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점검71: 반산의 향상일로(向上一路)
반산(盤山)은 상당하여 말했다.
“향상일로(向上一路)는 천성부전(千聖不傳)이다. 배우는 자가 형상에 수고하는 것은 마치 원숭이가 (물속의 달)그림자를 잡으려는 것과 같다.”
盤山上堂。向上一路。千聖不傳。學者勞形。如猿捉影。
무엇이 향상일로(向上一路)인가?
『불교용어사전』을 보면, ‘깨달음이 지극한 것. 향상은 진보(進步), 일로는 대도(大道)를 이르는 말이니 곧 종문(宗門)의 극처(極處)를 뜻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인터넷을 보면, 어떤 자가 설명하기를, ‘향상이란 것은 위로 향한다는 것이니, 구경인 절대 평등, 절대 무한한 이지(理智)의 극점인 형이상의 경지를 말한다. 그리하여 향상일구(向上一句)란 언어적 표현을 넘어서는 곳에 존재하는 오히려 신령스럽기조차 한 종교적 의미를 나타내기 위한 구절이다.’라고 하였다. 이 글을 잘 살펴보면, 향상(向上)은 곧 일로(一路)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향상이란 곧 근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잘 살필 일이다.
나라면 이렇게 말하겠다.
“저 향상으로 가는 길은 오직 하나일 뿐이다.”
여기에서는 향상과 하나의 길은 같음 의미로 쓰지 않고 다만 향상을 일로가 돕고 있다고 하겠다.
무엇을 향상(向上)이라고 하는가? 글자를 풀면, ‘위로 향한다’는 말이다. 위란 구체적으로 어디를 말하는가? 이는 곧 근본을 가리킨다. 무엇을 근본이라고 하는가? 일체만물이 생겨난 근원을 가리킨다. 좀 더 쉽게 비유하면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것이다. 삼라만상은 모두 여기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나의 지혜는 모두 여기에서 생긴다.’라고 한 것이다.
『佛光大辭典』에서는 ‘끝에서 근본으로 나아가는 것이 향상(向上)이라고 한다. 근본에서 끝으로 내려가는 것을 향하(向下)라고 한다(自末進於本, 謂之向上, 自本下於末, 謂之向下)’라고 하였다.
그런데 어째서 일천성인도 전하지 못한다고 했을까? 일천성인이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가? 소승의 성문, 아라한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대승의 불보살을 가리키는가?
소승의 성문, 아라한은 ‘내가 이러한 경지를 성취했다’는 소득심을 잊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 참고로 성인이란 곧 범부와 대비되는 말이다. 무엇을 범부라고 하는가? 아공(我空)을 성취하지 못한 자이다. 무엇이 아공을 성취함인가? 견혹(見惑)을 모두 타파한 자이다. 무엇이 견혹인가? 견이란 곧 오견(五見)을 가리킨다. 이는 곧 신견(身見), 변견(邊見), 사견(邪見), 견취견(見取見), 계금취견(戒禁取見)이다.
아공을 타파하면 이미 수행을 마친 것이 아닌가? 다섯 가지 견해를 타파했다고 해도 다겁생의 번뇌습기는 어쩌지 못하기 때문에 소승에서는 다시 사혹(思惑)을 닦고 팔정도(八正道)를 닦는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성인이란 곧 불보살, 성문아라한을 가리키는 것이다.
부처는 성인 가운데 성인이고 보살은 성인인 것이다. 저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등등 십지보살 모두가 곧 여기서 말하는 ‘모든 성인’에 속하는 것이다.
한편 일로(一路)란 하나의 길이다. 그런데 이것을 곧 대도(大道)와 연결시키는 것은 지나치게 거칠고 성급한 일이다. 일로란 말 그대로 하나의 길이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두 개의 길이 없고 오직 하나의 길을 따라서 가기 때문에 일로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반산선사가 말하기를, ‘일천성인도 전하지 못한다’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법공(法空)을 꿰뚫어서는 더 이상 언어문자를 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두 가지 공(二空)을 깊이 꿰뚫어서는 더 이상 양변을 의지하지 않는 길을 밟아가는 것이다.
반산선사는 말했다.
“배우는 자가 형상에 수고하는 것은 마치 원숭이가 그림자를 잡으려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 형상이란 곧 한자로는 ‘形’을 번역한 것이다. 살피는 것이 이 형(形)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뜻한다. 원숭이가 그림자를 잡으려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그림자는 곧 ‘물속의 달그림자’를 가리킨다. 저 원숭이가 나무에 기대어서 물속의 달을 건지려는 그림을 상상해보면 되겠다.
순종황제는 시리(尸利)선사에게 물었다.
“대지의 중생이 어떻게 하면 견성성불(見性成佛: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루다)을 얻겠습니까?”
시리선사가 말했다.
“불성(佛性)은 마치 물속의 달과 같습니다. 볼 수는 있어도 취할 수는 없습니다.”
鵝湖舉順宗問尸利禪師曰。大地眾生如何得見性成佛去。利曰。佛性如水中月。可見不可取。
설령 이렇게 말했어도 어찌 반산의 향상일로를 보였다고 하리오. 다만 말로 말을 없앴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교학의 이치로 본질을 살피고 불성을 살피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어째서인가? 일체의 가르침을 양변에 비추어 살피기 때문이다.
일천성인이 저 양변을 떠나서는 이 ‘하나의 길’에 대해 전혀 설명하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예컨대『유마경』에서 32보살들이 저마다 불이법문에 대해 말하지만, 문수보살은 다만 말로 말을 걷어냈고, 유마는 오직 침묵했을 뿐이다.
지금 저 반산선사가 말하고자 하는 ‘천성부전(千聖不傳)’이란 곧 이 모두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설령 32보살들이 불이법문에 대해 말했어도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옛 사람들의 묻고 대답한 것이 있다.
담당 문준선사가 말했다.
“향상일로는 천성도 전하지 못한다.”
“무엇이 향상일로입니까?”
“물이 다한 곳에 이르러 앉아서 구름이 이는 것을 보는 때이다.”
“어째서 전하지 못합니까?”
“집집마다의 길은 장안으로 통한다.”
“납승문하에서라면 결국 어떻습니까?”
“그대에게 삼십 방망이를 때려야겠다.”
問向上一路千聖不傳。未審如何是向上一路。師曰。行到水窮處。坐看雲起時。曰為甚不傳。師曰。家家有路透長安。曰祇如衲僧門下。畢竟作麼生。師曰。放你三十棒。(隆興府泐潭湛堂文準禪師 - 錦江禪燈)
여기서 ‘집집마다의 길은 장안으로 통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흡사 황금색 두루마리 비단천이 붉은 축을 감싸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만약 누군가가 절대평등의 궁극의 경지를 참으로 얻는다면 틀림없이 다음의 구절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자신도 시험 삼아 살펴보기를 바란다.
평양 도민(道忞)선사는 말했다.
“반산은 ‘향상일로는 천성부전이다(千聖不傳)’라고 말했으니, (훔친) 장물(贓物)을 끌어안고서 억울함을 호소하려는가?
자명은 ‘향상일로는 천성불연(千聖不然)이다’라고 말했는데, 또한 명두(자명)는 (사람을) 속여서는 안 된다.
경산은 ‘향상일로여, 뜨거운 주발이 소리를 낸다(熱碗鳴聲)’라고 했으니, 눈을 감고 황하를 훌쩍 (건너)뛴 것이다.
천암은 ‘향상일로여, 그대의 발아래에 있다(在你腳底)’고 했으니, 대나무를 잡고 푸른 하늘에 점을 찍은 것이다.
선노인은 ‘향상일로여, 짚신을 밟아 떨어뜨려라(向上一路蹋破草鞋)’고 했으니, 원숭이(猢猻)가 나무를 거꾸로 오른 것이다.
저 다섯은 산승에게 한 차례 점검을 당하였다. 필경에는 무엇이 향상일로인가?”
주장자를 잡고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승)당으로 돌아가 차를 마시라.”
平陽忞云。盤山道向上一路千聖不傳。抱贓叫屈作麼。慈明道向上一路千聖不然。且莫詐明頭。徑山云向上一路熱碗鳴聲。合眼跳黃河。千巌道向上一路在你腳底。接竹點青天。先老人道向上一路蹋破草鞋。猢猻倒上樹。者五箇漢被山僧一時領過了也。畢竟作麼生是向上一路。拈拄杖起身云。帰堂喫茶。
참고로 천성불연(千聖不然)이란 ‘일천성인은 그런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은 곧 ‘그와 같지 못하다’는 것이다. 즉 하나의 시금석과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향상일로에 나아가려면 이상의 구절들을 밀밀하게 살펴야 할 것이다. 한 글자라도 어긋나면 이미 전체가 왜곡된 것이다. 곧 잘못된 이해로 억지로 꿰맞추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도민선사는 말후에서 말하였다.
“저 다섯은 산승에게 한 차례 점검을 당하였다. 필경에는 무엇이 향상일로인가?”
이는 곧 모두가 향상일로를 말하려고 했어도 끝내 말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참으로 향상일로를 말할 수 있을까?
도민선사는 주장자를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승)당으로 돌아가 차를 마시라.”
왜 차를 마셔야 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해보겠다.
“오래 앉으면 피로하다.”
향상일로에 대해 옛 사람은 노래하였다.
전하지 못하고 그러지 않음이여
해구(海口: 항구)를 열기 어렵다.
수미의 정상에서
수레(駕)에서 철선(鉄船)을 일으킨다. (경산 고)
不傳不然。海口難宣。
須彌頂上。駕起鉄船。(徑山杲)
저 경산 고는 곧 대혜 종고선사를 가리킨다. 송나라 시대에 묵조선을 비판하고 화두선을 제창하신 분이다. ‘해구를 열기 어렵다’고 한 것은 도적이 허술한 집을 터는 것에 비출 수 있겠다. ‘수레(駕)에서 철선(鉄船)을 일으킨다’라고 했는데, 결국에는 어떠한가? ‘남면하여 북두를 본다’고 하겠다.
끝으로 한 자 적는다.
향상일로여
홀로 새벽을 가르며 차가운 길을 나섬을
취한 자들은 알지 못한다.
옛 사람이 또한 거들었으니
선상을 뒤엎고 돌아갔다.
고림선원에서 취산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