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전통문화 * 한국사

[장인]서울무형문화재 궁장 23호/권무석

작성자혜련|작성시간04.05.31|조회수207 목록 댓글 0
역사와 맥을 같이한 세월의 흔적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

서울무형문화재 궁장 23호

권무석

활은 댓개비나 단단한 나무 또는 쇠를 휘어서 반달 모양으로 궁체(弓體)를 만들고 양끝에 시위를 걸고, 화살을 시위에 메워 함께 당겼다 놓아 줄의 탄력으로 쏘는 무기이다.

후기 구석기 시대에 출현하여, 오랫동안 대표적인 원격무기(遠隔武器)로 널리 사용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태즈메이니아 섬 등과 같이 옛날부터 활이 없었던 곳도 있으나 미개한 채집 수렵민의 대부분은 활을 사용하였으며, 농경민, 유목민도 활을 사용한 예가 많다. 그러나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총(銃)의 도입으로 활은 사냥의 대표적 도구로서의 지위를 잃었다. 활은 동물을 사냥하기 위하여 사용한 것이 최초의 용도였지만 점차 인간을 해치고, 죽이기 위한 무기로 사용하게 되었다. 특히 농경민, 목축민의 활은 사냥의 도구라기보다는 무기의 성격이 더 강하다. 활의 종류로는 단숭궁(單純弓), 강화궁(强化弓), 합성궁(合成弓)의 3종류가 있다. 이렇게 오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켜 가는 장인. 서울무형문화재 제23호 궁장 권무석 씨(60세)를 만났다.

활쏘기의 역사

우리나라의 역사와 함께 궁술은 발달하고, 우리의 활은 세계에서 제일 멀리까지 쏠 수 있는 활로서 그 모양이 아름다워 멋진 활이라 할 수 있다.

고대에는 식량을 얻는 방편으로 활을 이용해 수렵을 하였다. 이후 부족과 부족의 전쟁무기로 사용되면서 강력한 힘을 가진 활이 필요하게 되어 목궁 철궁 등이 오늘 날 스포츠에 사용되는 각궁(角弓)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활이 만들어 졌다.

우리나라의 각궁에 대한 기록으로는 서기 220년 고구려 산상왕이 손권이 오 나라를 세워 왕위에 오를 때 선물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 민족은 활과 함께 살아온 민족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은 여덟살 때부터 활을 손수 만들어 사냥을 다녔다고 한다.

부여시대에는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외침(外侵)을 당했을 때는 강력한 무기로 활이 위력을 떨쳤다. 고구려 때 당 태종이 고구려를 쳐들어와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양만춘 장군의 화살에 불구가 되어 퇴진한 고사는 유명한 얘기로 남아있다.

삼국시대 신라에서는 군제에 이궁이라는 정규 활부대 편제를 두어 나라를 지키고 삼국을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고구려와 백제도 활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은 있으나 군 정규 편제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여 삼국통일을 이룩했다고 전사가들은 기록하고 있으나, 신라의 정규 이궁 부대가 있어서 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다. 고려의 건국공신 신승겸은 날아가는 기러기를 한 발에 떨어뜨렸고, 고려 말 이성계는 지리산 운봉골에서 활개치던 왜적의 괴수를 활로 사살하여 물리친 전과는 후에 조선국을 건국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활로 나라를 세운 주몽과 이성계의 궁술을 신궁이라고 한다.

또 조선시대 왜적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의 남해 삼 대첩도 장군의 뛰어난 지략과 전술에 강력한 활이 있어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조총의 살상거리는 50m 정도였지만 활의 살상거리는 500m 이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16세기 전까지는 우리 활의 위력은 세계 최고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활은 신무기가 나오기까지 전쟁의 무기로 위력을 떨쳤는데, 삼국시대에는 궁술을 인재등용의 지표로 삼았다고도 한다. 이러한 활쏘기가 운동으로서 처음 기록된 것은 백제 비류왕(서기 330년) 때, 궁성 후원에 사대를 축성하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왕과 군신이 모여 활쏘기를 즐겼다는 것은 우리 민족이 일찍이 활쏘기로 건강관리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활과의 한 평생

300여 년째 활을 만들어 오는 장인 집안에서 태어난 권무석 씨의 고향은 활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경상도 예천이다. 태생부터가 활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인 것이다. 예천은 전국 활 생산의 90퍼센트를 넘는 활 고장이다. 활 만드는 집이 한집 건너 한집 꼴일 만큼 대대적인 활 마을이 조성된 곳이다. 하지만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활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고 귄 씨도 예외는 아니었으나, 고민 끝에 '활 인생'을 시작한 것이다. 조상 대대로 활을 만들어온 집안의 자손이었지만 그의 '활 인생'은 결코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권씨가 태어날 당시 활의 값어치는 자그마치 쌀 세 가마였다고 한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전국 활 생산의 40%를 차지하던 이곳에 지금은 전수자가 10명도 체 안 된다고 한다. 후계자가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활은 4년 정도 배우면 간단하게 수작업으로 직접 만들 수 있고 인건비가 적게 들기 때문에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전통 전수품인데도 말이다.

활은 제일 먼저 대나무를 잘라 구워서 평면이 되도록 펴주어야 한다. 그 다음 몸통인 대나무의 양끝에 뽕나무를 연결하고, 손잡이 부분에 참나무를 붙인다. 그리고 활 안쪽에 무소 뿔을 붙이고, 바깥쪽에 민어부레 풀과 배합한 소 힘줄을 붙여준다. 끝으로 자작나무 껍질을 겉에 붙여 마무리짓는다.

활 만들기는 10월부터 12월까지가 가장 알맞다고 한다. 종로구의 옛 한옥에 자리잡은 그의 작업실에서는 한창 활 만들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다. 궁장의 손놀림이 정겹다.

국궁으로서의 안타까움

권무석 씨는 조상 대대로 이어온 가업을 좀더 체계화하기 위해 사범이 되었다고 한다.

“활을 만들다 보니 실제로 활을 쏘아 봐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호술을 지도하며 활을 쏘다 보니 활에 대한 연구를 하고 싶어지더군요.

그렇게 해서 시작한 활에 대한 권씨의 연구는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다. 특히 임진왜란의 승전 원인이 일본의 조총보다 사정거리가 열 배나 되는 우수한 활에 있었다는 것은 그의 지론이었다. 또한 당시 일본군함은 우리 거북선과는 달리 목선이었으므로 일본 배들을 협곡으로 유인하여 불화살을 날려 목선들을 불태웠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국궁예찬론에 열을 올리다가도 각궁을 만드는 장인들의 현실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표정이 어두워진다.

이렇게 가다간 그나마 남아 있던 각궁 마저 사라지는 게 아닌지 걱정입니다. 각궁을 만들던 인간문화재 세 분 중 두 분이 돌아가시고 한 분은 연로하셔서 손을 떼셨어요. 옛 것 소중한 줄 모르는 젊은이들이 어디 힘든 일을 배우려 한답니까. 후계자 양성이 어려워서 정부 당국의 배려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입니다.”

어려움이 많긴 하지만 궁도 인구는 점차 급증하는 추세이고 인식만 바뀐다면 이런 문제들은 풀릴 것이라 낙관한다.

활쏘기의 효험

“활쏘기는 체력증진뿐만 아니라 신경통, 위장병, 심폐기능과 건망증까지 치유가 가능하며 특히 고혈압, 저혈압, 당뇨가 있는 사람에게도 많은 효험이 있다는 것을 황학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지도하면서 확인할 수 있었어요. 활쏘기는 전신의 근육을 긴장시켰다가 풀어주는 신축운동을 반복하는 것으로 자연스레 단전호흡이 되어 위장병 치료에도 아주 알맞죠. 또한 활 쏘는 자세로 인해 등골과 척추를 바르게 하고 가슴을 확장해 자른 자세교정뿐 아니라 신축성 반복으로 근력을 증가시켜 비만예방에도 좋아요.”

시위를 떠한 화살이 과녁에 명중하여 탕’소리를 낼 때는 쌓여있던 스트레스가 일시에 풀리는 상쾌한 기분을 활 쏘는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쾌감이라 말한다. 특히 전국 활터에는 20대부터 90대의 노인까지 어우러져 젊은이들에겐 예절교육이 된다. 활 쏘는 자세는 정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는 아주 동적인 운동으로 우리의 얼과 선조들의 지혜와 슬기가 모아진 세계제일의 건강관리 운동임엔 틀림없다.

역사를 살리는 소중한 작업

권무석 씨는 한국뿐 아니라 중국의 연변으로 그 발판을 확대하여 활쏘기 운동을 장려하고 있다. 연변에서는 1996년 연변궁도협회를 창설 제11대 대각궁 제작 계승자인 그의 후원으로 20여 장의 개량궁을 마련하여 회원을 모집 중이다. 연변에서는 이미 우리 활에 대한 인식이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오늘 날 우리 양궁 선수들이 세계를 제패하는 것도 국궁과 양궁에서 좋은 점만을 접목시켰기 때문이죠. 앞으로 우리의 이런 전통 비법이 있는 한 우리의 양궁은 세계 최강의 자리 매김은 지속되겠죠.”

우리의 양궁을 낙관하는 권무석 씨는 특히 동양철학의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욕심을 버리고 자부심과 애국심을 갖는 길만이 세계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한다. 묵묵히 우리의 옛 것을 지켜 나가는 그의 모습이 아름답다.