멱수(汨水)와 라수(羅水)가 합쳐지는 만이라 하여 이렇게 부른 것이다. 참고로 전국(戰國) 시대의 굴원(屈原)은 여기에 투신하였다. 이상의 다섯 구절은 남전선사의 뜻을 그대로 관통하고 있다.
옛 사람들이 이렇듯 말을 교묘하게 쓰는 것에는 모두 후학을 위한 배려이고 안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모르고서 이리저리 선(禪)의 구절을 놓고 입을 댈 부분과 대지 말아야 부분을 가려내지 못한 채 함부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곧 전혀 옛 사람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다. 화두의 구절이란 곧 참으로 그가 부처의 뜻을 바르게 알게 하고자 하는 배려이고 정말 아는지를 가려내려는 장치인 것이다.
끝으로 한 자 적는다.
참으로 회광반조라면
어찌 백척간두에서 호랑이 굴에 나아가지 못하리오.
남전이 사람을 위해 근심함은
흡사 오리 등에 물을 뿌리는 것과 같네.
고림선원에서 취산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