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스타브 꾸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
화가 꾸르베는 프랑스 화단에서 사실주의를 향한 운동을 시작하고 지배하였다. 예술 비평가들과 대중들은 삶을 그 실제의 모습보다 더 훌륭하게 보이도록 만들어진 이쁜 그림들에 익숙해져 있었다. 꾸르베는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상적인 장소들과 사람들을 진실되게 그려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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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브 꾸르베는 1819년 6월 10일 프랑스 오르낭(Ornan)의 부농에서 태어났다. 그는 1841년 파리로 갔는데, 법률을 공부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는 곧 그림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대가들의 그림을 모사함으로써 배워나갔다. 1844년 자신의 자화상인 검은 개와 함께 있는 꾸르베가 살롱에 채택되었는데, 이는 당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로얄 아카데미가 후원하던 연례 대중 전시회였다.
1848년 프랑스에서의 정치적 혁명은 예술에서의 혁명의 전조를 알리는 사건이었는데, 사람들이 예술에서도 또한 새로운 개념들에 대해 더욱 개방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꾸르베의 초기 작품들은 1849년에 성공적으로 전시회를 마쳤다. 바로 그 해에 그는 시골의 가족들을 방문하였으며, 거기서 오르낭에서의 매장에 이어 그의 가장 위대한 작품 가운데 하나인 돌 깨는 사람들을 1850년에 완성하였다. 이들 두 작품 모두 당시의 낭만적인 작품들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여 주었는데, 이들 그림에서는 농부들의 모습을 미화된 상황에서 부유하게 표현하는 대신 사실적인 상황으로 그려내었기 때문이다. 1855년에 그는 거대한 캔버스에 화가의 화실을 완성하였으며, 이 그림이 중요한 전시회에서 거부당했을 때, 꾸르베는 당돌하게 근처의 다른 전시장에서 그의 작품을 스스로 전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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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화가. 농촌 출신.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졌으며 프롤레타리아적 삶을 추구했다. "나는 사회주의자요, 민주주의자요, ... 그 중 내가 가장 듣고 싶은 것은 사실주의자이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직접 보고 경험한 것만을 그리는 사실주의에 대한 자의식이 강했다. 연민과 감정이 묻어나는 밀레의 그림과 비교하여, 꾸르베의 그림은 지극히 객관적이며 이로 인한 쓰라림을 느끼게 한다. 정치적 성향을 가진 인물로 파리코뮌의 나폴레옹 동상 없애기의 선봉에 나섰다가 감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당시에 사회적 이단아, 반항아로 여겨졌으나 현대미술의 선구자로 재평가받고 있다. 처음으로 팔레트 나이프로 화면에 직접 채색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돌깨는 사람들>(1849) 소실됨.
석공은 사회적으로 최하층인 사람들을 대표한다. 농사로 생계를 꾸리기가 힘들어서 돌을 깨는 가장 힘든 일을 택한 것이다. 청년의 찢어진 옷과 노인의 찢어지고 기워입은 옷, 모자에 드리운 그림자 묘사. 삶의 무게와 우울함이 느껴진다.
<마을처녀들>(1852)
꾸르베의 누이 셋을 모델로 하였다. 연민,감정을 배제한 채 계급을 대두하였다 하여 비난받음.
오르낭에서의 매장
1849-50 (130 Kb);
캔버스에 유채,
314 x 663 cm (10" 3 1/2" x 21' 9인치);
파리 오르세이 박물관
특별한 사건이나 인물의 죽음을 담지 않고 그냥 한 개인의 죽음을 어떤 의미나 감정도 담지 않고 무려 가로 6m이상의 캔버스에 그려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루브르박물관에 소장 결정 당시, 과연 이러한 의미 없는 그림을 걸 것인가에 대한 반발 또한 심했다.
한 농부의 죽음을 계기로 소도시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계급들을 실물 크기로 그렸다. 이 작품은 기존의 전통 역사화의 경향을 소박하고 진실성이 담겨진 사실의 재현으로 당대 미술계에 큰 논란이 되었다. 신과 영웅들의 전유물이었던 존엄성을 쿠르베는 40여 명이 넘는 대중들에게 부여하면서 예술적 혁명을 불러 일으켰다.
화가의 작업실; 하나의 사실적 비유
1855 (170 Kb);
캔버스에 유채,
361 x 598 cm (11' 10 1/4" x 19' 7 1/2인치);
파리 오르세이 박물관
교회의 3폭제단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오른쪽화면에는 당시 꾸르베와 교류한 죠르주상드, 보들레르(책읽는사람) 등의 지식인층이, 왼쪽화면에는 마을(가난한)사람들이, 중앙화면에 그림을 그리는 꾸르베 자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여기서 꾸르베 뒤의 벌거벗은 여성에 대한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그는 "나는 천사는 그리지 않는다 그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기 때문에"라고 말했으며 직접 볼 수 있는 것만 그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은 신화 속 인물이 아닌, 예술적 영감을 주는 뮤즈로 생각할 수 있으며 벌거벗었다는 것은-그림 그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아이의 순수한 눈과 동일선상에서-진실만 추구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화폭 뒤에 성 세바스티아노와 그 옆에 해골은 '회화는 순교다'라는 천직의식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잠자는 어린이 쥴리엣 꾸르베의 초상화(Juliette Courbet)
1841 (110 Kb);
종이 위에 흑연;
파리 오르세이 박물관
<송어>
화면 가득히 낚시에 물린 송어를 그려 넣고 배경은 거친 해안의 풍경이 들어와 있다. 송어의 표정은 막바지에 몰린 인간의 절망과 억울함을 나타낸 것이라고나 할까. 화면 아래 쪽으로 '71년, G. 쿠르베 옥중에서 이것을 그리다.' 라고 씌어 있어, 한 마리 낚시에 물린 물고기를 자신의 심경으로 비유 했음이 분명한 것 같다. 실의에 잠긴 쿠르베의 심경을 헤아려 볼 수 있을 것 같다. 옥중에서 그렸다고 하나 실은 다음해 인 72년 오르낭에 돌아와 요양하고 있을 때 그린 것으로 보인다. 물고기를 통한 의미화에 못지 않게 물고기 자체의 가감없는 묘사가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의 시각을 실감시켜 주고 있다.
Plaisir 샘에서 흘러나오는 개울가의 사슴들이 있는 잡목숲
1866 (250 Kb);
캔버스에 유채,
174 x 209 cm (5' 8 1/2" x 6' 10 1/4인치);
파리 오르세이 박물관
샘 La source
1868 (180 Kb);
캔버스에 유채,
128 x 97 cm (4' 2 1/2" x 3' 2 1/4인치);
파리 오르세이 박물관
여인의 육체는 고대로부터 모든 화가와 조각가들의 즐겨 찾는 주제로, 신화와 성경 속의 상징적인 의미로만 표현되던 아카데믹한 화풍으로 그려지는데...
'마네'의 < 올랭피아 >나 < 풀밭 위의 식사 >와 마찬가지로 사실주의 작가 '꾸르베'의 이 작품에 나타나는 여인은 투명하고 밝은 육체와 넓은 둔부를 통해, 훨씬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는데,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표현이었다고..... 미인 모독죄??
'꾸르베'에게 있어 누드는 한번도 그의 붓끝에서 떠난 적이 없는 장르였는데, < 세계의 기원 >이나 < 잠 > 등에서 보였던 파격적인 묘사를 염두에 둘 때, '꾸르베'의 이 작품은 미술에 있어 사물의 재현이라는 고전적인 문제에 천착함으로써 아카데미 화풍에 대한 단순한 반대로서의 '사실주의'를 넘어서고 있다고..
폭풍우 치는 바다(또는 파도)
1869 (220 Kb);
캔버스에 유채,
117 x 160.5 cm (3' 10" x 5' 3 1/2인치);
파리 오르세이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